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그네 시인 jung sik kim / 소년의 빛 바랜 노트... (실 화)
어머니의 애타는 사랑
어머니의 보고픔에
영혼이 피를 흘리며 슬피 웁니다...
인자하신 엄마의 흔적들은 온대간데 없고
새엄마의 비정한 흔적들만
깨진 유리조각처럼 우리가슴에 깊이 박혀져 가고
내 영혼은
죽음의 바다에 더 가까이 철석이는데... 제 6 편에서 이여져 감)
죽음은 슬픔과 절망의 문턱에서 늘 서성거렸습니다.
희망은 항상 저 멀리 기울러져 가는 희미한
초생 달입니다...
공군부대에서 생활도 어느덧 1년이 지나가고 추운
동장군도 봄바람 처녀에
고개 숙일 무렵 공군부대에서 나는 1년 동안
일하면서
동생들 옷을 사고 손에 남은
3천원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성공 할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송정리에 있는 공업중학교 라는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술을 배우면 더 빨리 돈을 많이
벌수 있을 것 같아서 였습니다.
그러나 부대에서 나에게 학교를 다니라고 허락
해 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리 장교(공사 18기 민승근중위 후일
전투기 사고로 전사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됨)한테
용기를 내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어린 나이에 그런 용기가 생겨 났는지
모르지만 몇일을 매달려 승낙을 받아 냈습니다.
민승근 중위는 저를 자신의 내부반으로 불러 등을
토닥거리며 그래
자기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여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며
너도 열심히 공부하여 공군사관학교에 시험을 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낮에 장교들이 출근하면 꼬마 3명의 숙소 40개
방 80명의 조종사들 내부반 청소와
군화 80컬레 외출구두 80컬레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모두 출근과 동시에 종일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부대에서 주간에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 한 일이였습니다.
일과 시간에 학교를 다니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낮에 할일들을 미리
해야만 학교를 다닐 수 가 있었는데 다른 꼬마들보다
2시간 일찍 일어나고 3시간 늦게 자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교복과 모자를 쓰고 학교를 등교하는 첫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나고
금방이라도 졸업하면 취직을 해서 돈을 많이
벌 것만 같아 졌습니다.
3개월이 지난 뒤 나는 학교에 다니는 기쁨도
잠시 배고픔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일을 마무리 하고
부대 정문을 지나
용보촌 미군 사창가를 지나 거의 7킬로가 넘는 읍내
중학교 까지 지름길을 택해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서
등교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 이였습니다.
허겁지겁 도착하는 시간은 언제나 선생님 눈치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등교 전에 부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고
점심은 학교 수돗물이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부대 꼬마들이 밥 먹는 시간은 조종사들이 다
출근하고 난 뒤
겨우 밥을 먹기 때문에 8시가
넘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침 밥을
먹고 학교에 갈 형편이 전혀 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뒤부터는 내 몸은
굶주림에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책가방이 점점 무거워지고 가는 길도
너무 멀리만 느껴
졌고 등에선 식은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젤 힘이 든 건 4교시가 끝나기가 무섭게
애들은 저마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가방에서 꺼냄니다...
그때 도시락에서 풍기는 김치냄새가 코를
타고 뼈 속까지 스며들 때면
나는 배고픔에 미칠 것 만 같았습니다...
왜 나는 친구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을 때
먹을 수 없는 것인지...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교실을 빠져나와
학교건물 뒤편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허기져
가슴까지 아픈
배를 움켜쥔 채 두꺼비 배가 될 때까지
물을 꿀꺽 꿀꺽 채웠습니다...
그리고 창피함에 운동장 젤 끝 쪽 느티나무 그늘로
감니다...
손바닦 엔 연필로 깨알같이 쓴 영어단어들이
빼곡이 적혀 있습니다...
소년은 나무그늘 아래서 손에든 쪽지에 쓰여진
영어단어들을
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연필로 쓰여진 영어 단어들을
서럽고 슬픈 눈물로 하나 하나 지워가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은 먹는데 나는 못 먹는 설움과 배고픔의 설움
어머니가 없는 설움이 복 받쳐
눈물 되어 운동장에 외롭게 외롭게 퍼져감니다...
한 달 1천원으로 옷 책값과 노트 연필을 사야 됨으로
뽀빠이 10원짜리 한 개도
쉽게 먹을 수 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학교공부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다시 오던 길로
조종사들의 5시 퇴근시간 전까지
부대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뛰어야만
했습니다...
책가방은 너무 무거워졋고 나는 5개월이 지나서부터
뛰다 뛰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희미한 앞을 가누며 또 뛰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한발 한발이 희미해져 갔지만
또 뛰어 감니다...
한번은 부대 정문 근처 용보촌에서 심한 빈혈과
허기로 쓰러졌나 봅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보니 사람들이 내 주변에 서 있었습니다...
아마 내가 간질발작으로 쓰러져 있는 줄 알고 지켜만
보고 있었나 봅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책가방을 집어 들고 부대 정문을
향해 또 달립니다...
내 등 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들림니다...
부대에 도착되면 내 몫의 일은 언제나 낮에 못한
일이 기다림니다...
밤 10경 조종사들이 술에 만신창이가 되어들어 와서
이곳 저곳 침대에
구역질을 해 데고 그것들 치우고
라면(당시 라면 한봉지 25원)을 끓여다 주다보면
밤 10시 30분이 넘습니다.
배가 고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허기를 지나
가슴까지 뒤 틀리는 통증의 아픔이 밀려 옴니다...
소년의 이마엔 식은 땀방울이 차겁게 맺혀있습니다...
조종사들의 내무반 소등이 시작되고 복도는
어둠이 깔리고 조용해 짐니다..
그들이 먹다 버린 염장김치 찌꺼기와 된장국
밥알 몇 수픈이 함께 섞여
바겟스에 그대로 창고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없을땐 빈 통을
붙잡고 허기진
아픈 배를 움켜쥐고 울었습니다.
나는 조종사들이 먹고 복도에 내놓은 라면
냄비를 하나씩 수거하기 시작 합니다.
밤 11시가 넘으면 나는 창고에 숨어서
수거한 남비에 남은 라면찌꺼기를
하나씩 하나씩 들어 마시기 시작 하였습니다.
밖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는
아주 추운 1월 하순경 이였는데
배가 너무 고파 위경련이 일어나고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함을 몇 번이나 느꼈습니다.
너무 배가고파
죽음이
또 내 앞에 나타나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밤이면 보름달을 바라보며 빌었습니다.
어머니
제발 저를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세요...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 내릴까 몇 번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엄마는 보름달에 나타나
나를 붙잡았습니다...
애야 ~
울지 말거라.
엄마야 ~ 엄마~
엄마는 너와 함께 있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고픈 어머니의 상상은 현실처럼 늘 또렷하였습니다...
밤 하늘 어머니의 냄새가 바람타고 볼기를 스치며
눈물을 닦아주고 사라져 갑니다.
배가 고파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소년의
학창시절은
이 세상 어떤 말로도 형용 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서 수 없이 서성거리고
가난과 엄마 없는 하늘아래서
세상의 척박하고 가혹한 눈보라가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지 모름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 가난의 굴래와 아버지의 냉담은
소년의 영혼이
피눈물로 얼룩지다 못해 뼈를 빼내서 가루로 만드는 아픔은
끝없이 긴 암흑의
터널로 더 깊이 들어만 가는데...
카페 게시글
◈ 자유 게시판 ◈
제6편ㆍ중하교에 입학하다
주유소
추천 0
조회 335
18.02.17 14:5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