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아포스톨로 제노의 <루치오 베로>
대본 아포스톨로 제노
초연 1766년 슈트트가르트 루드비히부르크 대극장(3000석)
배경 로마와 파르티아 전쟁 당시의 에페수스
<2015년 2월 슈투트가르트 극장 / 183분 / 한글자막>
슈투트가르트 극장 오케스트라 연주 / 가브리엘 페로 지휘 / 조시 비엘러 & 세르지오 모라비토 공동연출
루치오 베로.....로마의 장군...........세바스티안 코흘헤프(테너)
볼로제소.........아르메니아의 왕.....소피 마릴레이(메조소프라노, 바지역할)
베레니체.........볼로제소의 왕비.....안나 더를로프스키(소프라노)
루실라............로마 황제의 딸.......엘렌 슈네이테르만(메조소프라노)
플라비오.........로마의 대사...........카트리오나 스미스(메조소프라노, 바지역할)
아니세토....................................이고르 두를로프스키(카운터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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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2015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 실황 - 니콜로 욤멜리 <일 볼로제소>
역사에 묻혀 있던 오페라의 250년만의 귀환
2015년 2월,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 오른 이 작품은 거의 250년만의 귀환이다. 초연하던 1766년 경에 유럽 음악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니콜로 욤멜리는 오페라 개혁의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전작인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과 수잔나의 데이트를 위해 실제 자동차를 무대에 등장시키기까지 했던 연출가 조시 비엘러와 세르지오 모라비토는 그들 특유의 모던한 디자인과 연출을 버리고, 고전적 취향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오케스트라를 무대 앞에 배치하여 마치 무대 속의 앙상블처럼 설정했는가 하면, 성악가들은 오케스트라 피트와 관객석으로 뛰어 들어가 다양한 동선을 그려내기도 한다.
전쟁을 배경으로 연인들의 엇갈린 사랑을 그리고 있는 니콜로 욤멜리(1714~1774)의 <일 볼로제소>가 공연으로 오른 것 자체가 기적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욤멜리는 당시 오페라 개혁을 주도했지만, 어느 순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작곡가이다.
2015년 2월,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 오른 이 작품은 거의 250년만의 귀환이다. 초연은 1766년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루드비히부르크에 위치한 30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있었다.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니콜로 욤멜리는 13년 동안 비템베르크 궁전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고, 이러한 그의 존재와 작품을 통해 슈투트가르트는 유럽 오페라 개혁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되던 18세기에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서사 중 하나가 이 볼로제소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1700년에서 1816년 사이에 적어도 80개 버전의 다른 음악이 작곡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과 수잔나의 데이트를 위해 실제 자동차를 무대에 등장시키기까지 했던 연출가 조시 비엘러와 세르지오 모라비토는 그들 특유의 모던한 디자인과 연출을 버리고, 고전적 취향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오케스트라를 무대 앞에 배치하여 마치 무대 속의 앙상블처럼 설정했는가 하면, 성악가들은 오케스트라 피트와 관객석으로 뛰어 들어가 다양한 동선을 그려내기도 한다.
=== 인물 정보 === <다음 백과>
욤멜리 Niccolo Jommelli
1714.09.10 나폴리 아베르사 ~ 1784.08.25 나폴리
나폴리 악파의 종교음악·오페라 작곡가.
1737년 나폴리에서 첫 오페라 <사랑의 오류 L'Errore amoroso>를, 1738년에는 <오도아르도 Odoardo>를 공연했다. 1740년 로마로 가서 새로 오페라 2편을 제작했다. 그후 1749년 볼로냐와 빈으로 갔고 1753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악단의 악장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페톤테 Fetonte>(1768 초연)를 비롯한 최고 걸작들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반주가 있는 레치타티보(recitativo acompagnato)를 자유롭게 사용했고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의 전통을 과감히 벗어나면서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을 예견했으며, 실제로 '이탈리아의 글루크'라고 불리기도 했다. 마지막 작품인 2성부를 위한 <미제레레 Miserere>는 죽기 바로 전에 완성한 곡으로 오랫동안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서곡 양식은 요한 슈타미츠의 초기 교향곡들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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