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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시편 24:1-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3주일이다. 어느새 여름이 깊어간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한다. 사실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은 얼마나 귀한가?
흔히 ‘썬데이 크리스찬’이라는 말을 한다. 애초에 부정적인 의미였다. 일주일에 겨우 하루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새겨들을수록 ‘선데이 크리스찬’이란 말이 참 중요하다. 날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먼저 제대로 된 ‘썬데이 크리스찬’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 ‘썬데이 크리스찬’도 못되면서, 주일예배를 정성껏 드리지 않으면서, 어찌 좋은 크리스찬이 될 수 있을까? ‘웨슬리안 크리스찬 애드보케이트’는 이렇게 묻고 대답한다. ‘그런 사람은 학교에 안 가는 학생과 같고, 부대에서 벗어난 군인과 같고, 세금을 내지 않는 시민, 기지가 없는 탐험가, 독자가 없는 저자, 오케스트라가 없는 지휘자, 팀이 없는 축구선수, 벌집이 없는 벌과 같다’.
코로나19로 1년 반 가까이 교회에서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평소 같으면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크고 작은 포기를 했을 것이다. 늦잠을 포기하고, 약속을 포기하고,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일상의 우선순위를 포기해야할 것이다. 먼 길을 여행하듯 교회로 오는 분들도 있다.
당장 오고가는 수고 없이 집에서 비대면 예배를 드리더라도 저마다 준비할 것이 많을 것이다. 비대면 예배를 위해 매주일 색동어벤저스의 헌신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오늘도 우리 모두 주일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썬데이 크리스찬’이 되길 바란다.
1)
시편 24편은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이 ‘성소로 들어가면서’이다. 성전에 들어가려는 예배자의 모습과 예배는 모름지기 이래야한다는 것을 다짐한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찬양으로 시작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1).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의 두 가지 태도는 감사와 찬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 가운데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평소 예배를 시작하면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코로나19 초기만 하더라도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반드시 교회에 나와야 하는지, 아니면 비대면으로, 온라인으로 예배드려도 가능한지 갈등이 있었다. 지금도 해결된 문제는 아니다. 신앙공동체가 모여 함께 예배드리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시편은 하나님은 특별한 공간만이 아니라, 창조의 세계와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제나 예배할 수 있고 고백한다.
예배는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을 향하도록 이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피조물인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과 죽음까지, 내 인생의 터를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이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2).
내가 여호와의 것, 곧 하나님께 속하여있다는 믿음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내가 드리는 예배생활은 나로 인생의 염려와 두려움, 아픔과 여러 가지 삶의 과제를 내어 놓고 하나님의 자비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준다.
예배는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예배자로 하여금 주님의 얼굴을 찾도록 이끄는 것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연약한 인생, 생로병사의 문제, 삶의 염려와 불안이 있다. 한 사람의 존재가 겪는 인생의 숙제는 끝도 없다. 모두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또 저마다 다 다르고 특별하다.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진리와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주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나를 온전히 맡긴다. 값없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구한다. 이것이 예배다.
그러므로 예배는 언제나 높이와 깊이를 추구한다. 피조물로서 나를 돌아보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세계관의 문제다. 그러니 이러한 복된 예배를 사수해야 한다.
우리는 자주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 예배는 새로운 유행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고지식하게 전통을 고수하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편의주의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제물이 아닌 상한 마음이고, 인간의 자구노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태도이다.
2)
두 번째로 예배하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과연 예배자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3).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뵙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 작은 포기이든, 커다란 희생이든 저마다 노력을 해야 한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
적어도 예배자로 나아오는 그 사람이라면 손은 깨끗하고, 마음은 청결하며, 뜻은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예물은 얼마나 드렸는가? 잘 차려입었는가? 성경은 이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그의 삶, 그의 중심을 보신다. ‘카인의 제물이 아닌 카인의 삶’을, ‘아벨의 제물이 아닌 아벨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은 분주한 일상 속에서, 때묻은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고백하는 것이다.
흔히 손을 씻는다는 말이 있다. 세상의 먼지와 티끌만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허물과 범죄를 용서받는 절차이다. 그러나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예배는 한 걸음 더 내일로, 미래로, 희망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시편 24편에 따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나아갈 때 예배자는 문 앞에서 질문을 듣고, 대답해야 한다.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나는 성전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는가?’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인과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받으려고 나아오는 죄인이다. 하나님이 죄인으로 나아온 그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다. 용서받은 결과 그의 마음은 청결하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신다.
예배자는 예배의 형식에 참여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예배자를 가리켜 “여호와를 찾는 족속...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6)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얼굴은 무엇인가?
얼굴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엄마와 아기가 얼굴과 눈동자를 맞추듯 예배자는 하나님과 친밀하며, 온전히 사귄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7).
하나님은 솔로몬의 성전에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의 집인데, 그 의미는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다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복되다. 야곱은 형 에서와 갈등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무려 20년 동안 객지에서 피난과 노동과 배신과 아픔을 겪었다. 마침내 형을 만나는 자리에서 화해를 구하며 이렇게 실토한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
그 얼굴과 마주하면서 비로소 평화가 가능해졌다.
하나님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주님의 품을 거부한 사람들, 더 이상 주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신다. 제사장은 예배하러 나아온 사람을 향해 이렇게 축복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하나님이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의미한다. 내 가정에 하나님이 머무시고, 내가 가는 길에 동행하시며, 내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 고난과 괴로움에도 함께 하시길 기원하는 것이다.
3)
시편 24편의 세 번째 부분은 성전의 입당식을 연상하게 하는 예식문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7,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으라’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올 때를 기억하며 불렀던 예전적 찬송이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니 성전 입구의 문들도 머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 문에 출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참 영광스러운 일이다.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옷자락을 스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전농동은 청량리와 함께 유명한 동네다. 사회적 환경이 어수선하고 구질구질하였다. 그런데 재개발을 하고나서 말끔해졌다. 오래 전부터 터줏대감 노릇하던 전농감리교회가 교회를 신축하고 입당하였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오는 첫날, 구약시대 언약궤 모형을 만들어 예복을 입은 장로님들이 어깨에 메고 성전에 들어오는 의식을 하였다. 흥미로운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냥 이벤트였을까? 교인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선언을 한 것이다.
이곳은 수십 억짜리 건물이 아니고, 재개발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목이 좋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구약 시대 엘리 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성소에 두었던 언약궤를 전쟁터까지 끌고 나갔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언약궤를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요행수로 여기고 수단으로 활용한 까닭이다.
언약궤는 불레셋을 괴롭히다가 결국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한동안 머물 곳을 잃고 세간의 집에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이제 다윗의 시대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정하고 시온성으로 법궤(언약궤)를 옮겨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몇 차례 시도가 여의치 않았다. 법궤를 옮기는 도중에 인사사고도 났다. 법궤를 수레에 싣고 옮기다가 소의 요동으로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웃사가 손을 댄 것이 그만 화를 불렀다.
애초에 법궤는 이동할 때에 제사장들이 반드시 어깨에 메도록 정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의 편의적인 사고방식이 법궤를 수레에 옮기고, 소가 수레를 끌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이 정한 방식을 인간이 편법으로 한 것이다.
인간의 편리주의는 편법을 낳는다. 매사에 편리하게만 살려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자녀들에게 사서하는 고생을 가르쳐주는 일은 얼마나 유익한가? 우리는 신앙의 편리주의가 과연 내 신앙을 왜곡하지는 않는지 따져볼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어깨에 메어야 할 멍에를 수레에 싣고 소더러 끌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의 물질만능주의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수단화하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예언자 미가는 제물 따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선한 일인지, 또 무엇이 사랑인지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공의와 자비와 신실함,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다.
오늘은 환경선교주일이다. 우리는 인간 뿐 아니라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함께 하나님께 속한다. 모두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속한다. 환경문제는 일 년에 몇 차례 이벤트를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제대로 된 ‘썬데이 크리스찬’이 365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듯이, 좋은 예배자가 된다면 365일 자연과 만물과 함께 창조질서를 존중하며 지구촌의 예배지기로서 살아갈 것이다.
예배는 다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회복하는 일이다. 창조질서를 존중하고, 생명세계를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일이다. 그리하여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이다.
나는 비록 세속적인 삶을 살아도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영광이 내게 깃들어 나는 복되고 거룩한 삶을 산다. 그 빛이 내게 순간순간 섬광처럼 작용하여 내가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여러분은 주일마다,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통해 복된 삶, 변화된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