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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치악산상원사 원문보기 글쓴이: 일소日笑
[역대 한국불교 리더 가상인터뷰]29 허응 보우 스님
“이 몸 바쳐 법등 밝힐 수 있다면 무얼 주저하랴”
기사등록일 [2007년 06월 18일 월요일]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은 욕망의 충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때로는 무소유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허응당 보우(虛應 普雨, 1507?~1509) 스님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보우 스님은 어느 원로학자의 말처럼 ‘조선시대 몰상식하고 문화의식이 결여된 유신(儒臣)과 유생(儒生)의 만행과 역사적인 범죄가 극에 달했던’ 비운의 시기를 살아야 했다. 유생들은 사찰을 불태웠고 사찰의 재물과 보물을 약탈해 갔다. 스님들은 사대부들의 가마꾼 노릇을 해야 했고 사찰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예의가 없다는 구실로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를 해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국가권력은 한 술 더 떴다. 똑같은 하늘 아래 백성이건만 도첩이 없다는 이유로 스님들을 환속시켜 군대에 편입시키고 승과를 폐지함으로써 승려가 되는 길을 차단했다. 특히 연산군은 선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와 교종의 본산인 흥덕사를 연회소로 만들고, 원각사는 기방으로 만들기도 했다.
보우 스님은 이런 법란의 시대에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되고자 했던 고승이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용문사로 입산한 스님은 1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에서 본격적인 사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금강산에서의 정진으로 큰 깨침을 얻은 스님은 그후 주머니 속 송곳이 드러나듯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다.
1551년 6월, 흥법을 발원했던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봉은사 주지 및 선종판사에 임명된 스님은 보현사 회암사 등 퇴락한 사찰을 중창했다. 특히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이끌고 승과를 다시 설치해 유능하고 합법적인 승려 배출에 힘썼다. 서산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이러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물이었다.
유생들의 끊이질 않는 질시와 모함. 그 속에서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불교중흥에 헌신했던 보우 스님. 하지만 1565년 6월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6월 스님은 제주도로 귀향가야 했고 그해 10월 경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살해됐다.
▷스님의 삶은 명종 임금의 어머니이신 문정왕후의 삶과 궤적을 같이 하는 것 같은데 문정왕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연산군과 중종 임금을 거치며 불교는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게 됐고, 승려들은 도둑으로 절은 이단의 소굴로 취급 받게 됐지요. 대신과 유생들의 극렬한 배불정책 속에서 불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후께서는 거센 반대여론을 친히 감수하시면서까지 매번 용기와 결단으로 불교 부흥을 위해 헌신하셨다오. 그 분은 보살의 화신이십니다.”
▷문정왕후께서 사신을 통해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를 맡아달라고 당부하셨을 때 스님은 ‘왕후의 조서에 처음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고 했고 귀를 씻고 못들은 것으로 하려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직책을 맡으셨나요?
“나는 지병으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다오. 또 법랍으로 보더라도 나보다 위에 계신 스님들도 많았지요. 그런데 왜 하필 이 병든 산승일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요. 그 길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그건 내 바람일 뿐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고 불보살님과 중생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임을 아는데 어찌 피할 수 있겠소이까.”
▷스님이 선종판사가 되기도 전에 스님에 대한 비난과 함께 처벌하라는 상소가 조정에 수북이 쌓였습니다. 이를 조사한 어느 논문에 따르면 ‘그 무렵에 무려 446건의 상소문이 폭탄처럼 올라왔다’고 하니 이를 지켜보는 스님의 심정이 참담하셨겠습니다. 그런데 왜 유학자들은 스님을 그토록 미워한 걸까요?
“나에 대한 것보다도 불교에 대한 미움이 더 컸겠지요. 허나 불교와 유교 사이를 서로 구분해 배척하는 건 편견이고 망상일 뿐이란 걸 모르지요. 공자, 노자, 부처님이 말씀한 근원이 둘이 아님에도 우열을 두어 배척하는 것은 이기심에도 비롯된 것이라오.”
▷제가 보기에도 스님께서는 참으로 맑고 고결하게 사셨던 것 같습니다.
“요승이다 괴승이다 소리를 죽을 때까지 들었는데 그건 어인 말이오?”
▷당시 교종판사였던 수진 스님도 주변의 일로 2년도 못돼 중도하차하셨습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음에도 이들의 상소 내용은 서울에 흰 무지개가 떴다느니 함흥에서는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으니 그것이 요망한 스님 때문이라고 하는 치졸한 수준이니까 말입니다.
“이 한 몸 바쳐 불교가 일어날 수 있다면 무슨 일이건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남들이 옳다 그르다 하든 그게 무슨 관심거리겠으며 어떤 다른 욕심을 내겠소. 더욱이 임금을 위해 불교 배척함이 진정한 선비의 일이라고 말하더라도 난 부처님 받들고 그 선비마저 존경함이 바로 불가의 가풍이라 본다오. 다만 내가 크게 상심한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몇몇 스님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내가 허물이 있다고 성균관에 가서 얘기하고 거짓 잘못을 만들어 임금께 상소를 올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마음 아프다오.”
▷그렇겠군요. 힘을 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래도 스님께서 불교부흥을 위해 진력하신 후 불교계 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같은데 어땠습니까?
“처음에 텅텅 빈 사찰이 많았는데 도승제와 승과제 영향으로 주지가 있는 절이 99개에서 395개로 크게 늘었지요. 그간 침체됐던 교학과 선풍이 구름처럼 일어나 각 사찰에는 승과를 준비하기 위한 경전공부도 대단했다오. 하지만 무엇보다 승과제도로 탁월한 인재들에게 승려로서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점이겠지요.”
▷스님께서는 선종판사로 6년간 소임을 맡으신 뒤 청평으로 물러나신 몇 년 뒤 다시 복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스님께서 ‘떨어진 가사 한 평생이 참다운 삶의 길이라. 짧은 지팡이로 천릿길 어정거림이 좋다네’라는 스님의 싯구처럼 살면서 다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면 훗날 귀양 가 죽임을 당하는 그런 비극은 없었을 거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왜 돌아오셨나요?
“젊은 휴정 스님이 교종과 선종판사를 맡은 지 두해 만에 그만뒀습니다. 상상키 어려운 질시와 모함 속에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그렇다고 그에게 더 맡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문정왕후께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리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았으니까 말이오. 유능하고 사려 깊은 젊은 인재가 희생양이 되느니 살만큼 산 내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소. 그 마지막 길이 무엇이든.”
▷『이조불교』를 저술한 다카하시 도오루(1878~1967)라는 일본의 학자조차 스님을 일컬어 ‘신라 고려 조선 삼대를 통해 가장 뛰어난 고승의 한 분으로 스님이 한 일은 실로 표표하여 조선불교사에 불멸의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스님이 계셨기에 조선불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나는 성품이 느리고 또 병약할뿐더러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선종판사직을 맡은 동안에도 종종 번민과 갈등에 빠지곤 했소. 그러나 매번 선택에서 나는 ‘옳음’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지요. 그게 뒷날 행인이 밟고 건널 나룻배가 됐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요.”
▷조선의 사관들은 스님의 입적했다는 소식에 ‘모든 백성이 구름을 헤치고 밝은 태양을 보는 것 같으니 그 쾌락이 어떠하랴’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모진 편견과 핍박 속에서도 스님께서는 참다운 수행자의 상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한 개인이나 종교가 흥하고 성하는 것은 상대의 성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됐다고 말씀하셨소.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인욕과 자비를 의지처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불교의 힘이고 위대함입니다.”
박영기 『순교자 보우선사』, 이종익 「보우대사의 중흥불사」, 김영태 「보우 순교의 역사성과 그 의의」, 강석근 「화쟁적 관점에서 바라본 두 승려의 행적과 시문학-충지와 보우를 중심으로」, 김기령 「허응당 보우의 유불관계론 고찰」, 서규태 「보우의 문예사상」 등
보우 스님 어록
“병 앓은 뒤 겨우 머리 들기를 배우고 있는데/ 왕후의 조서 구름 깊은 언덕에 온 소식 놀라며 들었노라/ 담장을 넘어 도망치자니 공손한 도리가 아니고/ 귀를 씻고 못 들은 것으로 하자니 세상을 피해 사는 허물이라/ 멀리서 온 사신은 오경에 범 같은 석장으로 재촉하여/ 북풍 불고 잔설 덮인 양주땅을 지나왔네/ 석양에 얼음 위 청담의 물 건너서 선원에 들어오니/ 나보다 위에 계신 스님들께 부끄럽기만 하여라.” (허응당집 중)
“불교가 쇠하고 박함이 올해보다 심한 적 없어/ 몰래 흘리는 피눈물 수건에 가득 적시네/
구름 속에 산 있지만 어느 곳에 자취를 의탁하며/ 속세에도 이 몸뚱이 용납할 만한 땅이 없네/
참담하고 부끄럽게 사는 우리 무리만이 복이 없어 태평한 세월에 오히려 불평 많은 사람이 되었네.” (허응당집 중)
“도란 본래 자주 옮겨지는 것/ 내 어찌 자연을 어기겠는가/ 강 흐름 깊으면 깊게 물을 건너고/ 개울물 얕으면 옷자락 걷고 건너지/ 외로운 지팡이는 여기보다 알맞은 곳 없으니/ 오고감은 인연에 맡겨 두네.” (허응당집 중)
“허깨비가 허깨비의 고을에 와서/ 오십년이 넘도록 미친 장난쳤구나/ 사람의 세상 영욕의 일 다 치르고/ 이 허깨비 승려 몸 벗어나 넓고 푸른 하늘로 오르리라.”
(허응당집 중)
찬탄과 공경
“보우 스님께서는 눈에는 색(色)에 집착하지 않는 공부가 있고 귀에는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 공부가 있다. 그러므로 스님은 항상 말과 행동과 용모가 한결 같았다.” (휴정 스님)
“우리 (보우) 대사께서는 동방의 외지고 좁은 땅에 태어나 백세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고 이 도로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거나 끊어지지 않게 하시었다. 이를 상고하여 논하건대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 가신 분이라 하겠다.” (유정 스님)
“이미 국가로부터 몰수 당하여 없어져 버린 선·교 양종을 다시금 되살리기 위해 헌신한 보우 스님의 업적은 조선왕조 반천년의 불교역사에 있어서 가장 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스스로의 모든 것을 교단중흥을 위해 바친 성사(聖師)였다.” (김영태 동국대 명예교수)
905호 [2007-06-20]
http://www.beopbo.com/article/view.php?Hid=51899&Hcate1=2&Hcate2=17&Hcmode=view
《한국불교의 큰 스승 허응당 보우》- 박영기 지음
조선조의 이른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찰과 종파가 강제로 통-폐합되고 승려는 쫒겨났으며,
1000년을 이어져 온 불교가 황폐화 직전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 혹독한 암흑기에 불교 중흥을 이끌고 1000년 불교의 법맥을 있게 한 사람이 바로 걸출한
큰 스님(호는 보우(普雨) 또는 나암(懶庵), 당호는 허응당(虛應堂))으로, 조선조 한국불교 중흥조
라는 추앙과 함께 불교 탄압에 앞장 섰던 유림들로 부터는 ‘요승(妖僧)‘ 이라는 모함을 받아 제주로 유배살이를 가고 현지에서 순교를 당하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조선의 연산군 때에 이르러 한 번 거센 산바람이 불어닥침을 만났고,중종 때는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풍(禪風)은 부채를 숨기고 불 일(佛日)도 빛남을 감췄다. 모든 나라안의 사찰은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훼손되어 산에는 절이 없어 지고 절에는 승려가 없어, 요행이 총림 아래서
머리 깎고 물든 옷 입은 사람도 관리가 침범하고 속인들이 재앙을 일으켜 눈에는 눈물이 있었고
그 눈물에는 피가있었다. 장차 외로운 명맥을 남길 곳도 없어지고 형세는 극도에 달해 길짐승으로
전락하였다.‘
- 《허응당집》, <선종판사계명록(禪宗判事繼名錄>중에서.
어지럽힌 요사스러운 승려라는 비판을, 한국불교사에서는 선사이면서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있던 한국불교의 불법을 이은 위대한 인물로 극찬을 받고 있다. 위기에 처한 불교를 재건하고자 애썼던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이며 끝내 목숨을 바친 ‘순교승’이지만, 조선의 주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스님은 권력을 등에 업고 정도를 어지럽힌 한낮 승려에 불과할 뿐이다. 스님은 쇠락해가는 조선 불교에서 봉은사를 근본도량으로 하여 중흥불사를 시작하였다. 스님의 일련의 불교 중흥 과정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 1565이다.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학자들의 표적이 되어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유학이 국가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 문정왕후는 중종의 왕비이며, 명종의 생모였으며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 실권을 잡고 조선조 한 시대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의 형태로 지속되었던 문정왕후의 권력은 역설적이게도 조선의 국가이념과는 상충하는 불교가 그 근간이자 지탱이었다. 부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제도적으로 사찰을 보호하게 하였다. 더불어 선과 교를 대표하는 봉은사와 봉선사에 방榜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킴으로써 유학자들의 횡포를 막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보우스님과 문정왕후와 유생들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보우스님은 문정왕후로 하여금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 로써 1551년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가 쓴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 상소문은 명종으로 하 여금 보우스님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의 제주목사 변협 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셨다. 스님의 나이 세수 56세법랍 49세였다.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도모하였다. 고단하고 공과功過가 공존하는 보우스님의 일대기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문장은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사라진다.”였다. 단순한 듯 무심한 이문장은 불법을 계승하는 진정한 불제자이며,시대의 선승이였으며,또한 유학자들의 저항에 맞섰을수 있는 종교적 신념이었다.그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 하고 전승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는 곧 역사와 문화로 전승되고 있다. 글 : 성청환(동국대 연구초빙교수)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보우스님은 불교가 억압당하던 조선시대 중종·인종·명종 때의 인물로, 유학자들로부터는 국사를
보우대사와 문정왕후
금강산에 주석하던 보우스님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의 요청으로 조선왕조에서 불교를
보우스님은 봉은사 주지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문정왕후로 하여금 <경국대전>에 적시된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유학자들이 사찰에 무단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거나 횡포를
1565년 4월 문정왕후의 장례를 마친 유생들은 곧바로 보우스님에 대한 배척과 불교탄압을 주장하
지금 다시
보우스님은 암울한 조선 불교사에서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우스님(普雨大師) (1509∼1565)
보우스님는 조선중기 조선왕조의 불교탄압속에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우스님은 문정왕후의 서울 봉은사 주지로 발탁되어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사람이 하늘이고, 사람의 바탕이 곧 천지의 바탕이며...'
보우스님이 유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불교의 심성원리(心性原理)를 해설한 학설.
'사람이 하늘입니다 _인내천人乃天 '보우의 저서인 『나암잡저(懶庵雜著)』에 수록되어 있으며,
보우가 한 고관에게 '일정(一正)’이라는 호를 지어주면서 그 뜻을 풀이한 것이라고 한다.
이 학설에서는
보우(普雨)선사의 일정설 [ 一正說 ]
일(一)이 진실하고 헛되지 않은 천리(天理)라고 정의하고,
그 이치가 깊고 그윽하여 아무런 징조가 없지만 만상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일기(一氣)의 유행에 따라
봄에는 싹이 나게 하고,
여름에는 자라게 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하고,
겨울에는 간직하게 하는 등 삼라만상이 모두 이것을 얻어서 나게 된다고 하였다.
‘정(正)’은 편벽되거나 사(邪)되지 않은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이 밝고 고요하면
천지만물의 일에 응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늘의 이치인 일과
사람의 마음인 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늘이고,
사람의 바탕이 곧 천지의 바탕이며,
사람의 기운이 곧 천지의 기운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항상 일정一正 을 생각하면서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바르게 가지면 재앙은 저절로 소멸되고
복은 자연히 돌아오게 되어 태평스러운 일생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일정설(一正說)은 그 표현의 묘(妙)를 얻은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일정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라는 것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며, 성실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을 말하니
하늘의 이치이다. 그 이치(理)가 공막(空漠)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지만 만상(萬象)이
울창하여서 물(物)의 어느것 하나 그 이치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체(體)를 말하면 하나(一)일 따름이니 처음부터 물(物)이 둘이나 셋 있는 것은 아니다.…… 바르다(正)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릇됨이 없고 순수하며 잡되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이니 곧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안정되어 딴 생각이 없고, 천지만물의 이치가
어디 한 군데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영통(靈通)하여 어리석지 않으니, 천지만물의 모든 일에 어느 것 하나 응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찍이 한 생각도 사사로이 치우치거나 그릇된 적이 없다.
보우는 일정설(一正說)에서 하나(一)를 가지고 하늘의 이치를,
바른 것(正)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 하였는데 그 취지는 한국 민족 사상의
한 전통을 이루는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편집] 저서
보우의 저서로는《허응당집(虛應堂集)》《선게잡저(禪偈雜著》《불사문답(佛事問答)》등이있다
보우(普雨: 1509?∼1565)는 연산군과 중종대를 거치면서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던 조선불교를
되살려 낸 종교운동가이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로 계승되는 호국불교의 명맥을 연 봉은사의
선승(禪僧)이기도 하다. 보우는 법명으로, 호는 허응당(虛應堂) 또는 나암(懶庵)이다.
첫댓글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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