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스 5 - 고린토스 시내 코린트만을 구경하면서 코린토스 운하를 생각하다!
2024년 4월 30일 크레타섬에서 항공으로 아테네에 도착해 X93 버스를 타고 키피소스
(Kigissos 터미널 A)에 가서 버스를 타고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쪽에 자리한
코린토스 에 도착해서는 호텔을 정하고는 택시로 고린도 유적지에 도착해 구경합니다.
박물관과 아고라며 유적지 여러 건춤물들을 구경하고 새로 지는 바울교회까지 보고 점심을 먹은 후에 택시를
타고 코리토스 시내 센트럴이라 불리는 프레토리아 광장에 도착하니 미터기 요금은 10유로가 나옵니다.
먼저 남쪽으로 5분여를 걸어서 내일 미케네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시외버스 정류소 를 확인하고는 다시
공원과 광장을 지나고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를 거쳐 북쪽 코린트만에 도착하니 큰 광장이 보입니다.
여기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에 아이들이 많이 모여 뛰어다니는 곳에는 여인의 동상이 서
있는데.... 얼핏 보아도 “밀로의 비너스” 동상이지 싶습니다? 물론 당연히 모조품이지요?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3대 소장품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다 그리고 그리스의
조각으로 밀로의 비너스와 사모트라케의 니케인데 여기에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끈는 자유의 여신을 네 번째도 드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입니다?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프랑스어: Vénus de Milo, 그리스어: Αφροδίτη της Μήλου)는 고대 그리스
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의 비너스)를 묘사한 대리석상
으로 길이는 203cm 인데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니 1:1.618의 황금 비율이며 8등신으로....
두 팔이 없지만 전문가들은 다양한 연구로 왼팔은 사과를 꽉 잡고 있는 형태였고 오른팔은
배에 있는 흔적으로 흘러내리는 옷을 잡고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당시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
에 의해 발견되었고 며칠 후 프랑스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위빌(Jules Dumont d'Urville) 이
조각상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프랑스 대사였던 샤를 프랑수아 드 리파르도를 설득해 조각상을 구입합니다.
이 조각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었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1821년
당시의 모습을 드로잉한 스케치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왼팔이 좀 더 남아있는 모습이라 합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있는 조각상의 재질은
파리안 대리석이며 하반신에 천을 두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리고 머리는
왼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또한 양팔, 왼발, 귓불은 발견 당시 부터 없었다고 합니다.
얼굴에서는 기원전 5세기의 표현 방식을 볼 수 있고, 머리와 몸통에서는 기원전 4세기 조각가
인 프락시텔레스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데, 나선형으로 꼬인 곡선미는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 사이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표현인데, 특히 공간감과
머리와 팔이 1대 8로 나뉘는 신체 비율은 헬레니즘 시대에 나타난 혁신적인 변화이기도 합니다.
이후 사과를 들고 있는 손이 석상이 발굴된 장소 근처에서 발견되면서, 사과를 들고 있는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으며 이때 발도 같이 발굴되었습니다.
사과나 거울을 들고있는 모습 또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거나 아레스에게 월계수
를 씌워주는 모습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결국에는 복원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밀로스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가 건축자재를 모으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견했는데 당시 밀로스 섬에 있던 프랑스인들과 밀로스 지역
유지들의 압력으로 인해 이 조각상을 프랑스인에게 넘겨줄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탐험대의 일원으로 그리스 섬들을 방문했던 쥘 뒤몽 뒤르빌이 밀로스섬에서 석상을
발견한 당시 대사에게 보낸 기록도 있으니.... “조각상은 2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키는 약 6피트에 상체를 벗고 있는 여인이다. 왼손에는 사과를 들고 오른손은 허리
에서 부터 자연스럽게 흘러 발로 떨어지는 옷의 벨트를 잡고 있으나 두 팔은 절단되어 있다”
머리에는 머리띠를 하고 머리카락은 뒤로 올려 묶었고, 잘리지 않았다면 아름다웠을 코가
잘려있으며, 남아 있는 발은 맨발이고 귀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귀고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발견 직후 오스만 제국에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었던
리비에르 후작이 사들여서는 루이 18세에게 존경의 의미를 표하고자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도착한 석상에는 팔이 없었다고 하며 조금 있는 팔의 윗부분에 팔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만 뚫려 있고, 귀고리와 머리띠도 없었는데, 보고서의 내용과 석상의 남겨진 부분을
조사하고, 없어진 팔이 취했을 동작을 유추한 뒤 비너스라고 결론 지은 것인데 이 석상을
밀로스섬에서 숭배하던 암피트리테 (Amphitrite or Halosydne)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여기 고린도(코린트) Korinthos 는 BC 5세기에 그리스 3대 도시 국가 중에 하나로 성장해 페르시아제국에
대항해 전쟁에 참가했다는데 세월이 흘러 BC 146년에는 로마군 에 의해 도시가 파괴되었다가 그후
줄리어스 시저가 재건했으며 현재 신고린토스의 인구는 3만명이라는데 여기 코린트만에는 운하가 있습니다.
코린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의 지협에 위치하고 있어 무역활동이 수월했기 때문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니 BC 8세기부터 BC 6세기 중반까지 주요한 도기 수출국가였습니다.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는 동물, 전사, 식물의 모티프의 프리즈로 장식된 코린토스의 특징적인
작은 플라스크가 발견되니...... 그럼 얼마나 많은 도기를 수출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코린토스 운하 Korinthos canal 는 코린토스 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 하는
운하로 1881년 부터 1883년 까지 6.3 km 의 길이로 건설되었는데 거의 90도 각도
로 깍은 높이 90미터의 두 절벽 사이애 폭 23미터 길이 6km의 운하가 동서로 뚫렸습니다.
그전엔 엄청 먼 길인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가거나 아니면 배를 들고 육지를 지났는데
바이킹들이 배를 들고 다녔으며 대마도에도 소선월과 대선월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운하를 이용할 경우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가는 것 보다 700km 정도 운항거리가 줄어들지만 운하는
폭이 24m, 깊이가 8m 로 규모가 작아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용 선박은 관광용 여객선ᄆᆞᆫ 있을 뿐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며
운하의 수면 위 60m 에 길이 33m 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는 폐쇄하였다고 합니다.
코린트 운하를 보자니 역사학자 임용한씨가 동아일보에 ‘임용한의 전쟁사’
라는 칼럼에 실린...... “홍해 와 수에즈”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후티 반군의 위협에 이란 구축함 까지 홍해에 진출하면서 세계 물류에 비상이 걸렸다. 유럽에는
혹한이 찾아왔고, 유럽 경제와 우크라이나 전선은 더 추워졌다. 미국은 인플레이션만 걱정할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지만, 군사력과 의지의 한계를 노출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다.
미국의 굴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미국 대선의 결과가 답을
주지도 않는다. 대선 공약과 무관하게 상황에 따라 미국의 대응은 달라질 수 있다.
홍해에서 후티의 기세가 줄어들지 않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긴다. 이집트는 왜 가만히 있을까? 수에즈를
이용하는 선박이 줄어들면서 이집트는 막대한 재정 손실을 입고 있다. 이집트의 올해 예산이 약 87조
4000억 원인데, 이 중 수에즈 운하 수입이 약 11조 원이다. 홍해 사태로 운하 수입의 80%가 감소
했다고 한다. 심각한 국가부채에 거액의 이자로 부도 직전인 상황에서 후티는 이집트를 말려 죽이고 있다.
이집트는 왜 가만히 있는가? 이집트야말로 중동 군사강국이 아닌가? 이집트군은 예멘에 아픈 추억이 있다.
1960년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무려 7만의 병력을 파병해 예멘 내전에 개입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것이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집트군이 대패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세기 전의 사례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가 없다. 오히려 후티 반군은 더
강해졌다. 이집트도 곤혹스럽다. 개입하면 군사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고 개입
하지 않으면 수입 감소를 해소할 수 없다. 후티는 이집트의 이런 사정도 계산했을 것이다.
1960년대에 이집트는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미국은 이집트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지금 이집트가 개입
한다고 하면 러시아가 분노하고,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미국이 고맙다고 밀어줄 상황이다.
우리는 지금 냉혹하게 변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 우리의 바다와 영공만 지킨다고 우리의 이익과
생존권을 지킬수 없다. 약한 자의 정의는 내동댕이쳐졌고 강한 자의 정의조차 조롱받고있다.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이미 말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코린토스 운하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나라도 운하를 뚫기 위해 여러차례 시도를 했으니 바로
태안반도의 운하인데..... 고려나 조선 한양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쌀을 비롯해서
많은 물자들을 거두었으나 포장 도로가 없으니 우마차가 다닐수 없는지라 배로 실어 올입니다.
길목인 충청남도 태안반도 앞바다는 물길이 거세고 암초가 많아 험난한 바다로 악명을 날렸으니
노련한 뱃사람이라도 잠시 한눈을 팔다가 암초를 만나 난파되기 쉬운 곳이었는데
그 중에도 신진도와 마도 주변의 해역은 물살이 거세 해난사고가 잦았던
곳이라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부르다가, 이름이 불길하다고 안흥량(安興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해역은 영호남에서 올라오는 세곡(稅穀)을 실은 배 조운선이 지나는 길목으로 무덤으로
불렸으니..... 『조선왕조실록』에는 1392년(태조 4년)부터 1455년(세조 1년)
까지 60여년 동안 200척에 달하는 선박이 안흥량에서 침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안군 안면도는 원래 곶(串) 으로 태안반도가 길게 이어진 뭍(육지)이었는데, 조선 인조때 뭍의 좁은
허리 부분을 파서 운하를 만들면서 섬이 되었는데..... 고려시대 부터 운하를 파는 작업이 이뤄
졌으니 태안반도를 돌지 않고 내륙으로 운하를 파면 변화무쌍한 물길과 암초를 피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 인종 12년(1134년)에 서해 태안 쪽의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굴포운하의 개착을 시도했으니
공사는 500여년간 중지와 재개를 10여 차례 반복하며 파들어갔으나 결국 7km 중 4km
정도만 파고 중지되었는데 당시 기술로 공사중 드러난 암반층을 뚫고 물길을 낼 기술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다가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선택된 것이 조선 인조때 안면읍 창기리와
태안군 남면 신온리 사이를 파내는 공사였으니 이 공사가 성공해
1638년에 판목운하가 완공됐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運河) 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운하의 개설로 안면곶이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한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안면도
가 되었지만 그러나 운하는 반쪼가리였으니..... 조운선은 저 운하를 지나도
마도 앞 바다 험난한 안행량을 비껴갈 방법이 없었으니 운하는 별 효과는 없었던 셈입니다?
그러고는 코린트만을 뒤로 몇분을 걸어 슈퍼에서 캔 맥주와 돼지고기를 사서는 우리 숙소
인 아파트 (연립주택) 로 돌아와서는...... 밥을 한후 돼지고기를 구워 맥주를 마신
다음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데 내일은 남쪽 "미케네" 유적지로 갈 생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