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증오
사랑과 증오에 대하여
토라의 중심에는 ‘바이크라(레위기)’가 있습니다. 바이크라의 중심에는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라”라는 중대한 명령이 담긴 ‘거룩함의 법규’(19장)가 있습니다. 그리고 19장의 중심에는 그 위치상 토라의 정점이자 절정을 이루는 짧은 구절이 있습니다:
네 형제를 마음에 미워하지 말라. 너는 반드시 네 이웃을 훈계하고, 그를 인하여 죄를 지게 하지 말라. 네 백성의 자손에게 보복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나는 하나님이다. (19:17-18)
이 연구에서 나는 이 규정들 중 두 번째인 “너는 반드시 네 이웃을 훈계하고, 그를 인하여 죄를 지게 하지 말라”는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람밤(Rambam)과 람반(Ramban)은 이 문장에 두 가지 상당히 다른 수준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람밤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 피해자는 그를 미워하며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악인에 대해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했으나, 그에게 선한 말도 악한 말도 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말을 걸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했느냐? 왜 이런 일로 내게 죄를 지었느냐?”라고 말해야 합니다. “반드시 네 이웃을 훈계하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만약 그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여…”라고 기록된 대로, 용서하고 잔인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동료가 죄를 짓거나 선하지 않은 길로 나아가는 것을 본다면, 그를 선한 길로 돌아오게 하고, 그의 악한 행위로 인해 스스로에게 죄를 짓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계명입니다. “너는 반드시 네 이웃을 훈계해야 한다...”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마찬가지로 람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반드시 네 이웃을 훈계할지니라” — 이는 별도의 명령으로, 즉 우리가 그에게 교훈을 주는 훈계를 가르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죄를 지게 되지 말라" - 그를 책망하지 않으면 그의 범법으로 인해 네가 죄를 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올바른 해석은 "반드시 책망할 것"이라는 표현을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했다"라는 구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네 뜻에 반하여 네게 무언가를 행하더라도 마음속으로 그를 미워하지 말고, 대신 그에게 '왜 내게 이런 일을 했느냐?'라고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네가 마음속에 미움을 품고 그에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로 인해 죄를 지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네가 그에게 책망하면, 그는 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죄를 인정할 것이며, 너는 그를 용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해석의 차이는 하나는 사회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대인 관계적 차원이라는 점입니다. 람밤의 두 번째 해석과 람반의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이 명령은 집단적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동료 유대인이 죄를 짓으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은 그와 하나님 사이의 사적인 문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현인들은 “모든 이스라엘은 서로를 보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행실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 율법과 사상의 주요한 장입니다.
그러나 람밤과 람반 모두 이것이 본문의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맥을 고려할 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대인 관계의 심리에 대한 미묘한 고찰입니다.
유대교는 때때로 기독교로부터 사랑보다는 정의에 더 중점을 둔다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전적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아보트 데라비 나탄』에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누가 가장 위대한 영웅인가?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자이다." 토라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증오의 심리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면, 상처받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네 형제를 마음속으로 미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토라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말하라. 대화하라. 따져 묻고, 항의하라.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악의에서 행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항의는 상대방이 원한다면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며,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치유하는 말의 힘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됩니다.
마이모니데스는 이에 대한 핵심적인 성경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다윗 왕의 아들 중 한 명인 암논이 이복 누이인 타마르를 강간한 사건입니다. 타마르의 오빠인 압살롬이 이 사건을 듣게 되었을 때, 그의 반응은 겉보기에는 화해적이고 평온해 보입니다:
‘그녀의 오빠 압살롬이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네 오빠 암논이 너와 관계를 맺었느냐? 자, 누이여, 조용히 하라. 그는 네 오빠다. 이 일을 마음에 두지 마라.” 그리하여 타마르는 오빠 압살롬의 집에서 슬픔에 잠긴 여인으로 지냈습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는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에게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이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겉모습은 속이기 마련입니다. 압살롬은 결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년을 기다렸다가, 양털 깎는 시기에 암논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잘 들어라! 암논이 포도주를 마시고 기분이 들뜬 상태에서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쳐라’라고 말하면, 그를 죽여라.”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압살롬의 침묵은 용서의 침묵이 아니라 증오의 침묵이었습니다. 피에르 드 라클로가 『위험한 관계』에서 “복수는 차갑게 내놓을 때 가장 맛있다”라는 유명한 대사를 썼을 때 언급한 바로 그 증오였습니다.
베레시트(창세기)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예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였으니, 이는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셉을 위하여 화려한 옷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의 형제들이 아버지가 그들 중 누구보다 요셉을 더 사랑함을 보고는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친절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velo yachlu dabro leshalom(וְלֹא יָכְלוּ דַּבְּרוֹ לְשָׁלוֹם), 문자 그대로 "그들은 그와 평화롭게 말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요나단 아이베슈츠(R. Jonathan Eybeschuetz)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 무리로 함께 앉을 수 있었다면, 서로 대화하고 서로를 설득했을 것이며, 결국 서로 화해했을 것이다. 갈등의 비극은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말을 듣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의 실패는 종종 복수의 서막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토라 구절에 나오는 두 구절의 내재적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나 모든 이웃이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시기나 악의로 인해 너에게 해를 끼친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을 전혀 갖지 않은 채 천사처럼 살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미워하는 것을 금한다. 그렇기에 누군가 너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너는 그 잘못을 저지른 자와 마주해야 한다.
너는 그에게 네가 느낀 상처와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한다. 어쩌면 네가 그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가 진심으로 너희에게 해를 끼치려 했을지라도, 이제 자신이 너희에게 끼친 상처의 현실을 마주하고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그 문제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원한을 품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때가 되면 압살롬이 그랬던 것처럼 복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토라가 그토록 인상적인 이유는, 가장 고귀한 이상을 명확히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걸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사라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사가 아닙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어떤 힌트도 없이 단순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윤리는, 그저 실천 불가능할 뿐입니다.
대신 토라는 현실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합니다. 서로에게 솔직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우리는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종종 가능할 것입니다.
인류가 이 단순한 명령에 귀를 기울인다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심지어 유혈 사태까지도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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