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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사역과 성경해석의 검증기준은?
(고전 4:3-6)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대한 해석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수많은 사역들을 행하고도 주님께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수많은 설교들을 선포하고도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심판받고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신 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계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사역과 올바른 성경해석의 검증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1.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 그리고
2. 성경자체의 문맥(context)입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하나님)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사역과 성경해석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검증하고 확증해보려면, 그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으로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딤전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무엇이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해 가는 마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아도 질병과 질고와 자연재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만일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알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일은 그 어떤 것 하나도 행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정확하게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사역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연재해와 연관된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곤히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면서 부르짖었습니다.
(막 4:36-38)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막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 부분에서 문맥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광풍을 꾸짖으실 때 그는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을 꾸짖으신 게 아닙니다. 마귀의 일을 중지시킴으로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광풍으로 인한 바다의 풍랑은 사탄이 일으킨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악한 세력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8:18-34, 막4:35-5:20, 눅8:22-39의 세 가지 본문 모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거라사지방의 악한 군대귀신들린 자를 찾아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그를 자유하게 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배를 타고 가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거라사지방의 군대귀신 들린 자가 먼저 예수님께로 달려나와 예수님을 알아보며 자신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실 것을 간청하는 일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군대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자체의 문맥으로 볼 때 바다에 일어난 그 광풍은 예수님의 그 사역을 방해하려는 사악한 군대귀신들의 장난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사악한 군대귀신들의 장난을 대적하여 꺾어버린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자연정화를 위한 풍랑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어성경과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다고 매우 자신하시는 어떤 목사님께서 원어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똑같은 사건인 마태복음14장(?사실은 8장)의 기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황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투브에 올려진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녹취하여 소개해 봅니다.
여러분! 마14장(?)에서 풍랑 이는 바다 위의...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라...(마8:26-녹취자 註)”에서 “꾸짖다”는 단어를 풍랑 이는 뒤편에 있는 귀신을 꾸짖는 것으로 보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웠어요. 그럴 법도 해요! 한글성경으로 보면 야단치는 것 아니에요?... 그러나 “꾸짖다”로 번역된 단어 “에피티마오”는 “에피테메쏘”입니다. “에피”는 “about ~에 관하여, 대하여”이고 “티마오”는 “deserve 가치를 인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직역을 해 볼게요.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바다와 바람을 보시고 일어나서 그 가치를 인정하시면서 ‘그만하면 됐어!’ 하시니 잠잠해졌더라.” 원더풀!(Wonderful!)입니다. 이것이 오케이!(O.K!). 아주 우리 마음을 너무 행복하게 만드는 구절이에요! 여러분 풍랑이 안치면 밑에 있는 식물들, 바다, 해초들, 물고기, 다 죽잖아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거 창조의 법으로 풍랑을 치라고 만들어 부은 거에요! 근데 창조주 하나님이 풍랑 친다고 야단치면 됩니까? 안됩니다! 안되죠! 그러니까 “에피티마오” 그 가치를 인정하시면서 “애들아 됐어!” 하니까 잠잠해진 거에요!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이럴 때 쓰라고 둔 거에요...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 번역입니까? 여러분들이 어디 가서도 이런 얘기 못 들어 보셨을 거에요... 너무 안타까운 게 참 많지요? 어째든 여러분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신령한 것이 아니라 악령적인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성경이 가장 신령한 것입니다. 성경을 신뢰하고 성경이 지시하시면 성경대로 따라가시면 됩니다. 성경이 곧 길입니다. 길을 벗어나면 우리는 떨어져 죽습니다. 저는 천 마디의 말이나 그리고 누구의 어떤 말도 저는 존경하고 그분의 지식을 존중하지만 성경과 빗나가면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길입니다. 도를 잘 따라가셔서 주의 나라 도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상과 같은식의 성경해석과 적용에 대한 결론적인 평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분이 선포하신 이와 같은 설교야 말로 우리를 매우 안타깝게 만드는 매우 잘못된 성경해석과 적용, 성경의 진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오히려 성경의 메시지와 정반대되는 매우 어리석고도 위험한 설교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설교를 낱낱이 구구절절 장황하게 인용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저는 이상과 같이 말씀하신 분을 개인적으로 공격하거나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어떤 분이 단지 성경의 원어를 알고 있다고 해서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확증한다는 보장도 될 수 없고,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의 설교가 성경의 진리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수하고도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라는 확증도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성경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상기한 바 대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들을 정확하게 보고 듣고 그 기준으로 모든 것들을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딤전6:3-4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일예로 질병을 통화성화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육체에 가시, 드로비모, 에바브로디도, 디모데 등등의 예를 들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잘못된 주장들을 펼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편협된 주장들입니다(http://cafe.daum.net/gvlove0691/K3nD/854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병든 자들의 모든 병을 다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마8:16-17).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온전하신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요5:30,36,요6:38). 그렇기에 질병을 통한 성화사상이 잘못되었음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읽고 보되 전체 문맥의 흐름 속에서 읽고 보아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성경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확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신 것은 맞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들에게조차 생명을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런 위험하고도 악한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혼구원사역을 위하여 호수 건너편 거라사지방으로 가는 전도의 여정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정화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본문 속에 등장하는 광풍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광풍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설명과 같이 성경자체의 문맥이 그 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자체의 문맥입니다.
앞에서 잠깐 설명드린 바와 같이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8:18-34, 막4:35-5:20, 눅8:22-39의 세 가지 본문 모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거라사지방의 악한 군대귀신들린 자를 찾아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그를 자유하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배를 타고 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거라사지방의 군대귀신 들린 자가 먼저 예수님께로 달려나와 예수님을 알아보며 자신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실 것을 간청하는 일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 군대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 일어난 그 광풍은 예수님의 그 사역을 방해하려는 군대귀신들의 장난이었고,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의 장난을 대적하여 꺾어버린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자연정화를 위한 풍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헬라원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도 문맥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단어가 “에피티마오”입니다.
“비난하다, 꾸짖다, 견책하다” 라는 기본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동사 에피티마오는 에피(ejpi,1909: 위에 on, upon)와 티마오(timavw,5091: 가격을 정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헤로도투스 이래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a)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영예를 주다'(Hdt. 6. 39).
(b) '~의 값을 올리다'(Dem. 918, 22).
(c) '비난하다, 견책하다, 벌하다'(Thuc., Xen., Plato등).
보시는 바와 같이 “에피티마오”는 물론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영예를 주다,”라는 의미가 있기에 상황에 따라서 “~의 가치를 인정하다”라는 해석을 할 수도 있는 단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의미는 그 단어의 전후문맥이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성경해석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원어실력보다 문맥을 볼 수 있는 실력이 더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어느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자체의 문맥을 놓치고, 성경의 진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를 주장하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경원어를 이용하는 수준에서의 해석과 적용이었기에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성경해석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분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19세기에 활동하였던 존 알렉산더 도위(John Alexander Dowie)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대단한 신유사역의 열매들을 드러내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일화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는 대서양을 14번 횡단했는데, 매번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나는 배의 갑판에 올라서서 폭풍에게 명령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폭풍은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때마다 폭풍이 그쳤습니다.”
도위 목사님은 그의 전도항해를 방해하는 폭풍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였고,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 되었을 때 파괴적인 자연의 힘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질병과 질고 그리고 자연재해 등과 연관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정확하게 잘 대처하려면 예수님의 사역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한 번도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한번은 나병환자 한 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절하며 말했습니다.
(마 8:2)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들아,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기적을 행하신단다. 하나님의 섭리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이란다! 인간의 유한한 머리를 가지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니? 하나님은 너의 고통에 어떤 목적을 두고 계시단다. 그저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열매를 맺게 될 거다.” 라고 하셨습니까?
“봐라. 하나님이 너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시고, 너에게 어떤 훌륭한 영적교훈을 주시기 위해 이 질병을 너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니 인내로서 잘 견디고 영적인 교훈을 얻도록 하여라. 그러면 혹시 하나님이 결국엔 너를 고쳐주실 거야!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말이다.”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와 같은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따위 종교적 전통의 말을 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자기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I am willing, Be clean!’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할렐루야!!! 이 말씀은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지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도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자를 치유하신 기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누가 그 여자를 질병으로 묶어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이 그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요14:9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연구할 때 예수님의 그 말씀 까닭에 질병과 질고가 하나님아버지로부터 온다는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믿는 자들에게 주신 명령도 치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질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것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막 16:15-18)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가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질병과 질고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질병과 질고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질고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역으로 점검하지 않고, 질병을 통한 성화사상과 같은 사람의 교훈과 종교적인 교리를 그냥 받아들임으로 질병과 질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으려면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막 11:23-24)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만일 우리가 치유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치유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질병과 질고 그리고 치유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그 어떤 질병도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치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 53:4-5)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 2:24-25)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막 11:22-24)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원어직역, =성경적인 믿음을 가지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기 위하여 19C중엽 미국 치유의 아버지라 불렸던 에단 O 알렌의 치유간증을 실예로 소개해 봅니다.
미국의 ‘치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단 O. 알렌은 치유를 위한 최초의 전임 순회 사역자였습니다. 50년 동안 알렌은 미국의 동부를 돌며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치유를 가르쳤습니다. 1846년 알렌은 감리교 집회에서 그의 폐결핵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그의 간증을 소개해 봅니다.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나는 내가 충분한 믿음을 보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가 나를 치유하실 거라 믿게 되었다...
나는 주님 앞으로 나의 질병을 가지고 나아갔고, 마치 주님이 내 바로 앞에 서 계신 것처럼 나의 구세주 되신 주님을 꽉 붙들었다. 나는 내 몸에 있는 질병에 대해 이야기했고, 주님은 나를 도우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는 주님의 약속을 선포했고, 바로 그 때 놀라운 축복이 임했다.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다.
“나는 치유 받았다. 나는 치유 받았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탄이 주님의 역사를 방해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진통이 느껴졌다. 내가 치유 받았다는 사실을 여전히 외치는 중에도 진통은 잦아들지 않았다. 진통 가운데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느끼는 고통과 상관없이 치유를 받았다고 입으로 선포했다.
한 걸음을 떼자 진통이 느껴졌다. 사탄이 이렇게 유혹했다. “오히려 전보다 고통이 더 심해지지 않았느냐” 하지만 나는 외쳤다. “고통에 상관없이 나는 나의 치유를 확신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고통아 물러가라! 나는 치유 받았다!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그 때 모든 진통과 고통이 떠났고, 어느 때보다도 큰 기쁨이 내 안에 넘쳤다.
알렌이 치유를 얻은 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포했고, 자신의 치유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고 자신이 믿음으로 치유를 얻었다는 성령의 증거로 인한 확신이었습니다. 고통과 상관없이 자신의 치유를 확신한 알렌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심한 통증이 찾아왔지만, 알렌은 자신의 치유를 선포했고, 오히려 자신의 몸에서 통증이 떠나가라고 사탄과 통증에게 명령했습니다.
알렌은 성화를 얻는 믿음에 대한 감리교의 가르침을 치유의 문제로 적용시켰습니다. 자기의 육신의 상태가 아닌 성령의 증거를 의지하여 선포했습니다. 이것을 “감각의 부인”(sensory denial)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과 신앙 치유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알렌은 감리교 전통을 따라 치유를 받은 사실에 대한 고백을 강조했습니다.
다음 주일 모임 때 받은 치유에 대한 고백을 거의 잊고 있던 찰나, 옆구리의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통증이었고, 마음의 부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입을 열어 경험한 사실을 간증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통증은 깨끗이 사라졌다. 주님이 나를 용납하셨고, 나를 인정하셨다는 사실이 정오의 빛처럼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이러한 원리에 대한 알렌의 생각은 헌신과 믿음, 고백으로 성결을 얻는다고 가르친 푀비 팔머의 직간접적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헤스터 앤 로저스와 존 플레처와 같은 이전 감리교도들의 가르침을 좇아 팔머 역시 성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고백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생각은 1846년 당시 감리교의 일반적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 Joe McIntyre, <E.W. 케년과 그가 전한 믿음의 메시지>, (서울: 베다니출판사. 2011), pp.110-112.]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진리대결
첫댓글 내 평생 불러야 할 이름 예수~! 그 이름을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요17:11~12).
아멘!!!
성경해석에서 예수님을 중심에서 놓쳐버리니깐 엉뚱한 해석이 생겨나는 듯 합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나의 설교에서 생기지 않도록 오직 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겠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선포 합니다
아멘!!!
성경을 원어적으로만 보는 습관과..
질병을 통한 성화사상에 대한 카운터펀치였어요.!!
너무 통쾌하고도 뻥 뜷리는 메세지였습니다.ㅠ.ㅠ.!!
믿음으로 붙잡고 돌파하겠습니다.!!ㅠ.ㅠ.머나먼 타교인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확 느껴지네요!!
귀한 메세지를 저만 볼수 없어서 블로그에 스크랩하며 블로그 놀러오는 모든 사람들로 자유함을 입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라파!!!^^
그렇게 되시기를 존귀하신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선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 할렐루야 ! 감사감사합니다!
분별에 더욱 더 도움 주심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