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의 기로회 - 북원수회첩
겸재 정선은 한성 장동(壯洞)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내내 살며 뛰어난 화업을 이룩했다. 장동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지역으로 백악산 서남쪽과 인왕산 동쪽 기슭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도성 내의 ‘산천(山川)’으로 불릴 만큼 숲이 우거지고 물이 맑았던 곳이다. 궁궐과 가까우면서도 한적한 곳이라 안동 김씨 집안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여러 명문가의 세거지이기도 했다.
[19세기의 한성지도인 수전전도(首善全圖) 속 장동 지역]
정선의 고조부 정연(鄭演)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지만 증조부부터 3대에 걸쳐 생원, 진사를 뽑는 사마시에도 입격하지 못하여 정선 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쇠락한 상태였다.
정선은 부친이 일찍 사망한 탓에 홀어머니와 동생을 거느리고 소년 가장노릇을 하느라 과거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는지 일찍부터 화도(畵道)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선은 36세 때인 1711년 금강산을 여행하고 남긴 「풍악도첩(楓嶽圖帖)」으로 진경산수화에 능한 문인화가로서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뒤인 1716년에는 좌의정이었던 김창집의 주선으로 비록 종6품의 잡직(雜織)이기는 하지만 관상감의 천문학 겸교수 자리를 얻어 첫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정선을 추천한 김창집은 흔히 정선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김창흡의 형이다. 그러나 두 집안의 인연은 정선 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정선의 고조부 정연(鄭演)과 김창집의 고조부 김극효(金克孝)는 같은 순화방에 살면서 회(會)를 만들어 서로 친밀히 교유하던 사이였고, 그러한 친분은 이후로도 대를 이어 두 가문 간에 유지되어 왔었다.
정선이 봄에 김창집의 도움으로 벼슬에 나아간 그해 10월, 정선이 살고 있는 장동에 사는 노인들의 장수를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인왕산과 북악산 기슭에 사는 벼슬을 지내고 나이 70을 넘은 노인들이 이광적(李光迪)의 장동 집에 모였다. 은암(隱巖) 이광적은 공조참판을 지낸 인물로 그때 나이가 89세였고 참석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정선의 외삼촌인 박현성(朴見聖)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런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런 좋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애석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참석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박현성은 모임을 기념할만한 첩을 만들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만들어져 전하는 것이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이다. 북원수회(北園壽會)는 ‘한양 북쪽 동네의 연로한 노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첩의 발문을 박현성의 아들 박창언이 쓴 것으로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만든 첩일 수도 있다.
첩에 실려진 박현성의 ‘기로회 자리에 올리는 글[奉呈 耆老會 席上 幷序]’을 보면 이날 모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中 박현성의 글]
모임을 주선한 장본인이 박현성이라는 해설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글 내용을 보면 박현성은 그냥 참석예정자 중 1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광적이 자신의 회방연을 치른 뒤 동네 노인들에 대한 예의로 이 모임을 마련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첩의 그림은 박현성의 외조카인 정선이 그렸다. 첩의 표지에는 정선이 실사(實寫)했다는 제첨이 붙어있지만 첩의 제작 시기와 과정을 고려하면 정선이 실제로 현장에서 이 모임을 보고 수회도(壽會圖)를 그렸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선 <북원수회도>, 견본담채, 39.3 x 54.4cm, ㅣ 이 첩은 손창근이라는 개인이 소장해오다가 201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북원수회도> 세부]
이광적의 사랑채 왼쪽에 둘러앉아 있는 인물들이 이날 모임의 주인공인 노인들인데 그림에는 11명만 그려져 있다. 박성현 말고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인원들이 더 있었던 듯싶다. 방 안쪽에 남면(南面)하여 혼자 앉아 있는 이가 모임의 좌장격인 이광적이고 그 옆에 붉은 옷을 입고 서있는 아이는 이광적의 손자다. 중간에 있는 세 명의 아이들도 참석자들의 손자다. 그 오른쪽에 앉은 인물들은 노인들을 모시고 온 후손들이다. 건물 밖에는 음식이 차려진 수반을 옆에 놓고 올릴 때를 기다리는 참석자들의 여종들이 대기하고 있다. 섬돌 아래 마당에 갓을 쓰고 서 있거나 모여앉아 있는 사람들은 청지기들이다. 다른 한쪽에는 가마꾼, 담 너머로는 구종(驅從)들의 모습도 보인다. 풍악이 있는 떠들썩한 잔치가 아니라 그저 노인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고 술 한잔하는 조촐한 모임의 분위기이다.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은 1 ~ 2면에 정선의 수회도를 필두로, 잔치에 참석하거나 참석할 예정이었던 70세 이상의 노인 15인과 그 후손들의 명단을 적은 ‘좌목(座目)’, 박현성의 글과 시, 박현성의 시를 차운한 이광적의 시, 참석자를 비롯한 의 시와 박현성의 아들 박창언이 쓴 발문 등으로 이어진다.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좌목(座目)]
첩에는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참석하지 못한 사람까지 모두 포함한 15인의 명단이 있고, 그 뒤를 이어 호종한 그 후손들의 명단이 있다. 그 명단에는 겸재의 평생지기였던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이름도 보인다. 그는 좌목에 가평군수로 이름을 올린 이속(李涑)의 아들이다.
호종한 후손들의 명단 뒤로는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나이는 각기 69, 66, 64세로 아직 70세가 안 된 상태였다. 좌목에 그들을 가리켜 특별히 삼공(三公)이라 지칭한 것으로 미루어 그때에도 이미 안동 김씨 가문은 주변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도 모임에 참여하려 했으나 일이 있어서 참가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김창집은 모임이 있은 뒤 2년 뒤에 두 편의 시를 지어 이 모임의 뜻을 기렸다. 김창집의 시도 첩에 첨부되었는데 시를 쓴 말미에 김창집은 이광적이 바로 전에 운명한 사실을 밝혔다.
이런 정황들로 미루어 《북원수회첩(北園壽會帖)》은 모임이 있었던 때에 바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몇 년의 기간에 걸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광적이 1717년 사망한데 이어 김창집은 1722년에, 정선의 외삼촌인 박현성은 1728년에 각기 사망하였다.
늘 그렇듯 사람은 가도 기록은 남아 이처럼 뒷사람에게 옛일을 전해준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출처] 장동의 기로회 - 북원수회첩|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