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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이 포착한 서애의학(西厓醫學)의 통서(統緖)와 사회적 가치
글쓴이 김학수 / 등록일 2024-01-29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의약(醫藥)은 위생(衛生) 차원에서 몹시 중시되었고, 이른바 도학군자 중에도 이 분야에 깊은 조예를 지닌 이들이 많았다. 아래 16세기 조선의 대유 이언적(李彦迪)과 그 아들 이전인(李全仁)의 대화는 의학과 약학이 말업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를 웅변하고 있다.
네 병이 이와 같은데 어찌 의학(醫學)을 배우지 않느냐? 너의 생각에는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으니 의약(醫藥)이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오로지 명에만 맡기는 듯 한데, 의약이 성인이 만들어 낸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는 구나. … 사람은 반드시 의학을 알아야 한다. 의학을 아는 것도 궁리(窮理)의 일인 것이다.(李全仁, 『 關西問答錄』)
이언적은 의학이 선택이 아닌 지식인의 필수 지식임을 강조했고, 심지어 그것을 궁리(窮理)의 영역으로까지 끌어들이는 적극성인 태도를 보였다. 그에게 의약은 결코 말업이 아니었음을 뜻했다.
선조∼광해군대 영남의 대표적 학인이었던 이석간(李碩幹)․정구(鄭逑)와 류성룡(柳成龍) 또한 의학에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류성룡은 이천(李梴)의 『 의학입문(醫學入門)』의 요점을 정리한 편저 『 의학변증지남(醫學辨證指南)』을 남길 만큼 조예가 깊었다. 그의 의학적 관심은 문인 정경세에게 영향을 미쳐 상주의 민간의료 시설인 존애원(存愛院)의 설립을 이끌었고, 의학적 전문성은 생질 이찬(李燦, 1575-1654)에게 전수되어 17세기 보건인프라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성호는 류성룡에서 이찬으로 이어지는 서애의학의 지식계보적 스토리를 『 성호사설』의 지면을 빌어 이슈화 했고, 이 정보는 영남학의 실학적 요소를 진단하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어느 날 류성룡이 자제들을 모아 대담하는 과정에서 숯불을 진흙에 던지자 서로 부딪혀 소리가 났다. 이 때 류성룡이 좌중을 향해 소리가 나는 이치를 물었다. 그러자 말석에 앉아 있던 이찬(李燦, 1575-1654)의 대답은 외숙 류성룡의 귀를 의심케 했다.
서애 선생이 하루는 그 자제들과 같이 앉았다가 숯불을 진흙에 던지니, 불과 불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일어났다. 선생이, ‘이것이 무슨 이치인지 알겠느냐?’ 하자, 그의 생질 이찬(李燦)이 ‘습기가 성하면 복통이 생기는 이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은 즉시 책장에 있는 의서(醫書)를 모두 주었는데, 후일 이환의 의술은 온 나라에서 으뜸이 되었다.(李瀷, 『 星湖僿說』卷15, 「人事門」 <腹痛>)
그랬다. 류성룡은 의학에 조예가 깊었기에 생질 이찬의 한마디 대답에서 그 자질을 발견했던 것이고, 즉석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의학 서적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찬은 외숙의 당부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시대가 주목했던 유의(儒醫)로 성장하였으니, 서애학의 갈래는 다양했고, 그 통서(統緖)는 면면했다.
이찬은 치병에 있어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때와 장소를 불문했다. 이런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은 생민의 하찮은 목숨까지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던 류성룡의 임관 자세와도 상통한다. 이런 가운데 그의 명성은 고을을 넘어 국중에 파다해졌고, 윤선도(尹善道)‧강학년(姜鶴年)‧이원진(李元鎭)과 함께 17세기 중엽 조선을 대표하는 유의(儒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1632년 6월 대비의 환후가 깊어졌을 때 입진 대상으로 천거되는가 하면 1634년에는 내의원의 의원들과 함께 인조의 치병에도 참여하는 등 그 명성을 조야에 떨쳤다.
이찬의 닥터(儒醫) 인생에서 포착되는 흥미소는 따로 있다. 그 자신은 비록 유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17세기 사상계의 대유를 살려냄으로써 한국유학사의 무대에서 빛나는 조연 역할만큼은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송시열의 대척점에서 조선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통유(通儒) 백호 윤휴(尹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때는 1631년, 당시 조선은 후금(淸)의 침략 우려로 인해 인심이 동요하고 국정이 매우 불안했다. 겨우 15세에 지나지 않았던 윤휴는 어머니를 모시고 보은 삼산(三山)의 외가로 피신했다가 그만 괴질(怪疾)에 걸리고 만다. 백약이 무효인지라 낙심한 끝에 그가 찾은 사람이 바로 용궁 땅에 살고 있던 이찬이었다.
15세 되던 신미년(1631)에 상복을 벗었다. 이 해에 오랑캐의 경보(警報)가 있었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보은 삼산(三山)에 갔었는데 괴질(怪疾)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이때 영남에 이찬(李燦)이란 사람이 의원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공이 그에게 가서 병을 치료하며 오랜 뒤에 돌아왔다.(尹鑴, 『 白湖全書』附錄 卷2, <行狀>)
윤휴가 이찬에게 오랜 기간 동안 치료를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모종의 난치병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어쨌든 윤휴는 이찬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여 학자로서 굴기하였으니, 용궁 땅에서 난망의 은혜를 입은 것은 분명했다. 이처럼 이찬은 학문과 경세 역량을 겸한 대유 윤휴를 괴질로부터 구해 조선의 문명성을 고양하게 했으니, 그의 의술은 여기(餘技)가 아닌 서애학이 배태시킨 사회적 자산이었다. 이것이 성호가 사설(僿說)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요체인 것이다.
글쓴이 :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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