언젠가 길갈에서 요단까지란 제목의 설교로
온 교회가 술렁이고 있어 조심스럽게 설교를 분석하며 비평하고자 합니다.
교인들이 발견한 설교의 문제점은
삼척동자도 잘 아는 사실을 잘 못 설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승천한 엘리야 이야기를 하면서
창세기의 에녹으로 잘 못 말하였습니다.
엘리야는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하나님과 동행한 마지막 장소인 요단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설교의 서론부터 교인들은 술렁이기 시작하였고
설교를 마치고 나서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오늘 목사님의 설교 잘못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떠들었습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를 에녹의 이야기로 잘 못 말한 것은
주일낮 예배의 설교 비중으로 볼 때 있어서도 있을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교인이 명백하게 잘 아는 사실을 단순한 실수라고 말하기에는
교인들의 마음이 너무 절망적입니다.
엘리야와 에녹을 구분하지 못한 설교는
담임 목사의 설교에 대한 강한 불신의 역풍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담임 목사는 자신의 설교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길갈에서 요단까지란 설교의 감동을 부교역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부교역자들은 말을 잃었고.....
담임 목사가 빨간색이라면 빨갛다고 느껴야되는 악순환만 되풀이 되었습니다.
여러차례 설교를 들으면서 분석한 결과
엘리야와 에녹을 혼동한 것은 단순한 실수나 착각 정도였고 보다 심각한 문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으로 이어지는 엘리사와 이별을 고하는 엘리야의 마지막 선지여정을
지명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설교를 도배하였습니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설교인데
담임 목사는 위대한 감동의 설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길갈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여호수아가 기념 돌단을 쌓은 곳이라며
새로운 신앙역사의 출발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길갈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할례를 베푼 장소요, 처음으로 유월절 제사를 드린 곳이요,
요단에서 취한 열 두 돌로 요단강을 건넌 기념 돌단을 쌓은 곳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와 함께 엘리야가 출발한 길갈은
요단 근처 여리고 동편의 길갈이 아니라 벧엘에서 대략 11키로 떨어진
해발790미터의 고지에 있는 성읍입니다.
훗날 엘리야의 염감을 받은 엘리사가 사역하면서
이곳 길갈에서 선지생도들이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독초로 국을 잘 못 끊여 사망의 독이 들어 있는 솥에
가루를 뿌려 해독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더 연구하면......
요단 근처 여리고 동편의 길갈과 엘리사와 엘리야가 떠난 장소였던 길갈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길갈에 대한 신묘막측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이것까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두번째로 새로운 신앙의 결단인 길갈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고.....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성숙의 벧엘로 올라가야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요단 인근에 있는 여리고의 동편의 성읍 길갈이면 길갈에서 벧엘로 올라간다는 표현이 맞지만
성경은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비전을 가지고 벧엘로 올라가는 길갈의 신앙이란
아주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입니다.
또한 벧엘을 베들레헴이라고 잘 못 말하였는데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해 있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완전 다른 성읍입니다.
벧엘과 베들레헴을 혼동하였다는 것은
성경 지리에 대한 기초 지식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벧엘을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고 역설하였는데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은 벧엘이 아니라 벧엘과 아이 사이의 산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라며
길갈의 신앙을 벧엘의 신앙으로 진보를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벧엘은 북쪽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장소라며
영적으로 전투하는 신앙을 가지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기도의 돌단을 쌓았던 벧엘과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바알 신앙의 온상인 벧엘을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전투하는 곳이라는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어떤 선지자도 복음서 기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기도의 돌단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을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바알 신앙으로 타락되었습니다.
신앙의 성숙과 영적 전투를 하는 곳이라는 벧엘에 대한 해석은
성서의 지명을 극단적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세째로 벧엘에서 성숙하고 연단된 신앙은
여리고의 풍요를 축복으로 누린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여리고는 지역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지만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여호와 군대에게 심판 받아 몰락한 성읍입니다.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성경은 못박았습니다.
그런데 여리고를 신앙의 성숙과 연단으로 얻는 축복과 번영이라고 설교히면.....
성공과 번영을 좋아하는 사이비 성도들은 아멘 할 것입니다.
넷째로 요단을 죽음으로 이해하여
순교자적인 신앙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얻은 갑절의 영감을 얻을 것이라고 설교하였스니다.
성경에서 요단을 죽음이라고 이해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다만 찬송가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노래하였습니다.
실제로 요단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던 기적의 강이요,
엘리야와 엘리사가 겉옷으로 강물을 갈라 육지처럼 건넜던 기적을 이룬 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곳이요,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던 곳입니다.
요단을 순교자적인 믿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입니다.
길갈의 신앙으로 출발하여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벧엘의 성숙한 신앙으로 연단받아 영적 전쟁을 하여 승리하고
여리고의 풍요를 은혜의 복락으로 누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순교의 신앙으로 마지막까지
일관하면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의 뜻을 이룬다는 설교는
성경 지명에 대한 극단적 알레고리 해석의 아주 잘못된 설교입니다.
이러한 설교는 예전의 부흥사들이 전국을 누비며 히트쳤던 사이비 설교로
성령의 염감을 받기 위한 성도들의 몸부림으로 광신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기막힌 성경해석의 오류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을 예수님이라고 여러차례 설교하여
잘 못된 성경 해석이라고 쑥덕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을 잘 못 설교하여
물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표적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설교는
완벽한 구속사적 알레고리 영해 설교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타락한 천사는 무저갱에 갇혀 있고.........
악한 영은 악한 일에 사용하기 위해 창조한 사탄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의식에 깨어 있는 집사님이 여러차례 의문을 제시하며
난상토론을 하였지만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합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사생자를 죽은 아들이라고 설교하여
원로 장로님께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을 토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졌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모두 동일인이라고 설교하여 수석 장로님은 목사님의 설교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여기에서 알렉산더와 루포와 시몬을 동일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기본 이해와 상식이 부족한데도
담임 목사는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탁월한 성경의 고수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이러한 패턴의 설교를 들었던 교인은 감각이 무디어져서
옳고 그른 가치 판단의 기준마저 상실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해석으로 한국 교회 강단을 콘크리트로 고정시켜 놓아
영적 생명력을 잃은 종교인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복음을 바로 선포하지 않고 맹신과 맹종을 강요하는 모양새는
전형적인 사이비 신흥종교의 교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바로 아는 목회자를 만나기 쉽지 않고......
언약적 복음 신앙을 가진 성도를 만나기가 예루살렘 거리에
의인찾아 헤메던 예레미야의 목마름으로 존재합니다.
지명에 대한 구속사적 알레고리 설교는 가장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설교의 전형이지만
복음적인 설교 대가들의 설교 퍼포먼스로 강단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이 인본주의 설교와 구속사적 알레고리 설교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사이비 이단의 설교도 분별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의 현실은 인본주의 설교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인본주의 설교를 하고
세대주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세대주의 설교를 하고
말로는 성령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영성을 추구하는 성령의 무속화에 매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