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척, 유해한 세상에서
자기가 정한 방향대로 한 발 나아가는 삶
황산벌청년문학상・이효석문학상 수상 작가 이서수 신작
“볕들 날 없는 일상에서도 기어이 윤슬 한 조각을 찾아낸다”
_박상영(소설가)
장편소설 《당신의 4분 33초》로 제6회 황산벌청년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문학을 한 단계 비약시킬 중요한 자산”이라는 평을 받았던 소설가 이서수. 그는 연이어 발표한 단편소설 〈미조의 시대〉로 제22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며 독자와 문학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젊은 작가로 급부상했다. 이번에 출간된 《헬프 미 시스터》는 이서수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전작 《당신의 4분 33초》가 전위적 음악가 존 케이지를 통해 시대와 불화한 ‘이기동’이라는 인물의 삶에 집중했다면, 《헬프 미 시스터》는 삼대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플랫폼 산업과 여성 노동의 현실, 혈연과 인연으로 엮인 가족 구성원의 연대를 솔직하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약물 성범죄를 당할 뻔한 뒤 회사를 그만둔 수경, 그런 딸의 곁을 지키는 엄마 여숙, 이렇다 할 직장 없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 천식,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큰 전업투자자 남편 우재, 수경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일찍 철들어버린 조카 지후와 준후. 그리고 수경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틴챗’ 유저 은지와 수경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보라까지.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을 겪었지만, 수경의 가족은 생계유지를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플랫폼 노동에 뛰어들게 된다. 자차 배송을, 뚜벅이 배달을, 대리운전을, 그리고 여성을 위한 심부름 대행 어플 ‘헬프 미 시스터’ 일을. 이서수는 15평짜리 낡은 빌라에 사는 다섯 식구와 그 집을 오가는 두 소녀의 좌충우돌 ‘플랫폼 노동 도전기’를 통해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대신 “서로를 껴안고 구원”(소설가 박상영)해야 한다고 전한다.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단단하게 성장해나간다.
“이젠 때가 되었다. 그들 모두 정신을 차릴 때가. 네 명의 성인이 거주하는 집에서 단 한 명도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없다니…….”_본문에서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수경은 사실상 집안의 가장이다. 아버지 천식과 남편 우재는 태평하고 순진한 성격이었고, 수경과 어머니 여숙은 생활력이 강했다. 그래서 천식과 우재는 주로 집에 머물렀고―전업투자자인 우재는 안타깝게도 수익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수경과 여숙은 나가서 돈을 벌어왔다. 그들은 이 균형이 나쁘지 않았다. 수경에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진. 어느 날, 수경이 새로운 거래처와의 계약을 성사시키며 즉흥적으로 회식이 잡혔다. 그녀는 팀원들 앞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모두가 즐거웠다. 별다른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람찬 하루. 하지만 그날 수경은 모텔에서 눈을 떴다. 동료는 수경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고, 수경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잠이 들어서 모텔로 데려간 것뿐이라고. 하지만 수경의 몸에선 졸피뎀 성분이 발견된다. 수경을 업고 온 동료를 수상하게 여긴 모텔 사장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더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약물 성범죄를 당할 뻔한 수경은 매일 두려움에 시달리다 결국 회사에 사직서를 낸다.
“팀장은 어쩐지 안도하는 얼굴이었고, 팀원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긴장감과 정적이 그 순간 사그라졌다. 얼음이었던 것이다. 독극물이 가득 차 있는 얼음. 수경은 그런 존재여서 녹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동사할 때까지 품고 있을 수도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수경은 회사를 나오며 그걸 깨달았다 (……) 극복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극복이 아니라 참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다.”_본문에서
사실상 집안의 가장이었던 수경이 퇴사를 하고, 꾸준히 생활비를 보탰던 엄마 여숙마저 딸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두자 집안의 다섯 식구 중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게 된다. 그나마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는 나이인 우재마저도 경력 단절로 인해 재취업이 어려운 상황. 경력직에 지원하기엔 경력이 부족하고, 신입으로 지원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설상가상 수경은 조카 준후가 피의자를 찾아가 두들겨 패는 바람에 합의금을 물어주느라 적금까지 깬다. 하지만 누가 준후를 탓할 수 있을까. 수경은 피해자였고, 동료는 명백한 가해자였다. 하지만 모아둔 돈이 점점 줄어들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런 수경과 가족을 바라보는 보라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왜, 다들 피하기만 하는 거지?
“수경도 그렇게 생각할까. 쟤, 재수 없다고.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저러는 거라고. 아직 어려서, 고작 스물셋이라서 인생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보라는 수경이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길 바랐다.
이 투쟁은 언니, 너를 위해 하는 거야.”_본문에서
방황하던 수경은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우리 계속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상처를 빨리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려 노력하는 수경과 그런 수경을 도우려는 가족들의 이야기. 플랫폼 노동자로 살아가던 이들은 점차 다른 시작을 꿈꾼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_본문에서
21세기 여성의 노동 현실을
연대와 온기로 끌어안는 유쾌하고 진솔한 서사
문학평론가 안서현은 《헬프 미 시스터》를 읽고 “지금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해내는 것, 그리고 다양한 세대가 모인 대가족의 올망졸망한 욕망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 바로 이서수의 장기”라고 했다. 《당신의 4분 33초》부터 〈미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서수는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곳에 놓였지만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를 종이 위로 끌고 와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로 구축해낸다. 수경이 겪은 일은 여성이 21세기 노동 현장에서 드물지 않게 겪게 되는 일이다. 공포와 불안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딸을 보며 과거에 수시로 당했던 성희롱을 떠올리는 여숙처럼, 비단 약물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우리를 위협하는 사건과 사고들은 불시에 벌어지고 끝내 한 사람과 한 가정을 무너뜨리고 만다.
수경과 여숙이 자차배송 이후에 뛰어든 ‘헬프 미 시스터’는 이 소설이 전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플랫폼 노동 중에서도 여성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심부름 앱이다. 의뢰인도, 구직자도 모두 여성인 공간. 오직 여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 별의별 게 다 있다는 천식의 말에, 여숙은 말한다. “그런 게 필요한 세상이겠지.” 그렇게 수경과 여숙은 자차배송과 ‘헬프 미 시스터’ 일을, 우재는 배송과 대리운전을, 천식은 뚜벅이 음식 배달을 한다. 무너지려 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과정에서 마주하고 겪게 된 수많은 일들. 플랫폼 노동의 현실과 제도적 취약점들이 생생히 드러나며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수경과 우재만큼이나 커다란 성장을 보여주는 건 여숙과 천식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 매던 두 사람은, 무서워하던 운전도 어느새 제법 멋지게 해내고 직원의 도움 없이도 음식 주문을 거뜬히 해낸다. 이서수는 이렇게 수경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넌지시 손을 건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다그치지 말고 오히려 감싸 안자는, 그렇게 같이 무너지지 않고 함께 일어서자는, 부드럽고 따뜻한 연대와 구원의 손길을.
“그들 모두 이렇게 한마음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이 기적.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