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은 우리나라의 국군의 날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국경절이다.
중국은 3대 명절이 있는데, 우리의 설날인 음력 1월 1일 춘절(春節), 5월 1일 노동절(May Day), 10월 1일 국경절이다. 이들 연휴는 약 1주일에서 10일 정도 된다.
특히 국경절은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뚱(모택동<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날로 중국에서는 대단히 뜻 깊은 날이다.
오늘부터,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글을 연재 하려고 한다. 아울러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포인트는 문화대혁명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문혁을 기점으로 중국의 대단한 현재의 변화가 시작된다.
이제 본격적인 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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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화대혁명!!
20세기 중국은 극단의 실험으로 교차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 속에 최악의 빈곤과 최고의 번영이 공존했다.
현대중국은 마오쩌뚱(모택동<毛澤東>)의 중국과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의 중국, 이 두 수레바퀴로 이어져 오고 있다.
중국은 왜! 마오쩌뚱의 이상사회를 포기하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상징되는, 중국식 자본주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중국현대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의 오늘과 미래를 들여다보자.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은 덩사오핑 이후, 중국의 변화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이다.
개혁개방 후, 중국은 2010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매년 9% 이상, 고도성장의 중국은 번영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향후 15년내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고 한다.
이는 마오쩌뚱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지 60여년만의 일이다. 마오쩌뚱의 꿈은 그가 열망했던 사회주의방식이 아닌, 덩샤오핑의 자본주의 방식을 통해 달성됐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마오쩌뚱 시대를 추모하고 있다.
마오쩌뚱은 여전히 중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44년전 8월, 군복을 입은 마오쩌뚱이 손을 흔들며 천안문 성루에 나타난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은 마오쩌뚱을 열광하는 인파로 가득했다. 수백만 홍위병들이 붉은 깃발과 마오 주석 어록을 흔들며 열광했다. 마오쩌뚱은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다.
나치의 파시즘과 함께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비극적인 역사로 기록되는 문화대혁명, 그러나 44년이 지난 지금에도 중국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있다.
중국인들의 기억에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은 문화대혁명은 왜 발생했을까?
1949년 항일전쟁과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열강의 지배와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대한 시도가 시작된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뚱이 혁명동지들과 함께 천안문 단상에 올라섰다. 그 일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정부가 성립 됐습니다”
새 중국을 통치하게 된 마오쩌뚱은 1893년 후난성(호남성<湖南省>) 작은 농촌 샤오산(蕭山))에서 태어났다. 마오는 농촌에서 자라면서 농민들이 무었을 생각하며 무었을 바라고 있는가를 터득한다. 마오는 인색한 아버지보다, 부드러운 성품의 어머니영향을 많이 받았다.
마오가 즐겨 읽은 책은 삼국지와 수호지 같은 중국고전소설이었고, 그 후 그는 중국고대철학과 칼마르크스의 철학을 배우며 농민혁명이라는 독자적인 신중국의 이상을 형성한다.
건국 후, 마오쩌뚱이 가장먼저 착수한 일은 농촌의 토지개혁이다. 마오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고루 분배한다. 당시 중국인구의 90%는 농민이었는데, 농민들은 중국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였고, 마오가 가장 신뢰하는 계층이었다.
토지개혁에 성공한 마오는 중국전체를 완전한 공동체제도로 전환하는 인민공사실험에 착수한다.
마오에게 공산주의란, 토지의 사유를 없앰으로써 실현되는 것이었다. 수억의 농민들이 토지소유권 포기당하고 인민공사로 집단화 되었다.
마오는 인민공사제도가 농촌에서 자본주의의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마오쩌뚱이 문혁을 발동한 것은 순수한 이상 사회주의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다. 인민공사는 군중들의 창조이고, 공농상병(工農商兵)을 결합해 만든 공유제이며, 공산주의와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 이상을 품고 있었던 마오쩌뚱은 조바심 난 심정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급속히 실현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인민공사 제도와 함께 마오쩌뚱은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대약진운동(1958년)을 벌였다. 이는, 중국을 단번에 선진공업국가로 끌어 올리려는 대중운동이었다.
대약진의 발걸음으로 공산주의사회에 진입하려 한 것이다.
마오쩌뚱은 이 운동을 통해 15년 내에 영국을 뛰어넘고, 미국을 따라잡을 것을 기대했다. 국내 기반이 허약한 마오쩌뚱의 이러한 조급한 좌경정책은 큰 대재앙을 불렀다.
1958년 당시, 모든 열정을 가지고 마오와 중국인민들은 대약진에 참가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대 얼마 않돼 좌절을 겪었다. 재해와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엄청난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죽었다.
1959년 루산회의는 몇 년 뒤 문화대혁명을 예고하는 중요한 서막이다.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뚱은 대약진운동의 극좌적 오류를 수정하려 했다. 하지만 당내 원로인 펑더화이(팽덕회<彭德怀> 당시 국방부장)가 대약진의 잘못을 극렬히 비판했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의 비판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마오쩌뚱은 우익기회주의자들이 당내로 진공하고 있다며 대약진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 내일 2편 계속 --
첫댓글 저도 중국 문혁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올라오는 글에 대하여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도 되겠죠?^^;
앞으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any time!
흔적만 남기고 가요. 편안한 저녁되세요.
문화혁명의 기억 때문인지, 97년 홍콩반한 즈음을 전후해서 많은 자금들이 홍콩에서 싱가폴과 벤쿠버로 빠져 나갔습니다. 금융도시라는 홍콩은 그때부터 서서히 껍때기로 바껴가고, 점점 대륙화 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싱가폴은 반사이익으로 아시아에서 최고의 금융허브도시가 되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이곳도 일하는 인원을 점차 줄이더니, 저도 그 대상에 포함이 되었네요. 싱가폴로 가든지, 아님 미국으로 가라고 합니다. 제 나이와 현지의 업무를 근거한다면, 귀향살이 비슷합니다 ㅎㅎㅎ 유태인들 밑에서 몸팔은 지난세월이 허무하고, 방향없는 분노가 오늘 이 글을읽다, 문화혁명에 원망을 하게 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봉스팅사마~봉스팅사마도 전공에 맞게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나 동물복제,유전자복제등에 대한 글을 올려주세요~~^^;;
너무 딱딱한 내용 뿐이라 ㅡㅡ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보미님도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