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주식회사 오대양에 딸려있던 식당 천장에서 32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여성 28명, 남성 4명의 시신이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겨 있었고
입과 코에는 휴지로 막혀 있었다.
이중 공장장 수씨만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천장에서 시신을 내리는 모습]
경찰 수사 결과 이들은
오대양 대표 박순자 씨를 비롯해
그녀의 가족, 종업원 등 오대양 '신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건 발생 13일 전, 박순자씨는 채권자 이상배씨 부부의
빚 독촉이 계속되자, 오대양 직원 10 명과 함께
약 12시간 동안 이씨 부부를
감금, 집단폭행, 사채포기 각서를 쓰게 했다.
이씨의 고발로 오대양 직원들을 구속하고,
경찰 조사를 위해 24일 오후 박순자씨와 그의 아들 이영호씨가
경찰에 자진 출두해 조사받는 과정에서 졸도하여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 빠져나와 사라졌고,
이후 29일 오대양 구내식당 천장에서 발견되었다.
과학수사연구소 부검팀은 여자 사체 14명을
검사한 결과 정액이 채취되었다고 밝혔다.
32명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성행위가 있을 수 없으니
제3의 살인자들이 죽이기 전에 성폭행을 한 후
교살했다고 볼 수 있으며, 상습적인 범죄자들이라고 추측했다.
[의혹을 제기한 故탁명환 소장]
고 탁명환 소장은 사건 발생 2년 후 당시 현장을 찾아
주민을 통해 사건 당일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할머니는 새벽 2시 30분경 안성 쪽에서 승합차 한 대가
오대양 공장으로 들어가서 30분쯤 후에 나와 안성 쪽으로 사라졌고,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와 오대양 공장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제3의 장소에서 살해한 뒤 두 차례 승합차가 드나들며
시체를 실어 나를 수 있고, 오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과 코를 휴지로 막았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오대양 사체 유입 의혹의 세모 유병언 회장]
당시 사람들은 권력에 의해 뒤에서 수사를 막았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이유는 당시 오대양 사건 관련자들이
정권 최고 실세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또 다른 사이비 종교집단이 있다는 혐의가 있었지만
의혹의 집단자살사건으로 종결되었다.
사건발생 4년이 지난 1991년 7월 11일
오대양 관련자들이 자수 했다.
이들은 1990년 6월 서로 만나 자수를 결심한 뒤,
1년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수했다고 밝혔다.
범인들의 모습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인상은 느낄 수 없어 의아스러웠다.
[자수한 전직 오대양 사원들]
당시 언론사들도 각본자수 의혹이 짙다고 보도하면서
위장자수에 무게를 두고 수사가 전개되었다.
경찰은 사건발생 이틀 만에 서둘러 시체들을 화장하고,
옷가지와 노끈, 유류품들을 분실해 버렸다고 말했다.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을 뒤로 한 채 수사 결론을
미리 정하고 그에 맞는 증거를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모습은 석연치 않았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집단자살을 한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공장장 이경수씨가 박순자씨의
두 아들과 함께 29명을 목 졸라 살해한 후 두 아들도 죽이고
이씨는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또 다시 이경수 혼자 31명을 죽이고
자살했다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경찰은 독극물이나 마취약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반항 없이 살해된 이유에 섭씨 36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공장 천장 안에서
거의 밥을 먹지 못한 채 4일간 은신해 있는 과정에서
모두 탈진,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당시 직접 취재했던 고 탁명환 소장은
경찰의 발표가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32명 모두가 다 가사상태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45세나 된 이경수가 힘이 펄펄 솟구쳐 한 두 사람도 아닌
30여 명을 목졸라 죽였겠는가” 라고 이야기 했다.
고 탁명환 소장은 경찰의 조급한 수사종결에 의혹을 제기했다.
박순자씨의 사망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10여 시간 전이고,
뒤통수에 둔기로 맞은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두 아들과 딸도 있었는데,
박씨를 먼저 죽였다고 생각할 수 없고,
순순히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36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서
4일간 30여 명이 생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을 조르면 마지막 발악과 몸부림을 치기 마련인데
반항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탁 소장은 본지 1988년 9월호 “오대양사건 1주년을 돌아보며”
라는 제하의 글에서 취재 당시 의심스러운 배경을 설명했다.
기자들을 만난 뒤 D일보의 K 기자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어서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행이 안면 있는 수사 간부가 있어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수사책임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D일보 K 기자도 동석했다.
그 책임자는 동석한 사람이 기자인 줄 모르고
나에게 이 사건은 선거가 임박한 시기인지라
확대시키지 않을 방침이므로 협조해 달라고 했다.
그때 직감적으로 이 사건은 정치권력의 배후가 있음을 감지했다.
충북 보은에서의 나에 대한 집단 폭행사건 직후,
보은경찰서의 한 간부가 무심코
“오대양 사건을 다룬다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이라고 흘린 말에서도 이 집단폭행사건의 배후에도
통일교와 정체불명의 권력층이 도사리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오대양 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직까지 오대양집단자살사건이 '집단타살극'인지
아니면 이를 빙자한 '타살극' 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고,
의문만 가득 남긴 채 종결되었다.
첫댓글 아 이거 시그널에서 오대양 제발 하길 바랬는데
헐 뭐야..
존나 진짜 돈과권력만 있으면 몇십명이 죽어도 아무일도 안 일어나는구나.. ㅋ
천국의문 생각난다 ㅠ
헐 뭔가 작은 신의 아이들 같다 ..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