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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5단계의 현대적 의미
출 8: 25-32
...마지막 열 번째 단계 하나님의 방법 마지막 열 번째 단계가 무엇입니까? 장자의 죽음의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사단을 심판하고, 바로의 지역에 죽음의 심판을 내려 버리십니다. 죽음을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그 때 바로가 손은 들었습니다. "가거라. 다 가지고 가거라. 완전히 가거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영적 해방의 단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는 그러한 진리의 단순한 말씀이지만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증명되고, 다시 한 번 확인된다면 우리 마음속에 깊은 명심의 말씀으로 새겨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출애굽 사건은 구약 성경의 핵심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살이, 신음의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강한 손을 더하심으로 해방되는 기독교 핵심 진리가 담겨 있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는 세 가지의 주역이 등장합니다.
1. 첫째로 애굽 왕 바로, 애굽의 세력이 등장하고,
2. 그 다음에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으며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등장하고,
3.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여호와 하나님, 이 세 종류의 주역이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 주역 중에서 애굽 왕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은 연합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살펴보고 그 다음 단계에 넘어가야 합니다.
1. 애굽과 이스라엘이 하나되어 있고,
2. 애굽이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고,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속박과 압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상태, 이것을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이 사단과 지금 현재 연합되어 있는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바른 이해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1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의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노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인이라.』
나, 인간 속에 다른 실체의 죄가 거하고, 나, 인간은, 나 자신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자꾸 악을 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내 속에 다른 존재가 함께 거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 속에 거하는 죄, 내 속에 거하는 사단, 육신의 소유욕 때문이라고 사도바울은 가르칩니다.
먼저 우리는 인간의 이런 바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가 아니오, 내 속의 생각이 다 내 생각이 아니니 내 속에 벌써 사단이 깊숙이 들어와서 사단의 육신의 생각을 내 마음속에 불어 넣어주고, 내 생각인 것 같지만 벌써 그것은 사단의 생각이요, 내 속의 육체의 생각이요, 악한 생각입니다. 내 인간 속에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독립의 백성이 아닙니다. 애굽 왕 바로의 속박 속에서 혼합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 상태를 하나님이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고백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모두 곤고한 사람, 내 속에 벌써 사단이 들어와 애굽 왕 바로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출애굽기의 사건은 나를 위한 말씀이요, 이 출애굽기 사건이 내게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여기 출애굽기 본문에 애굽 왕 바로가 등장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강팍하고 완고해서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애굽 왕 바로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는 내 속에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인간의 몸 속에 거하고 있고, 애굽 왕 바로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완고하고 강팍한 것이 내 속에 지금 거하고 있어서 나를 해방시키지 않고, 나를 하나님께로 완전히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인정을 해야 출애굽기 본문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사단의 생각이 거하고 있고, 육신의 생각이 거하고 있고, 내 속에 옛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데 내 영혼이 이 몸 속에서 육신의 지배로 죄의 지배로 사단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참 해방이요, 인간 해방이요, 영적 해방이요, 영적 출애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연합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애굽 왕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로 주종 관계를 이루고 있는 애굽 지역에 먼저 재앙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제일 처음에 모세를 통해서 좋게 말로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내보내라"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절대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은 재앙의 벌을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연합 지역에 고통을 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내 자아와 그리고 사단의 죄의 세력이 함께 거하는 내 몸에 내 육신에 고난을 허용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지역에 하나님이 재앙과 징벌을 먼저 내리십니다.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점거하고 있는 애굽에게 징벌을 가하여 이스라엘을 회복, 구원시키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를 고난으로 압력을 가하시는데 그 압력을 가하시는 목적은 원래 내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옛사람에게 고통 주시기 위해서, 내 속에 거하는 사단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내 속에 거하는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소유욕에 일 타를 가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이 고난의 방법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애굽 지역에 피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시는 모습이 출애굽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책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재미있게 이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애굽과 이스라엘이 혼잡하게 되어 있는 애굽 지역에 징벌을 내리시는데 피의 재앙, 애굽의 모든 하수들이 피로 변합니다.
두 번째로 개구리의 재앙을 내립니다. 하수에 지팡이를 치니까 개구리 떼들이 어디서 많이 나왔는지 여기저기서 나와서 막 궁전에도 들어가고 사람 발 딛을 틈이 없이 개구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티끌을 날리니까 그 티끌들이 전부 이가 되어서 애굽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파리의 재앙, 파리가 하도 많이 생겨서 도무지 어려움 당합니다.
때로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 자신 속에 거하고 있는 죄와 옛사람으로부터 나 자아를 사랑 받는 나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에게 혼합되어 있는 나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 네 가지 일 단계 재앙들을 어려움이라고 합니다. 삶의 어려움을 주시던가 내 마음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잘 안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 어려움이 내게 임할 때 고난을 당한 후 먼저 내 속에 있는 육의 완고한 바로의 성이 녹아져 내립니다. 내 육신의 생각이 일단계 후퇴합니다.
1. 애굽을 떠나지는 말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라
후퇴 한 바로가 이제 제시하는 말을 한번 봅시다. 출애굽기 8장 25절,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고난받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난을 받자 바로가 제시를 하는데 가라 그러나 이 땅을 넘어가지 말라. 애굽 땅을 떠나지는 말라. 애굽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라."
내 육신이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내 옛사람이 고난을 받고, 육신의 생각이 조금씩 녹아지면 "아이고, 이제 하나님을 섬기어야 하겠구나." 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뭐라고 하는가 하니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애굽 지경을 벗어나지 말라."
"하나님을 섬기되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던져 버리지 말고 그대로 같이 즐기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되지 않느냐?
이 세상 애굽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예수 믿으면 되지 않느냐?
여기서 떠나지 말고 우리와 똑같이 살면서 주일 날 교회에 나가서 한 번 예배드리고 오면 되지 않느냐?"
애굽을 떠나지는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세상에 사는데 세상과 이별할 수 있습니까?
남들이 술좌석에 가야 할 때 그들과 사귀려면 같이 술좌석에 가야 되고, 또 이 세상에 살면서 돈이 없으면 안되니까 돈도 벌어야 하고, 이 세상에 살면서 고달픈 이 세상,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이 세상을 떠나고 이 세상과는 구별 되라.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적당히 이 세상에 살면서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회개 기도하고 회개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 나는 세상을 떠날 수 없다. 바로가 바로 이런 심정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 내 속에 거하는 옛 사람, 내 속에 거하는 사단, 내 속에 거하는 이 육신의 소유욕이 바로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구나. 조금 녹아지긴 녹아졌으되 아직 멀었구나.'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2. 가서 하나님을 섬기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이제 고난이 더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이제 두 번째 단계에는 출애굽기 8장 2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바로가 한 단계 더 물러갑니다. "그래 내가 보내긴 보내겠다. 애굽 땅에서 광야로 가거라.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우리는 이런 모습을 흔히 봅니다. "여보 당신 예수 믿는것은 좋아. 하지만 너무 깊이는 빠지지마.
주일 낮 예배는 괜찮아. 주일 저녁 예배까지는 괜찮아. 그러나 수요예배나 새벽 기도는 안돼. 금요 예배도 안돼. 너무 깊이 빠지지 마."
물론 그런 얘기를 하시는 데는 요즘 교회들이 잘못 되어서 교회생활 한답시고 가정 등한히 하고, 가정 다 포기하고, 자녀도 남편도 다 던져 버리고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겠습니다만 그것은 잘못 믿는 것입니다. 바르게 잘 믿고, 깊이 믿으면 더 인내심을 가지고 남편을 주님처럼 존경하고 자녀를 위해서 헌신하고, 더 참을성이 생기고 더 인내하고 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됩니다. 잘못 믿기 때문에 잘못 빠지기 때문에 꼭 가정을 버리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르게, 성경 말씀대로 진실하게 잘 믿으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 받는 사람, 예수 믿는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늘 생각하기를 예수를 믿기는 믿되 너무 깊이 믿지 말자는 생각이 있습니다. "기도생활 새벽 기도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어. 그런 것은 광신도 같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그런것은 안 해도 된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이것은 두번째 단계의 사단의 목소리입니다.
될 수 있으면 우리가 믿음 생활이 많이 나아지고 우리에게도 여건이 돼서 모두가 새벽 기도도 하고, 금요 기도회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고, 집에서 기도 생활도 하고, 이렇게 깊숙이 신앙 생활에 들어가 날 구원하신 예수를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고, 내 믿음이 돈독해지고 깊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지 못해서 마음은 원이로되 그렇게 안 되는 것이지 그것을 내가 내 주관으로, 내 강팍한 마음으로 금을 긋는것은 바로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더 가까이 아버지께로 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혹시 우리가운데 "나도 그런 동감이다"하고 생각하면 내 생각이 바로의 생각과 똑같다고 판단하시면 됩니다. 내가 두 번째 단계에는 와 있는데 세 번째 단계에는 못 가고 더 가까이 내 영혼이 주께로 향하는 것을 "내 속에서 내 옛사람이, 내 죄 된 생각이, 내 속의 사단의 생각이 막고 있구나"하는 것을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기는 보내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재앙을 애굽 지역에 고난을 더하십니다.
가축 전염병, 독종, 우박과 불이 쏟아지고, 메뚜기가 생겨서 모든 소산들을 먹어 버립니다.
두 번째 단계에 인간이 고난을 당하고 나면 신앙이 많이 자라는데 그 전에는 적당히 예수 믿고, 너무 깊이 빠지기를 두려워하던 자들도 갑자기 내 생애 속에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모든 재산이 날아가 버리면 이제는 부인에게 "철야기도를 가라. 나를 위해서 기도해라. 금요 기도회도 가고, 수요 예배도 가라."하고 완고한 내 마음이, 굳어져 있던 내 마음이 풀어지면서 더 멀리 하나님께로 보내주고, '나 자신도 하나님께 기도생활을 해볼까' 하고 깊이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완고한 옛 사람이, 바로가 벌써 한 단계 더 푸는 것입니다.
3.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그러자 어떤 모습으로 바로가 이야기합니까? 10장 10절을 보십시다.
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 말을 현대판으로 바꾸면 "좋다. 금요 기도회도 가고,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마음대로 기도하고, 마음대로 가라. 그러나 당신만 예수 믿어라. 자녀들에게 강요하지는 마. 자녀들의 신앙은 각자 그들의 신앙이야. 그들이 다 이다음에 때가 되면 자기 신앙으로 예수 믿고 해. 종교는 자유야. 너무 그렇게 강요하지마. 내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 줄께 저녁 예배까지 가자고 요구하지마. 우리 가족에게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지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이 옳은 판단인줄 아십니까? 바로의 말입니다. 사단의 말입니다. 바로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 가거라. 멀리 가라. 그러나 너희 남자들만 가라. 자녀들은 데려 가지 마라." 우리 가운데 이런 생각이 나면 '아 바로가 내 속에 들어와서 똑같이 붙잡고 있구나. 아직도 옛 사람이 깨지지 않았구나' 생각하시면 정확합니다.
4.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가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홉 번째 재앙 어두움, 흑암의 재앙을 애굽에 내리십니다. 흑암의 권세가 애굽 전역에 드리우고, 캄캄함이 임해버렸습니다. 마치 일식 현상이 일어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홉 번째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리시니까 애굽 전역에 어두움이 있어서 3일 동안 사람들이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한 단계 더 풀어줍니다. 10장 24절을 한번 보십시다. 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가장이 처음에 예수 안 믿고 거부하다가 조금씩 사업이 잘 안되고 하다가 조금씩 마음이 녹아져서 "그래 예수 믿어보자. 그러나 너무 깊이 믿지는 마. 혼자 깊이 믿어. 그러나 자녀들까지는 강요하지마."끝까지 버티다가 나중에는 "그래 우리 자녀들까지 다 데리고 가자. 나도 데려가려면 데려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다 신앙을 권유해서 우리 자녀들까지 다 끌고 가자. 좋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헌금 갖다 바치지마."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바치고 교회에 바쳐서 선한 사업을 하는데 인색하고, 바치면 이상하게 너무 아까워 하는 생각.이런 마음이 들면 '내 속에 바로가 아직도 들어가서 네 번째로 끌어당기고 아직 이것 붙잡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완전 출애굽을 시키지 않고, 바로가 끝까지 매달리는 모습이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속에 똑같이 존재합니다. "내 모든 것 주신 것은 다 아버지께서 주신 것인데 아버지께서 바치라고 하는 것 기쁨으로 바치지는 못하고 아까워서 절대 교회에 헌금 바치지마"하며 붙잡고 있는 것은 아직도 내 속에 옛 사람이 깨지지 아니하고 내 속에 강팍한 마음이 깨지지 아니해서 그렇게 발악하는 것 아닙니까?
부부생활, 부부관계 속에서도 이런 것이 많이 보입니다. 남편은 신앙이 좋아서 때마다 감사헌금하고, 십일조 생활도 하고 싶은데 깍쟁이 부인이 십일조 생활 안하고, 감사헌금 안하고 경우가 있습니다. 꼭 이 헌금 문제 때문에 부부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인은 좀더 "내가 하나님 앞에 내게 있는 물질 내가 뭐 다 가지고 갈 것인가? 조금씩 한 주에 만 원, 이만 원 씩 하고 싶은데"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해요. 남편은 "뭘 그렇게 갖다 바치느냐?" 그래서 마음속에 고통을 느끼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양과 소도 가져가야 하겠습니다. 이것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막 단계를 쓰십니다.
5. 가거라. 다 가지고 가거라. 완전히 가거라.
마지막 열 번째 단계 하나님의 방법 마지막 열 번째 단계가 무엇입니까? 장자의 죽음의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사단을 심판하고, 바로의 지역에 죽음의 심판을 내려 버리십니다. 죽음을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그 때 바로가 손은 들었습니다. "가거라. 다 가지고 가거라. 완전히 가거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죽음의 재앙. 이것은 내 개인에게 적용시켜 보십시다.
아무리 하나님이 고난을 주셔도 내 마음이 조금씩 녹아지는데 완전히 깊은 신앙의 단계까지 들어가지 않습니다. 완전하게 이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내 육체의 포로에 잡혀 있고 육체의 소유욕에 아직도, 많이 누그러졌지만 완전히 거듭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내 욕심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아 나는 죽었지. 나의 육신은 죽었어. 난 죽은 사람이야. 나는 죽었어. 내 욕심아 나는 죽어 버렸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와 같이 고백할 수 있을 때 바로가 완전히 풀어줍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죽음의 재앙을 받고 그 날 밤에 유월절 어린양도 잡힙니다. 모든 애굽 지역의 장자들은 다 죽습니다. 이 죽음의 심판 앞에 바로는 두 손 바짝 들어버리고 완전히 보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 속에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아직까지도 바로가 있습니다. 완전한 참 해방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2000년 전에 십자가의 우리 주님과 함께 내 육체는, 내 육신의 소유욕은, 내 육신의 모든 자존심과 욕심은 이미 죽어버렸다고 말입니다. "내 육신아, 내 속에 거하는 바로야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다. 나는 죽은목숨이다." 우리는 그렇게 될 때 그 순간 참 해방을 경험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경험합니다.
어떤 집사님께서 자부님에게 서러움 참 많이 당했습니다. 집사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부와 부딪힐 때 나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난 죽었어." 하고 내가 죽어 버리면 됩니다. 죽지 않으면 자부 생각에 '이것들이 내가 평생 길러놨더니 이 늙은 어미를 천시한다'고 분히 여겨져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근심걱정 하면서 나는 꽉 눌려서 고통 속에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데 왜 이런 고통이 나를 누릅니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 자존심은 벌써 주님과 함께 2000년 전에 죽어 버렸어" 그 집사님 말씀이 "난 죽었어 이미"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 진답니다.
죽었다 생각하니까 영적 내 영혼이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영적 참 자유와 참 해방의 기쁨을 내 속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고귀한 말씀입니다. 나는 예수 믿어 영적인 해방을 누리고 살고 있는가? 너무나도 어렵고 너무나도 곤고한 세상 속에서 참 해방을 느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무디 선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참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교회에 와서 십자가를 볼 때 '아 나는 이미 죽었지, 여기에 주님이 달렸는데 내 죄 짐을 지고 내가 같이 죽었어. 난 죽었어' 이것을 내 자신에게 선포하고 내 옛사람에게 선포할 때 그 바로가 내 속에서 나를 풀어 버립니다.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나의 영혼은 해방되어 참 자유함 속에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음을 기억하십시오. 아홉 번째 재앙까지는 안됩니다. 열 번째 죽음,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참 해방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출애굽사건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출애굽의 5단계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기억하십시오. 교회에 올 때마다 나는 저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 박혀 죽어 버렸음을 인정하시고 여러분의 속 사람에게 나는 죽었다고 말하십시오.
드디어 바로가 손을 완전히 들고 참 출애굽이 시작됩니다.
사탄의 전략
출 8: 27-32
♠ 본문말씀
27/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서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 서론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출1장에 이 사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데 감독자를
세워 철저히 감독을 합니다. 무겁고 힘든 일을 시킵니다. 바로를 위해 거대
한 성을 쌓게 합니다. 이것은 흙에 속한 삶이었습니다. 그 결국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사단은 수많은 종교인들을 향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를잘 모르는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감독자를 세웠습니다. 어떤 사
람에게는 돈으로, 지식으로, 명예의 감독자를 세워 철저히 감독시키는 것입
니다. 수 천년이 지난 오늘날도 사단은 끝까지 종교를 가진 그리스도인들
에게 감독자를 세워서 그들을 철저히 감독합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 권력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사단의 전략이 있습니다.
그러면 청소년들의 감독자는 누구입니까? 청소년들이 방황을 합니다. 돈,
음란, 문화의 감독자에 의해 죽어갑니다. 부모님들이 영적 감독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학원, 과외에 투자하고 많은 것을 배우
게 하지만 영적으로 방치된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번 주에 한 아이
에게 전화를 계속 했습니다. 중등부 임원입니다. 토요일 주일 1박2일동안
학교에서 수련회를 간다고 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교회를 가야하는데 네
가 한번 총대를 메라고 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니까 자신 있게 한
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성적이 떨어지고, 매를 맞아도 복음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라고 했는데, 오늘 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망이 조금 됩니
다. 누가 하나 말해주지 않습니다. 주일날 수행평가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
지 않습니다. 그런 결단력이 없으면 이 시대에 그루터기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여러분들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단의 말들, 행동
들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아이의 감독자가 될 것입니
다.
오늘날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이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시대
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 마실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세대를 향해
서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있습니
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영이 죽었습니다(엡2:1).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자마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묻
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위치를 묻는 것입니다. 아담은 내가 벗었음으로
나무 뒤에 숨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누가 벗었음을 고하였느냐고 묻습니
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에 목적을 둔 삶을 살
아가고 있습니다. 결단 없는 신앙은 자라지 못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유
혹을 합니다.
1. 너무 멀리 가지 말라(출8:28)
타협과 방해 공작을 끊임없이 하는데, 바로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말
했습니다. 언제든지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중간적 위치에 두기만 하면,
돌아올 수 있다는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불신앙으로 가득 찼습니
다. 노예근성입니다. 그들의 삶 전체는 미움과 시기와 상처로 얼룩졌습니
다. 또 이들은 애굽을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광야를 대처할 능력과 훈련
도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애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약점
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상처들, 실패한 경험들,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와 응어리들, 이스
라엘 백성들의 약점을 이용한 사단은 광명의 천사처럼, 우는 사자처럼 공
격합니다. 한 발짝만 벗어나면 음란의 물결이 판을 치는 이 땅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마4:1-11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을 창조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충분한 능력, 지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
단을 물리칠 때는 지혜와 힘이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습
니다. 이것은 모범입니다. 충분한 능력과 지혜로 이길 수 있지만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사단을 꺾는 모
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까지, 죽는 날까지 자기의 의견이
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입니다. 33년 동안 살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죽
기 싫었지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나를 죽이셔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견해나 주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
도록 철저히 죽어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
범이 되는 사건입니다. 너희도 봉사하고 헌신할 때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
다. 예수님은 모델이요, 샘플입니다.
2. 안일(출10:9-11)
바로는 어린아이와 여자는 남겨두고 건강한 남자만 가서 하나님을 섬기
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설득력이 있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입니다. 남자도
가기 힘든 길을 어떻게 여자와 어린아이가 가겠느냐? 그러니 남자만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대신 여자와 어린아이는 고센 평
지에 머물러 있으라는 안일로 사단은 유혹합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안일
입니다. 안일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도 믿음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가 전혀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그
대로 있는 것입니다. 안일은 황량한 모래밭으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거센
바람을 싫어합니다. 고센 평지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구출한 백성입니
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고 7족속을 멸해야 합니다. 안일은 심령을 부패케
만들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전진했듯이 전진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나의 현장이 말씀으로 정복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곳곳을 점령해야 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안일한 삶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개인에게 역사하는 흑암의 세력
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만 내가 주는 땅으
로 가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일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창13장에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
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롯이 선택한 곳이 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풀이 넉
넉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목축업을 하기에 좋은 곳을 선택했습니다. 임시
보기에 안일한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편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앞
에 물어보지 않고 자기 생각이 원하는 곳으로 안일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안일 너머에 하나님을 떠난 죄의 도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그
러나 자기가 선택하고 계획하고 갔으면 좋은 소식이 들려와야 할텐데, 안
일한 길의 결과는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믿지 않는 자와 연합니다. 한 사
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긴급한 상황에서도 지체하는 안
일한 롯의 모습, 불륜의 자식, 그것이 중동 비극의 시작입니다. 미국 테러
사건의 원인이 이것입니다. 한번의 불신앙으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중동의
비극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안일은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듭니다.
왜 안일한 상태에서 있으면 안 되느냐? 지금은 휴전 상태가 아니라 전쟁
상태입니다. 영적 전쟁터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대
입니다. 하나님은 그 군대의 사령관, 성경은 만군의 주라고 나왔습니다. 엡
6:10-20에 전신갑주를 입으라, 무장하라, 그리고 전진하라고 했습니다. 전진
중에 있는 군인은 절대로 안일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터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임원들을 데리고 영화를 가끔 보러 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영화
값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애들은 염치가 없습니다. 염치를 길러야
합니다. '리베라메'를 봤는데, 한 아이가 끝나고 웁니다. 그런데 저는 눈물
이 메말라서 영화를 보고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TV 프로를 보면
서 가끔 울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보고 플 때' 이 노래만 부르면 가슴이
저립니다. 우리 어머님은 군대 생활하면서 저에게 면회를 온 적이 없습니
다. 강원도 골짜기에 있었는데, 한번 오면 자고 가야 하기 때문에 못 오시
는 것입니다. 본인은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주일은 본 교회에서 지켜야 하
기 때문에 오지를 않습니다. 제대하는 날 중대장이 불러서 얼마나 속을 썩
였으면 부모님이 면회를 오지않냐면서 밥을 사 준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12월이면 출산을 하는데, 걱정이 됩니다. 아들을 낳을까, 딸을 낳을까.. 중
등부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중학교 여자아이들은 너무 잘 삐진다는
것입니다. 중등부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 있는데, "강도사님 닮았
네."입니다. 그러면 상처를 받습니다. 얼굴이 크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
는 아이들에게 설령 공부를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외모로는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고등부 사역자는 외모가 떨어져야 합니다. 아이들
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별명이 호빵맨입니다.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돈이 있으면 뜯어고치겠다고 합니다. 저는 성경 속에서 자
신을 보라고 합니다. TV를 보면 낙심하지만,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택
하신 족속이라는 것과, 그 분이 직접 오셔서 피를 흘리며 내 자녀라고 인
치신 귀한 존재라는 것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심정으로 200지교회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 결론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홍해
를 건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애굽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서, 홍해를 건너
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영적 홍해는 다른 말로 하면 갈2:20절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10:1-2절에 우리의 선조들이 다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
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수 천년이 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 사건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자신, 생각, 마음과 육체가 원했던 것, 이것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그것을
홍해 바다에서 수장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으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불신앙, 인본주의를 꺾어야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수 천년이 지난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을 세례라고 합니다. 십
자가에서 내 죄와 가문의 저주가 끝이 났습니다. 다가오는 문제는 내 문제
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입니다. 그 때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고 날마다 죽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노년에 매일 죽는다고 고백을 했습니
다. 날마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모습이 수장되어
야 합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하고 추구했던 것이 있습니다. 더 지혜롭
게 할만큼 탐스러운 그것이 홍해 바다에서 수장되어야 합니다. 나의 인본
주의, 불신앙이 홍해바다에 죽어 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
을 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잘 죽지 않습니다. 생각이 얼마나 죄성에 찌들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날마다 말씀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이 말씀에 정복되지 않고서는 죽지 않습
니다.
그러면 자신이 죽지 않았을 때는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삿2:10절에
한 세대만에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선조들은 광야에서
해가 멈추는 것도 체험하고, 7족속이 무너지는 것을 체험하고, 요단이 갈라
지는 것도 체험했는데 어떻게 100년 동안 여호와를 알지 못했을까요? 기적
입니다. 한쪽에서는 이방민족의 관습과 제도를 즐겼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혼합되었습니다. 혼합은 서서히 망합니다.
안일한 삶은 율법과 복음이 혼합되어졌습니다. 말씀과 세상이 혼합되어
졌습니다. 주일과 일요일이 혼합되어진 세상을 향해서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혼합이 얼마나 무섭냐면, 창6:1-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원하는대로 취했습니다. 노아 홍
수의 결정적인 출발점은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취한 것입니다. 혼합 신앙은
망하게 됩니다. 내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지지 않으면
나도 혼합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
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말도, 행동도 오직 예수! 예수의 사상
화, 체질화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
다. 그런데 그들이 그 모든 사상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홍해를 갈 수 있
습니까? 광야 길을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뜨거운 태양과 추위 속을 어떻
게 갑니까? 자기 것, 자기 생각으로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광야 길은 어떤
길입니까? 구석구석 음란의 물결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덤벼들고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지식으로, 신학으로 못 갑니다. 그래서 하
나님은 자기 생각, 모든 것들이 홍해에서 수장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 - 기도제목
하나님은 분명히 내 자신이 죽는 방법을 한 가지로 말했습니다. 말씀입
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
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무슨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는 자를 통해서
지역에 말씀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에 승리해야 합
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들었지만 다시 한번 회복되어야 할 것이 단1:1-10
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쓸 수밖에 없는 그릇입니다. 1-9절에 다니엘에
게 죽음의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
습니다. 성경에 지혜가 있고 민첩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0일 동안 기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문을 닫고 하면 됩니다. 지하에서 하고, 묵상으로 하
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 위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에 세 번씩 기도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그렇게 길러야
합니다. 내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일날 학교를 가야 하느
냐? 수행 평가를 해야 하느냐? 모의고사를 봐야 하느냐? 가르쳐 주어야 합
니다. 아니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토해버린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치에서 살기를 바랍니
다. 안일을 파괴시키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수아, 모세의 심정으로 지역을 정복하고 가정
에 역사하는 어둠의 세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부수는 능력이 있기를 간
절히 바랍니다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출 8: 28-32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삽니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을 거꾸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잊지 않을 것과 잊을 것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람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온 손님을 위해 택시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 가지고는 자기가 타고 갔답니다. 한참 가다보니 어딜 가는지 몰라 생각해보니 손님을 위해 잡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와서는 또 뭐 때문에 택시를 잡았는지 몰라서 그냥 택시 요금만 주고 택시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웃으시는데 사실은 죄에 대하여 인간의 모습이 이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른 길로 가고, 뭐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다가 돈만 없애고 후회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바로의 머리가 새 머리라고 했지요. 사실은 새 머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새대가리예요. 그런데 이제 보니 새 머리도 아니고 물고기 머리에 불과합니다. 똑 같은 잘못을 금방 또 잊어버리고 다시 반복하는 물고기 머리예요. 얼마 전 저의 작은아이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글을 재미있다고 읽어주었습니다. 제목이 '물고기의 분노'입니다. "물고기 왈 당신들 말야, 수족관에 나를 키우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달랑 두 마리 집어넣고 물래 방앗간 설치하는 건 좀 오버 아냐? 그리구 말이야,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고 말하는데. 당신들이 시간 재봤어? 그리구 말이야,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구 말하는데, 당신들이 시간 재봤어? 재 봤냐구? 음, 또 뭐였더라, 아! 그리구 말이야, 당신들이 내 기억력이 3초라구 말하는데, 당신들이 시간 재봤어?". 물고기 기억력 3초 맞죠? 하나님의 재앙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작은 미끼에만 정신을 팔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멀리 보지도 못하고 앞날을 생각도 못하고 현재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래는 또 다른 재앙을 자초합니다. 이것이 바로의 물고기 머리입니다. 바로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머리가 하나님과 비교해보니 이것밖에 안됩니다.
첫째, 바로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타협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말은 언제든지 병거를 이용하여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거리를 말합니다. 보내기는 하되 언제든지 잡아 올 수 있는 거리에 가 있게 하려는 잔꾀입니다. 보내기는 해야겠고 보내기는 싫고 해서 하는 타협안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형식적 신앙을 요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참된 자유를 유보하여 언제든지 낚아 챌 수 있는 영역 아래 성도를 묶어 둘려는 개략이 항상 있습니다. 교회는 가되 필요하면 못 가게 하고, 언제든지 예수 믿는 자리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세상의 의도입니다. 언제든지 죄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조건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죄의 도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후서 2:22에서 말한 대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한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진흙에 자신의 몸을 다시 맡깁니다. 마귀의 붉은 손에 다시 내 영혼을 의탁합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에게 데려다놓으면 다시 돌아갑니다. 완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다시 죄로 돌아갈 만한 거리에서 반쯤은 항상 죄로 물들어 삽니다. 이것이 멀리는 가지 못하는 비신앙적 자세입니다. 이것은 반(半) 신앙적 자세가 아닙니다. 절반의 신앙은 없습니다. 완전한 신앙이든, 불신앙이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적당히 믿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위선적으로 만들고, 자기 중심적 신앙에 머물게 합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다시는 죄의 자리에 안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곁에서 함께 동역하던 일꾼들도 다시 세상 즐거움에 빠지고 세속으로 돌아갔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딤후 4:10). 지금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 죄는 또 다시 찾아옵니다. "죄의 길에 서지 말라"고 합니다. 죄의 길에 서서 죄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습니다. 죄의 길에 서 있으면 죄를 짓게 되고, 죄의 길에 서 있는 자세가 죄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 앉지 말라"고 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오만해집니다. 그 자리가 오만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가까이 있지 말고 아예 멀리 돌아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8:11에는 예수님께서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자유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시는 옛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상과 가까이 있으면 언젠가는 세상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시는 옛 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과 가까이 있지 말고 멀리 떨어져 완전히 결별하여 도라갈 수 없다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토마스 왓슨이 말합니다. "죄는 세상을 사용하는데 있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데 있다". 세상은 사용할 만큼의 거리에 두십시오. 사랑할 만큼의 거리에 두는 것이 죄를 짓게 되는 이유입니다.
둘째, 바로는 모세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합니다. 중보 기도는 참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중보 가도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최고의 중보 기도는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중보 기도입니다. 결과적으로 멸망을 당했지만 멸망당할 도시를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한 아브라함의 중보는 참 좋은 교훈이 됩니다. 성경은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5:44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중보 기도를 명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22:32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베드로를 중보하십니다. 누가복음 23:34에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시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중보 기도는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5에는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바울도 권합니다. 바울은 이기적 목적에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하는 중보 기도는 참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신앙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기도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는 기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가끔 어떤 선교사나 일을 시작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 분들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계획을 다 가지고 와서 설명한 다음에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말은 "좀 도와주십시오"라는 말로 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물질과 대치될 수 없습니다. 진실성이 없는 기도는 듣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지방에서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동네의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돈을 두면서 권능을 주어 안수하면 성령을 받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책망합니다. 그 때 시몬은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행 8:9-24)라고 하였습니다. 시몬은 재물도 생명도 상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시몬은 바로와 같은 종류의 중보 기도를 요청합니다. 자신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게 해 달라고 중보 기도를 요청합니다. 회개 없는 기도가 응답되겠습니까? 성도를 삼켜 버리는 두 종류의 마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도를 적게 하도록 만드는 마귀요, 다른 하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귀라고 합니다. 이기적인 기도만 하게 만드는 마귀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두 마귀 중에서 기도를 안 하게 하는 마귀보다도 기도를 적게 하도록 하는 마귀가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드리는 듯 마는 듯 하는 기도로서 양심의 자위물로 삼기가 쉬운데 이러한 자위야말로 무엇보다도 유해한 치명적인 허위의 생활을 연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셋째, 모세는 바로에게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말라고 합니다.
바로는 또 다시 거짓 참회합니다. 지난번 개구리 재앙 때와 같이 다시 거짓을 행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거짓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바로의 위선적 회개는 자신의 순간적 위험을 피해보려는 가식이었습니다. "악어의 눈물"이란 말을 아십니까? 악어가 먹이를 삼킬 때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이 눈물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악어가 큰 고깃덩이를 삼킬 때 슬픔이나 참회 때문이 아닙니다. 욕심사납게 먹이를 탐내 종종 자기 입보다 훨씬 큰 덩이를 삼키기 때문에 이때 눈물샘이 눌리게 되어 눈물이 납니다. 악어의 눈물을 참회의 눈물로 본 것은 로마의 사학자 플리니우스가 그의 책에서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것은 잘못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에서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위선적인 거짓 눈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일강에 사람을 잡아먹는 악어가 있었는데 그 악어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죽이고 꾸짖은 다음에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거짓 눈물을 흘리는 악어가 하루는 나일강에서 한 아기를 빼앗았습니다.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는 울면서 애를 돌려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악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애를 돌려줄 것인지 아니면 돌려주지 않을 것인지 그것을 맞추기만 하면 돌려줄테니 대답해봐라." 난처한 물음이며 억지였습니다. 악어는 이미 아기를 잡아먹을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아기를 돌려주실 겁니다"라고 말하면 악어는 "아니 틀렸다"라고 말하며 잡아먹을 것입니다. "당신은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아니, 난 돌려주려고 했는데"하면서 답이 틀렸다고 할 것입니다. 답을 어떻게 하든 결국 아이는 잡아먹힐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어논법'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악어논법은 자기 위주의 궤변입니다. 악어가 그런 문제를 낸 것은 아기를 잡아먹기 위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물론 악어가 잡아먹고 말 거라는 속셈을 눈치 채고 맞는 답을 할지라도 악어는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어논법은 거짓이며 속임수입니다. 바로는 나일강의 악어처럼 자신의 말로 궤변을 말하며 거짓으로 모세와 아론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대 이 지구상의 악어가 누군지 아시니까? 제가 볼 때는 미국입니다. 모든 것을 미국은 힘을 이용하여 악어논법을 구사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의 상품들이 미국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나 미국의 법에 따라서 저촉을 받습니다. 이라크를 보세요. 무기 사찰을 받든 받지 않든 미국은 이라크를 폭격하려고 할 것입니다. 악어논법입니다. 여중생 사망사건은 우리 나라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입니다. 그리고 미국만큼 세계의 경찰 국가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힘을 하나님의 은혜로 사용하지 못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의정부의 장갑차 사건은 관제병이나 운전병이나 다 무죄라고 합니다. 미국의 법에 의하여 무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장갑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입니까? 미국의 법이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중요한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길보다 장갑차가 넓고 인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길의 너비는 3미터 50센티미터이고 장갑차의 차폭은 3미터 65센티미터랍니다. 그렇다면 이동 도로를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선 유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도로가 차량전용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보행자가 우선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법입니다. 미국은 철저하게 보행자가 차량보다 우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죄입니까? 이것이 미국의 실수입니다. 우리는 미국과의 우호관계가 깨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미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우방인가를 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 힘만 믿고 악어논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거부합니다. 미국은 청교도와 총잡이들이 함께 들어간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에 은혜를 주셔서 총잡이가 아니라 청교도들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청교도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은 총잡이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총잡이의 나라가 되고 힘에 의존하는 나라가 되면 그 대가는 그들이 되받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재앙의 대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을수록 겸손하고 공평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상실되기에 반미가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이시며, 진리이시며,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악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입으로 아첨하며 자기 혀로 거짓을 말하며".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사회상을 보세요.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6:13). 이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12절). 예레미야 8:10도 똑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거짓을 행하면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가 됩니다. 거짓이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우리 사회를 보세요. 거짓, 부정, 부패, 부도덕 이런 것들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어느 빵장수가 빵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 아침 버터를 만들어 공급해 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납품되는 버터를 보니까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 보였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납품된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보았는데, 예측한 대로 정량에 미달되었습니다. 화가 난 빵장수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이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체포된 농부의 진술을 듣고 놀랬습니다. 버터를 공급했던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자기의 물건을 공급받은 빵장수가 만들어 놓은 1파운드 짜리 빵의 무게에 맞추어서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빵장수가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 자신의 1파운드 짜리 빵의 규격을 조금 줄이고, 양을 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 버터가 함량 미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거짓을 동원한 대가는 자신이 치른 것입니다. 거짓의 대가는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속이는 자는 속습니다. 바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깁니다. 또 다시 거짓을 행합니다. 이 모든 거짓의 대가는 자기와 자기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결론
오스트랠리아의 원주민의 전통 풍습 가운데는 부메랑으로 사냥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메랑은 원래 사냥도구입니다. 부메랑은 던진 사람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메랑을 잘 던지는 사람은 정확하게 사냥감을 맞추고 다시 자신의 손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도 부메랑의 원리를 닮습니다. 우리가 던진 대로 다시 그 대가를 돌려 받습니다. 바로는 지금 부메랑을 던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자신이 맞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더 큰 재앙입니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할 만큼 진솔하고, 거기에서 덕을 배울 만큼 영리하며, 그 것을 고칠 만큼 강해야 합니다. 성자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름은 인간적이지만, 계획적인 죄에 머무름은 악마적이다". 거짓에 머물지 마십시오. 나의 거짓은 내게 돌아옵니다. 내가 던진 부메랑에 내가 맞는 어리석은 사냥꾼이 되지 맙시다. 돌이킬 줄 알아야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의 연장입니다. 세상을 교회 대하 듯해야 합니다. 날마다 예배하듯 거짓을 행치 말고 깨끗하게 사십시오. 세상에서 완전히 돌이켜 주의 품에 사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