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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개암일록(2)
본 자료에 월천의 도산서원 제향과 수암선생의 소과 장원. 김직재 무고사건 연루. 도암공의 타계등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선조 40년
11월 10일
맑음. 이작(李灼)이 도로 돌아가므로 술을 대접하여 전송하였다. 이 형(李兄)의 종 귀봉(貴逢)이 하회(河回)로 출발하므로 계화(季華)에게 편지를 썼다.
11월 12일
아침에 덕여(德輿)와 참(墋)이 누이를 보기 위해서 왔다. 백승(伯承)의 집 혼사(婚事) 때문에 동네에서 하는 관례로 계주(鷄酒)를 보내고 또 농어[巨口魚]를 보냈다. 밥을 먹은 뒤에 종 석부(石夫)는 돌아갔다. 오시에 백승의 집으로 갔다. 의논하여 홀기(笏記)를 쓰고 사첨(士瞻)을 지정해서 찬자(贊者)로 삼았다. 교배례(交拜禮)의 자리 배치는 당연히 동서(東西)로 해야 하는데, 그 편리함을 취해서 남북(南北)으로 향하게 놓았으므로 고쳐 놓으려다가 고치지 못했다. 한탄스럽다. 저녁에 신랑이 왔다. 바로 의령(宜寧) 수령 이함(李涵) 씨의 아들인 시명(時明)이다. 요객(繞客)은 예안(禮安) 수령 안담수(安聃壽)ㆍ이정회(李庭檜)ㆍ신랑의 형 이시청(李時淸)이었다. 제천 표숙(提川表叔)ㆍ좌수(座首) 형ㆍ평보(平甫) 형ㆍ백승(伯承)이 손님을 대접하였다.
무신년(1608, 선조41)
3월 2일
흐림. 병산(屛山) 사람이 사열(士悅) 어른의 편지를 보내 주었다. 서애(西厓)의 글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11월 5일
맑음. 저녁에 종이 풍산(豊山)에 가기 때문에 계화(季華)에게 편지를 썼다.
기유년(1609, 광해군1)
3월 2일
맑음. 계화(季華) 가 그의 어머니 묘를 옮겨 수동(壽洞)에 합장(合葬)하기 위해 초나흘로 날을 잡고 사람을 보내 안부 편지와 쌀말을 보냈다.
4월 22일
아침에 안개가 짙게 끼었다. 류계화가 편지를 보내어 사열 어른의 후사(後嗣)에 관한 일로 서촌(西村) 김효백(金孝伯)의 아들을 언급했는데, 친구인 내가 권하여 일이 성사되도록 하고자 했다. 답장을 작성하여 보냈다.
8월 17일
맑음. 밥을 먹은 뒤 내성에 갔다. 병을 앓은 뒤로 처음 갔는데 이미 4년이 흘렀다. 홍 찰방 등과 이야기했다
12월 16일
맑음. 밥을 먹은 뒤 계화도 만날 겸 해서 내성으로 출발했다. 덕우(德優)가 같이 갔다. 저녁에 유곡(酉谷)에 이르렀다.
12월 17일
맑음. 아침에 계화에게 편지를 보냈다. 계화는 서울에서 그의 췌가(贅家 : 처가)에 새로 돌아왔다. 계화는 증광 회시(增廣會試)에서 떨어지고 11월 식년시의 진사 초시(進士初試)에서 장원했다. 밥을 먹은 뒤 정보(精甫)와 함께 계화를 보러 가니 권상현(權尙賢) 제보(齊甫)도 있었다. 계화가 술을 내고 나도 술을 가져가 계화를 위로했다.
12월 18일
맑음. 오시쯤 계화가 와서 이야기했다. 덕우도 왔다. 저녁에 잠시 계화가 돌아갔다가 조금 뒤 다시 와서 함께 초당에서 잤다.
12월 21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누워서 조리했다. 저녁에 계화의 편지를 보고 정보와 더불어 계화의 처소에 가서 함께 잤다.
12월 23일
추웠다. 아침에 계화의 편지를 받았다. 밥을 먹은 뒤 계화가 와서 이야기했다. 권제보도 왔다.
12월 24일
맑음. 아침에 계화의 쪽지를 보니 정의(情義)가 굽이굽이 넘치는데 한나절을 동행하자고 했다. 밥을 먹은 뒤 안으로 들어가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다. 계화와 더불어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면서 길에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가비곡(加飛谷)에 이르러 헤어지고 밤에 집에 당도했다. 덕우도 같이 돌아왔다.
경술년(1610, 광해군2)
3월 25일
흐림. 계화(季華)가 진사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지와 참(墋)은 모두 떨어졌다.
4월 8일
맑음.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이라서 마음이 아팠다. 오시에 계화가 왔다. 평보 형이 와서 술을 마셨다. 저녁때 함께 제천댁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잤다.
4월 9일
비가 조금 내려서 모두들 즐거워하였다. 평보 형은 밥을 차리기 위하여 먼저 가고, 나는 계화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밥 먹을 시간에 맞추어 함께 갔다. 오시에 계화가 분천서원(汾川書院) 등지에 갔다.
6월 3일
맑음. 중식의 숙소에 가서 전 형을 만났는데, 영주(榮州)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시에 사소소(寫疏所)에 갔는데 그곳은 쾌빈루(快賓樓)였다.
6월 4일
맑음. 숲 속 나무 아래에서 모였는데, 이 날은 많이 모였고 날씨가 몹시 더웠다. 저녁때 모임을 마치고 동헌에서 소두(疏頭)와 계화를 만났다.
6월 5일
흐림. 오후에 유건(儒巾)을 쓴 옷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가, 스무 명씩 한 대(隊)를 지어 객사의 대청으로 들어가서 상소에 서명(署名)하였다. 알성시가 7월 17일로 물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보 형과 계화를 만나 서헌으로 상소를 옮겼다.
6월 6일
맑음. 아침에 중식의 숙소에 가니 전 형이 와 있었다. 밥을 먹고 숲 속의 모임에 갔다. 모인 곳에 상소를 내어 와서 여러 유생들이 서명하고 상소에 절하였다. 오후에 어지러이 흩어져 떠났는데 이지는 오천(烏川)으로 가고 사첨은 산양(山陽)으로 가고 나는 용궁(龍宮)으로 갔다. 이 형(李兄)의 집에 들렀다가 밤에 다시 길을 떠나 용궁 현 내에 들어가서 용궁 사람들과 술을 대작하고 객관에서 소두·계화·의정(義精)과 함께 잤다.
7월 24일
흐림. 평보(平甫) 형이 서울에서 돌아왔으므로 서숙(庶叔)․참과 함께 가서 보았다. 상소를 올린 일은 16일에 주상이 비답을 내려 윤허하였다니 몹시 다행한 일이다. 이강과 이점 등의 일은, 이립(李苙)은 평보 형의 지적으로 큰 잘못을 없었고, 강(姜)과 이(李)는 모두 잘못되었다고 한다. 계화(季華)는 벌써 먼저 내려갔다고 한다.
10월 7일
새벽에 전 형의 쪽지를 보았는데 곧 떠날 것이라고 하였다. 찰방·회백(會伯)과 함께 가서 작별하였다. 전 형에게 편지를 부쳤다. 돌아올 때에 찰방과 함께 오 주부의 집에 갔더니 조사강(曺士强)도 또한 왔다. 낮에 계화(季華)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험에 떨어진 것을 위로하였다.
10월 15일
새벽에 일어나 찰방·회백과 함께 정시(庭試)에 나아갔다. 반궁(泮宮; 성균관)에 이르니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에 집춘문(集春門)을 통하여 후원(後苑)에 들어가니 주상이 이미 서총대(瑞蔥臺)에 납시었다. 소나무가 푸르게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논이 있고, 그 가운데에 계화(季華)·의정(義精)·백온(伯溫) 등 여러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별시에서는 실패하였으나 정시에는 모두 남았다. 사배(四拜)를 마치니 이미 진시(辰時) 말 사시(巳時) 초가 되었다. 표문의 제목이 발표되었는데 매우 쉬워서 곧장 10여 구를 지었는데, 날이 아직도 일렀다. 조용히 다듬어서 정서하여 제출하였더니 시각이 지나서 받지 않는다고 하여 가소로웠다. 들어왔던 문으로 나와서 계화·이화(而和)·중식(仲植) 등 여러 분을 만났다. 또 동대문 안 숙소에서 계화를 만났다. 돌아오니 벌써 밤이 되었다. 나의 초시(初試)는 모두가 말하기를 이상(二上)이라고 하였다. 이점(李蒧)이 정시에 들어왔으니 거리끼는 것이 없다고 하겠다.
10월 19일
아침에 일어나 찰방과 함께 전시(殿試)에 나아갔다. 이때 눈 녹은 물에 길이 얼었다. 대궐 뜨락 빈청(賓廳) 앞에 나아가니 시관(試官)은 좌상(左相) 이항복(李恒福)·대제학(大提學) 이정구(李廷龜)·박승종(朴承宗)·조탁(曺倬)·이이첨(李爾瞻)·홍서봉(洪瑞鳳)·허균(許筠)이었다. 동이 틀 무렵에 시관들이 거자(擧子)들을 인솔하여 임금께 숙배(肅拜)하였다. 해가 뜨자 책문(策問)의 제목이 나왔는데 <도학숭장(道學崇奬) 운운(云云)>이었다. 책문의 의미가 서인들에게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니, 어찌 저들의 뜻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의 견해대로 써 내었다. 이때 몹시 춥고 얼어서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해는 너무 짧고 불 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서편(書篇)을 마무리를 짓고 몇 글자를 마저 쓰지 못하였는데 군사들이 뺏어가니 한탄스럽고도 우스웠다. 또한 거자들이 몰래 베껴 쓰느라고 분주하고 요란하니 몹시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었다. 나와서 찰방의 노비 집에서 잤다.
신해년(1611, 광해군3)
1월 10일
흐리다가 금세 비가 내렸다. 계화(季華)의 편지를 보니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가는 길에 방문하고 싶다고 하였다.
1월 11일
맑음. 저물어 캄캄해서야 계화가 내성(奈城)에서 도착하였다. 이야기가 뜻이 맞고 또 즐거웠다. 평보 형·이지·이건(以健)·이직(以直)이 모두 왔다. 들으니, 지난번에 급제한 열 아홉 명 가운데에 오직 두 사람만이 공정한 도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현(李袨)이 합격한 문편(文篇)은 볼 만한 것이 없었는데, 게다가 ‘지하(地下)에서 원한을 품은 사람’이란 말은 명관(命官)과 대제학(大提學)이 극력 그렇다고 하였지만, 그 부친은 보고 질타하였는데, 서인들은 이것이 정당한 말[正言]이라고 하였다 한다. 성혼(成渾)의 신원(伸寃)에 대해서는 지난 날 경연(經筵)에서 우상(右相)이 직언을 많이 하였고 이필영(李必榮) 또한 직언을 하였다고 한다. 양홍조(梁弘祖)의 일기(日記)에 말하기를 ‘퇴계(退溪)의 학문과 지조는 우리가 미칠 수 없는데, 나의 선생은 퇴계의 고제(高弟)인 조목(趙穆)이고, 조목의 고제는 이덕홍(李德弘)인데 이덕홍의 아들이 모모(某某) 등이다’고 하였으니, 양홍조는 연릉(延陵)의 질서(姪壻)라서 희노(喜怒)가 무상(無常)하다고 하였다. 계화는 두 번이나 외천(外川)을 지나갔지만 이 모(李某) 등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밤이 깊어지자 달이 대낮 같이 밝았다. 한밤중에 이르러 계화·이지와 함께 잤다.
1월 12일
맑음. 아침에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계화의 손을 잡고 내실에 들어가서 두 잔을 마셨다. 사열(士悅) 어른이 양자를 세우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평보 형이 아침밥을 차려 놓고 계화를 초청하였는데, 나와 이지도 보자고 하므로 함께 올라갔다. 밥을 먹고 다시 내려왔는데 평보 형이 또 함께 왔다. 날이 이미 오시가 되어서 제천 표숙댁에 갔다. 이날 계화는 꼭 여강서원으로 가야 한다며 곧장 일어서서 나갔다. 나와 평보 형·대이·이지도 나갔다. 계화는 떠나려고 하는데 이지가 억지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에 날이 저물어서 보내지 못하였다. 저녁때 나는 잠시 집에 돌아왔다가 밤에 다시 이지의 집으로 갔다. 이사첨이 술을 가지고 와서 계화를 대접하였다. 그대로 유숙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월 24일
바람이 불었다. 계화가 여강서원에서 도곡(道谷)으로 가다가 이지의 집에 잠시 머물렀으므로 가서 만나보았다. 함께 제천댁으로 갔는데 봉길(逢吉)이 또 와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였다. 계화가 돌아간 후에 제천 표숙은 취하여 쓰러졌다. 봉길과 함께 이지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봉길이 말하기를, ‘퇴계 선생의 제자를 퇴계 선생의 사당에 종사(從祀)하려 한다면 합천(陝川)만을 어찌 단독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강(李茳)의 무리가 지난날 서울에 있을 때 박율보(朴栗甫)를 과거에 급제시켜 준다고 유혹하여 서인에 붙게 하였다’고 하였다.
1월 28일
덕우(德優)가 와서 초청하여 오시에 가 보았다. 모인 사람은 오직 판사 형·이지·대이·사첨·서숙뿐이었다. 내성 사람이 말을 끌고 왔는데, 이보다 앞서 내가 내성으로 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계화도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2월 6일
재계하였다. 계화의 편지를 보았다.
5월 13일
맑음. 밥을 먹은 후에 소회에 갔는데, 객사(客舍) 옆 한길에서 모였다. 수좌(首座)는 백현룡(白見龍)·이화(李華)였고, 모인 사람들이 사백여 명이나 되었다. 나와 황뉴(黃紐)가 공사유사(公事有司)가 되었는데, 극력 사양하였으나 마지 못하여 비로소 소임을 맡아 행하였다. 장의(掌議)는 경상우도의 생원이나 진사 중 때맞추어 온 사람 가운데에 조금도 합당한 인물이 없어서 황회보(黃會甫)와 함께 의논하겠노라고 하였다. 들으니 좌상(左相 : 이항복)은 외롭기 짝이 없고, 대신들과 대각(臺閣)과 옥당의 장주(章奏)와 상소가 잇따른다고 한다. 초사흘에 유생 육십여 명이 다시 공관(空館)을 하고 대성전(大成殿)에 곡을 하고 떠났다 한다. 성균관에서 이것을 계달(啓達)하였더니, 전교(傳敎)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한다. 승정원에서 상계(上啓)하기를, “유생들이 이미 공관을 하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신들이 무슨 얼굴로 주상의 명을 받들겠나이까’고 하였습니다.”고 하니, 비답하기를, “유생들이 배운 바가 무엇이길래 군왕을 협박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면서 군신의 의리를 모르니, 유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한다. 승정원에서 계달하기를, “청컨대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유생들을 다시 모으소서.”라고 하니, 답하기를, “그 계획은 참담하고 계사(啓辭)는 지나치다.”고 하였다 한다. 이날 나의 숙소를 방문한 사람은 친구 모모(某某) 등인데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밤에 류숙정(柳叔整)의 숙소에 갔는데, 북문 밖 나의 숙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효중(孝仲)·계화(季華)가 모두 함께 있었다.
5월 14일
맑고도 더웠다. 밥을 먹고 회소에 갔다. 모임에 도착이 늦어져서 재촉하게 하여 오시나 되어서야 비로소 일제히 모였다. 장의(掌議)는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려 하였는데 당장[腰上]에 모두가 재촉하므로, 좌도(左道)에서는 내가 영주(榮州)의 권자지(權子止)를 뽑았고 우도(右道)에서는 회보(會甫)가 이위(李蘤)를 뽑았다. 드디어 절하고 읍을 한 후에 자리에 나아갔다. 소두(疏頭)에는 김봉조(金奉祖)가 수천(首薦)으로 뽑혔는데, 계화(季華)가 소두가 되지 못한 것은 형세였다. 효백(孝伯; 김봉조)은 오늘 일직(一直)으로 가서 청좌(請坐)하지 못하였다. 서로 전하는 말에 정인홍의 당여[弘黨]들이 상소를 하기 위하여 모였는데 정인홍의 처의 말이 더욱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임자년(1612, 광해군4)
2월 8일
흐림. 고조모의 기일이어서 행소(行素)하였다. 밥을 먹은 후에 평보 형·이지·서숙이 와서 만났다. 전 형에게서 들으니, 박수의(朴守誼)가 제천댁에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서울의 재상들이 월천(月川)의 종사(從祀)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듣고, 예안(禮安)의 풍속이 모두 불미(不美)하다고 할 만하니 속히 거행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니, 제천 숙부가 그 말에 미혹(迷惑)되었다고 한다. 이 무리들이 제천 표숙을 이처럼 우롱하고 겁박하니 몹시 놀랍고 분하였다. 박수의가 당초에 송응순(宋應洵)이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관직을 제수(除授)받을 때에 월천(月川)의 고제(高弟)라고 명목을 달았다. 스승이 높아짐으로써 그도 또한 높아질 것이므로, 박수의와 김택룡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월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들을 위해 도모함으로써 세상의 중망(重望)을 취하려는 것이다.
2월 9일
바람이 불고 추웠다. 전 형이 돌아갔다.
2월 11일
맑음. 자개(子開)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강(寒岡)이 제천 표숙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하문(下問)하신 일은 공손히 별지(別紙)로 알립니다. 대개 상애(相愛)하는 처지에 감히 숨길 것이 있을 수 없지만 진실로 그 가부(可否)는 제가 감히 모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별지에 이르기를, “이미 사액(賜額)을 받았으니 마땅히 국가의 학교[國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향(從享) 같은 중대사는 계품(啓禀)을 거치지 않을 수 없으니 앞질러 스스로 독단적으로 거행하면 안 될 듯합니다. 제식(祭式)은 반드시 그것이 배향(配享)인지 종사(從祀)인지 이름을 먼저 정한 다음에야 논의하여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제천 표숙이 나에게 보내 주어서 그것을 본 후에 돌려보냈다. 한강의 편지에 담긴 말에 은연중 부족(不足)하다는 뜻이 있으니, ‘감히 알지 못한다[不敢知]’나, ‘앞질러 스스로 독단적으로 거행하면 안 될 듯하다[恐不得徑自擅擧]’는 말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강이 어찌 막대한 일을 경솔히 허락하겠는가? 제천 표숙이 김택룡의 무리들에게 우롱을 당하면서도 이 일을 주장하고, 우리 고을과 인근 고을의 선비들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그 불가함을 아는데도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욕을 당하니, 정말로 한탄스럽다. 이 일은 오직 김택룡·금경·박수의·김중청(金中淸)과, 김중청의 문도(門徒) 이립(李苙) 등, 부르짖으며 가세하는 사람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할 따름이다.
2월 13일
하루 종일 큰 비가 내렸다. 저녁때 한강이 김중청과 이립 등에게 보낸 답서를 보니, “월천을 퇴계 선생의 사당에 종향하는 것은 사론(士論)이 매우 합당하니 몹시도 성대한 일입니다. 외람되이 자문을 입었사오나 보잘것없는 제가 감히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만 도산서원이 이미 국가의 학교[國庠]가 되었으니, 계청(啓請)을 거치지 않고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사리에 편안치 않은 바가 있을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봉배(奉配)하면서 한편으로는 상달(上達)하는 것도 또한 정당한 일은 아닙니다. 제군(諸君)들은 선생의 사당에 무슨 일이 있으면 마땅히 의리(義理)를 취하여 충분히 생각해야 하니,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때문에 몇 달이나 반 년이 지연된다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을 터인데, 서둘러 하려하면 반드시 뒷날의 이의를 불러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평보 형이 어제 도산서원에 와서 베껴 보냈으므로 김(金)·이(李)의 무리들이 한강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문을 청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살펴보니, 한강 노야[寒老]가 제천 표숙에게 답한 편지와 마찬가지로 가하다고 하기에는 미진한 뜻이 있는 것 같지만, 이 편지에는 오직 계청하기 전에 종사하는 것은 마음에 편치 않다고 함으로써 종사하는 것은 허락하는 듯한 뜻이 있는 듯하다. 한강 노야는 멀리에 있으니 어찌 물의(物議)를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 편지 속에 ‘사론이 매우 합당하다[士論克合]’는 말이 있으니, 김과 이의 무리들이 필시 이 말로써 한강 노야를 기망(欺罔)한 것이리라. 원통한 것은 이 고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이 저 무리들이 이처럼 흉악하여, 막중하고도 막대한 곳을 그들이 함부로 농단하는 사사로운 장소로 만들고,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달리고 뛰어가기에 급급해 하는 것이다. 대개 이 무리들이 사론이 통일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서로 더불어 꾀를 모아 바삐 손을 써서 일을 저지르는 것이니, 이미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비록 말을 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것은 도적들의 모의가 아닌가? 스승이 높아지면 제자도 높아지나니, 이 무리들의 본래 계획은 그 스승을 위한 것이 아니요 자기들을 위한 것에 불과하니,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것을 빙자하여 이것에서 중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하물며 이립의 무리들이 퇴계 선생의 도통(道統)이 월천에게 전해졌고 월천은 중청에게 전했다고 하는 데에랴? 대개 그 전에도 이미 이런 말은 있었고, 오늘날의 이 소행은 이 같음에 불과할 따름이니, 심하도다, 소인배들의 허물이여!
2월 23일
따뜻함. 상주 형(尙州)이 와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들으니,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안동부에 달려 들어와 역옥(逆獄)의 죄인을 체포한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2월 25일
흐리고 온통 어두웠다. 류계화(柳季華)가 체포되었다니 너무도 놀랍고 너무도 경악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기별은 풍산(豊山)의 이평백(李平伯)의 아들이 대이(大而)의 집에 왔다가 말해준 것이다. 도사(都事)가 어제 저녁에 풍산(風山)에 도착하여 오늘 아침에 잡아갔다고 한다. 역옥(逆獄)은 월초에 일어났는데,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계(狀啓)로 체포되었으며, 재령(載寧) 등지(等地)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평보 형이 바로 밤에 와서 함께 탄식하고 놀라워하였다. 형이 간 뒤에 이지가 또 왔다가 밤이 되어 돌아갔다. 이 친구는 곧 심장과 폐부를 서로 내보일 만큼 절친하니 이 위급한 재난을 당하여 의당 힘을 써 주어야 했는데, 일행이 이미 출발하여 서로 거리가 썩 멀어졌고 즉각 들어서 알지도 못하였다. 누가 뒤따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물품이라도 보내어 도와주고 싶지만 이 또한 알 수가 없으니 한탄하고 한탄할 뿐이다.
들으니, 박수의(朴守誼)의 무리들이 전 형(全兄)이 지은 영주의 통문을 지칭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예안(禮安) 사람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니, 통탄스럽고 가소롭다.
2월 27일
맑음. 집사람이 대신하여 외조모의 기제사를 모셨다. 오시쯤에 이도(以道)가 와서 만났고, 이건(以健)·참(墋) 및 대이(大而)가 잇달아 도착하였다. 들으니, 계화(季華)가 체포될 때에 안동 판관이 군사를 발동하여 하상(河上; 하회)으로 가고, 도사(都事)가 계화를 잡아 칼을 씌우고 말에 실어서 차꼬를 채웠는데, 도사도 울고 판관도 울고 군인들과 보고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계화의 처자들이 울부짖으니 곁에서 보는 자들도 처참하고 애달파서 차마 말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심 우상(沈右相)이 체직된 후에 영상 이덕형(李德馨)과 좌상 이항복(李恒福)이 모두 사임하고 출사하지 않으니, 완평(完平; 이원익)으로 영상을 삼고 이 영상(李領相)으로 좌상을 삼고 좌상으로 우상을 삼았다. 완평이 한 번 임금을 뵙고 말씀을 올린 후에 즉시 집으로 돌아간 것이 지난해 추동(秋冬) 간이었다. 이후에 두 의정(議政) 또한 모두 출사하지 않아서 삼공이 공석이 된 것이 이미 오래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소문을 들으니, 역모의 변고[逆變]에 오성(鰲城; 이항복)으로 하여금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고 한다.
2월 28일
맑음. 들으니, 김백함(金百諴)의 초사에(招辭)에 스스로 일컫기를 팔도 도대장(八道都大將)이라 하였다고 한다. 김백함은 곧 김직재(金直哉)의 아들이다. 초사에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이 연좌되었는데 주상이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명하였고, 정호선(丁好善) 삼형제와 윤안성(尹安性)은 모두 초사에 연루되어 조옥(詔獄)되었다고 한다.
3월 1일
맑음. 집사람이 삭례(朔禮)를 올렸다. 들으니, 상주(尙州)의 감사(監司) 정경세(鄭經世), 교리(校理) 이준(李埈), 강응철(康應哲)이 잡혀갔다고 한다.
3월 6일
저녁때에 이지와 이건이 거인(居仁)에서 돌아왔다. 계화가 체포될 때에 그의 일가들이 처참하게 애걸하던 정상(情狀)을 들었다. 듣고 보니 가슴속이 무어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지만, 나포되어 가는 행렬이 자못 느릿느릿하다고 하니 위로는 되었다.
3월 24일
맑음. 오시쯤에 시냇가로 걸어나가 반석(磐石)의 설밭 언덕에 올라갔는데, 대이(大而)가 따라왔고 조금 있다가 참(墋)도 왔다. 저녁때 사수(士修)가 와서 만나보았다.
신언부(申彦夫)가 용궁(龍宮)에서 돌아왔는데, 중명(仲明) 형의 편지를 보았다. 대사헌과 박승종(朴承宗)이 계화의 억울함을 역설하고, 좌상과 우상 역시 진언(陳言)하였으며, 성상(聖上) 또한 꿰뚫어 살펴서 보방(保放)하게 하여, 병이 나은 후에 원정(元情)대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초여드렛날 전옥(典獄)에서 나왔다니 성은(聖恩)이 하늘 같아서 감격하여 절하였다. 다만 들으니, 감사 정경세는 그저께 또 체포되었고, 승전색(承傳色)·대전별감(大殿別監)·선전관(宣傳官)·도사(都事)가 와서 문서를 압수해 갔다고 한다. 들으매 놀라고 경악하였다.
6월 2일
아침에 잠깐 비가 오고 흐렸다. 밥을 먹은 후에 이사첨(李士瞻)이 알려 주어서 류숙정(柳叔整)이 지난달 26일에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통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 자리를 마련하고 서울을 향하여 곡을 하고 싶었으나 비편(非便)한 일이 있을까 하여 그러지는 못하였다. 숙정이 봄 어름에 계화(季華)를 따라가서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고 섭생(攝生)을 상할까 우려하였더니, 지난달 초부터 병을 얻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처참하고 애달픈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저번에 들으니, 숙정은 계화의 일로 인하여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매양 눈물을 흘려 땟국물이 낀 얼굴로 사람만 만나면 울었다는데, 필시 이것 때문에 몸을 상하여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이 친구는 뇌락(磊落)하여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악을 미워하는 강철 같은 속마음[剛膓]은 여러 친구들이 따라가지 못할 바여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것도 또한 많았다. 딸만 있고 후사(後嗣)도 없이 서울에서 객사하니, 서울의 친지며 친구들이 무명을 내어 서로 부조하였으나 필요한 분량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여서 여러 장례 도구들이 형편 없었다고 하니 더욱 원통하고 마음이 아프다. 계화가 당초에 시병(時病)으로 방면(放免)을 계달(啓達)하였기 때문에 아직 임금의 후정(厚情)을 입기 전이어서 때 낀 얼굴에 봉두난발(蓬頭亂髮)로 거의 인정의 도리를 차릴 수 없을 때에 또 이런 일을 만났으니, 계화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더더욱 한탄스럽다.
첫댓글 개암일록이 아니라 계암일록입니다.광산김씨 설월당 김부륜의 장자인 불천위 계암 김령의 40년 일기이지요.석계 이시명은 근시재 김해의 따님과 혼인하고 근시재는 계암의 6촌형(재종형)이고 22년 연상입니다.농수 김효로-둘째 아들 탁청정 김유-셋째아들 설월당 김부륜-계암 김령로 계보를 잇고 농수 김효로-첫째 아들 운암 김연-둘째아들 읍청정 김부의-근시재 김해로 계보를 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