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서구 열강 맞서 전통 지키려 한
모로코 독립운동가 라이슐리의 美 대선에 얽힌 이해관계 담아
몰아치는 ‘바람’을 루스벨트 ‘라이온’을 라이슐리에 비유
미국의 26번째 대통령(1901∼1909)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이력은 이채롭다. 별칭은 곰을 좋아해 테디 루스벨트(Teddy Roosevelt)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쿠바 동맹군과 전쟁을 시작하자 돌연 국방부 해군 담당 차관보직을 사퇴하고 자비로 의용병을 모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1904년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추진했고, 1906년 모로코 문제 중재와 러·일전쟁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도 수상했다.
마초적인 두 지도자의 대립
저돌적이지만 솔직한 카우보이 같은 캐릭터로 백악관에 복싱챔피언을 초대해 권투경기를 하기도 했으며 사냥을 좋아했다. 그는 또 노동자 편을 들어준 미국 첫 좌파 대통령이었지만 국제외교에선 철저히 미국 중심의 강대국 논리를 폈다.
같은 시기 그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 아프리카에 있는 모로코의 독립운동가 물라이 엘 라이슐리다. 리프(Riff)족 족장이었던 그는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 맞서 이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한 민족주의자였다. 왕족인 그는 모로코 북부지역의 독립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미국인 미망인 이든 부인과 자녀들을 납치해 루스벨트에 맞선 마초적인 인물이다.
이 두 지도자 간의 대립을 그린 영화가 ‘바람과 라이온’이다. 모로코에서 패권을 잡고 이를 선거에 활용하려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자신의 모로코 영토를 지키려는 라이슐리의 싸움이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루스벨트, 그 바람에 맞서 포효하는 ‘라이온’이 라이슐리다.
영화는 실화인 이든 부인과 자녀들의 피랍 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아프리카 북서쪽 모로코를 두고 벌이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각축전이 배경이며 모로코의 독립운동가 라이슐리(숀 코너리), 루스벨트 대통령(브라이언 케이스), 그리고 이든 부인(캔디스 버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랍 지도자로 변신한 007 제임스 본드
1905년 10월 프랑스·스페인·독일·미국 등 서구 열강들이 모로코로 들어와 영향력을 확산해 나가자 라이슐리는 독립을 주장하며 미국인 저택을 습격, 이든 부인과 자녀들을 납치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포함한 열강들의 신경전이 고조된 가운데 루스벨트는 이든 부인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미 해군을 동원해 모로코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든 부인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족장 라이슐리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던 중 루스벨트는 라이슐리의 독립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인질 교환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어긋나면서 협상이 결렬되고 오히려 라이슐리가 스페인군에 체포된다. 이때 이든 부인은 라이슐리를 살리기 위해서 미군 지휘관을 찾아가 인질 석방에 대한 미국의 협상 약속을 이행해 달라고 요청한다.
영화는 1차 대전 직전 미국의 대선 정세와 모로코 내 열강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보여준다. 꼭두각시인 모로코 왕은 독일, 실세인 총독은 러시아에 기대는 가운데 루스벨트는 외교 문제로 비화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이든 부인과 아이들 구출을 명분으로 모로코를 공격한다. 진짜 이유는 대통령 재선을 위해서다. 그는 선거 캠페인에서 “언제 어디서든 국익과 미국인을 보호할 것이며 죄 없는 여자에게 저지른 일을 방관하지 않고 보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라이슐리는 “모로코의 왕은 열강의 꼭두각시다. 서구 열강을 상대로 성전을 벌일 것이며, 정통 이슬람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 강점 직전의 대한제국 생각나게 해
영화는 광활한 사막 위에서 펼쳐지는 전쟁 스펙터클이 볼만하며, 숀 코너리의 중후한 연기가 돋보인다. 영화 007 제임스 본드의 핸섬하고 민첩한 이미지와는 달리 야성미 넘치고 카리스마 있는 아랍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잃고 석양의 해변에서 라이슐리는 부하와 함께 루스벨트에게 쓴 편지를 꺼내 든다.
“당신은 바람, 나는 라이온. 당신이 폭풍우를 몰고 와 모래가 내 눈을 가리고, 땅이 나를 흔들어 나는 울부짖지만,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는구려. 그러나 당신과 나는 분명한 차이가 있소. 당신이 바람처럼 당신의 존재도 모른 채 날 몰아치지만 난 라이온처럼 이곳에서 내 땅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 장면은 일제 강점 직전,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대한제국의 처지와 흡사하다. ‘바람’인 일제는 ‘라이온’ 대한제국을 몰아쳤고 나라 잃은 아픔과 시련을 예고했다. 개인도 국가도 힘이 있을 때만 안녕할 수 있고,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