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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
신하에게 굽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자신보다 못한 아랫사람에게 뜻을 굽혀 큰일을 성취한다는 말이다.
屈 : 굽을 굴(尸/5)
臣 : 신하 신(臣/0)
制 : 다스릴 제(刂/6)
天 : 하늘 천(大/1)
下 : 아래 하(一/2)
(유의어)
극천하이굴신(克天下而屈臣)
출전 :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자신보다 못한 아랫사람에게 뜻을 굽혀 큰일을 성취한다는 뜻으로, 극천하이굴신(克天下而屈臣)이라고도 한다.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 편에 나오는 말이다.
진(秦)나라와 조(趙)나라의 장평(長平) 싸움은 진나라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진의 소왕(昭王)은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때 그의 명장이었던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소왕에게 반대 의견을 올렸다.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닙니다. 장평 싸움에서 우리 진나라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죽은 자를 묻고 부상자를 보살피는 일로 재력을 전부 썼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는 비록 이 싸움에서 패하여 죽은 자나 부상자를 돌볼 여유는 없었지만, 온 국민이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며 부흥에 힘썼기 때문에 국력이 이제는 탄탄해졌으며, 군신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무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소왕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왕릉(王陵)에게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왕릉은 소왕의 명을 받고 출정하여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전력이 약화되어 악전고투를 하다가 패하여 5개 군단의 병사들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소왕은 이번에는 무안군을 출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무안군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싸움을 반대하였으므로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왕은 하는 수 없이 왕흘에게 이 일을 하도록 했지만, 그 또한 출정하여 수많은 사상자만 냈을 뿐 조나라 공략에 실패했다.
소왕은 무안군을 찾아가 “누워서라도 군사들을 지휘하시오”하고 말했다. 무안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조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그만 두십시오.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고도 천하를 잡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하에게 굽혀 천하를 다스린다(屈臣制天下)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조나라를 공격하고 저를 벌주시려고 한다면, 이는 신하에게 이기고 천하에게 지는 것입니다. 저를 이겨서 폐하의 위엄을 세우는 것과 저에게 굽히고 천하를 이겨서 폐하의 자리를 빛내는 것 중 어느 쪽이 낫습니까? ”
소왕은 무안군의 간언(諫言)에 기분이 상해 그대로 돌아왔다. 예부터 임금과 신하는 나라의 흥망이나 안위 및 백성들의 삶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현명한 임금은 신하의 조언을 수용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다.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
신하에게 허리를 굽힘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자신의 뜻을 굽히고 아랫사람의 조언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큰일을 이룬다는 말이다.
군주(통치자)가 귀를 닫고 고집을 부려 의사결정을 하면 큰 낭패를 본다. 심하면 권력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군주는 신하(참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지혜와 인내와 결단이 필요하다. 때로는 체면을 무시하고라도 자기의 고집을 꺾고 신하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에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인 기원전 306년(진소왕 47년) 진(秦)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 장평(長平)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총사령관 무안군 백기는 장평의 전투를 지휘하여 조나라를 크게 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진소왕은 다시 조나라를 치고자 했지만 무안군은 때가 아님을 들어 극구 반대했다. 하여 진소왕은 왕릉을 사령관으로 하여 조나라를 치게 했으나 실패하였고 뒤이어 왕흘을 보내 치게 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여 진소왕은 사직하고 병석에 누운 무안군에게 ‘누워서라도 군대를 지휘하라’고 하였으나 무안군은 屈臣制天下(굴신제천하) 라는 말로 왕을 설득하면서 끝내 사양하였다.
이때 무안군은 진소왕에게 “만일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꼭 조나라를 치시고 신을 벌하실 마음이라면 ‘신하를 이기고 천하를 잃는 결과가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라는 말은 임금이 신하에게도 굽힐 줄 알아야 천하를 마름 즉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 지나치게 자기 고집과 체면을 중시한 나머지 신하의 고견을 듣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고 훌륭한 신하까지 잃는다는 말이다.
현명한 임금은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자기 체면보다 신하의 훌륭한 고견에 더 집중한다. 그러나 소인배 임금은 체면을 중시한 나머지 자기의 체면을 구기게 한 신하를 처단할 뿐 그 고견을 듣지 않는다. 결과는 신하도 잃고 천하도 잃는다.
1. 귀가 닫힌 군주(통치자)
예나 지금이나 귀가 닫힌 군주(통치자)는 권력의 자아도취에 빠져 신하와 백성(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나라를 망치고 결국은 자기 자신도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거나 심할 경우 권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귀가 열린 통치자는 늘 겸허한 마음으로 신하들의 충언과 여론을 경청하며 바른 판단을 하려 애를 쓰고 자기 학습에도 매진한다. 그래서 뒷날 큰 업적을 이루고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
역사 속에서 그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연산군은 귀를 완전히 막은 군주였다. 그는 신하들의 직언이 불편한 나머지 직언을 듣지 않기 위해 간언하는 신하를 형장으로 끌고가 매질하는가 하면 조정 신료들에게 ‘신언패’를 착용하게 하여 말문을 막았다. ‘신언패’는 연산군이 직소(直訴; 일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윗사람 또는 상급 관청에 직접 호소하는 것)를 막기 위해 신하들에게 등청할 때 목에 걸고 다니게 한 패이다.
여기에는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이 드나드는 문이며, 몸을 망치는 도끼와 같은 것이다.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어느 곳에 있든지 편안하리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패를 목에 걸고 다니게 한 것은 누구도 자기에게 직언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도 용기 있게 충언하는 신하에게는 “왕권에 도전하려는 것이냐?”고 꾸짖으며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술과 연회로 나날을 보냈으며 폭정을 일삼아 조정 질서를 무너뜨림은 물론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중종반정이란 정변으로 모든 것을 잃고 유배 생활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일부에게선 대왕으로 불리는 숙종은 한편으로는 귀를 닫은 군주였다. 그는 46년의 긴 재임 기간 환국 정치의 달인이었으며, 장희빈이란 여인에 빠져 나라를 혼란 속으로 빠뜨리기도 했다. 그의 환국 정치를 당시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권력의 균형을 유지한 절묘한 정치로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환국 정치를 행할 때마다 많은 선비가 죽임을 당했고 권력이 상대방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숙종의 독선이 발휘되었다. 특히 숙종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숙빈 최씨 사이에 사랑싸움이 벌어지게 하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상당한 독선을 발휘하였다. 덕성스러운 인현왕후가 세자를 출산하지 못하였다. 여인에게 눈을 많이 돌린 숙종은 궁녀 중에서 장씨의 미모에 반해 희빈으로 등극시키고 희빈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인현왕후를 버선발로 내쫓는다. 그렇게 5년을 지낸 숙종은 장씨에게 정이 떨어졌는지 인현왕후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인현왕후를 저주한 댓가로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안 먹겠다고 악을 쓰니 세 사발이나 되는 약을 희빈 장씨의 입에 들이부으면서 사형을 시켰다. 장씨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시기상조임을 들어 강력하게 반대하자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서인을 대거 축출하면서 남인을 대거 기용하는 기사환국을 발휘한다. 여기서도 숙종은 신하들의 말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숙종은 중전과 함께 주변 여인들에게 사랑싸움을 붙여 놓고 그녀들을 살렸다 죽였다 했다.
이 과정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때 조선은 학문이 어느 정도 진작되고 안정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라가 거덜 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숙종의 일방통행적이고 감정적인 의사결정에 수많은 선비가 환국 정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축출되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숙종은 자기 수(壽)를 다했지만, 그의 사후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 때는 나라가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다. 다행히 뒤를 이은 영조에 의해 나라는 안정을 찾았다. 여기에 숙종의 독선적인 여자관계가 한몫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국부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민주주의를 망친 독재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나 건국사에서 학식이나 외교, 정치적 수완 면에서 특출하게 뛰어난 인물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될 때도 그가 원했던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추대되었다. 일제 강점기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는 과정에서도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해방 후에 그가 남한에 들어왔을 때도 국민은 이승만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승만은 권력의 자아도취에 빠졌는지 모른다. 그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면서 주변 간신들의 아첨에 눈이 멀어 갔다. 그래서 이기붕을 중심으로 한 충성 아첨파들이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하였고 이를 비판하는 재야인사들과 국민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결국 3.15 부정선거에 의한 규탄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국민의 소리를 듣는다면서 하야했다. 그의 권력과 존경받던 인품은 하루아침에 추락하였다. 아첨하는 측근에 둘러싸여 귀를 닫은 결과였다.
이렇듯 아무리 똑똑한 군주(통치자)도 권력의 자아도취에 빠져 귀를 닫고 자기의 뜻대로만 의사결정을 하고 신하의 충언을 멀리하면 결국은 나라를 망치고 권력을 잃게 된다. 군주(통치자)에게 중요한 것은 때로는 자기의 권위나 체면보다 신하의 올바른 충언을 귀담아 듣고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귀가 닫힌 군주(통치자)와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의 차이가 난다. 귀가 닫힌 군주(통치자)는 패역한 군주(통치자)가 되고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는 성공한 군주(통치자)가 된다.
귀가 닫힌 군주(통치자)가 아니라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가 되려면 권력의 자아도취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권력에 취하면 체면과 권위 의식에 빠져 신하의 올바른 충언도 자기의 잘못된 고집으로 무시하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기 쉽다. 또 일부 아첨하는 무리에게 둘러싸여 세상물정에 눈이 멀게 된다. 중국 한나라를 망친 십상시의 사례는 이에 대한 표본이 되기도 한다.
열린 귀를 가진 군주(통치자)는 자기의 권력과 체면보다는 신하의 옳은 충언에 더 무게를 둔다. 기울어져 가는 한나라(전한)를 다시 일으킨 광무제(후한의 세조)나 우리나라의 세종과 정조가 그랬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하들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신하들의 고견에 귀를 기울였고 신하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또한 학문을 장려하였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다.
언로(言路)가 막히지 않도록 매사에 주의하였으며 항상 인애(仁愛)로써 정사를 돌보았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고 중한 죄를 지은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고 백성들의 삶이 풍족해졌다. 신하들의 의견이 옳을 때는 거침없이 자기의 견해를 유보하고 철회하기도 했다. 또한 혈족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항상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려 노력하였다. 그런 시절에는 나라가 중흥했다.
중요한 것은 군주(통치자)가 신하의 의견에도 굽힐 줄 아는 열린 귀를 가지는 일이다. 그래야 천하가 번성하고 평화롭다. 고사에서 그것을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라 한다.
2.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의 유래
사마천의 사기(史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중국 전국시대인 기원전 306년(진소왕 47년) 진(秦)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 장평(長平)의 전투(이를 사기에서는 長坪之戰이라 한다. 이 전투는 전국시대의 명운과 향방을 가른 전투가 된다. 이 이후 진나라는 전세의 승기를 잡아 戰國의 맹주가 된다)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는 조나라를 크게 이겼으나 그 손해 또한 조나라 이상으로 막중하였다. 그래서 쫓겨가는 조나라 군사를 더 이상 추격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에 진나라는 빼앗은 땅을 관리하도록 하고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진나라 소왕(昭王)은 병력이 회복되었으므로 다시 한번 조나라를 칠 계획으로 대신들과 상의했다. 이때 명장 무안군(武安軍)이 나서서 이를 말렸다. 백기 무안군은 장평의 전투를 지휘하여 조나라의 병졸 40만을 몰살시키고 큰 승리를 거두므로 진나라가 전국의 맹주가 되도록 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명장이었다.
그런 무안군은 조나라를 쳐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들었다. “지금 우리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는 것은 안 됩니다. 장평의 전투에서 우리 진나라는 대승을 거두고 조나라는 대패했습니다. 이에 진나라는 승리로 흥분하여 분위기가 들끓었고, 전사자는 정중히 매장하였으며, 부상자나 쇠약해진 사람에게는 후한 지원을 하여 돌보았습니다. 하여 나라에 대한 믿음과 사기는 충만해 있으나, 그런 일을 하느라 나라의 재정이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크게 패한 조나라는 전사자를 제대로 매장하지 못하고 부상자도 잘 돌보지 못하는 등 그 피해가 막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는 그런 와중에도 온 나라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나라의 부흥에 온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거기다가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어 정무에 힘써 왔습니다. 하여 상당한 부흥을 이루고 국력도 거의 회복되어 있으며 만약에 대비한 재정도 상당히 확충한 상태라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의 침공에 단단히 대비해 왔기에 섣불리 전투를 벌였다간 오히려 우리 진나라가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진나라 소왕(昭王)은 한 번 마음먹고 내뱉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기어코 왕릉(王陵)에게 명하여 조나라를 치라고 명령했다. 왕릉은 조나라와 싸움에서 다섯 군단(軍團)을 잃고 패배했다. 이에 소왕은 무안군으로 하여금 조나라를 치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무안군은 병을 핑계 삼아 사직을 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소왕은 병력을 증강시키고 황릉을 대신해서 왕흘(王齕)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치게 했다.
황흘은 아홉 달 동안이나 조나라 서울인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그러나 조나라 한단은 방어가 워낙 치밀하고 완강하여 진나라 군사는 사상자만 속출하고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초조해진 소왕은 병석에 누워있는 무안군을 찾아가서 억지로 일으켜 세워 “누운 상태라도 좋으니 전쟁을 지휘해 주시오”라고 간곡한 청을 담은 명을 내렸다.
이에 무안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제발 조나라를 치는 일은 그만두어 주십시오. 조나라를 치지 않아도 천하를 잡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屈臣制天下(굴신제천하) 라는 말은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꼭 조나라를 치시고 신을 벌하실 마음이라면 ‘신하를 이기고 천하를 잃는 결과가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을 이겨서 위엄을 세우는 일과 천하를 얻어서 성군의 위엄을 떨치는 것과 어느쪽이 나을 것인지요? 제발 신의 뜻을 살펴 주십시오.”
무안군 백기는 소왕의 출전 명령을 위와 같은 사유를 들면서 거절하였다. 소왕은 그 말을 듣고는 말도 없이 가버렸다. 뒷날 무안군은 이 항명 사건으로 소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조나라와의 전투도 실패로 끝났다.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라는 말은 임금이 신하에게도 굽힐 줄 알아야 천하를 마름 즉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 지나치게 자기 고집과 체면을 중시한 나머지 신하의 고견을 듣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고 훌륭한 신하까지 잃는다는 말이다.
현명한 임금은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자기 고집과 체면보다 신하의 훌륭한 고견에 더 집중한다. 그러나 소인배 임금은 체면을 중시한 나머지 자기의 체면을 구기게 한 신하를 처단할 뿐 그 고견을 듣지 않는다. 결과는 신하도 잃고 천하도 잃는다.
3.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가 되길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를 얻는 것은 신하(참모)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국민)의 복이다. 또한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에게는 인재가 모인다. 전제군주 시대에는 백성이 군주를 선택할 수 없기에 그것은 어쩌면 하늘의 몫이며, 순전히 군주의 몫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선 국민이 통치자를 선택할 수 있기에 상당한 부분 국민의 몫이고 책임이다.
과거의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정치에서도 귀가 닫힌 군주(통치자)를 얻느냐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를 얻느냐에 따라 나라의 번영과 안녕, 질서가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국민이 선택한 통치자가 귀가 열린 통치자가 되기를 국민은 간곡히 바란다. 그런 점에서 귀가 열린 통치자의 특성을 살펴보자.
첫째, 귀가 열린 통치자는 자기의 의견에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는 참모를 기용한다. 정치적 토론에서도 반대 토론자의 의견을 중시한다. 정책 결정을 위한 토론에서 자기중심적인 토론이 아니라 열린 토론을 중시하므로 누구나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유명한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 중대사를 토론할 때 항상 반대의견을 개진하는 토론자들을 끼워 넣어 격렬한 토론을 벌이도록 했다. 그래서 그 결정의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파악한 후 의사결정을 했다. 이처럼 반대파를 토론에 기용하고 끼워 넣는 것을 ‘악마의 대변인’을 넣는 것이라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중요한 회의에 관한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그 항목 중에 제일 먼저 세운 항목은 바로 케네디 대통령 자신이 회의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출석하면 회의에 참석한 모든 토론자는 결국은 자기의 의견에 눈치를 보고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의 중에 나온 모든 약점과 위험 요소를 찾아내어 그 내용을 자신과 제안자들에게 철저히 규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반론의 자유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반론자의 의견에 깊이 귀 기울이고 나서 의사결정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반론의 자유에 대하여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견이 어떠한 반론에도 논박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와, 애초에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미리 없다고 상징되는 경우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반증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어야 말로 자신의 의견에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이것 외의 방법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인 보증을 얻을 수 없다.”
밀이 위와 같이 반론의 자유를 보장하므로 보다 완전한 정책결정을 하는 것에는 마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지도자는 자신이 똑똑하고 엘리트라 여길수록 의사결정을 독단적으로 경솔하게 내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 특히 최고 통치자라 할지라도 그의 견해와 지혜가 부족하기에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과 성급한 마음을 통제하므로 올바른 결정에 도달하도록 하는 길은 반대자의 의견에 귀를 이울일 줄 아는 자세와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둘째,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는 항상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여론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다. 여론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여론을 경청하므로 자신의 정책을 수정하고 때로는 국민을 위한 설명과 설득에 노력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 판단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며 여론을 무시하면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정권이 위태롭게 된다. 여론을 무시하고 자기의 정치적 견해의 옳음을 고집하는 일은 곧 귀를 닫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셋째,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는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정치적 집단이나 정당의 의견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는 반대정당을 정치적 적이 아니라 파트너로 인식한다. 따라서 반대정당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대화와 설득을 통해 자기의 정치적 입장과 정책을 설명하면서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특히 집권자가 반대당의 의견과 반대 논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화와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체가 이미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반대파에게 대화를 요구하고 실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뢰 정치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 귀가 열린 군주(통치자)는 권위에 의존하기보다는 교화와 설득에 의존한다. 따라서 군주는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며 대통령을 포함한 최고 통치자는 국민 설득에 노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과 권위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신뢰와 이해에 의존한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는 대국민 담화와 국민을 상대로 하는 대담 등을 자주하여 기탄없는 의견을 나누고 국민의 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고 애를 쓴다.
케네디 대통령은 출근길 인터뷰의 명수였다. 이 출근길 인터뷰는 원래 영국에서 유래되었으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였다. 지금 미국 대통령의 출근길 인터뷰는 거의 생활화되어 있을 정도로 정착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과 항상 소통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기간 동안 이것을 일상화하겠다고 하였으나 얼마 하지 못해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렸다. 미국에서 이를 처음 시행한 케네디 대통령도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아 참모들이 중단을 건의했으나 케네디 대통령은 인내심을 가지고 유지하면서 발전시켰다고 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의 출근길 인터뷰 역시 교화와 설득에 의존하는 통치 방식이다.
군주정치 시대이건 민주정치의 시대이건 귀가 닫힌 통치자를 가진 국민은 불행해진다. 그리고 그 통치자의 권력 또한 위태로워진다. 귀가 닫힌 통치자와 귀가 열린 통치자의 차이는 그 마음과 행위의 겸허함에서 차이가 난다. 귀가 열린 통치자는 항상 겸허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기에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참모와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합리적 인내심으로 분위기가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며 또한 분위기가 성숙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귀가 닫힌 통치자는 조바심으로 성급한 의사결정을 일삼으므로 일을 그르친다. 우리나라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은 경연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는 시간을 즐겼으며 신하들과 학문을 학문을 포함한 모든 정책에 토론을 즐겼다. 그러기에 큰 업적을 이루고 나라가 융성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악마의 대변인을 존중하고 출근길 인터뷰에 충실했기에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 존 스튜어트 밀의 ‘악마의 대변인’의 견해에 비춰 본다면 최고 통치자가 자기 스스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만해지기 쉬우며 권력의 자아도취에 빠져 성급하고 그릇된 정치를 하기 쉽다. 아무리 똑똑한 정치인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이념과 행동이 자기도취의 틀에 갇히는 순간 독선과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기들의 견해에 빠져 그것만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며 오판하게 되고 국민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쉽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최고 통치자가 열린 귀를 가지는 것이며 여기에 겸허라는 중요한 인격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屈臣制天下(굴신제천하) 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길 줄 안다. 오늘날 한국에 그런 최고 통치자가 아쉽다.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
조조의 CEO 협상전략
대업을 이루고자 한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재라도 모두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전란 중에 유비의 식솔들과 함께 조조에게 붙잡혀 인질 신세에 놓인 관우. 조조는 관우를 극진히 대접한다. 인재를 알아 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던 조조에게 관우는 어떻게든 수하로 만들고 싶은 영입 대상 1호였던 것이다.
도원결의(桃園結義)한 유비와 장비를 배신하지 않는 관우에게 조조의 끈질긴 회유가 시작된다. 금주령이 엄한 상황에서 조조는 자신이 직접 담근 술과 안주를 내놓으며 격의 없이 주방 식탁에 마주 앉아 관우에게 술 한 잔을 청한다.
조조가 말했다. "(자리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유비의 식솔들을 유비에게 돌려 보내기로 했네. 장료에게 50의 정예병으로 호송하라 했네." 관우가 말했다. "(정중하게 두 손으로 잔을 받들고) 조 대인의 군자된 도리에 경의를 표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천하의 관 장군에게 군자 소리를 들으니 부끄럽구먼."
조조의 CEO 협상전략
1. 욕금고종(欲禽故縱)
대어를 낚으려면 작은 것을 풀어주라. 즉, 협상 초기에 상대가 '신세 졌다' 혹은 '빚졌다'라는 생각을 갖도록 뜻밖의 선물, 호의, 관용과 아량을 베푸는 것이다.
손자병법에는 이와 유사한 계책이 여럿 있다. 우선, '배를 먹으려면 오얏을 버려라' 하는 이대도강(李代桃畺)과 '옥을 얻고 싶으면 벽돌을 던지라' 하는 포전인옥(抛塼引玉)이 그것이다. 표현은 달라도 하나같이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덜 중요한 것을 희생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의 베스트셀러 '설득의 심리학'에 보면 설득의 법칙 5개 중에 '상호성의 원칙'을 제1법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여러 논증 사례도 제시하고 있는 데 그중 한 사례는 단순하지만 '상호성'의 본질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영어의 시제를 교육하면서 'I give(나는 준다)'의 미래 시제는 무엇인가란 시험문제를 냈다고 한다. 한 학생이 이런 답안을 냈다. 'I receive(나는 받는다).'
또한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마르셸 모스(Marcel Mauss)는 "인류 사회의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는 세 가지 종류의 의무가 있는데, 첫째, 선물을 주어야 하는 의무, 둘째, 선물을 받아야 하는 의무, 그리고 받은 선물에 대해 언젠가는 보답해야 할 의무를 말한다"고 했다. 항상 받기만 하고 전혀 갚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조조왈: "혹시 그거 아시는가? 금주령 위반자는 자네뿐이 아니네." 관우왈 "또 누가 있습니까?" 조조왈: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공자님의 손자." 관우왈: "공융 선생 말씀입니까?" 조조왈: "선생은 무슨... 그에게 달콤한 과일을 사양하게 할 순 있어도, 그에게 술을 사양하게 하는 건 자네가 조조군에 남는 것보다 어려울 걸세." 관우왈: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기뻐하는 관우)"
조조의 CEO 협상전략
2.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비수를 감추어라 즉, 상대를 은근히 추켜세우는 농담으로 친근감을 조성하고 재치 있는 농담으로 상대를 기쁘게 하라는 말이다.
현대 일본 정치의 대부로 일컬어지며 전후 일본의 외상이자 총리로서 이름이 높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일화를 소개한다. 1974년 가을 영국 국왕 부처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다. 후지산을 찾은 영국 여왕이 흐린 날씨 때문에 산 정상 보기가 너무 힘들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 그때 요시다의 넉살 좋고 재치 있는 한 마디에 영국 여왕의 불평은 봄눈 녹듯 녹았다고 한다. "후지산은 자신보다 아름다운 미인 앞에서는 부끄럼을 탑니다."
필자도 국제협상에서 험악했던 협상 분위기를 한 마디 유머로 화기애애하게 바꿔났던 기억이 있다. 한 기업체의 국제 클레임 협상 건으로 런던에서 협상을 진행할 때였다. 양측의 입장 차가 너무 큰 데다, 장기간 진행된 협상 탓에 서로 간의 반목과 불신으로 협상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상대 협상대표단에 '솔로몬'이란 이름의 수석 법률고문이 있었다. 협상 시작 전, 나는 대뜸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협상이 너무 안 풀려 내가 밤새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 드렸더니, '지혜의 왕'인 '솔로몬'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군요." 냉랭했던 협상장에 순간, 미소와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적절한 유머는 최고의 협상전략이다. 마음을 열어야 지갑도 열린다 하지 않는가! 기억하자. 웃음은 세상을 내편으로 끌어오는 자석이다.
조조왈: "나는 그릇이 큰 인물은 못 되지. 관 장군, 소인배가 한 잔 올리지." 관우욀: "저도 촌놈에 불과합니다. 어찌 자신을 그리 낮추십니까?" 조조왈: "관 장군에게 나를 낮추어서 세상이 편하다면, 난 한평생 소인배로 살 수도 있네."
승상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옷차림. 농군들과 함께 들에서 허리 굽혀 일하는 모습. 휘하의 장수들과 신하들을 존중하는 조조의 모습은 관우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특히, 일개 무장에 불과한 자신을 영웅이라 존대하며 스스로를 소인배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조조의 겸허함에 관우 역시 끌리기 시작한다.
조조의 CEO 협상전략
3. 굴신제천하(屈臣制天下)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우대하라. 임금이라도 현명한 신하의 조언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인다. 즉,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추켜세우라는 말이다.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는다(泰山不辭土壤)고 했던가. 대업을 이루고자 한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재라도 모두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를 우대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가능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조조를'난세의 간웅'이라고 한다. 그는 '인재를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삼국의 흥망성쇠는 인재의 각축전이라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았다.
조조를 가장 심하게 폄하한 것으로 잘 알려진 명나라의 홍매도 '용재수필'에서 조조의 탁월한 인재술을 두고 "조조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던 것은 행운이 아니었다"라고 적고 있다. 진수는 조조를 두고 "계획을 세우고 책모를 꾸며 천하에 미치게 했다. 각각 자신의 기량에 따르도록 하고,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계획에 맡겨 옛날의 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조조가 가장 아끼던 친위병의 맹장 전위와 조카 조안민이 전사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 조조의 말이 다친 것으로 보고 자신의 말을 내주고 장렬히 전사한 장자인 조앙마저 잃게 만든 불구대천의 원수 '장수'가 투항해 오자 전일의 악연을 기억하지 않고 후대하고 중용했다. 진정으로 사람을 용인하는 아량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조조의 수하에는 문인과 참모, 장군 등 인재들이 말 그대로 운집(雲集)했던 것이다.
한때 원소의 수하였던 진림이 조조를 두고 쓴 격예주문(檄豫州文) 으로 알려진 유명한 전투격문이 있다. 이 격문에서 진림은, 조조가 환관의 후손이란 비천한 배경과 그의 파렴치한 갖가지 죄상을 어찌나 날카롭게 꼬집었는지, 조조는 그 충격으로 고질병이던 두통까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일 진림을 생포했을 때, 그를 죽여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그의 절세의 필치를 칭찬하고 중용했다고 한다. 조조의 문무관들은 군신의 구분도 상하의 구분도 없이 결속력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론적으로, 조조가 내로라하는 군웅들을 제치고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겸양의 미덕,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발굴한 인재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인재 운용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屈(굽힐 굴, 옷 이름 궐)은 ❶형성문자로 음(音)을 나타내는 出(출, 굴)과 구부러진 꼬리(尾, 尸)의 뜻이 합하였으며 굽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屈자는 ‘굽히다’나 ‘움츠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屈자는 尸(주검 시)자와 出(날 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屈자는 본래 尾(꼬리 미)자와 出(날 출)자가 결합한 것이었다. 금문에 나온 屈자를 보면 尾자 아래로 出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두려움에 꼬리가 움츠러드는 모습을 出자로 표현한 것이다. 해서에서는 毛(털 모)자가 생략되면서 지금의 屈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屈(굴, 궐)은 ①굽히다 ②굽다, 구부러지다, 한쪽으로 휘다 ③오그라들다, 움츠리다 ④쇠(衰)하다, 쇠퇴(衰退)하다 ⑤다하다 ⑥(길이가)짧다 ⑦꺾다, 억누르다 ⑧베다, 자르다 ⑨강(強)하다, 굳세다 ⑩물러나다, 물리치다 ⑪거두다, 거두어 다스리다 ⑫섞다, 뒤섞다 ⑬솟다, 솟아나다 ⑭지명(地名) ⑮이상한, 색다른, 그리고 ⓐ옷의 이름(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꺾을 절(折), 굽을 만(彎), 굽을 곡(曲), 굽을 왕(枉), 굽을 요(橈), 굽을 오(迂), 줄일 축(縮),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펼 신(伸)이다. 용례로는 머리를 굽히어 꿇어 엎드림을 굴복(屈伏), 굽혀 복종함이나 힘이 모자라 복종함을 굴복(屈服), 남에게 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음을 굴욕(屈辱), 휘어서 꺾이는 것을 굴절(屈折), 남에게 굴하지 아니함을 굴강(屈强), 이리저리 꺾이고 굽음을 굴곡(屈曲), 몸을 앞으로 굽힘을 굴신(屈身), 절개나 정조를 굽힘을 굴절(屈節), 무릎을 꿇어 절함을 굴슬(屈膝), 계책을 쓰지 않음을 굴책(屈策), 손가락을 꼽아 헤아림을 굴지(屈指),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을 굴건(屈巾), 비겁하여 용기가 없고 품성이 천함 또는 줏대가 없고 떳떳하지 못함을 비굴(卑屈), 온갖 고난에도 굽히지 않고 꿋꿋이 나아감을 불굴(不屈), 문장이 읽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길굴(佶屈), 남에게 굽힘을 당함을 견굴(見屈), 뒤로 또는 반대쪽으로 구부 반굴(反屈), 스스로 굽힘을 자굴(自屈), 뒤쪽으로 굽어 있음을 후굴(後屈), 형세가 기울어 꺾임을 세굴(勢屈), 폐기하여 없애 버리거나 잘못 적용함을 폐굴(廢屈),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없다는 뜻으로 수효가 매우 많음을 이르는 말을 지불승굴(指不勝屈),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다는 말을 백절불굴(百折不屈),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자벌레가 몸을 굽히는 것은 다음에 몸을 펴고자 함이라는 뜻으로 훗날에 성공을 위해 잠시 굽힘을 이르는 말을 척확지굴(蚇蠖之屈), 죽음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러도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는 말을 지사불굴(至死不屈) 등에 쓰인다.
▶️ 臣(신하 신)은 상형문자로 본디 크게 눈을 뜬 모양을 형상화했다. 내려다 본 사람의 눈의 모양으로 전(轉)하여 신을 섬기는 사람, 임금을 섬기는 중신(重臣), 신하(臣下)를 말한다. 그래서 臣(신)은 ①신하(臣下) ②백성(百姓) ③하인(下人) ④포로(捕虜) ⑤어떤 것에 종속(從屬)됨 ⑥신하(臣下)의 자칭(自稱) ⑦자기(自己)의 겸칭(謙稱) ⑧신하(臣下)로 삼다 ⑨신하로서 직분(職分)을 다하다 ⑩신하답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임금 주(主), 임금 후(后), 임금 군(君), 임금 제(帝), 임금 왕(王), 임금 황(皇), 임금 후(矦), 임금 벽(辟)이다. 용례로는 임금을 섬기어 벼슬을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신하(臣下), 신하와 서민 또는 많은 신하를 신서(臣庶), 신하가 되어 복종함을 신복(臣服), 신하된 처지를 신분(臣分), 나라에 공로가 있는 신하를 공신(功臣), 국가나 임금의 명령을 받고 외국에 사절로 가는 신하를 사신(使臣),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중직에 있는 신하를 중신(重臣), 봉토를 받은 신하 곧 제후를 봉신(封臣), 슬기와 꾀가 있는 신하를 모신(謀臣), 문관인 신하를 문신(文臣), 무관인 신하를 무신(武臣), 남의 신하를 인신(人臣), 간사한 신하를 간신(奸臣),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절을 다하는 신하를 충신(忠臣), 지위가 낮은 신하를 미신(微臣), 이름난 신하를 명신(名臣),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고굉지신(股肱之臣),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또는 불충한 무리를 난신적자(亂臣賊子),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는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등에 쓰인다.
▶️ 制(절제할 제/지을 제)는 ❶회의문자로 製(제)의 간자(簡字)이다. 刀(도; 날붙이)와 未(미; 작은 나뭇가지가 뻗은 나무의 모양)의 합자(合字)이다. 날붙이로 나무의 가지를 쳐서 깨끗이 하다, 베다, 만들다, 누르다, 규칙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制자는 '절제하다'나 '억제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制자는 未(아닐 미)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未자는 木(나무 목)자에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본래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뜻했었다. 이렇게 가지가 풍성한 나무를 그린 未자에 刀자를 결합한 制자는 나무의 가지를 다듬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은 모양을 다듬거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制자는 나무가 마음대로 가지를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다듬는다는 의미에서 '절제하다'나 '억제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뜻이 확대되어 지금은 '법도'나 '규정'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制(제)는 (1)일부 명사(名詞)에 붙이어, 방법(方法)이나 형태(形態)나 제도(制度) 따위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제도(制度) 등의 뜻으로 ①절제(節制)하다 ②억제(抑制)하다 ③금(禁)하다 ④마름질하다 ⑤짓다 ⑥만들다 ⑦맡다 ⑧바로잡다 ⑨법도(法度) ⑩규정(規定) ⑪천자(天子)의 말,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제정된 법규나 나라의 법칙을 제도(制度), 정해진 한계 또는 한계를 정함을 제한(制限), 법령이나 규칙 위반자에게 가하여지는 불이익 또는 징벌을 이름을 제재(制裁), 제도 등을 만들어서 정함을 제정(制定), 사물의 성립에 필요한 조건이나 규정을 제약(制約), 통제하여 복종시킴 또는 기계나 설비 등을 목적에 알맞도록 조절함을 제어(制御), 하려고 하는 일을 말리어서 못하게 함을 제지(制止), 운동을 제지함 또는 속력을 떨어뜨림을 제동(制動), 헌법을 제정함을 제헌(制憲), 위력이나 위엄으로 남을 눌러서 통제함을 제압(制壓), 경기 따위에서 우승함을 제패(制覇), 어떤 범위 밖에 두어 한데 셈 치지 아니함을 제외(制外), 끌어 당기어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함을 견제(牽制), 어떤 일을 법이나 규정으로 제한하거나 금하는 것을 규제(規制), 위력을 써서 남의 자유 의사를 누르고 무리하게 행함을 강제(强制), 억눌러 제지함을 억제(抑制), 일정한 방침에 따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을 제한이나 지도함을 통제(統制), 세무에 관한 제도를 세제(稅制),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욕심을 억누름을 자제(自制), 알맞게 조절함으로 방종하지 아니하도록 자기의 욕망을 이성으로써 제어함을 절제(節制), 선수를 써서 자기에게 이롭도록 먼저 상대방의 행동을 견제함을 선제(先制), 학교 또는 교육에 관한 제도와 그에 관한 규정을 학제(學制),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남보다 앞서 하면 유리함을 이르는 말을 선즉제인(先則制人), 독을 없애는 데 다른 독을 쓴다는 뜻으로 악인을 물리치는 데 다른 악인으로써 한다는 말을 이독제독(以毒制毒),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으로 약한 것을 보이고 적의 허술한 틈을 타 능히 강한 것을 제압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능제강(柔能制剛),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한다는 말을 이이제이(以夷制夷), 자기자신의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말을 율기제행(律己制行), 시대의 변함을 따라 그때 알맞도록 해야한다는 말을 인시제의(因時制宜) 등에 쓰인다.
▶️ 天(하늘 천)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서 있는 모양(大)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一)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하늘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天자는 ‘하늘’이나 ‘하느님’, ‘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天자는 大(큰 대)자와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天자를 보면 大자 위로 동그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天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 ‘하늘’을 뜻했었지만 소전에서는 단순히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天(천)은 (1)하늘 (2)범 인도(印度)에서 모든 신을 통들어 이르는 말. 천지 만물을 주재 하는 사람, 곧 조물주(造物主)나 상제(上帝) 등 (3)인간세계보다 훨씬 나은 과보(果報)를 받는 좋은 곳. 곧 욕계친(欲界責), 색계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늘 ②하느님 ③임금, 제왕(帝王), 천자(天子) ④자연(自然) ⑤천체(天體), 천체(天體)의 운행(運行) ⑥성질(性質), 타고난 천성(天性) ⑦운명(運命) ⑧의지(意志) ⑨아버지, 남편(男便) ⑩형벌(刑罰)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이다. 용례로는 타고난 수명을 천수(天壽), 하늘과 땅 또는 온 세상이나 대단히 많음을 천지(天地), 타고난 수명 또는 하늘의 명령을 천명(天命),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이 곧 황제나 하느님의 아들을 천자(天子),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의 총칭을 천체(天體), 부자나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천륜(天倫),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천하(天下),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천문(天文), 하늘과 땅을 천양(天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천재(天才), 하늘에 나타난 조짐을 천기(天氣), 하늘이 정한 운수를 천운(天運),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재난을 천재(天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를 천양지차(天壤之差),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천의무봉(天衣無縫), 세상에 뛰어난 미인이라는 천하일색(天下一色) 등에 쓰인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