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예수님은 누구신가” 민로아 선교사 이야기
[민노아 선교사 (Ⅰ)]
충북의 첫 선교사 민노아 목사가 지은 찬송 “예수님은 누구신가” 를 다시 들으며
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lIazaAAJw34
요즈음 유튜브 동영상으로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찬송가에 관한 영상이 많이 유포되고 있다. 지난번(2016. 4. 18) 중부명성교회에서 열린 “충북노회 설립 70주년 기념예배” 때에도 낯선 한국 땅에 도착한 선교사 부부 이야기, 곧 민노아 선교사 부부이야기가 동영상으로 소개 되어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충북 지방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교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민노아(閔老雅, 밀러, Frederick Scheiblin Miller, 1866~1937) 목사이다. 본명이 밀러(Miller)인 그는 초기 미국 북 장로회 청주선교부의 선교사로, 충북 선교의 개척자이다. 1866년 12월 10일 미국 펜실바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의사인 아버지(W. M. Miller)와 어머니 수산 워커(Susan Walker) 사이에서 태어나 1889년 피츠버그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1892년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그는 1892년 11월 15일 부인 안나 라이네크(Anna Reinecke)와 함께 복음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3년 1월에 선교부 회의에서 언더우드가 설립한 “예수교학당(현 경신 중․고등학교 전신)”의 제3대 학당장으로 임명되어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1894년의 서울 연동교회 창립에도 기초를 닦은 선교사다.
후에 민노아 목사는 장로교의 발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1900년에 김흥경(金興京) 조사와 함께 청주 시장에 들러 노방전도를 했다. 그리고 그는 청주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심하고, 선교부의 승인을 얻어 1904년에 가족과 함께 청주로 내려왔다.
1904년, 청주에 도착하여 1937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민노아 목사는 충북 선교의 아버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청주선교부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청주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청남학교 등 근대학교를 세워 충북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많은 전도지와 소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면서 문서선교에 힘썼다.
민노아 선교사는 문학과 음악에 재능이 있었기에 초기에 찬송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때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기도 하고 손수 작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문학가, 음악가로서 약 40여 편의 곡을 한국어로 번역해 내었는데, 그 중 『찬셩시』(1905년)에 그의 번역 및 창작시 25편이 수록되었고 《챤숑가, 1908》에도 실렸는데, 그 중 다음의 5편은 번역이 아니라 그가 한국어로 지은 창작 찬송이며, 이 찬송들은 100년 동안 변함없이 사용되어 현 21세기 찬송가에도 그대로 실려 애창되고 있다. 그 5편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맘 가난한 사람”(427장),
“예수 영광 버리사”(451)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
이 5개의 찬송가는 충북 선교의 대부, 민노아 선교사가 작사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신가’ 의 가사가 태어난 배경을 보면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민노아 선교사는 1892년에 아내와 함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만을 안고 낯설고 척박한 한국 땅을 밟았다. 미국에서 갓 결혼하여 낯선 한국 땅에 왔는데, 내내 자식이 없어 쓸쓸하였다. 자식을 기다리고 있던 중 입국 6년만인 1898년 11월에 첫 아들 프레드 밀러가 태어났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한국의 열악한 환경과 위생에 적응하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과거 별장이었던 양화진에 아들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는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이국땅에서 자식을 보낸 그 아픔이 사라져 가려 할 때 쯤, 둘째 아들을 임신하게 되었다. 그 부부는 다시 소망가운데 나날을 보내었다. 10달 동안 배속에 품고 기도하며 자식이 세상에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중 1902년 3월에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루 만에 하나님이 그 아이를 데려가셨던 것이다.
둘째 아들을 잃은 떠나보낸 아픔을 당한 지 1년 뒤인 1903년 6월 17일, 그의 사랑스런 아내가 38세의 일기로 또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이었다.
조선 땅에서 두 아들과 아내를 잃어버린 모든 일을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은 민노아 선교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이 전하는 예수가 누구기에 이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조롱 반, 위로 반이 섞인 어조로 민노아 선교사에게 질문한 것이다.
주변의 조소와 물음에 민노아 선교사는 응답대신 찬양을 지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현행 찬송가의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①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 없는 자의 풍성, 천한 자의 높음, 잡힌 자의 놓임, 그리고 우리 기쁨
②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 눈먼 자의 빛, 병든 자의 고침,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우리 생명
③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淨)함, 죽을 자의 생명, 죄인들의 중보, 멸망자의 구원, 그리고 우리 평화
④ 예수님은 누구신가? 교회의 머리, 온 세상의 구주, 모든 왕의 왕, 심판하실 주님, 그리고 우리 영광
이렇게 예수님의 속성을 ‘20가지’로 요약하여 경쾌한 행진곡풍의 곡조에 맞춰 찬송을 지어 불렀다. 자신의 슬픈 감정이나 어려움을 참아 보이거나 해명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로 표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였다. 예수님의 속성이 어찌 스무 가지 뿐이랴. 설명하려면 한이 없겠으나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민노아 선교사의 신앙관과 예지에 감탄할 뿐이다.
이 찬송의 곡조는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철학가요 교육가인 장 자크 루소(Jean J. Rousseau, 1712~1778)의 곡이다. 그는 『사회 계약론』 『에밀』등을 지어 프랑스 혁명과 낭만주의에 영향을 준 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한편 성당 부속 음악학교에 들어가 음악을 공부하여 이 분야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5편의 오페라와 100여곡의 가곡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는 96장의 곡조는 그의 오페라《마을의 점쟁이》(The Village Soothsayer, 1752)에 나오는 행진곡이다.
장자크루소의 곡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외에 54장 “주여 복을 비옵나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많이 불러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의 곡도 바로 이 장 자크 루소의 곡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의 작사 배경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하다. [필리오, 전순]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xkislBtMnSA
[민노아 선교사 (Ⅱ)]
“내가 죽으면 나의 시신을 청주에 묻어다오”
민노아 목사는 청주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심하고, 선교부의 승인을 얻어 1904년에 가족과 함께 청주로 내려왔다. 1904년, 청주에 도착하여 1937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민노아 목사는 충북 선교의 아버지로 충북지역 복음화에 헌신적이었다.
충북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친 민노아 목사는 가정적으로 순탄하지 않아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 첫 부인 안나 라이네크가 한국 선교를 시작한 지 11년째 되는 1903년에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자, 그 이듬해에 정신여학교 교장인 도티(Susan A. Doty) 여사와 아내로 맞아 함께 청주로 왔다. 그러나 1931년 안식년이 되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체류 중 두 번 째 부인을 캘리포니아에서 사별하고 청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1932년에 청주선교부 선교사이며 정신여학교 교사인 딘(千美禮, Lillian Dean)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딘 여사는 충북 사람들에게 천미례 또는 민미례(閔美禮)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1930년 충북 여전도회 연합회 조직을 발기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36년까지 계속 회장을 역임하면서 교회 여성들의 선교 교육 봉사 활동을 통한 선교 여성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앞장섰으며 해방 후 청주로 다시 돌아와 한 때 충북노회 재건에 힘썼다.
일생을 충북 복음 선교에 헌신한 민노아 목사는 충북 지역의 선교에 착수한 지 36년만인 1936년 12월에 70세 정년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필리핀과 중국의 남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1937년 10월 6일 향년 71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첫 번 째 부인 안라 라이네크(선교사 묘지 제1묘역 사-16)가 있고, 아들 프레드(제1묘역 사-17), 둘째 아들 프랭크(제1묘역 사-18)가 잠들어 있으나, 그는 “내가 죽으면 청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었기에 양화진으로 모시지 않고, 금천동 산 42-2번지, 청주 시내가 잘 보이는 곳에 안치하였다. 그 후 충북노회는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금천동 야산에 있던 선교사 묘지에서 일신학원 구내로 이장하고, 그곳에 선교기념비를 세워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그의 비문에 “주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오늘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죽어서도 계속 일깨워 주고 있다.
올해는 2016년, 그의 탄생 150년 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가 일생 몸담고 있던 청주제일교회 자리는 1866년 천주교 대 박해(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터였고, 그 자리에 교가 우뚝 서게 되었다는 데서, 그는 생존 시에 1866년의 천주교 박해와 자신의 출생을 오버 랩 시키어 늘 의미 부여하며 더욱 복음화에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글쓴이 : 전순동
출처 : http://cafe.daum.net/70years.cb/Ks9S/19?q=%B9%CE%B3%EB%BE%C6%20%BC%B1%B1%B3%BB%E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