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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The Ant and the Grasshopper)
둘 >>>
세상이 개념처럼 생각만으로 모든 것이 굴러가는 즉 권위에의 복종만이 요구되는 터전은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빈틈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굴러가는 톱니바퀴도 아니라 생각됩니다. 힘들고 어려움을 꿋꿋하게 참아내며 살아가는 인생에서 공감하는 동지적(同志的) 의지력을 느끼기도 하겠으며 웃음꽃이 피어나는 행복한 곳에서 친숙한 이웃과 같은 친밀감으로 따듯한 심성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한 공감의 훈훈함이 우리의 삶에 인정이라는 감정을 생성시켜 세상에 온화한 훈풍을 불어오게 합니다. 그러나 말로서의 개념으로 그러한 공감의 감정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삶에 모두가 동참함으로써 모두는 방법론적인 공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삶은 동참이 불가능한 다양한 세계와 시차적 세계로 과거와 같은 공감의 영역이 사라진 세상입니다. 오직 말과 글로써 모든 것이 표현되고 전달되어야 하는 바쁜 일상만이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공감능력은 점점 더 줄어들어가고 오직 건조한 형식적 공감과 함께 억지스러운 억압적 공감으로 삶은 피폐해져갈 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저장능력이 떨어지는 말로서의 공감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글로서의 공감에 매진할 수밖에 없으며 글의 형식과 내용의 구조에서 이해력과 공감능력을 높여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글조차도 편견과 이념에 가득한 인위적 천박한 의도로 전환됨으로써 글의 가치를 손상시키고 있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공감의 차이에서 오는 인식의 갭을 메우기 위해 모두는 노력해야 할 시절입니다. 그러한 방법적 수단으로 우리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써 표현해 보는 즉 스스로를 깨달아갈 수 있는 자기투자에 나섬으로써 세상의 거짓과 투쟁의 허구성을 파악해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야 할 시절에 직면해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주인의식에 의해 가능해지며 주인의식은 세상을 냉철하게 바라볼 인식적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에도 매일 관심을 가지고 물도 주고 햇볕에도 내놓고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하물며 자신의 인생을 가꾸는 노력을 학교를 졸업하거나 직장을 잡으며 포기한다고 하면 그처럼 야만적인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남들의 선전선동에 자신의 마음을 저당 잡히는 살림살이는 나그네의 허접한 삶입니다. 곁눈질과 귀동냥의 허접함에서 나오는 손쉬운 판단의 유혹이 스스로의 인생을 가치 부재의 독단으로 내몰며 편리에 안주하려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특히나 개념에 압도당한 언론일수록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을 모두가 공유하도록 강요합니다. 요즘 부부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만 열변을 토해냅니다. 화성 남자와 금성여자라든가 황혼이혼이나 삶에서 서로 티격태격하는 다툼까지 모두는 성격의 다름에 대해서만 강조하기에 바쁩니다. 그것은 분명 흥미 꺼리는 되겠으나 진정한 삶의 세계를 소개하지 못하는 개념의 천박함 또한 제공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삶이 없다고 단정 짓게 합니다. 언론이 흥미에 집착하고 개념에 몰두할수록 세상은 더욱더 그 내막의 상처를 자랑스레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배우자를 원망과 무시로 대하려 합니다. 나만의 천국이 그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배우자의 그림자로 평생 동안 어둠에 묻혀 살아왔다는 때늦은 후회를 불러들여 새롭게 시작할 삶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여러 주제의 이야기들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보편적으로 누구나가 주제로 삼는 것이 반려자로서의 남편과 부인에 대한 서로 간의 불만의 토로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들은 함께 살아갈 것을 맹세한 부부이며 서로의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삶을 잘 살아가야 할 주인공들입니다. 그것은 서로가 합의한 맹세이며 인정한 바탕이겠으나 삶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습니다. 속도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부딪침을 전제합니다. 인생의 시간이라는 속도는 만족보다 불만을 먼저 선물해줍니다. 삶 자체가 비교의 현장이고 우월과 차별의 현장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젊어서는 참고 살 힘이 있었으나 힘 떨어진 노후마저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심정이 꽉 들어찹니다. 고요 속에서 영혼의 눈으로 삶을 회상하기보다는 후회하는 심정으로 추억을 지워가며 새로운 나만의 삶을 개척하고자 합니다.
부부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생이라는 삶의 주인공이라는 주인 의식은 사라지고 인생의 시간을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려는 나그네 심성이 차지합니다. 베풀려는 주인의식은 줄어들고 구걸하려는 나그네 의식이 앞서갑니다. 가정의 주인에서 벗어나 나그네로 전락한 신세타령이 원망입니다. 함께 살아가기로 말로써는 맹세했으나 함께 살아가며 함께하는 행위로서의 노동의 고단함이 없다 보니 서로는 멀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부부가 힘든 일을 함께 하며 삶을 영위한다고 하면 그들에게서는 서로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무수한 계기들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도시의 현대인에게는 상대적 장애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를 상대에게 서로 되넘기려 애쓸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으로만 함께 해왔지 자연의 터전을 가꾸는 일로서의 노동으로 생계를 함께 꾸려가지 못한 도시 공동체의 삶을 편리하게 살아온 죄과(罪過)입니다.
함께 살아갈 때에 부부가 한 침상에서 살아갈 때에 모든 자연의 따듯한 정기는 유지됩니다. 방안에 온기가 돌고 서로가 도란도란 이야기함으로써 서로는 더욱더 죽음을 극복할 정기를 몸으로 채워갑니다. 가정의 온기를 그들은 집안 공간에 가득가득 채워갑니다. 늙어가면서 건강해지는 삶은 없습니다. 신체는 병과 함께합니다. 그러나 정기는 함께 할수록 늘어나며 서로를 건강하게 해주는 비타민입니다. 우리의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고집할 뿐입니다. 근대의 모든 과학은 그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삶에서 계몽을 통해 몰아내고 무시하는 독단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왔습니다. 인간의 몸은 독성이 나올 수도 있고 사랑의 정기를 무한하게 발산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그런 의미에서 독도 되고 사랑도 됩니다. 세치 혀를 잘못 놀리면 고통이요 잘 놀리면 사랑을 가져옵니다. 사랑의 정기야말로 노년의 힘든 삶을 극복해줄 보약입니다.
노년으로 갈수록 증가하는 병의 증상과 힘듦을 부부는 서로 챙겨줄 수 있는 어찌 보면 의사보다도 더 먼저 병의 예방 역할을 해주고 치료해 줄 수 있는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젊어서 서로가 일로 애써왔다고 하면 노년에는 함께하는 삶을 통해 정기를 서로 불어넣어 줌으로써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한 여유로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함께 노동하며 부부가 살지 못하고 따로 직장과 가정에서 살아왔다면 그런 부부에게 가장 소중한 노년의 시간은 서로의 신체를 함께 접촉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노년에 골다공증이니 각종 암이니 정신질환이니 하는 병인(病因)과 가깝습니다. 남자들은 운동으로서의 활동이 줄어듭니다. 이때 가장 좋은 방식은 남편이 부부를 전신 마사지해주는 것입니다. 서로가 몸으로 마찰해줌으로써 피부에 열을 증가시켜주고 찰싹찰싹 피부를 때리는 것은 미세혈관을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주물러주고 눌러주고 압박해주고 마치 심폐소생술을 시술하듯이 상대가 고통스럽지 않을 정도로 아침저녁으로 서로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새롭게 애정을 가꾸어갈 수 있습니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 머리끝도 함께 마사지(massage) 해줌으로써 정신적인 경도인지장애를 예방하는 효과는 물론 신체적으로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정기(精氣)를 불어넣어 주는 역할까지 함으로써 서로가 안쓰러운 마음에 가슴이 찡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서로가 불쌍해 보이는 순간이야말로 노년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이 생성되는 순간입니다. 그러한 심성은 결코 천박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 생득(一擧生得)의 삶입니다. 시들어가는 신체에 새로운 삶의 방식의 도입함으로써 서로는 활력이 증대되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됩니다. 노년으로 갈수록 남자는 혈관질환에 여성은 정신질환에 취약해져갑니다. 서로가 적극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정기를 형성시켜가는 노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면역력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마치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듯이 남과 여라는 상극이 마사지를 통해 새롭게 자력선을 생성시켜 신체의 병인(病因)을 줄여갑니다. 모든 병원에서의 치료는 결과에 대한 치료이지 원인으로서의 치료는 어렵습니다. 가장 손쉽게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이 부부간의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정기(精氣)의 증식(增殖)입니다. 거기에 마사지의 최종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다름과 같음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노년으로 갈수록 애가 된다고 합니다. 귀가 얇아지고 판단이 둔해지며 고집만이 늘어갑니다. 거기에 살아온 세월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본모습을 추억으로 되찾으려 애쓰기까지 합니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것은 때 묻고 영악한 아이입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일원(一員) 일 수는 있어도 가정의 일원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회사원으로서의 일이 끝나 퇴직했음에도 아직 가족구성원으로 돌아오지 못하며 길거리를 방황하는 미아(迷兒)의 꼴입니다. 언론에서나 수다를 떨며 얻어들은 남들로부터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심정인 것처럼 동감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홀로 살아가려는 원망의 욕심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부부가 함께 해로하라고 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거칠고 무딘 알량한 욕심의 심보로 내던지는 행위야말로 하느님에게 죄를 짓고 인생의 삶에 재를 뿌리는 철부지 짓이라 하겠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한 번도 가꾸어본 적이 없는 태생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어린애의 몸짓입니다. 자연에서의 진정한 완성은 시작과 끝을 함께할 때이며 이혼과 새롭게 재혼한다는 것은 그러한 함께하는 진정성을 벗어나 욕망의 삶을 살아가려는 거짓의 반복이자 스스로를 절단(切斷) 시키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포기하는 삶입니다. 나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야말로 진정으로 태어나서 늙어가며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도전이자 성취이며 절정의 계기이자 자연과 함께하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돈으로 갈라서고 원망으로 갈라서며 자신만을 깨끗하다고 말할 근거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인간만이 알량한 지성으로 자신을 오판함으로써 욕망의 노예로 살아갈 뿐입니다. 언론에서 보여주는 계몽적인 정보의 홍수에 휩싸여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을 잊어버리고 남으로 살아가는 원망의 인생이 펼쳐질 뿐입니다. 결국 함께할 서로는 어느 순간 상대에 대한 부담감과 독립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불편을 감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나오면 배우자에 대한 흉과 함께 불평불만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물리적인 생존에서 벗어나 경제적인 풍요에 따른 그 대처 방법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으로 보여 지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가치가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시절에는 그런 이야기는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남자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보니 각자의 삶의 영역이 뚜렷하게 구분되어있었으며 서로는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함에 의해 한 가정을 이룩했습니다. 남자는 생명의 유지에 여자는 자손의 번성에 매달리며 한 가정을 함께하며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시절의 운명적 삶을 벗어났습니다. 즉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에는 가정의 유지와 자손의 번창을 위해 서로가 합일한 마음을 말한다고 하겠으나 지금은 서로가 각자의 인생만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삶보다 개념 우위의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삶보다는 언론이나 남에게서 얻어들은 개념의 헛된 가치에 경도(傾度) 된 삶을 살아갑니다.
어쭙잖은 계몽과 개념이 삶을 앞서가며 양보와 희생을 두려워합니다. 부부가 함께 할수록 내가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앞서갑니다. 그것은 서구에서 들여온 표절과 모방의 결과들입니다. 말이 글을 앞서가고 생각이 행위를 앞서가는 그런 경우입니다. 어려서의 이기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함에 의해 고통은 가중되어 갑니다. 물론 노년에 힘 떨어지면 한마음이 되겠으나 그때에는 이미 부부 중 한 사람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시절과 맞닥뜨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종의 미가 아니라 후회의 고통만이 인내의 빈방을 가득 채우며 쓸쓸하게 삶을 마감할 뿐입니다.
현실에서의 힘듦만을 세상의 잣대로 여기면서 서로는 상대의 중요성을 서로가 망쳐가고 있는 시절입니다. 세상을 향해 외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한탄과 토설로 지새우려 합니다. 남녀의 구분에 의한 직업의 영역도 무너졌습니다. 누구나가 노력하면 잘 살아갈 수 있는 시절입니다. 각자의 인생이 중요했지 부부나 가정은 그다음 순위로 밀려난 시절입니다. 그런 시절에 가정을 일구어가기 위한 삶의 명제는 당연히 서로 간의 사랑의 감정이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서로가 통할 때에만 우리의 가정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다르면 헤어져야만 하는 시절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 청춘들의 마음은 안타깝게도 개념을 우선시함으로써 개념에 휩싸인 삶을 올바른 삶이라고 남들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 여기며 공감의 착각을 현실의 올바른 길로 인식함에 따른 또 다른 삶의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개념의 로봇들이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다니며 거리를 활보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세상에서의 인식하는 능력은 개념으로의 인식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자연에서의 노고로 이루어지는 깨달음 자체가 소멸해버린 결과입니다. 자연을 벗어난 인공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죄업(罪業)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그들은 개념으로 규격화시킴으로써 잘 살 수 있다고 투쟁적으로 외칩니다. 투쟁을 몰고 오는 사회는 누군가를 지배해야만 가능합니다. 개념의 노예를 거느리던지 동료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거느리던지 투쟁의 대열을 거느려야 가능합니다. 모두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질서를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습은 없고 보편적이고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는 프로그램 된 로봇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질서에서 무언가 찜찜한 느낌의 이건 아닌데 하는 적체물들을 내면의 공간에 쌓아놓고 삽니다. 그것이야말로 불안의 화약을 몸에 걸치고 살아가는 인생이며 개인의 삶을 망칠 수 있는 개념의 폭발력을 내면에 간직한 삶입니다.
그러한 의식의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폭발력의 본능적인 신체 내의 활동과 흐름은 결국 적령기에서 저절로 조성되는 결혼에 이르려는 자연스런 신체적 욕망의 추구와 조화가 지속적인 개념과 이념에 점유되어 정서적 불안으로 무시되거나 지나쳐버리려 합니다. 그런 증상을 자연스럽게 보이려 인공의 개념의 구축물에 자신의 신체를 내맡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덕후니 코스프레니 아바타가 되어 현실을 회피하는 인공의 세계에 저절로 빠져듭니다. 개념에 빠져 현실과의 괴리감을 현실에 대한 과대한 부정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신체는 천박해 보이고 비천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공적 우월과 함께합니다. 과거의 게으름과 집착적인 인간의 운명이 놀음과 주색잡기와 한탕주의로 패가망신하듯이 현실의 부조화로 괴로워하며 기존의 삶의 방식을 회피하려 애쓰게 됩니다.
거부하는 몸짓은 기존의 관습을 내 몸에서 몰아내려 부모에 대한 시각마저 사시(斜視) 적으로 변화해버립니다. 그러한 폭발력이 사회적 공간을 향해 나아갈 때에 그것은 세상의 구(舊) 질서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독단적 질서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이 그와 같이 변해야 한다고 허공에 그림을 그리려 거국(擧國) 적인 노력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계몽적인 개념의 길로 나서며 자신만의 참된 삶의 길을 잃어버리는 엉뚱함까지 보여줍니다. 나라를 위하고 세계 질서를 위해 자신의 삶을 가두고 묶어놓으면서 희생한다는 착각을 애국의 길이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개념은 옳음과 그름의 판단 세계에 인과적인 필연의 관계를 도입시키려 함으로써 자연의 세계를 인간의 독단이 만들어낸 인공의 세계로 대치합니다. 자연이라는 실제적 삶을 소멸시키고 인공이라는 독단적 개념의 길을 갑니다.
그런 세계관에 빠져들수록 개념의 올바른 길을 숭상하고 그 머슴을 자처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새로운 애국자의 탄생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름이 선택한 길이 올바르다는 강한 인식이 증가할수록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향해 또 다른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중독된 신념의 길을 가고자 새롭게 신체를 혹사시키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또한 보다 다양화되고 구체화되어가는 세상에서 다양(多樣)의 고난의 구체(具體)의 과정을 거치며 신선한 경험의 슬기를 깨닫기보다는 마음의 생각들과 이념적인 깨달음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로 세상을 판단하려고만 하는 판단력(Urteilscraft /공동 감각(共同感覺)/ 판단력(判斷力)/ common sense) 을 몰고 옵니다. 개념은 배움으로 그 한계(限界) 세계가 정해져야 함에도 세상을 향해 포효하듯 진리를 선포하는 신체는 자연의 조건을 벗어나 개념으로 바깥세상을 올바르게 질서 지우려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개념을 통해 깨달은 지식은 학문의 영역이 그 한계이며 그러한 지식이 수많은 삶의 영역에서 무수한 삶과의 마찰을 통해 자연스레 얻어지는 지혜로 변태(變態 metamorphosis) 됨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전환 에너지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겠으나 나약함의 개념들은 신념만이 넘침에 따라 그 중간의 과정을 건너 뛰려 합니다. 그런 개념의 올가미에 걸려 마취된 신체는 과거 전통적인 세상에서는 그것의 발산이 불가능했기에 젊은이들이 조현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철학에 빠져 현실과의 괴리감을 이겨내지 못한 나약한 심성을 가진 똑똑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현대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타자들과의 심정적 공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이념과 같이할 수 있는 동지적 상대를 갈망하며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 세상을 그들의 신념으로 새롭게 바꾸어나가려 전통을 거부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함으로써 이념의 먹구름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만남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어울릴 수 있는 대상이 점점 중요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대를 만나기에는 각자의 개념의 고유성이 개성으로 굳어져야 하며 그것은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교육의 덕분으로 중독되어 있기에 현대는 손쉽게 만날 수 있으며 심정적 통합이 사회적으로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각자는 개념의 실현을 위해 개념의 깃발로 모여듦으로써 자신의 고유성을 없애고 개념의 공동체에 자기 자신을 내맡깁니다. 세상의 무서움은 세상을 자신의 잣대로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개념을 신탁한 공동체의 개념이며 그들이 높이 들어 올리는 개혁의 깃발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이념이 다른 타자의 시각에 대한 인정이나 배려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을 삶의 가치로 여기지 못한 삶을 살아온 영악한 투쟁적 어른들만이 그들 순수한 어린 양들의 고지식한 순수함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점잖음과 어수룩의 가면을 쓰고 채워갈 뿐입니다. 그들은 순수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서 후자에 해당하며 근본이 망각된 존재의 무서움을 비수처럼 마음속에 새겨놓은 온화함을 일상으로 아무 때나 보여줄 수 있는 인간입니다. 현대는 베짱이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이 뜻은 그들의 주장이 누구나가 받아들이는 사회적 진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땀 흘림은 모두가 함께 할 수가 있는 보람의 영역이겠으나 개념으로서의 생각의 관념 덩어리에서는 서로의 배타적인 심성만이 커져가며 서로는 명확한 경계를 예리하게 그어 독자적인 터전을 구축해갑니다. 즉 땀 흘리며 밤샘의 노력으로 자력(自力)의 길을 자연스러운 신체와 함께 가는 사람들과 애쓰며 즉흥적 깨달음으로 타력의 인도를 받은 부조화의 인공의 길을 구겨진 신체의 희생정신과 더불어 투쟁적으로 세상을 개혁해보겠다는 사람입니다. 즉 보수의 길과 진보의 길입니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개념으로 구성된 사회 공동체들의 집단들이 늘어갈수록 개인의 고유한 삶은 없어져갑니다. 삶의 온화한 가정의 정기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시절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세상의 개혁은 항시 물리적 힘의 개혁이었지 인문적이고 전통적인 보수적 시각으로서의 개혁은 불가능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세상을 바꾸었지 관념적 실재론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사회가 될 수 없는 자연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로지 모방과 표절만이 가능한 사회입니다. 결국 모두는 사회적 부조리의 찌꺼기만을 남기며 자신의 길을 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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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은 같음인가 다름인가 / 2
올려주신글
감사히 잘 읽고
수고하심에 감사한 마음 전허고 갑니다.
한주를 마감하는 넉넉한 토요일입니다
마무리 잘 하시고 여유로운 맘으로
보람찬하루. 연일 무더운 날씨와
미세먼지에 건강유의하시고
행복하고 멋진
주말과 휴일 즐겁게 보내세요
추천"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