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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설경으로 한 주를 시작하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태라 여기저기 사고들도 많았습니다. 대형사고는 없었으니 다행입니다. 하늘도 땅도 뒤숭숭한 한 주간을 보내고 다시 주말을 맞습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주말은 웬지 좋습니다. 그냥 마음이 느긋해집니다. 따로 어디 멀리 나갈 일도 없다면 집안에서 차 한 잔 놓고 평안한 하루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한 주간을 지나오며 이런 느긋함을 누릴 수 있는 때가 많지 않습니다. 이제 곧 나른한 주말도 올 것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선물해주려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아마 오늘도 바깥은 어수선하리라 생각합니다.
멀리 유럽의 전쟁도 끝날듯하면서 이어지고 중동의 전쟁은 다시금 안개 속에 묻혔습니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죽음과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중동의 전쟁은 2년도 안 되는 사이 4만이 넘는 목숨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거의 반이 어린아이랍니다. 세상에! 뭔 짓들인가요? 다행히 살아남은 아이들도 평생 이 때의 아픔을 기억할 것입니다. 포탄 터지는 소리,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 그 기억을 담고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인생 속에 행복이 그려질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우리도 다시는 전쟁의 때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잘 유지하며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따사로운 햇볕이 개나리 노란꽃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음 주말에는 아마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기대하며 복된 주말이 되기를 빕니다. ^)^
2025년 3월 22일 김종우 목사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사무엘상 16 : 23)
<컴플리트 - 언노운>
그냥 노래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들은 기억은 있습니다. 그런데 가사 내용을 보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더 큰 감동이 밀려들었습니다. 아 이런 노래였구나 싶은 것입니다. 가사가 가슴을 스며들었습니다. 어쩌면 음악보다는 그 가사에 더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노래 자체보다 바로 이 가사에 마음을 녹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내용인즉 한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그 때를 살던 사람들의 마음이고 삶이었습니다. 특히 어두운 시대를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방황을 담고 있습니다. 더 넓게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운 희망을 긁어내야 하는 간절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타 하나 들고 우러러보던 가수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유명가수는 거의 반신불수가 되어 병원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간병하던 또 다른 유명가수가 맞아주더니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알아보았습니다. 꽤 쓸만한 그릇이라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무대에 서볼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또한 다른 유명가수를 만날 기회도 가집니다. 당시 반전운동가이면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던 가수입니다. ‘조안 바에즈’ 그녀의 노래를 들은 기억도 납니다. ‘밥 딜런’보다 앞서 유명한 가수입니다. 둘은 노래로 마음이 맞더니 잠시 삶까지도 맞추기도 합니다. 콘서트 장에서도 두 사람의 화음은 관중을 매료시킵니다. 아름다운 화음은 노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음악과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슬퍼서 노래하고 반대로 기뻐서 노래합니다. 우리는 노래와 함께 살아갑니다. 난폭한 독재자도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인성과는 별개로 음악은 개인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풍성하게 꾸며주는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음악을 가까이 하며 살아갑니다. 더구나 가사 내용 들이 자기의 삶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근해집니다. 노래는 한번 듣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늘 귀와 입에 붙어있어 언제 어디서라도 맴돕니다.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유행처럼 지나가기도 하지만 그럴지라도 추억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야기는 짧은 기간을 말하고 있지만 그 사이 밥에게는 두 여자가 가까이 지냅니다. 처음 아직 유명세를 타기 전에 ‘실비’를 알고 함께 지냅니다. 없어도 가난해도 서로 힘이 되고 의지가 됩니다. 그런데 조금 알려지고 조안과 함께 공연하며 화음도 환상적으로 만들면서 실비는 멀어집니다. 이미 알려지기 시작할 때 실비는 마음의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 내게는 과하다 싶다는 생각을 하였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실비가 밥의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자리에 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조안과 실비,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물론 밥에게 달려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밥은 애매하지요.
방송을 타고 레코드가 출반되고 밥의 이름 값도 조안에 못지않게 올라갑니다. 작곡 작사 노래까지 부릅니다. 자신의 이야기이며 당시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들으면 그냥 감동입니다. 잘 아는 대로 60년대 초중반 한창 핵전쟁의 위협으로 두려움 속에서 살던 때이고 월남전으로 시끄러웠던 때입니다. 사회적 불안 속에서 그냥저냥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줍니다. 다른 한편 희망도 심어줍니다. 한 날의 괴로움을 노래에 실어서 날립니다. 위로가 되며 용기를 얻게 됩니다. 반항하며 또 적응합니다. 싫어도 떠날 수는 없는 세상, 그래서 기를 쓰며 이겨내야 합니다. 그 때 노래는 지친 마음을 다독여줍니다.
기존의 의식과 세계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한 개인의 인생 속에서도 전환기를 겪습니다. 어린 시절을 지나 사춘기를 맞고, 청년 시절을 지나 장년의 때를 맞습니다. 한참 지나 노년기로 접어듭니다. 바뀌는 때마다 신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크고 작은 정신적 심리적 충격을 견뎌야 합니다.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바뀔 때도 한바탕 진통을 겪게 마련입니다. 크게 국가적 혼란의 때를 지나야 하든지 사회적 갈등의 때를 지나야 합니다. 종교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천주교)로, 천주교에서 기독교로 넘어갈 때마다 이단시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은 공존하게 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는지 역사가 말해좁니다.
일반적 포크송에서 전자기타 음악으로 바뀌자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반대합니다. 그러나 군중의 반항을 이겨내고 밥은 밀어붙입니다. 어쩌면 당시 젊은이의 반항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시대를 넘어 발전하며 성장하는 것이지요. 변화의 때 그 고통을 이겨내지 아니하면 새로운 시도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보다도 가사 내용이 더욱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조안 바에즈와의 화음은 말 그대로 환상적입니다. 티모시 살라메와 모니카 바바로, 배우들의 연기지만 실제 그 당시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의 화음도 이만큼 아름다웠을까 싶습니다. 영화 ‘컴플리트 - 언노운’(A Complete Unknown)을 보았습니다.
종말을 당하여
우리 신앙인들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일까요? 전에 밀레니엄 2천 년 대에 들어서서 십여 년 동안 종말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영화로도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아냈습니다. 핵전쟁, 기후 변화 또는 우주에서의 별들의 충돌 등등 다양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종말에 대한 관심은 여전합니다. 비단 신앙인뿐만 아니라 비신앙인들까지도 일단 종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지는 않지만 들은 것들은 있으니까요. 우리 성도들은 어떤가요? 관심 없습니까? 오로지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고 있는가요? 그러지 맙시다. 종교가 뭐라고요? 으뜸 되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 그 어떤 학문보다 높은 수준의 배움 아닙니까? 더구나 기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배우는 종교입니다. 종교 중에서도 으뜸 아닙니까? 그런 기독교인인 우리가 겨우 먹고사는 일에 전념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받아 땅을 선도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 아무튼 우리의 관심은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입니다. 새 언약 곧 신약이지요. 누가 해주신 언약입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다시 오마. 그렇죠? 그런데 사실 그 언약을 하신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약 2천 년. 역사는 흘러가는데 오실 기미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에이 설마?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태 안 오셨는데 이제 와서 뭘?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대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4 : 14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언제 끝이 온다고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만한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열두 제자에게 주신 천국 복음이 중동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와 미주로,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로, 나아가 중국 인도 동남아 지나 이슬람국들을 넘어 출발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었겠다, 안 되었겠다? 대략 되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어쩌겠습니까? 무슨 일이 생길까요? 바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종말’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나오는 말이 바로 ‘지구의 종말’입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이 터지고 깨지고 무너지고 엉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살아남을까요? 그게 우리의 희망사항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과연 그런 종말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종말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세상 사람들이 처음에 어디서 영향을 받았겠습니까? 기독교에서 들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들었으니 하나님을 믿지는 않아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들어낸 영화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독교인들이 과연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인가 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 끝, 즉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태 우리가 듣고 배우고 알고 있는 것이 참인가? 성경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잘못되었다면 과감히 버리고 올바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로 그렇게 생각하고 배우고 그렇게 가르치게 된 근거가 있습니다. 마 24 : 7 -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전쟁, 기근, 지진 등 재앙이 일어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렇게 상상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앞의 1 - 2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뭐가 무너진다는 말씀이지요? 성전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집, 우리 아버지 집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데 그 하나님의 집이 무너집니까?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성전을 자랑하려던 제자들이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진다고요? 이건 오늘날 미국의 백악관이 테러 당한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이야말로 종말의 사건이다 싶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3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무엇을 묻습니까?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죠? ‘이런 일’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보았듯이 성전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언제 성전이 무너지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날을 무엇과 연관시킵니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입니다. 성전이 무너진다, 종말이로구나. 그 때 누가 오신다? ‘주의 임하심,’ 주님이 오신다. 그리고 그 때는 곧 ‘세상 끝’이다, 그런 뜻입니다. 다 한데 묶인 말이지요. 당시 예수님과 대화 하고 있는 상황이니 여기 ‘주의 임하심’은 곧 재림 때를 가리킵니다. 자 봅시다. 재림과 세상 끝 그리고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같은 시대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다는데 하나님이 그 무너지는 성전에 계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셨기 때문에 무너지는 겁니다.
성전에 있는 비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법궤입니다. 다른 말로 언약궤 또는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써서 주신 십계명 돌비입니다. 그 법궤가 있는 곳이 바로 지성소이고 그 자리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속죄합니다. 그런데 이 법궤를 이방인에게 뺏긴 적이 있습니다. 언제요? 옛날 사사시대 이야기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레셋과 전쟁에서 자꾸 패배하니까 전쟁터에 뭘 가지고 나갑니까? 바로 법궤를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을 믿기나 했습니까? 삼상 2 : 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러면서도 이 하나님의 법궤를 마치 부적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을 데리고 나가보자 한 것입니다. 그런 불량자요 불신자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미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가지고 나가봤자 전쟁에서 패하고 둘은 죽습니다. 법궤가 하나님입니까?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 자기를 신뢰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십자가 목에 걸고 있으면 마귀가 안 들어옵니까? 우리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면 벌 받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 그냥 건축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안 계신 교회는 그냥 건물일 뿐입니다. 십자가 달아놓았다고 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예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하고 복잡합니다. 왜 간단합니까? 답 자체는 간단하다 그 말입니다. 왜요? 요 1장에서 배우고 아는 대로 하나님도 말씀이고 예수님도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말씀이 없다면 거기에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안 계신 것이지요. 그러면 왜 복잡합니까? 그 말씀이 하나님 말씀인지 아닌지 구분할 줄 알기 위해서는 그냥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성경책이 있으면 뭐 합니까? 알아요, 몰라요? 모르는 성경은 갖고 있으나 마나 아닙니까? 물론 성경책을 읽고 설교할 것입니다. 예수님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 장로들도 성경 가지고 백성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까? 성경을 알아서요, 몰라서요? 성경을 갖고 있어도 모르면 마귀 짓 하는 겁니다. 오늘이라고 다릅니까? 오늘날은 성경의 분량이 더 늘었습니다. 신약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쉬워졌겠다, 어려워졌겠다? 아무튼 모르면 백독을 해도 꽝이고 열 번을 써 봐도 꽝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는 주님이 재림하는 때이고 세상 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설명해주시기 앞서 주의부터 주십니다. 마 24 : 4 -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뭐라고 주의를 주십니까? 미혹 받지 말라고. 그러니 그날에는 무슨 일이 생길 것이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생길 거다 그 말입니다. 누구 이름을 팔고 그런 일을 한답니까? ‘내 이름으로 와서’ 누구 이름입니까? 예수 이름. 초림 때는 누구 이름 팔아서 백성을 가르쳤습니까? 하나님. 재림 때는 누구 이름 팔아서 백성을 미혹한다고요? 예수 이름. 모두 자기네가 하나님의 종이고 예수님의 종이라고 나서는 겁니다. 성전을 차지하고 백성을 미혹했습니다. 오늘날은 교회를 차지하고 성도를 미혹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주의를 합니다. 교회 이름 붙였다고 모두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그 말이지요. 누가 계셔야 합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그 교회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지 어떻게 압니까? 예,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강단에 성경책이 놓여있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경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라 할 정도라면 그것은 헛것입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그 성경을 자기 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적하셨습니다. 마 15 : 8 - 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읽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설교합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마귀의 말이라고 선포하면 성도들이 옵니까? 미쳤다고 그런 교회에 갑니까? 교회마다 성경책 펴놓고 설교합니다. 누구 말씀이라고 설교합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라고 설교합니다. 문제는 자기 하는 말이 마귀가 주는 말이라는 것을 본인이 안다, 모른다? 모릅니다. 모르니까 전하지요. 그것이 마귀의 주는 말이란 것을 알고서야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함께 하고 있는지, 마귀의 영 악령이 함께 하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리라 믿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이제 누가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까? 그 말을 듣는 성도가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소경 따라가면 똑같이 구덩이에 빠집니다. 우스갯소리로 늘 말하지요? 앞사람 똥 밟고 갔다고 나도 똥 밟고 갈 필요 있다, 없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해야 합니다. 천국 간다고 생각했다가 지옥 갑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이 날을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 일어날 일을 말씀해주시고 나서 봉함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알라는 말씀입니까, 모르라는 말씀입니까? 모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다니엘이 하나님께 듣고 보고 기록하였지만 자기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냥 봉해라 하십니다. 언제까지요? ‘마지막 때까지’ 그러면 언제 알게 된다는 말입니까? 예, 마지막 때 알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된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왕래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왔다 갔다 한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지식이 더하여집니다. 무슨 지식입니까? 세상 지식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하늘의 지식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합니까, 몰라도 됩니까? 알아야 하지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도 바로 그겁니다. 왜요?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 백성이 왜 망한답니까? 지식이 없어서. 무슨 지식? 세상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제사보다, 즉 오늘날 예배보다 앞서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 그 말씀입니다. 예배드리기 앞서 우선 하나님을 알고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누구한테 예배드리는지 알고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그겁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까? 자기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요 4 :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뭐라 대답합니까? 39 - 40절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다시 맞대응합니다.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누구라고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네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한 마디로 가르쳐주십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
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누구라고요? 자기들은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가 누구라고요? 마귀랍니다. 수긍이 됩니까? 마귀에게서 났으니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이거 미친 놈 아니야? 이런 놈은 죽어야 마땅해,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지금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누구에게 예배드리러 교회를 갑니까? 당연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갑니다. 그런데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내가 왜 네 아버지냐?’ 여기 왜 왔느냐?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다. 나는 여기 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집, 그 교회에 들어가시렵니까? 하나님도 예수님도 안 계시다는데 그 교회 들어가서 예배드리렵니까?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까? 간단히 말한다면 그 교회에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이신 예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책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없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만 있다는 말입니다. 소위 하늘로부터 주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자의적 해석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계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교회일 뿐입니다. 거기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생각’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오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람의 계명인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종말’이 과연 지구촌의 종말인가? 그게 사람의 계명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무너지는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종교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복음의 시대가 열릴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곧 말씀을 잊으면 우리 자식까지도 잊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지요.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피와 땀을 담보로 이 성경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하라고 하면 뭘 그리 열심을 내냐고 핀잔을 줍니다. 말이 됩니까? 우리를 살리려 애쓰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에 이 성경 지키려고 목숨을 바친 선지사도들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예수님을 멸시하는 일입니다. 그런 경거망동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목숨을 걸고 이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 나라와 영생이 있는 줄 확신합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기를 쓰고 배워서 알아야지요.
그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빨리 왕래해야 합니다. 왜요? 지식을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지식이요? 하나님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지요. 그 지식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 말씀이 진실인지, 저 말씀이 진실인지 분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녀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은 다녀보라고 해요, 다니지 말라고 해요? 다니지 말라고 막습니다. 왜요? 성도들이 다니며 진실을 들으면 자기가 말하는 것이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다니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금방 들통 날 텐데 어떻게 다니라고 말합니까? 세상 말로 밥줄 끊어집니다. 예수님 때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러니 종말의 때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가르치고 따르는가, 들어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경고해주신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마 24 : 4 -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목사님이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배워 알고 분별해야 합니다. 모두 똑똑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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