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은 지난 2016년 12월 9일 이었다. 그 이튿날,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조대환이 부임했다. 그러나 이미 권력의 추가 떨어져나간 뒤의 정무 수석이 해야 할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허수아비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추석 전날, 한 일간지에 실린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마지막 정무수석 조대환의 인터뷰에는 탄식과 회환, 반성과 울분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자괴감이 그만큼 크게 들었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조대환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헌재로부터 확정되자 조대환은 캐비닛과 책상 서랍에 보관중인 중요한 문서의 확인과 폐기를 주문했다. 조대환의 이런 조치는 전임 정권에서 했던 일은 다 비우고 차기 정권은 백지에서 시작하라는 의미 차원에서 공직자가 떠날 때 인수인계와 폐기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8년 2월, 당시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그의 참모들은 “막상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캐비넷과 책상서랍까지 텅텅 비워 있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청와대도 조대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조대환의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작년 7월 문재인 정부는 민정비서관실에서 박근혜 정부와 관련된 문건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문건에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 지원,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집행 방안 등 내용이 포함돼 있었고 검찰은 이내 수사에 들어갔다. 문재인 정부가 이 문서들을 입수하여 언론에 공개하고 수사와 재판에 제출한 것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의 입법 취지를 위반한 범법행위라고 조대환은 규정했다. 그러면서 민정수석실 직원이 실수로 문건을 남겼을 리가 없다면서 박근혜 정부 관계자가 현 정부에 갖다 바친 것으로 예단했다.
조대환은 탄핵 후에 나타난 관료사회의 동향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민정수석은 정권이 흔들릴 때 일수록 민심 정보를 더욱더 얻어야 하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정보를 보고해야할 국정원, 검찰, 경찰, 감사원 등 사정기관에서 올라와야 하는 정보가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그 사람들이 새 정부에서 자리를 꿰차는 것을 보고 그게 무슨 공무원이냐“는 조대환의 이 소리는 현재 권력을 버리고 미래 권력을 향해 간신 짓을 하는 영혼 없는 병든 관료사회를 질타하는 준엄한 비판의 소리로 들리기에 충분한 지적이었다.
조대환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등을 돌리고 복지부동한 공무원은 귀신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지는 정권의 대통령 권한대행의 한계와 차기 권력의 해바라기로 변한 관료사회의 행태를 꼬집었다. 그 당시 상식을 지닌 국민들은 관료사회의 움직임에 의구심을 가진 국민이 많았다.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미중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현재 권력에 대한 대응방안 찾기 보다는 미래권력에 대한 눈치 보기가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료사회가 현재 정권에 등을 돌린 상태에서는 아무리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도 영(令)이 설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 대상이 영혼조차 없는 관료사회였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뿐이다.
조대환의 인터뷰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 고려 멸망 때의 일이었다. 서기 1394년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새로 세워진 해였다, 그러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주장하는 고려 충신들은 새롭게 건국된 조선정권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개성 부근 보봉산 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 두문동으로 들어가 농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들어간 고려 유신(遺臣)들의 수가 72명이라는 설도 있고 48명이라는 설도 있지만 72명이 설이 유력하게 내려오고 있다. 두문동으로 들어간 고려 유신들은 조선 조정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두문동에서 농성하다 끝내 불에 타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때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72명을 두문동 태학생 72인이라고 불렀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도 이런 연유에서 생겨났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으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황희도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2년 동안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신들과 생사고락까지는 하지 않았고 이성계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 정권에 몸담았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고려사람의 입장에서는 황희도 변절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희는 다르게 평가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을 일방적으로 남기는 일기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조대환의 인터뷰에서는 박근혜 정권 탄핵에 처한 관료사회의 움직임과 한때는 권력의 핵심에서 권세를 누렸던 참모들의 변절과 배신의 현장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하게끔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다.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지키고 옹호해야할 권신들이 파기해야할 기밀문서를 빼돌려 미래권력에 줄을 대는 지렛대로 이용하는 세태를 보면 난신적자의 유전인자는 50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고려 말에는 두문불출했던 유신이 적어도 72명은 있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굵직한 감투를 썼던 자들과 박근혜 이름을 팔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자들 중 유신(遺臣)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과연 몇 명이나 남아 있을까, 박근혜 정권 시절, 한때 잘 나가던 권세가들의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지적하는 조대환은 예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첫댓글 명문장, 잘 읽었습니다. 장자방님의 고견에 공감합니다. <난신적자의 유전인자는 50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 => 기록으로 남겨서 역사의 징벌을 받게 해야 합니다.
추석차례 지내려 시골 내려가는 열차 속에서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서울 오는 열차 속에서도 권력을 쫓아 헤매는 정치 불나방들의 전횡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심금을 울리는 글을 읽고보니 문득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오늘 날에는 통용이 되지 않는 모양임니다. 그만큼 세태가 변했다고 해야 할까요? 아생연후라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일까요?
난제에 영웅 난다는 말은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봅니다.
차라리 난세에는 변절자와 배신자만 대량 생산된다는 말이 더 적합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본성이 全氏였군요, 고려왕조의 王氏와도 깊은 사연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보수정권 9년이라고 하지만 이명박 정권 5년을 빼면 사실상 보수 정권은 4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명박 정권때 오히려 좌파가 득세한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