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보니 시(詩)는 외 1편
정영주
몽당연필도 귀해
침 바르며 글 쓰던 시절
시인이 되면 좋겠다 싶었다
밥풀 하나에도 입 찢어지게 싸우고
아버지 밥그릇에 밥알 서너 개라도 남지 않나
눈 찢어지게 염탐하던 식탁
밑천 없이 연필 하나만 가지면
밥이 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 늦은 나이에 나는 시인이 되고
시인 옷엔 그래도
나비가 날아들고 입술엔 꽃도 피어
밥그릇이 되고 그릇은 책이 되어
아주 잠깐씩은 유랑이 휴식이 되는가 싶었다
이제 보니 시는
밥이 아니라 독에 가깝고
꽃과 나비가 아니라
단숨에 태워지는 갈대에 가깝고
유랑이나 휴식이 아니라
천 번씩 꺾여나가고 분질러지는 붓이어서
골방보다 더 좁은 쪽방 벽에 박힌
빼도 박도 못할 피 질질 흘리는 녹슨 못이라는 걸
뒤가 환하다
깊은 산속,
햇빛 서너 장 깔고 뒤를 본다
삼나무는 너무 높아 보지 못할 터이고
산새들은 허공에다 변을 보니 흉볼 처지 아니고
희끗희끗한 잔설들 햇빛에 녹으며
에그, 에그, 하다가 이내 사라질 터이니
염치없이 나는 시원하게 일을 본다
산에선 냄새도 없다
사방이 열린 문이니 오지게 뒤를 본다
헌데, 이걸 어쩐다? 휴지가 없다
주머니를 뒤지다 딸려나온
손바닥만한 면수건 한 장
반을 접어 뒤를 닦으니
그 속에 찍혀 나온 황금 문장
그래, 오장육부 다 썩어 나온 적나라한 언어
햇빛에 잘 삭으라고
산에 거름 한 사발 놔 주고 일어선다
뒤가 환하다
─계간 『시에』 2012년 가을호
정영주
강원도 춘천 출생.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버지의 도시』, 『말향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