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세상, 변화하는 교육-남궁억
1. 선정대상과 선정이유
현재 우리나라 교육의 기틀은 모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들이 마련한 것이라고 생각해 해당 인물을 선정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교육자들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특히 남궁억 선생은 교육자로서 활동함과 동시에 언론인으로서 국민 계몽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더욱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근대적 교육관을 바탕으로 새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교육 개혁을 이끈 인물이라 인상적이었다.
2. 성공사례(어떻게 성공했는지)
남궁억 선생은 여러 관직을 거쳐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개혁 내각 내 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아관파천 후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으며, 1898년에는 나수연, 유근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여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후 독립협회 지도자로 활동하던 남궁억은 1898년 11월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이후 여러차례 독립운동을 이끌며 붙잡히고 풀려나기를 반복하다가 고종의 요구로 1905년 다시 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귀경하였다. 이후 1906년 양양군수로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시작하며 교육자로서의 계몽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정미칠조약 체결 및 침략정책 강화가 시작되자 다시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대한협회를 창립,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며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해 교육면에서의 활약도 놓치지 않았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새세대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해 10월 배화학당 교사가 되었고,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며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 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강원도 홍천으로 낙향하여, 1919년 모곡학교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민족성을 고취하기 위한 여러 교육들을 펼쳤으며, 노년에도 여러 독립운동을 진행하였으나 다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투옥되었고, 잔혹한 고문의 여파로 사망하였다. 이후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남궁억 (南宮憶)-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자신의 의견(느낌, 각오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것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교육을 접목시켜 국민 계몽을 꾀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종래의 관습적인 교육이 아닌, 근대적 교육관을 바탕으로 교육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어 낸 점 역시 본받을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에 비하면 지금은 더할나위 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세상임에도 세상은 좀처럼 변화하려 하지 않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온 몸을 바친 선생의 생애가 감동적이었다.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교육도 발전하고 있다고들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교육이 다가올 미래사회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남궁억 선생의 생애를 알아보고 그를 롤모델로 정하기까지의 시간은 나에게 앞으로 교육자가 되었을 때 나는 교육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떠한 교육관을 가지고 현장에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