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인애를 제사보다 더 원하심
호세아 6 : 4 – 11(마25:31-45)
여호와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양이나 소를 잡아서 제단에 올려놓고 불사르는 제사와 번제를 드리며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제사를 원하시는 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애’란 단어가 신약에는 없지만, 구약에는 33번 있습니다. 그중에 호세아서에 다섯 번 있습니다. 신약에 ‘인애’란 말이 없다고 해서 ‘인애’를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신약에 ‘인애’인 ‘긍휼’과 ‘자비’에 대한 말씀으로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 호세아가 말한 이 말씀을 인용하여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12:7). ‘인애’를 ‘긍휼’과 ‘자비’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아,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고 부르시고 너희에게 인애가 없다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4,5).
국어사전에 ‘인애’(仁愛)란 ‘어진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사적으로 ‘인애’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으로 성경은 말씀하시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인애’라고 합니다. 인애가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위선적일 수 있습니다.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이혼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맡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끝까지 참고 사랑하는 것도 ‘인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에브라임’(북이스라엘)과 유다’(남유다)에 ‘인애’가 없음을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4,5)라고 말했습니다.
아침 구름이나 이슬은 해가 솟아오르면 즉시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처럼 인애를 찾아볼 수 없어서 탄식하여 한 말입니다.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인애가 없음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당했습니다(5).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B.C. 722년).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했습니다(B.C.586년).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제물을 불사르고 제사와 번제를 지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은 무수한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을 불사르고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시며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1:12,13).
‘인애’가 없는 그들의 제사는 제사와 아울러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인애’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와 함께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인애’가 없는 제사(예배)를 드리는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7)라고 말했습니다. ‘인애’가 없는 예배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언약을 파기한 것처럼 에브라임과 유다도 여호와를 배반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됨을 포기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인애가 없는 제사를 드리는 그들에게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5)고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겁주는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태양이 떠오름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빛이 모든 어두움을 밝히듯이 그들의 모든 악행이 그 심판에 의해 밝히 드러나게 되어 숨길 수 없는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제사(예배)를 들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애’가 없는 예배는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한 가증스러운 예배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자비’는 그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애’는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사마리아 사람이 불쌍히 여겨 그를 고쳐준 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 만난 그의 죽어 버려진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도와주어 살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인애’가 없었지만 사마리아인은 ‘인애’가 있었습니다.
맹인들이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은 예수님의 ‘인애’였습니다(마9:27-3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심판하여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실 것입니다.
그때 오른편 의인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마25:37)라고 말했습니다. ‘음식을 대접하여’라는 말씀을 개역판 성경은 ‘공궤’(供饋)라고 했습니다.
의인들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언제 ‘공궤’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공궤’는 자신이 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이 한 ‘공궤’를 ‘내게 한 것이라’(마25:40)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궤’는 받은 은혜와 복을 감사해서 굶주리는 자에게 음식을 베푸는 ‘인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인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시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2,4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악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시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25:44,45)라고 말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공양’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한 일들을 자랑하며 알아주기를 바라는 ‘공양’(供養)은 ‘인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공양은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마25:45)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너희 자신을 위해서 ‘공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와 악인으로 구분하는 심판의 규정은 하나님을 잘 믿고 직분을 받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많은 헌금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인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공양’하는 마음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 더 많은 복을 받게 된다는 불교를 비롯한 이방 종교의 신앙 중심입니다. 흰두교의 성직자들은 때가 되면 길에 나가서 사람들로부터 공양을 받아 식사합니다.
‘공양’을 하면 베푼 것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복을 받게 된다는 믿음은 불교나 흰두교를 중심으로 사이비종교의 신앙 중심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공양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적 오해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공궤’보다 ‘공양’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공양 신앙’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공양’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인애’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유다여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11)고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추수’는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어서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는 최후의 대심판 입니다. ‘인애’가 없는 믿음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13).
야고보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6)고 말했습니다. ‘인애’가 없는 교회와 성도를 구원받을 수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고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음부에 던져진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럼에도 ‘인애’가 없었기 때문에 음부로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인애’가 없는 예배는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애가 없는 허울 좋은 예배를 역겨워하시고 미워하십니다.
‘인애’가 없는 찬송과 기도와 예배를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인애’가 없는 제물(헌금)은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실 정도로 역겨워하십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우리에게 ‘인애’를 찾으시는 ‘여호와를 알자’고 말했습니다(3). 우리에게 인애를 찾으시는 여호와이심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새벽빛 같이 나타나셔서 이른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복을 주십니다(3).
‘이른 비’는 씨 뿌리는 때 뿌린 씨가 싹이 나고 자라게 하는 비이며, ‘늦은 비’는 자라서 추수할 때 알곡을 영글게 하는 비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인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에게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모두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여호와를 아는 자가 됩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새벽빛 같이 나타나셔서 심판하실 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인애를 알고 행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