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글/김병덕 목사
마태복음15:21-28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믿음-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시고 또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졌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사라졌습니다.-지금 이 시대 교회는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의 믿음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믿음으로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기 보다는 맹목이라고 해야 더 맞고 아니 자기들이 믿고 싶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믿음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가 나에게 믿음을 주어야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상대가 믿음을 주지도 않고 있지만 자기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믿고 싶을 뿐입니다.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자들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이 시대는 거의 은사에 빠져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치 이 시대도 그렇게 병자를 고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병자를 고치던 시대와 지금은 너무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저 문자적으로 보이는 병자를 고친 역사를 지금 이 시대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적 수준이 높아져서 누구라도 스스로 지혜를 구해서 성경을 볼 수 있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성경에서 고침을 받은 그것을 그대로 하려고 하고 있고 그런 고침을 받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입니다. 솔직히 이 시대 병자를 고치는 행위는 샤머니즘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을 주시고 지혜와 지식을 통해 더듬어 찾기를 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역사를 하던 그때를 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있습니까?-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있습니까? 어느 교회의 광고를 보면 차라리 병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은 다 샤머니즘적인 행위지 그것을 통해 믿음이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첨단 과학과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종교에만 들어오면 바보가 되어서 아직도 그런 샤머니즘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이 나면 뭐합니까? 성경에 병자를 고치신 역사를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서 이 시대도 그렇게 병자를 고치라고 하신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저 아마존에 살고 있는 어느 부족의 샤머니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적으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것을 육적으로 보는 것은 샤머니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병자를 고쳤을 때 왜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셨고 또 그 병자를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병자를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입니까? 정말 진정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면 자기 병이 나은들 어떻고 또 그 병으로 죽은 들 어떻겠습니까? 병을 낫고자 교회 안에서 그런 은사적인 행위를 하는 자체가 아직 천국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까? 물론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있는 사단의 가시 때문에 3번 기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말씀을 듣고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자기의 약한 것을 위해서 더 기뻐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병이 들면 그것을 낫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고 또 기도를 해서 나은 것을 마치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들어 주신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아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습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안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믿음이 없어서 사자 밥이 되었습니까? 자기들은 믿음이 있어서 기도 응답을 받아 병 고침을 받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이 없어서 기도 응답을 못 받아서 사자 밥이 되었습니까?
이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 한 가지만 생각을 해도 그렇게 교회 안에서 병을 낫기 위해서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샤머니즘에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병이 들었는데도 전혀 기도를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응답이 없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게 죽을병이 왔으면 받아들이고 눈앞에 있을 천국의 즐거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있고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고 그 병을 기어이 고치겠다고 합니까? 사자 밥이 되는 상황에서도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을병이 더 괴롭습니까? 사자 밥이 되는 것이 더 괴롭습니까? 그것만을 생각해도 병이 들어서 죽은 것은 그래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 아닙니까? 초대 교회의 성도들보다는 아주 편안하게 죽게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거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믿음이 있다고 해야 합니까?
나이가 듭니다. 누구나 병 한두 가지는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이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연의 이치도 모르고 죽을 때 까지 청년의 모습으로 있다가 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병이 두 가지 이상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병을 가지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말 하나님께 내 생명을 빨리 취해 달라고 투정을 부려 보기는 해도 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아마도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약을 안 먹고는 하루도 견디지를 못 합니다. 아니 약을 먹으면서도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지 그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시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잘 다스리면서 살아가려고 육체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지 그것을 샤머니즘적인 방법으로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절대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내일 죽으면 어떻습니까?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라면 죽임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사는 동안 누구나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누구에게나 있는 병을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픕니까? 그것까지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더욱 큰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가시가 없다면 이렇게 까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지금 이 시대도 육적으로 병자를 고치라고 기록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15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다가 가나안 여인을 만난 사건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이 시대도 역시 바리새인들과 같이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이스라엘이 유대교에 빠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에 빠져 있습니다.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까? 그들이 유대교에 빠진 것이 우리보다 지혜가 부족해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유대교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기독교 빠져 있으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소경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은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있는데 이방 여인인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 다윗의 자손이라 소리를 치면서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2:4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그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이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자손이면 왕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육적으로 왕으로 오시는 다윗의 자손을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왕으로 오시는 다윗이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식에 갇혀서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육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과 같이 이 세상의 왕으로 와서 자기들의 나라를 이방의 속박에서구원을 하고 이 세상의 으뜸의 나라가 되는 그런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천국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있습니까? 그리고 마태복음 14방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고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먹이셨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는 것을 보고도 믿지를 않은 것과 같이 똑같이 그렇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똑같습니까?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데도 도무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를 못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지 못하게 소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6:10절을 보면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스라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가지를 잘라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들의 눈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가 스스로 자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소경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자부를 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소경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취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알아야 합니다. 내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 가 똑똑히 보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다 성경을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경은 물론 성령이 오시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성경을 보아서 그저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없습니까? 지금이 중세 시대입니까? 누구나 자유롭게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 성도라면 스스로 성경을 볼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다면 성경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성경이 바르게 보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소경으로 만들어서 육적인 이스라엘과 같이 성경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께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도 저 보다는 똑똑할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말씀하면서 전혀 성경에 대해서 고민을 한 흔적이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는가 하는 것을 고민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에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아니 소경이 되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못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안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것으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보고 있습니까? 전혀 안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를 보고 있다면 한국교회는 이렇게 까지 진리에서 타락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전혀 예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로 침통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못 보고 있으면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예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가나안 여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정말 애타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한 말씀도 안 하시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는 스스로 병자들을 찾아서 고쳐 주셨는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청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면 제자들이 그것을 듣고 주여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이제까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저 여자가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말씀 한 마디면 고칠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소리를 못 들으셨습니까?
듣고 있습니다. 아니 제자들보다도 더 빨리 들으셨고 그 가나안 여자가 왜 자기를 찾고 있는지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예 듣지를 못한 것 같이 그냥 아무 대답도 안 하시고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여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하시고자 그리고 나타내시고 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여자가 더욱 소리를 지르게 그냥 두시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기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있는데 이 여자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고도 대답지 않은 것은 이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목소리를 높여 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얼마나 간절하면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 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병이 고쳐질 줄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여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 줄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제자들이 말합니다. 저 여자가 너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니까 빨리 병을 고쳐 주시고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이사야42:6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왜 오셨습니까? 이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방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마치 육적인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여자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방에 빛이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고쳐 주셔야 하는데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제자들과 뒤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있다면 그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런 말씀을 보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나안 여자가 겸손해서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말 합니다. 너희도 이 가나안 여자와 같이 그렇게 주님께 간절하게 구하면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자기들의 지적인 수준으로 성경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성경을 바로 해석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사망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구원을 받는 사람보다 악을 행하다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주 적습니다. 주님께서 아주 적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구원을 받는 사람이 아주 적습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자기 영혼에 대해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도와주소서.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도와 달라고 할 때는 그에게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도와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도와 달라고 하지를 못 합니다.
시편121:2절을 보면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가나안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믿음이 있는 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냥 병을 고치는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나의 도움이 되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 딸을 고쳐 줄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병을 고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서 지금도 병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하지 못하는 말을 지금 이 여자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를 통해서 자기를 들어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을 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가나안 여자를 개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 가를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이방인을 개로 취급을 했고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개로 취급을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교만 했는가를 잘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가나안 여자를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개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인 우리가 누구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너무 자기를 높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다 누구인줄을 모르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방인은 개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자에게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시니까 이 가나안 여자가 어떻게 대답을 하는 가를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옳습니다. 주님께서 개라고 하시는 그 말씀이 옳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누군가 개 취급을 받는다면 아마도 저것이 미쳤는가 하면서 내가 죽으면 죽었지 아니 천국을 안 가고 말지 그런 취급을 안 받겠다고 말하고 뒤 돌아서서 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개라고 하고 또 이 가나안 여자가 개라고 말씀하는 것을 인정하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23:22절을 보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주인의 것을 먹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나안 여자가 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에 이스라엘이 곡식을 거둘 때 다 거두지 말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객들을 위해서 남겨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예수님께 율법에 있는 것을 말하면서 자기의 권리르 주장하고 있습니다.
달라는 것입니다. 모퉁이에 있는 것을 그리고 밭에 떨어져 있는 것을 먹겠으니까 당연히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자가 개라고 해도 겸손하게 개라고 대답을 해서 마치 자기 딸의 병을 고침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 여자는 지금 당연한 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자녀들에게 곡식을 다 거두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객들이 먹을 수 있게 남겨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당연하게 그 떡의 부스러기를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주님께 자기가 부스러기를 먹겠다고 당당히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인간적으로 겸손해서 자기 딸의 병을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에 하나님께서 곡식을 거둘 때 밭에 떨어진 것을 다시 줍지 말고 모퉁이를 다 베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들과 객들이 와서 먹을 수 있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달라고 주님께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가나안 여자는 보통의 여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받아야 하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여자와 같이 침노를 하는 자가 천국을 얻는 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까 이제 그 여자의 딸의 병을 고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정마 이 여자는 율법을 알고 있었고 또 그 율법대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것을 당당히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의 믿음과 같은 사람이 성경에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절대로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크고 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여자I 네가 믿음이 있구나 하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까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말씀을 하면서 이 여자의 딸의 병을 고쳐 주시고 있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여자에게는 육적으로 딸의 병을 고쳐 주시는 그 소원을 이루게 하셨지만 이 세상 사람들의 소원은 바로 천국에 가는 그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에게 그것을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던지 병을 고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네가 믿음이 있어서 네가 소원하는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가나안 여자입니다. 주님 앞에서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것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이렇게 침노를 하는 자의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 천국을 침노해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소원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