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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총선, 선거혁명을 이루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를 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은 '정의 사회 구현'과 '의식 개혁', '선진 조국 창조'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실제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려고 경찰 등 폭압 기구를 강화하여 정권 유지의 방패막이로 삼고,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 채 흔드는 폭력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관계법, 국가 보안법 등을 개악하여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더욱 강력히 탄압하였다. 전 정권은 1980년 말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 기본법을 만들어 언론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이런 속에서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의 결과는 국민들의 5공 정권에 대한 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것이었다.
1984년 11월 30일 3차 해금으로 풀려난 구신민당 출신 전직 의원들은 1985년 1월 18일 김대중·김영삼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의 창당 대회를 서울 앰베서더 호텔에서 가졌다. 대의원 523명이 참가한 창당 대회는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로 뽑고, 김녹영, 이기택, 조영하, 김수한, 노승환 등 5명을 부총재로 선출하였다. 이 날의 신민당 창당은 2월 12일로 예정된 제 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신민당 창당을 계기로 민주 세력의 결집은 날로 가속화되었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이 같은 '신당바람'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이는 선거일 4일 전인 2월 8일 미국 망명 2년여 만에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정부 여당(민정당)은 김대중의 귀국을 거부하면서, 그가 귀국하면 투옥시키켔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신변 안전을 이유로 귀국을 만류하기도 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귀국을 강행했다. 국내에서는 김영삼이 죽음을 각오한 23일간의 단식으로 흩어진 야권을 결속했고, 국외에서는 김대중의 죽음을 각오한 귀국으로 민주화 세력을 결집, 전두환 정권과의 일전 불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선거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선거 결과 지역구 총 의석수 184석 중 신민당은 92개 지구당에서 50명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이 87석을, 그리고 종래의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은 26석에 불과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 신민당은 17석을 합쳐 67석, 민한당은 9석을 합쳐 35석이 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민한당을 물리치고 창당한지 불과 25일만에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신당 돌풍'을 일으킨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체제 내에 안주해 온 제도권 정당에 대한 국민의 회의와 반발이 깊어진데다 야당다운 야당이 있어야겠다는 국민 의식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신민당은 김대중·김영삼의 권유에 따라 민한당의 인사들이 대거 입당함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야권 통합을 이룩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런 힘을 배경으로 국회가 열리자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민주화 운동 세력도 군사 독재 정권 타도와 이를 위한 직선제 개헌을 적극 주장하였다. 집권세력은 개헌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물리적 힘으로 탄압하면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행위로 매도하였다.
권인숙과 박종철
권인숙은 대학 출신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비합법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이다. 그녀가 1986년 6월 부천 경찰서에서 추악한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 권인숙 의 진솔하고 도도한, 그리고 당당한 눈물의 법정 발언은 독재 정권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이번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박종철은 반정부운동을 하던 친구의 행방을 대라는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요구에 불응하며 끔찍한 고문을 견디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87.1.14) 다음 날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죽은 까닭을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 같이 있던 치안 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러졌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위 발표는 시민적 공분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어느 시민은 " 박군 관계 신문 기사를 보면서 부부가 함께 울어버렸던 우리들의 아픔을 당신들은 정녕 아는가?"라는 글을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80년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제 5공화국을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억눌린 감정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관련자 처벌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4.13 호헌 조치 그리고 6월....
이런 상황 속에서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의 여망이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4.13 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하였다. 4.13 호헌 조치 뒤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 대중의 결의는 더욱더 강해졌다. 각계 각층에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을 내고,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 대회를 6월 10일 대규모로 벌이기로 결정했다. 6월 10일 그날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한다.
.. 2.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3.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연행을 거부한다. 연행되면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
4. 전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항의한다....
7. 또 한번 부탁하거니와 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이런 움직임에 당황한 정부는 6월 10일 며칠 전부터 6.10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봉쇄 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았다. 이에 따라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인쇄소 등에 대한 경찰의 경계와 수색도 심해졌다. 또한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을 발령하는 한편 버스·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고 교대시간도 바꾸도록 종용하였다.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대회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전격 수색하여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드디어 6월 10일이 밝았다.
오전 11시 15분 서울시 송파구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2 30분 채문식 전당대회 의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한 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와 손을 잡고 연단 앞쪽으로 걸어나가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은 신군부 내의 권력 승계를 위한 한판의 축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체육관 밖에서는 또 하나의 '축제' 가 진행되고 있었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서울시청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의 숫자가 12:00로 변하는 순간 도로 건너편 성공회 대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탑 꼭대기에 잿빛 가사를 걸치 스님(지선스님)과 연한 보라색 블라우스에 쉬어링 치마를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소설가 유시춘)이 나타났다.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를 대표하여 종탑에 올라간 그들은 그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될 6.10국민대회의 성공을 예감했다.
드디어 6시 약속된 시간이 되자 거대한 함성이 도심을 울렸다.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먼저 나서고 시민들이 속속 동참하기 시작했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인 9일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로 인해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규모가 커지면서 급속히 전개되어갔다. 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시위대와 경찰은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거리는 마치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 같았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공주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 시위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시청 한 곳, 파출소 열 다섯 곳, 민정당 지구당사 두 곳 등이 파손되었다. 경찰은 그날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8백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6월 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그 희망의 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성금은 물론 빵, 음료수, 의약품 등을 전달하였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회사원들은 그 자리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도 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옷을 보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 지지편지>
⊙ 민주발전을 위해 써 주십시오. 고등학생이라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요. 지갑을 털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하는 데서 항상 여러분에게 못 미쳤던 평범한 샐러리맨 69명과 식당 주인 아저씨로부터
⊙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몸은 함께 하지 못하나 마음만은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당신과 같이 피를 흘리지 못하나 눈물만은 함께 흘립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 장한 일 하십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시민 일동
⊙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애국적인 투쟁에 따른 희생을 모르는 척 하고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자꾸 치밀어 올라와 어느 모퉁이에서 간절히 동참하고 있는 마음 약한 40대 중반의 못난 선배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부탁이 있소. 폭력은 금물이오.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또 법의 가면을 쓴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정부당국의 발표를 보면 80년 5.17때의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하오. 이번만은 절대로 그러한 우를 범해서 반역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맙시다. 말없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애국적인 학생들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부디 건강을 비오.
이렇게 명동 성당에서의 농성 투쟁이 6월 민주화 운동의 불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한데 이어서 군대 동원의 가능성에 대한 정부의 경고에도 굽히지 않고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이라는 조직된 시위를 주도하여 1백만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런 국민들의 거대한 힘에 놀란 정권은 '직선제 개헌' 및 광범한 민주화 조치 등을 보장하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선언')을 내놓게 된다. 우리 국민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였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 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29선언 중)
6월 시민항쟁 그 후....
6월 항쟁의 거친 파도 속에서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시민과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 직선제에 동의함으로써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6.29선언은 여당이 국민의 지지를 못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히 모험적인 조치였다. 노 대표가 발표한 8개항에는 김대중의 사면복권, 언론 자유, 대학 자율권 지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노 대표의 핵심 측근에 따르면 광주사태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 했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 순간에 철회했다. 노대표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건의 형식으로 6월 29일 이 제안을 전격 발표했다. 그는 "만에 하나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대표 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비장한 어조로 밝힌 후 국립 묘지를 참배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틀 후 노대표의 계획을 지지했다.
6.29 선언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노 대표가 대담한 조치를 취함에 따라 전대통령도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노대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전대통령은 그런 소문에 전혀 반박하지 않았으며 노 대표의 결단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4년뒤 6.29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고, 노대통령은 처음에는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연출'을 맡게 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9선언은 1987년 6월의 위기를 종식시켰고, 한국의 정치개혁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6.29선언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한 후 치러진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이래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 선거였다.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를 이끌어낸 역할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軍 배경 때문에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군사 정권에 몸 담은 전력은 그만큼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태우 후보는 1932년 12월 대구 부근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한국 전쟁 초기 단기간 사병으로 복무한 뒤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첫 번째 4년제 정규코스인 11기로 입학했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당시 9사단장이었던 그는 전방에서 병력을 빼내 서울로 이동시킴으로써 이 거사의 핵심적인 지원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수경사 사령관, 보안사 사령관 등을 지냈다.
노태우 후보에 맞설 야당 정치인으로 양金(김영삼, 김대중)이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모색했다. 그러나 곧이어 김대중씨는 자신의 본거지인 광주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대통령 후보처럼 전국 유세를 시작했다. 김영삼씨도 자신의 본거지인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같은 행동을 취했다. 양金은 오랜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왔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각각 자신이 야당 단일 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양金은 그들의 단일후보 약속을 뒤로하고 둘 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김영삼 후보는1928년 12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어장 사업으로 성공한 부친은 그를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와 서울대로 유학을 보냈다. 25세 때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당선 기록을 세운바 있다. 곧이어 그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에 항거해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평생동안 민주주의 옹호에 나서게 된다. 1960년 북한 공비에 의해 그의 모친이 총살되는 비극 때문에 북한에 대해 확고한 입당을 견지했으며 야당 정치인 탄압에 자주 이용되는 색깔론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기득권 층이라는 사실 때문에 중·상류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198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 3명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정치인에 가까웠다. 야당 지도자로서 김영삼은 오랜 세월 동안 굴복하지 않고 투쟁해왔다. 박 대통령 시절 그는 군부통치에 반대해 투옥됐으며 1969년에는 3선개헌 추진에 반대하다가 황산 투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영삼은 공개석상에서 박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영삼 후보는 민주개혁을 주장하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1924년 1월 전라남도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오랜 라이벌인 김영삼과 달리 유복한 가정 출신이 아닌 그는 한국 엘리트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1971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지명전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승리한 김대중은 여당 측의 극심한 선거부정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에 맞서 46%를 득표함으로써 최고 정치 지도자 대열에 뛰어 올랐다. 박대통령은 그를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박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하려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후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나중에는 또 선동죄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박대통령이 시해된 후 들어선 전대통령도 탄압을 계속했다. 전대통령은 김대중을 체포해 날조된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결국에는 레이건 미 행정부와 가진 협상으로 그를 석방해 미국 망명에 오르게 했다. 1985년 자진 귀국한 뒤 또다시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리고 1987년 6.29선언으로 모든 혐의를 벗고 정치적으로 사면 복권됐다. 대선 전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한다는 군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에 따라 김대중이 당선되더라도 군부 지도자들이 그의 취임을 용납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으며 군부가 김대중을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36%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28%)과 김대중(27%)은 각각 야당 표를 양분했다. 노태우 후보는 치열하게 전개된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에게 결여됐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에 따라 노대통령은 임기 동안 전임자인 전대통령에 비해 언론자유를 확대하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줄일 수 있었다.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또 한국이 강경 반공노선을 완화하고 동유럽 공산국가, 소련, 중국 등과 관계를 발전시켜 결국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소위 '북방외교')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동북 아시아의 전략적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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