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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 8. 권세를 주신 하나님 9. 마태를 부르신 예수
마 9: 8. 권세를 주신 하나님 -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무리들은 그 사건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다.
1]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에포베데산)
초기 사본(알렉산드리아 사본, 가이사랴 사본)은 하나같이 '무서워하다', '경외하다'의 뜻을 지닌 본문의 원어를 사용했다. 후기 필사자들(copyists)은 '이상히 여겼다', '놀랐다'라는 뜻의 '에다우마산'(*)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약화시키고 있다.
죄악에 물든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신 절대적 존재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직면할 때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녀야 한다.
* 마 17: 6 -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 마 28: 5, 10 –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항상 경배와 찬양을 수반한다.
2]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공관복음서 기자 중 마태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도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1) 찬양을 돌린 주체
이 구절은 복음서 기자의 생각, 즉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부활을 목격하며 성령 세례를 받았던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며 찬양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사람의 정체
'사람에게'(*,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란 말은 복수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호하다. 문맥상 '이런 권세', 즉 중풍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신 분은 분명히 예수이시다.
어떤 학자들은(Benoit, Held, Hill, Hummen) '사람에게'란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킨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16:19과 18:18을 인용하고 있다.
* 마 16: 19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마 18: 18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말은 마태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리들은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특수 그룹의 자연인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일부 율법주의자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사죄권에 대해 크게 놀라서 찬양을 드렸지만 예수의 참 정체,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을 이해하는 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의 죄 사함 선포를 신성모독으로 보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이 문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원래 단순하고 겸허한 자들의 심령에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만, 자신의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이들에게는 혼돈과 불평거리만 될 뿐이다.
2. 마태를 부르시다 ( 9: 9-13. 막 2: 13-17. 눅 5: 27-32 )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 9. 마태를 부르신 예수 -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변화된 현재를 간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관에 앉아 있던 그에게 주께서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세무 공무원들은 불의한 이익으로 자신을 부요케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태에게는 회개하고 믿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는 그의 유여한, 그러나 아마 더러워진, 생활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결단을 내렸다.
1]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본문의 평행구인 막 2: 13-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2] 마태라 하는 사람이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 대상 9: 15 - 또 박박갈과 헤레스와 갈랄과 맛다냐이니 그는 미가의 아들이요 시그리의 손자요 아삽의 증손이며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서너 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레위는 소명 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 후의 호칭인 듯하다.
사도 바울이 두 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이 마태는 12제자 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3]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곳 세관은 유대를 속국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다.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특히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다.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 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5: 46. Edersheim).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성실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4]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 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 마 4: 19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마 19: 21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5] 일어나 따르니라.
미련이나 후회가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낸다. 그는 세리보다 더 영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눅 5: 28 -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니 마태가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좇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마태의 직업은 세리로서 로마의 분봉 왕 헤롯을 위하여 백성의 세금을 거둬들였던 사람이었다.
세리라는 직업은 정치, 종교,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멸시와 배척을 받는 직업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이러한 마태를 예수께서는 알아보시고 그의 제자로 초청하였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좇은 마태를 살펴봄으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도록 하자.
(1) 마태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는 종종 '레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졌다.
* 막 2: 14 -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눅 5: 27 -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러한 그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의 초청이 임하였고 예수님의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마태는 그의 천한 신분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후에 성경을 (마태복음) 기록하는 축복까지 누렸다.
①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한 로마의 앞잡이로 죄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일부는 상부에 바치고 일부는 자기가 유용하였다. 이러한 세리들의 비리는 유대인들의 원성과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실제로 그들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마태도 역시 이웃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지내는 처지였다. 이처럼 고독한 죄인 마태에게 예수님은 다가와 그를 부르셨다.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3절)라고 하신 말씀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리도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생활 속에 빠져 있을 때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러 주셨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좇은 사람에게는 구원이라는 최대의 축복이 주어진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신다.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그를 좇자. 그는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이시다.
② 그는 주저함 없이 예수를 좇았다.
세관에 앉아 자기 직무에 열중할 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좇았다는 것과, 또 그의 부르심에 미루는 법이 없이 즉각적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 마 11: 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그를 따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예수님의 부르심
예수님은 마태를 보시고 여러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단지 '나를 좇으라'고만 하셨다. 이 말씀은 지극히 간단한 말씀이지만 그 위력은 대단하였다. 그것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① 예수님의 부르심은 권위의 부르심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강제적이거나 독단적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절대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간들은 거역할 수가 없다.
마태의 응답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명령의 필연적인 결과다. 예수께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능을 직접 목격하였다.
권위 있는 말씀과 놀라운 이적의 체험, 그리고 어린아이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푼 지대한 사랑을 보고 들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모든 주저함이나 이의나 유보를 불용하는 권위있는 부르심이다.
②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의 부르심이다.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그에게 제자의 사명을 주시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그 일보다 먼저 마태는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었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죄악 된 생활을 아시고 구원의 길로 그를 부르셨다. 구원은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서 그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죄인들을 부르신다. 그의 부름에 어서 응답하자.
③ 예수님의 부르심은 전체를 요구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전인격적 응답을 요구하신다. 마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할 만한 대상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몸 전체를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그는 지금도 우리의 완전한 결단을 기다리고 계신다. 이제 우리의 전체를 그분에게 드리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각자 각자를 가장 사랑하는 영원한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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