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무어 선교사
❤1892년 3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지가 아닌 가난한 조선인 마을에 집을 얻어 생활하며 조선의 가장 낮은 자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는 도착한지 몇 주 만에 집안일을 돕던 여인을 전도했고 반년만에 우리 말로 대화와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매일 20~30명의 사람들을 만나서 성경을 가르쳤다. 8년만에 25개의 예배처소를 마련했으며, 850여명의 교인들이 예배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었다.
조선의 계급제도에서도 가장 밑바닥이었던 백정들이 모여 살던 곳을 찾아 다니던 그는 전염병을 앓고 있던 백정 박가를 위해 고종 임금의 주치의였던 의료선교사 에비슨을 불러 돌보기도 했다.
조선인들의 사랑방을 찾아다니는 파란 눈의 외국인.. 천민들의 친구, 백정 전도의 개척자, 사랑의 사도로 존경받았던 이 선교사는 바로 사무엘 무어 (Samuel F. Moore 모삼열, 1860~1906)다.
그는 기도와 눈물로 곤당골 교회 (현대 승동교회,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를 세웠습니다.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던 백정 박가는 무어 선교사의 사랑에 감동받아 개신교도가 되었고 무어 목사에게서 성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백정 박성춘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자 곤당골 교회의 양반교인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 드릴 수 없다며 최소한 자리만이라도 구별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어는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어떤 경우에도 그런 차별적인 행위를 할수 없다, 우리 모두는 똑 같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며 그 제안을 거부했고, 이에 양반들은 갈라져 홍문동 교회를 세웠다. (후에 두 교회는 다시 화합하였고 양반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교만함을 회개하였다) 박성춘은 교회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수많은 백정들을 인도했고, 승동교회의 장로가 되어 신분제도 철폐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1898넌 만민공동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후에 허틀리 여사는 무어 선교사에 의한 조선의 백정의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라고 그의 책에 기술했다.
가난과 질병, 억눌림받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복음을 끝까지 전하던 그는 결국 전염병으로 순교했다. 조선에 온지 14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양화진의 묘비에는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 인도하기를 원하였다. 예수 크리스토의 충실한 일꾼”으로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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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양반, 중인,상인, 천인 네 계급의 신분사회였다.
천인 계급 가운데 특히 백정은
인도 카스트계급 제도의 가장 아래 계급인 불가촉 천민과 다를 바 없었다.
이름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성리학적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복음이 조선 땅에 미쳤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상놈이 뒤섞여 교제를 하고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한 뒤에 예수 크리스토의 가르침을 따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정도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하고 축복했다.
‘백정 전도의 개척자’, ‘백정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불리는
사무엘 무어 (1846-1906) 선교사는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46세에 부인과 함게 입국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백성 속에 깊숙히 들어가 선교하겠다며
초가 민가에 살며 쌀밥과 김치를 먹으면서 조선말을 배워
매일 신도들과 함께 시가 전도를 하였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상인및 천인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언어 습득이 빨랐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입국 수주 만에 매일 평민,
천민 수십명에게 복음을 전하던중
장티프스에 걸려 사경을 해매고 있는 박가라는 백정을
에비슨 의료 선교사에게 알려 목숨을 구했다.
이름도 없던 백정 박가가 훗날 크리스토교 인권운동가 박성춘(1862-1933)장로이고
그의 아들 봉주리는 한국인 첫 양의 박서양(1887-1940)이다.
일반 교인들이 백정과 예배를 함께할 수 없다고 했으나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교회는 신분 위세 부리는 곳이 아니다.”라고 나무랐다.
1898년 10월 이상재등 독립협회 지도자 구속등에 항의해 종로에서 민중대회가 열렸다.
그들은 국정개혁을 촉구했다. 이 민중대회의 첫번째 개막 연설자가 박성춘이었다.
샤무엘 무어는 선교여행을 떠나 마포나루 부근에
1900년 초가 7칸으로 동막교회를 개척했다.
동막교회는 독을 짓는 이들이 많이 사는 독막의 변음이 동막이다.
지금의 동막교회는 1906년 서울 마포구 대흥동 운현궁 소유터에 자리했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 동막교회 곽재욱 목사는 “ 사무엘 무어 선교사의 근본을 해치지 말라는 당부를 늘 기억하고 우리끼리 믿는 예수 크리스토도가 아니고,
균형과 조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믿는 예수 크리스토가 되도록
열린 예배당을 지향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