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역관(譯官)들의 학습 및 역과시용(譯科試用)으로 간행된 몽고어 회화책이 바로 몽어노걸대인 것이다. 이 책은 현재 8권 8책으로 남아있으며 목판본이고 조선시대의 사역원에서 간행되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몽골어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여 고려 충렬왕 2년인 1276년 학사 김구가 "설인(舌人)들이 미천한 출신으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빈번함"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설인은 통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치 혀로 먹고사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어 김구는 정부내의 행정기관으로 통문관을 설치하여 대궐 안에서 근무하는 40세 미만의 하급 문관들이 외국어를 배워 질적 수준을 높이자는 뜻에서 건의를 하였다.
여기서 주된 외국어는 당연히 몽골어였다. 당시는 중국을 지배하는 국가가 바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였던 것이다.
이 통문관이 나중에는 사역원을 바뀌게 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몽골어가 꾸준히 학습되고 이를 바탕으로 몽골어 역관이 계속적으로 배출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즉 1394년 11월에 사역원 제조 설자수가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사역원 제도의 개선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 여기에는 몽골어 학습과 관련된 제반 규정이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 당시 몽골어 학습과 역관 배출이 계속되어 진 것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설장수는 통역관들이 대부분 미천한 출신이라 믿을 수가 없으니 사대부 자제들로 하여금 역관이 되게 해야 한다는 건의는 그만큼 몽골어등 제반 외국어 전문 통역사들의 질적향상을 부르짖은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몽골어와 형제어나 다름없는 여진어 과정도 사역원에 세종 8년에 즉 1426년에 개설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실록과 경국대전에 몽고어 "노걸대"의 서명이 등장하는 사실로 미루어 조선 초기부터 몽고어 학습서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처음에는 중국어 학습서로 시작하여 편찬 간행된 유명한 어학교재인 "노걸대"를 텍스트로 하는 교재에 기존의 몽골어를 번역한 책이 나온 것이다. 즉 노걸대의 판본을 몽고어로 번역한 것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1598년에는 임진왜란이 끝이 난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역원이 개편되고 역관들이 보는 책들에 대한 전반적인 정비작업이 병행되었다.
이는 각종 전란으로 책이 불타고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일어난 호란은 더욱 인근 외국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었다.
병자호란이 끝이 난 그 다음날인 인조 15년 즉 1637년 2월 1일자 기사를 보아도 알수가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이 아직도 도성에 있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말하니 청나라의 장수 용골대는 즉시 부하로 하여금 몽골 군사들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게 하였다."
이들 몽골인들은 청나라 군대와 함께 당시 조선을 침공한 병사들이었다. 이처럼 여진족과 몽골족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서로 형제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즉 몽골족이 융성하여 원나라를 세웠을때 당시 고려의 근방국가인 여진족은 몽골족에 협조하여 고려를 침공하였고 이번에는 여진족이 융성하여 청나라를 세월을때 이번에는 몽골족이 협조하여 같이 조선을 침공하였던 것이다.
몽골족과 여진족은 서로 국경의 경계가 없었고 서로 일어나면 한쪽에서 협조를 하여 같이 들고 일어나는 식이었다.
따라서 말타고 오고가는 친족 관계의 민족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몽골은 좀더 당시 조선에서 떨어져 있었고 여진족은 바로 조선의 인근 국가로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던 민족이었을 뿐이다.
여진족은 함경도에서 요동반도에 위치한 민족이었고 몽골족은 여진족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북만주에 위치한 민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관계로 조선은 여진족도 무시를 할 수가 없었고 또한 몽골족도 무시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몽골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통문관지 권 2 및 권 8의 기사에 의하면, 과거에 사용되던 책은 전란, 즉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중에 소실되고, 새로 번역된 노걸대가 숙종 10년인 1684년부터 역과시험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외국어 중시정책은 조선의 치세 후반기 들어 더욱 가시화 되었다.
즉 청나라는 사대국으로 모시는 형편이었지만 몽골족은 항상 두려움을 갖고 대했던 민족이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1732년 영조 8년 2월 13일 기록에 지평 남태량의 상소문에서도 알수가 있다.
그는 몽골의 흥성과 관련하여 역관들의 몽골어 실력의 미흡함을 우려하는 내용으로 기술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1737년 영조 13년 5월 14일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몽골족의 발흥과 관련 역관들의 몽골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였고 역관 이찬경이 새로 편찬한 몽골어 어휘집을 칭송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이는 아마도 몽어유해가 이찬경하고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추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김재로는 다음과 같이 당시 몽골어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몽골은 종류가 가장 강성하여 실로 다른 날의 깊은 우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에 통역관이 몽골의 글을 읽어 익힌 자도 몽골 사람을 만나면 전혀 언어가 통하지 못합니다. 지난해 역관 이창경이 연경에 갔을 적에 몽골 사람과 서로 언어를 질정하여 책을 만들어 가지고 왔고, 요즈음 다시 청문문감을 얻어 왔으니 이제부터는 몽골어를 통달하여 해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사역원 제학의 예에 의거하여 몽학총민청을 설치하고 권과하여 강습하고 잡과에서 시험하여 뽑도록 하소서."
이런 좌의정 김재로의 건의에도 몽학총민청은 설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신하들의 불가함이 통했던 것 같다.
또한 같은 해에는 역관시험 책이 "몽어노걸대"를 비롯한 5권에서 "첩해몽어"로 바뀌었다. 따라서 첩해몽어는 1737년 이전에 만들어 진 것임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영조 17년인 1741년에 몽어노걸대가 이최대(李最大) 등이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안명설의 서문이 있다.
다만 영조 33년 1757년 11월 3일에 영조는 몽골에 대한 두려움만 표시하였다.
"중원은 회복할 기약도 없고 몽골인들의 세력이 점점 번성하여 가니 나는 진실로 그것을 근심하는 바이다. 어찌하여 경들은 목전의 계획만 생각하고 후일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1766년 몽어노걸대는 이억성(李億成)이 수정한 것을 사역원에서 간행하였다. 이억성은 이 책에 몽문발(蒙文跋)이라는 글을 적어 놓았던 것이다.
정조 10년 즉 1786년 4월 22일에 이복원의 이런 주청이 있었다.
"역관중에서 한어와 청어를 잘하는 사람이 물론 드뭅니다만 몽골어를 통역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말이 아닙니다. 당장에는 비록 긴급히 관계된 일은 없습니다만 이왕 그 방면의 학교를 설치하였으니 이처럼 실효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배울 책이 원래 매우 빈약하고 또 많이 산실이 되었다고 하니 앞으로 사신이 갈 때에 몽학의 서적을 찾아 구입해 오고 몽역과 몽골 사람과의 대화하는 방법도 유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살펴서 지휘하는 책임은 오로지 사신에게 있으니 이로써 신칙하소서"
정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만 보더라도 특히 몽골어를 배우는 기관을 설치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사역원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하여튼 몽골어를 시급히 보완하고 정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인식은 있었던 것이다.
18세기말 정조시기는 역관들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노걸대와 각종 외국어에 관한 책들이 나왔다.
다시 1790년 즉 정조 14년에는 방효언(方孝彦)이 몽어노걸대를 첩해몽어 및 몽어유해와 함께 수정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현존하는 "몽어노걸대"는 방효언의 수정본들인 것이다. 이 책은 각 면 7행으로 각 행에는 왼편에 위구르(Uighur) 몽문자(蒙文字)로 몽고어 문장이 쓰여 있고, 오른편에 한글로 발음이 표시되어 있다.
각 문장 혹은 각 절의 아래 국어 역문(譯文)이 붙어 있다. 조선 전기간에 걸쳐 간행된 각종 언해본역학서(諺解本譯學書)의 전형적인 체재이다.
현존본들은 모두 방효언의 수정본으로 보인다. 몽어노걸대의 몽골어는 기본적으로 17, 18세기에 정착이 되고 보급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내몽고(內蒙古)에서 사용되는 몽고어 문어(文語, 혹은 고전몽고어)와 유사하다.
하지만 말도 당시의 구어적 요소(口語的要素) 혹은 현대 몽고어와 동일한 형태도 많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한글로 표기된 발음부호는 몽고문자 표기와 다른 구어체가 상당수 눈에 띈다. 예를 들면, 몽문자로 ‘-yi’로 표기된 대격조사(對格助詞)가 현대몽고어음과 같은 ‘기’로 시종일관 표시되었다. 이런 성격 때문에 18세기 몽고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출처:https://blog.naver.com/maenam111/90042747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