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末伏)
덥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푹푹 찌는 더위에 사방이 고요하다. 고요한 만큼 청량한 바람이 쉬익쉬익 떠돌대길
소망한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에 여럿 있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굳이 더 더운 음식을 먹어서 더위를 다스리고자 한 선조들의
익살은 더위를 조롱하듯 더위를 온몸으로 껴안아 버린다. 한때(혹은 지금도) ' 보신탕'을 먹으면서도 그랬다.
그러나, 무언가를 다스리기 위해 다른 무엇을 희생시키는 논리는 과연 정당한가. 개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에 몇 마지 편향된 말마디를 던지기 이전에, '먹어야만' 다스릴 수 있다는 건, 꽤나 원시적이고 전근대적인 발상이
아닐까. 더위를 이겨 내기 위해 몸이 튼튼해야 한다는 논리로 향변할 수는 없겠으나, 이 논리에는 조금 짠한 면이 있다.
못 먹고 살던 시절의 이야기이니까. 영양 과다로 불철주야 지방을 태우고 한끼 식사를 거르고 칼로리를 계산하며
먹거리를 선택하는 현대인들에게 왜 굳이 여전히 더위를 이기는 것과 먹는 것이 함께 엮여야 하는걸까.
여름 한더위가 '기후 위기'와 맞물려 사유되는 요즘이다. 대량 소비의 저변에는 인간의 과한 소비 욕구가 창궐한다.
적게 먹고 작게 쓰는 것을 상식처럼 되새기는 우리는 과하게 소비하고 있다. 여전히 배가 고파서 그럴까. 급한 성장
탓에 적당히 배부른 체험을 사유하고 소화할 시간이 없어서 여전히 배고픈 줄 착각하는 건 아닐까. 무엇이 우리를
배고프게 하는 걸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더 먹고. 더 건강해지자는 논리가 신앙으로 옮겨오면 더 기도해서. 더 노력해서 하느님의 은
총을 구하는 식이 되어 버린다. 은총은 하느님 선물일진대, 선물을 받은 이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선물의 정도가 달라
진다면 그건 구걸이 되어 버린다. 은총에 은총을 이미 입고 있는 우리 인간은 저 자신이 먹고 싶은 은총을 갈구하면서
늘 배고프게 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우리의 하느님을 좁디 좁은 지구 안 인간들의 욕구 충족의 도구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여전히 역사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손아귀에
벗어날 자 아무도 없다.(토빗 13,2참조) 하느님은 우리의 청원 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신다.
(마태 6,7-8 참조)
그리하여 하느님을 안다는 건, 더하기의 논리가 아니라 나누기, 빼기의 논리로 접근해야 할 듯하다. 당장 먹고 쓰는 것들
주 무엇을 뺄 수 있는지 따져 보는 것, 제 삶의 사리에서 필요 이상의 것들을 정리해서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는 것부터
실천하자는 진부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들이 하느님을 아는 지혜의 길이 아닐까 다시 되새긴다. 우린 충분히 건강하고
우리가 지닌 영양소는 차고 넘친다. 우린 충분히 은총을 받고 있고 지금의 은총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아마 마지막 복날,8월 14일, 사람들은 또다시 특정 생명체를 과하게 섭취할 것이다. 다른 생명체에 목줄을 매는 그 기
백으로 다른 생명체를 살리는 마지막 복날을 맞이하면 어떨지. 서로의 기운을 지배하는 복(伏)말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복(福)을 전해 주는 나눔의 시간이 우리의 마지막 복날이길 빌어 본다.
글.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2024년 8월 월간 빛 책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