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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수도'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벽란도.
원래 예성항이었으나 그곳에 벽란정이 있어 "벽란도".
고려시대 대외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개성 벽란도였다.
고려시대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나
외국 상인들이 머물던 건물.,벽란정.
고려때 예성강 하구에 벽란정은
'송나라 사신' VIP 전용의 영빈관.
벽란정이 있는 섬이라 하여 벽란도.
고려시대 벽란도는
조선시대 인천 월미도와
유사한 세관 내.,보세 구역.
개성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
조선 중기., 황진이
알고싶어요.
1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2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개성 한옥거리.
개성 영통사
개성 송악산
...................송악산(松岳山 : 488m).........................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개성특급시에 있는 산.
부소갑(扶蘇岬)·곡령(鵠嶺)· 문숭산(文崧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천마산과 박연폭포, 남쪽으로는., 진봉산과 용수산.
예로부터 소나무가 많아.,"송악산."
고려의 옛 도읍인 송도(松都)의 진산이다.
남쪽 기슭에는 고려 왕궁터 만월대(滿月臺).
동쪽 기슭에 자하동, 서쪽 기슭에 광명사정
...........................................................
조선 중기 송도삼절 삼패(三牌)기생., 황진이.
동아시아 '배니스 상인.'이라 불리웠던.,개성 상인.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국제무역항이던.,벽란도.
일본은 11세기 후반부터 주로 모피를 가지고 와서
'고려~조선'시대 식량, 인삼, 서적 등과 바꾸어갔다.
무역은 국경을 통해 이뤄지는 상거래.
무역이 있는 곳에는 세관이 있었으니
세관의 역사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관습.
.............세관.................
영어로 커스텀스(Customs)
'세관' '오래된 관습'라는 뜻말,
세관의 오랜 역사와 무관치 않다.
관(關)은 국경을 드나드는 관문(關門).
세금을 걷는 관(關이 곧 세관(稅關)이다.
세관은 관공서 명칭과 달리
건물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
명칭 자체가 고유한 세관의 역할.
통일신라의 청해진, 고려의 벽란도,
조선의 책시와 왜관(倭館) 모두 관에서
무역하던 장소들이며 이곳에서 밀무역 단속.
세금을 징수했던 것이
전통적인 세관의 모습.
조선은 무역을 이유로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해금정책을 고수했으나 결국 열강의 통상압력에 굴복.
무역과 관세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에 관세주권이 주어졌다.
나중에야 관세주권을 회복하고자 1878년 세운
세관이 최초의 세관인., 부산 두모진 해관(海關).
1905년 을사조약으로 관세주권 재상실 후
일제와 군정을 거쳐 1947년 관세주권을 회복
우리나라는 세관과 고유의 관세법을 갖게되었다.
1960~1970년대는 산업화 초기로 수출진흥에 매진했다.
수출에는 관세환급 특례, 밀수감시선단은 밀수단속 강화.
1964년 1억불 수출, 1977년 100억불 올리는데 공헌한 세관.
'1980~2010' 30년간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국제화, 자유화 물결로 세관행정 수요 폭증.
86아시안게임ㆍ88올림픽ㆍ2002월드컵
등 큰 행사의 성공 뒤에는 세관이 있었다.
세관은 관세징수 외에도
테러물품 통제를 통한 국경안전관리,
마약, 불법물 반입통제를 통한 국민건강 보호
등 경제국경 파수대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선보였다.
2010년대 무역 1조달러,
해외여행자 5천만 시대에도
세관의 관문은 흔들리지 않는다.
관세청은 국세수입의 32%를 담당하는 외
자유무역협정(FTA)수출입기업을 지원하고
세관전자통관시스템(유니패스)을 해외에 수출.
.
외국 세관원을 불러 가르치며 세계 표준을 주도.
그 외에도 국제테러를 방지하고 마약을 퇴치하며
불법 국부유출을 방지하면서 지하경제 양성화 주도.
1947년 최초 한국인 세관장이 나온 뒤
70년이 지난 오늘날의 관세청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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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는 예성강 하류 고려의 무역항이던 예성항(禮成港)
개경(開京) 서쪽 30리 거리에 있었고 고려시대는 관문 역활.
예성강 기슭에는 송 사신이 머무는 벽란정(碧瀾亭)이 있었는데,
이 관사(館舍)의 이름을 따 벽란도(碧瀾渡)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고려시대 도(渡)는 수로와 육로의 교차점에서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특수 행정구역이었다.
..............................벽란도(碧瀾渡).........................
고려는 송·거란·여진·일본 등 외국상인과 물자교역을 장려.
이러한 외국사신이 출입하던 국제무역항이 예성항이었다.
그곳에는 특별히 송 사신이 오갈 때 쉴 벽란정 관사가 설치.
벽란도는 벽란정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고려시대 예성항과는 그 위치가 달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선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개성선의문 남서쪽에 있었다.
고려 말 여·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후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그 기능이 정지되면서 예성항을 벽란도로 혼동해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벽란도가 조세미 등을 운반하는 도선장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한말 이후 철도를 비롯한 육로교통이 발달
따라서 벽란도는 조세미 운송기능도 거의 상실했다.
벽란도는 현재, 북한 땅이며, 벽란리 지명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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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위치한 개성시 벽란도(현재 예성항)는
남한에서 '강화도. 교동도'와 마주 보이는.,위치.
고려 말까지 동아시아 해상무역 중심.,국제무역항.
"KOREY"는 '고려'에서 유래된.,국호(國號)
^ 벽란도
935년 고려 왕건에게 신라를 경주에서 양위한.,경순왕.
그로부터 양왕이 되어, 왕건의 딸과 결혼 후, 송도에 정착.
그후, 발해 동경상인까지 송도로 와.,국제무역항 상권을 형성.
발해와 통일신라는
국경은 나뉘어 있어도
다툼 한번도 없던.,우방국.
발해(698~926)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
698년 발해 건국과 더불어
'남북국시대'를 연.,통일신라.
통일신라는 남국, 발해는 북국.
국경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정치, 경제, 문화 교류 측면에서는
동질성을 공유한 나라가 아니었을까?'
'고려와 송나라 관계처럼.,'
발해와 신라는 패망 시점도 비슷하며
민심이반으로 패망한 원인도 유사하다.
한국 역사 상 최초로 남북국시대를 전개.
발해는 일본과 친밀한 외교 및 교역도 하였다.
하여, 발해 유민 일부는 북왜 혹카이도로 유입.
신라 유민들은 여진, 거란, 송나라로 흩어졌다.
660년 8월 29일에 백제를 망하게 한.,통일신라.
통일신라 패망 유민들은 일본으로 갈 수 없었다.
하여, 마의태자 세력이 훗날 여진으로 가 세운 후금.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부터
신라, 발해, 해상 세력까지 영입해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급부상한다.
신라 말, 고려( 918년~1392년)는
송악 지방의 호족인 왕건이 건국 후,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하였던 국가이다
원래, 개성상인의 뿌리는.,발해 동경상인.
발해 동경상인과 개성상인이 합쳐 지면서
형성되었던.,'송도(松都) 국제무역항' 벽란도.
............................벽란도.................
경기도 개풍군 서면의 예성강 하류에 있었던 항구.
이곳은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다.
고려수도 개경과 가까워 고려시대에 국제 항구로 발전.
하여, 국제교역뿐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했던 고려의 관문.
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이라는 관사가 있어
송나라 사신 일행이 출입할 때에는 이곳에서 묵었다.
벽란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이었다가
이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
고려시대 국제무역항이었지만
조선시대 점차 그 역할이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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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송나라 거란· 여진· 일본 등
외국상인과 물자교역을 장려했는데,
외국사신이 빈번하게 출입하던 예성항.
그곳 언덕 위에 송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
쉬어가는 벽란정(碧瀾亭) 관사가 설치되었고
들어올 때나 나갈 때 이곳에서 하루밤 쉬어갔다.
그런데, 송이 원에게 망하고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게되며
고려는 송과의 교섭이 끊어지며 예성항 이름은 쓰이지 않았고,
고려가 송 사신을 맞이하고 하룻밤 쉬어 보내던 벽란정 역시 폐쇄.
그 이후, 조선시대 들어와
예성항에 해당하는 지역을
벽란도(碧瀾渡)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벽란도는 벽란정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고려 국제무역항으로 알려진 예성항과 위치가 달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 선의문 서쪽에.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는., 기록.
벽란도가 예성항 상류 나루터가 된 것.
그런데, 고려 말 여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후
예성항 국제무역항 기능이 정지되고 벽란정도 사라지며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예성항을 벽란도로 혼동하여 불렀다.
조선시대 국제무역항으로서 기능을 상실한.,예성항.
조선시대 벽란도는 조세미 도선장이 활발해지며 유명.
예성항이 '조세미 도선장' 벽란도와 혼동되게 불리운 것.
한편, 벽란도는 예성항의 벽란정에서 얻은 이름이고
벽란정은 예성항의 언덕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지금 벽란도 위치가 예성항 옛터라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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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 5월 1000여명 송나라 사절단이 중국 명주(明州),
저장(절강) 닝보(寧波)에서 배를 띄워 흑산도, 위도, 영종도
등을 거쳐 6월에 고려의 개성 외곽 예성항 벽란도에 도착하였다.
요와 금나라의 전쟁으로 위기에 봉착한 송나라.
고려와 동맹을 맺기 위하여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길이 100m' 두 척의 신주(神舟)를 새로 건조하고
여섯 척의 대형 무역선인 객선(客船)까지 동원하여
그들의 국세가 시들지 않았음을 과시하려 한 것이었다.
그당시 고려는 조선과는 무척 다른 사회였다.
방 안에는 침상과 걸상을 두고 돗자리를 깔았다.
육류보다는 생선을 많이 먹었고 차도 즐겨 마셨다.
중국에서 수입한 밀로 만든 국수가 귀한 음식.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참외나 복숭아를 먹고
일본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사용하였다.
여인들은 흰 모시 저고리에 노란 치마를 입고
붉은 비단으로 묶은 머리를 어깨로 흘러내렸고
남자 머리도 검은 띠로 묶은 것을 제외하면 비슷.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섰다.
여름에는 하루 두 번 시내에서 남녀가 섞여 혼욕했다.
남녀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맞지 않으면 쉽게 헤어졌다.
.
학문을 숭상하여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왕실의 도서관 임천각(臨川閣)에는 수만 권의 서책이 소장
여염집 거리에도 책을 파는 서점이 두셋씩 마주보고 있었다.
기술자를 우대하여 관아에서 일을 맡기고
기술이 뛰어난 거란의 포로들도 적극 활용.
비취색 청자를 위시하여
정교하고 화려한 기물이
고려에서 만들어진 것이
이러한 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세 챕터에 걸쳐 기명(器皿)을 두고
갖은 종류의 향로와 병, 찻그릇과 술잔 등을
자세히 소개한 것을 보면, 비취색 자기뿐 아니라
다른 기물을 만드는 고려인의 솜씨에 서긍이 감탄.
<고려도경>은 송 사신들이 고려의 문물을 조사한 보고서.
오늘날, 고려의 풍속을 살피는 데 매우 소중한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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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벽란도는 오늘날 알려진 것보다 세계화된 공간.
수도 개경(개성)에서 30리 남짓 떨어진 황해도 예성강 하구.
벽란도(碧瀾渡)는 요즘으로 치면 인천 송도 국제도시 같은 곳.
벽란도(碧瀾渡) 국제무역항에서의 국제무역 활동과
국내 각지와의 상업활동은 주로 개성상인이 도맡아 하였다.
개성상단은 국내 다른 상단보다 규모가 크고 상술이 앞선 때문.
벽란도는 고려시대 제1항구이자 유일하였던 국제무역항.
송, 왜, 남양, 서역, 아라비아 반도 해상까지 드나들며 교역.
고려의 대외 무역의 발전과 더불어 국제 무역항으로서 번성하였다.
"KOREY" "동아시아 해상왕국" "코레아.".,고려.
그 국제적인 명성들을 얻게된 원동력.,송도 상인.
왕건을 중심 축으로 하여 고려를 창건한.,송도 상인.
조선 개국 이후, 탄압의 대상이었던.,개성상인.
벽란도 국제무역상 개성상인들은 어디로 간걸까?
조선시대 개성상인들은 송방 시스템으로 명맥을 유지.
송방 시스템을 통해 전국적으로 국내 유통업을 장악.
여타 상단들과 연계하여 공무역보다는 사무역에 전념.
'벽란도 개성상인' 또는 '송방'은 개성상인 트레이드 마크.
개성상인이 운영하는 점포.,"송방".
'보이지 않는., 유명 브랜드.'.,"송상(松商)."
개성상인을 의미하는 '소나무 松' '헤어릴 商'.
'松'은 개성 송악산 소나무를 상징하는.,브랜드.
'사계절 언제나 변함없이.,늘 푸른 소나무.'
개성상인들은 짠돌이 경영을 통해
성공 앞에 겸손함을 잃지 않았으며,
재물은 공공 성격이 강하다고 여겼다.
축적된 부(富)가 삶을 타락시키지 않았으며,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신용을 철저히 지켰으며
혼을 불어넣는 장인정신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그리하여, 개성상인들의 제품은
믿고 오래 쓸 수 있는 최상품의 품질.
"송방" "개성상인" 그 자체가 품질을 보장.
조선시대 한양 시전상인과 마찬가지로
개성부에 세금을 내고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소유한 시전을 경영하던 일부 개성상인도 있었다.
1910년대까지 개성에는 선전(縇廛), 백목전(白木廛),
청포전(靑布廛), 어과전(魚果廛), 문외백목전(門外白木廛),
의전(衣廛) 지전(紙廛) 유기전(鍮器廛) 장전(欌廛) 사기전(砂器廛)
개성의 시전상인들은 16개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신입조합원 가입여부 결정, 도원 상호간 상호부조.
한양 시전 조합은 도중(都中), 개성조합은 전계(廛契).
벽란도는 '고려~조선'시대 약 800년에 걸쳐
개성상인들이 송도를 거점으로 활동을 하면서
사실 상, 개성상인에 의해 형성된.,국제 사무역항.
일제시대 철도, 육로 발달로 폐쇄된.,벽란도.
벽란도가 있었던 '벽란리' 지명 조차 사라진 것.
그후, 벽란도 개성상인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일까?
벽란도 개성상인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이유는,
일제시대 독립군 자금 제공과 독립군 이동을 돕는.,통로 역할.
그 이유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민족자본 말살정책을 시행.
일제는 개성상인들의 인삼 수출권을 박탈하고
거대 외국 자본을 무차별적으로 들여와 물량주의로
개성상인들의 민족자본 씨앗조차 말려 버리려고 애썼다.
전설과 같은 개성상인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많지만,
아직까지 최인호씨가 쓴 소설 '상도'(商道)를 통하여,
개성상인 '임상옥'의 이야기가 알려진 정도에 불과하다.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벽란도(예성항)
'예성강 하류' 서해 인근.,마지막 나루터.
황해도 고달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예성강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데,
이 일대는 산지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빠르며 바다에 가깝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
경기도 개풍군 서면의 예성강 하류의 항구.,벽란도.
이곳은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수도 개경과 가까워 국제 항구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벽란도는 국제적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였던 곳.
벽란도 부근 언덕에 있는 벽란정이라는 관사는
송나라 사신 일행이 출입할 때 이용하는.,영빈관.
'벽란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예성항이었다가
벽란정에서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바꾼 것이다.
벽란도는 고려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조선 말, 벽란도는 조세미 등을 운반하는 도선장 역활.
'구한 말~ 일제'강점기 철도를 비롯한 육로 교통이 발달.
그 운송기능조차 사라져 북한에서 벽란리 지명이 없어진 것
개성(開城)은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의 훗날 이름이다.
'열' 開, 중심이., '예성강 입구' 벽란도(碧瀾渡) 나루터.
개성은 외국 사신과 상인들의 빈번한 왕래로 무역이 번성.
개성은 12~13세기 인구 50만에 이르렀고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왕래했으며 같은 시기에
규모는 유럽의 전통적인 부자 도시' 피렌체보다 4배.
이탈리아 피렌체
.........................피렌체.....................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약 230㎞ 떨어져 있다.
이탈리아 수도로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해
상업·금융·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다.
가장 유명한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을 예(例)로 들 수 있다.
관광업이 시 경제활동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 유리제품과 도자기, 귀금속제품,
가죽, 예술, 연철 및 짚 제품, 의류와 구두 등 제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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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니스
이탈리아 베니스
개성은 무역 상권으로는 베니스 보다 2세기 앞섰고
고려가 영어로 ‘"코리아(korey)"’가 된 것도 이때부터.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은
그가 쓴 저서 ‘성호사설’에서
개성상인의 성공 사유를 설명.
"서울과 가까우면서 중국 대륙과 소통되고,
조선 개국에 저항한 사대부들이 관직에 배제되면서
상업에 전념, "개성상인이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속담이 있듯.,개성상인은 하나 같이 근면 성실하고 검소.
"깍쟁이"는 개성상인 ‘가게쟁이’ 정신에서 비롯된 말이다.
제품 제조과정에서부터 상품 진열, 포장, 판매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5대상인
평양상인.,유상(遊商)
개성상인.,송상(松商).
의주상인.,만상(灣商).
경강상인.,강상(江商)
동래상인.,남상(南商)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였던
송도상인.,송상(松商).
의주 중심으로 청나라와
무역에 주력하였던.,만상.
조선시대 국경도시 의주는 사행(使行)이 떠나는 곳.
또 중국 사신이 오는 관문으로 정치, 외교, 무역 중심.
17세기 금속 화폐 유통과 더불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곳.
그당시 대청 대외무역에서 크게 진전을 보인.,의주.
조선은 사대정책 구현으로 점차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
북경상인 만상 활약으로 대청 중개무역이 발달하였던 의주.
만상은 대청무역에서 개성상인과 국내시장을 연결.
또한 이를 통해 대일무역 동래상인과도 연계하였다.
그리하여 개성상인과 국제 중계무역을 가능케한.,의주.
.
조선시대 상업도시.,평양.
'대청 무역' 유상(遊商)으로서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평양상인.
18세기 단원 김홍도 ‘평안감사향연도(월야선유도).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란 말을 실감난다.
평안감사(평안도 관찰사)는 지방 관직 중 가장 높은.,종2품.
평안감사 위상과 권세는 부임 축하연부터 나타났다.
수백 관리 군졸, 백성들이 대동강에 햇불을 들고 환영.
"풍악이 하늘을 울리고 돛배가 강을 뒤덮었다.
감사는 누선에 높이 앉고 여러 수령들도 다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그림자는 물결 위에 너울거리고
성머리와 강 언덕은 인산인해를 이루.,”- 청구야담 -
정승보다 낳다던.,조선시대 평안감사.
평양상인들이 즐겨 먹었다는 어복쟁반.
평양은 사무역이 공무역보다 성행한 증거.
평양기생 재색이 가장 빼어났다던 조선시대.
평양상인 대청무역 수입품은 개성상인이 판매.
국내시장의 유통을 장악하고 있었던.,개성상인.
경강시장이 선 포구는 용산, 마포, 서강, 양화진, 노량진
한양을 비롯하여 제주도 포구에서 객주를 운영한 경강상인.
조선 정조때 제주 객주를 운영한.,경강상인 거상.,의녀 김만덕.
정조 재위때 한강 배다리를 놓은.,경강상인들.
이어서, 김만덕이 긍휼미 450석을 기부한.,선행.
정조 재위 때 경강상인 상인군 세력이 성장한 증거.
한강 중심으로 운송업을 도맡았던.,경강상인.
동래 왜관 중심으로 무역업을 한.,동래상인 등은
조선시대 형성되었지만 개성상인은 고려시대 형성.
고려시대부터 앞선 상술로 상인군 세력권을 이룬 개성상인
조선시대 대표적인 상인군(商人群)으로.,송도상인(개성상인).
'조선시대~일제강점기' 개성상인들이 경영한 상점.,송방(松房).
조선시대 왕조 탄압 속에서 자생력으로 성장.
일제 강점기 정경유착 고리 없이 민족자본 형성.
독특한 상술과 복식부기 등으로 유명한.,개성상인.
고양시 박모 씨가 소유한 개성복식부기 장부.
경기도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제587호로 등록.
개성상인 박재도 가문 실무회계장부 14권과 일기장,
장책, 보조 장부인 각처전답문기등록, 각인물출입기일.
각인회계책(各人會計冊), 외상초(外上抄), 어음, 증서 등.
1298페이지 분량의 문서에는 분개장(회계장부)
총계정원장,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이익배당 등
'1887~1912' 25년간, 30여 만건의 거래 내역이 기재.
특히 실무회계장부에는 목화와 면포 거래, 인삼 재배 및
거래, 금융업 등을 하면서 작성한 회계 과정이 담겨있다.
'구한 말~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개성(송도)상인 기록.
개성부내 상설점포 시전(市廛)상업,
전국적 행상(行商)과 도고(都賈)상업,
인삼재배, 홍삼제조업 등 사업 영역 확장.
해양을 무대로 한 선상(船商)활동,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 등.
개성상인은 17~18세기 전국에서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상권을 확장.
통일전망대에서 보이는
예성강 하류의.,연백평야.
송나라 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공무역 사무역 상업활동도 크게 활기.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나라 상인들이 내왕
고려시기에는 중국대륙에서 여러 왕조가 흥망성쇄를 겪어,
고려는 나라마다 교역방법 물품, 거래 장소와 통로가 달랐다.
고려전기 고려와 가장 빈번한 교역을 한 나라는 송.
산동(山東)에서 직선 통로를 택하여 대동강어구의 초도(椒島)
옹진구(甕津口) 예성항(禮成港)에 이르는 길이 중심이었으며,
그 이후는 거란의 위협을 느껴, 남쪽으로 바뀌었다.
예성항 - 자연도 - 마도 - 군산도(群山島) -서남 - 명주
이 항로는 명주·정해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만에 바다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또 5일이면, 흑산도에 도달하여 고려 국경
당시 송나라와 고려를 잇는 빠른 뱃길.
민간무역은 공무역보다 훨씬 활발했다.
고려 현종 3년(1012)부터 충렬왕 4년(1278)까지
송나라 상인이 내항한 횟수는 약 120 회에 달하였고,
내항한 송 상인의 총인원은 약 5천명에 달하였다.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였다.
거란과는 성종·현종 때 전쟁 후에 국교가 정상화
고려가 거란에 수출한 품목은 금·은·동과 포면류·화문석
거란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말·양·능라 등이 주종이었다.
그리고 거란판 대장경이 다수 입수된 사실이 주목된다.
고려와 금 사이에는 사행무역 이외에,
국경선 부근에 각장(場)을 설치하여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압록강 방면에는 의주와 정주에서,
동쪽으로는 정평과 청주에서 각장 무역
각장 무역은 12세기 초 요·금 교체기나,
13세기 초 금·원 교체기와 같이 북쪽 변방에서
변화가 생길 경우에는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폐쇄.
아라비아는 당시 대식(大食)이라 불리었는데,
당대(唐代) 이래로 남중국 광주를 중심으로 무역
송대에 이르러 송의 해외 무역 장려책에 힘입어 활기
그들은 남중국 연안에 출입하면서
송상의 고려무역에 자극되어
고려에까지 진출하였다.
아라비아 상인의 내왕에 관한 기사는 3회에 그쳐,
고려와 지속적dmfh 무역활동이 행해지지 않았다.
송상인이 고려와 아라비아 사이에 중계무역 한 때문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 관계 성립 이전부터 민간에서 성행
11세기 이후 주로 진봉선에 의해 금주객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 이후로는 거의 교역이 단절되었다.
일본에는 인삼·쌀·콩·마포·서적과 중국산 비단을 수출하고,
수은·유황·진주·소라·해조·거울상자·벼루상자·책상·향로·부채
칼·활·화살·갑옷, 후추·단목·침향·물소뿔 남방산 물품을 수입.
고려후기 원의 간섭 하에서는 주로 원과 교역하였다.
고려는 원과 단일한 경제권에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와의 국제무역이 연결.
원나라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활발히 무역하였다.
원과 교역에 편승하여 우마·금·은 등이 유출되었는데,
은의 유출은 고려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사무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역은,
조선 시기 공무역으로 제한되며 활기를 상실.
개성상인.
근대 개성상인 복식부기 장부
고려, 조선시대에 항상 앞선 상술 대표적인 상인집단.
고려시대 송악 근처 예성강 입구 벽란도는 국제무역항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로 공무역과 사무역이 발달한 개성.
조선시대 소외 당한 구왕조의 사대부 계층과 지식인들
이들의 지식은 상업의 합리적 경영과 상술을 개발하여
서양보다 2세기 앞선 사개송도치부법 복식부기를 사용.
조선 중기 이후 상품, 화폐경제 발달에 따라
개성은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개성상인은 송방이라 불리워졌고,
이들이 축적한 자본은 개항 전에 국내 최대
개항 후 외국자본에 대항한 가장 강한 민간자본.
근면과 앞선 상술, 철저한 상혼,
전국적 규모의 상업, 송방 등은
오늘날까지 개성상인의 대명사.
당나라 신라 왜 무역로를 연 해신 장보고.
장보고가 무너지자 해상권은 왜구들이 장악.
왜구란 고대중국, 한반도 일본을 오가던 무역군단.
중국 왜, 한반도 왜, 일본 왜를 통털어 왜구라 지칭.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 후 유래된 왜.
동아시아 해상무역에 종사한 고조선 패망 세력들.
중국과 우리나라는 농업 정책 위주의 농본 국가.
명나라와 고려가 농본정책을 펴며 해상봉쇄령 선포.
사실 상, 중국 한반도에서 무역을 할 수 없었던 상인들.
일본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해상무역 거점을 확보.
명나라와 고려를 무력으로 침입하며 무역활동을 전개.
이 무렵부터 왜구는 일본 해적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왜구 상행위로 무역적자 폭이 컸던 명나라.
국가 경제가 위태로워지자 왜구 무역을 억제.
중국 명나라 때에는 해안봉쇄령을 내릴 정도.
한반도 고려에서도 공도령을 내려 해안 봉쇄.
무역 항로가 봉쇄된 왜구들이 극렬하게 반발.
조선은 삼포를 개방해 왜구의 무역활동을 승인.
왜구는 일본 춘추전국시대 토호세력과 정경 유착.
500척 이상의 군사력까지 갖춘 해상군단으로 발전.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
'중국 명나라와 고려 정권을 위협했던 왜구.'
한편, 한반도는 개성상인 군단이 고려 왕실과 유착.
그러나, 일본 토호세력들과 정경 유착 왜구에 밀린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무역을 제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과 약탈로 국력 약화.
고려가 패망하게 되는 커다란 원인으로도 작용.
하여, 고려와 정경유착한 개성상인도 점점 쇠퇴.
개성 상인의 뿌리는 패망한 발해의 동경 상인들.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의 도읍 개성에 유입되었다.
그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성상인은 패망한 진나라 유민들.
중국 격변기를 피해 한반도로 유입.
진나라 유민들은 한반도에 진국을 건설.
삼한시대에 진한이 바로 진나라 유민들.
진한은 신라에 흡수된, 지금의 경상도 일대.
훗날, 당나라와 신라는 상호 활발한 교역.
신라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개척자.
그 해상왕국의 뿌리는 진나라로부터 이어진 것.
'따라서, 그 역사적인 뿌리가 깊은.,개성상인.'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성상인(송도상인 또는 송상)
개성상인은 시전인(市廛人)과 사상(私商)으로 분류
사상들은 이조 후기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인 상업망
송방을 통해 각 지방 특산품을 매점하거나 판매했다.
개성상인은 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자본을 축적했고,
오늘날 복식부기와 비슷한 개성부기(開城簿記)를 고안
상술이 뛰어났으며 주요한 상품은 의류, 도자기, 인삼 등.
일제때 근대 공업제품을 취급하는 일본상인들에게 압도
그러나, 개성, 종로에서 일본상인과 대항하여 단결했다.
상인의 종류에는 객주(客主), 도상(都商), 산상(散商) 등.
용인(傭人)으로서는 사환(使喚)·차인(差人) 등이 있었다.
개성상인의 특성 5 가지,
1. 골짜기 골짜기 찾아가서 판매하는 상인,
2. 팔 물건과 살물건을 동시에 고려하는 상인,
3. 한푼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십리를 가는 근성,
4. 상인 간에 서로 서로 공동체 의식을 갖는 연대감.
5. 생존과 이윤에 대한 정보를 중요시 하는 유목민 정신
개성상인의 5대 정신
1.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는다.
2.한가지 업종을 선택해 그 분야 최고 기업으로 키운다.
3.장사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용을 지킨다.
4.자식이라도 능력이 모자라면 회사를 물려주지 않는다.
5.기업은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해야한다.
개성상인의 정신은 중국인 상술을 떠오르게 한다.
개성상인은 옛부터 중국을 오가며 생업에 종사하였다.
하여, 상인에게는 옛부터 국적보다 상권이 중요하였다.
산동반도 - 강화도 - 개성 - 인천 - 여수 -김해 - 왜.
고대 동아시아 해상무역 상권을 장악했던 '개성상인'.
고대국가 영역다툼도 치열했지만 상권다툼도 치열하였다.
장보고 이후, 고려 ~조선, 구한 말 ~ 근대 한반도 상권의 핵.
개성 상인의 주종 상품은 오늘날까지 유명한 고려인삼.
산동반도와 거리상 가까운 강화도는 수출용 인삼 원산지.
개성 상인은 지리산의 산삼까지 중국에 수출하지 않았을까?
진시황이 진나라 절반을 내어주고도
구하려 했던 불로초가., '지리산의 산삼'.
'천왕성모 영원한 젊음의 비결.,지리산 산삼.
그러한 전설은 개성상인이 지어낸 전설 아닐까?
그래서, 전세계에 인기 무역상품이 된.,고려인삼.
오늘날, "KOREY" 는 "고려인삼" 명성에서부터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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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물주 부상(富商)과 사용인 차인(差人)이 존재.
조선후기에는 차인·서사(書士)·수사환(首使喚)·사환(使喚) 등
'수사환과 사환' 사용인은 상업활동의 구체적 업무를 담당하였다.
사환은 소년점원으로서, 좋은 집안의 자제를
상업견습생으로 다른 집에 위탁시켜 교육시켰다.
사환은 보수가 없었으며 의복, 신발 등을 지급할 뿐.
사환은 일정기간 경과되면 수사환으로 승진.
수사환도 사환과 마찬가지로 보수가 없었지만,
영업성적에 따라 결산기에 이익의 일부분을 지급.
재직 7∼8년이 지나 신용을 얻게 되면,
주인은 수사환을 지방행상을 하게 하였다.
서사는 부기장부 작성 등 회계 업무를 담당.
차인은 주인의 신용을 얻은 자가 독립
지방행상 및 금융에 종사하는 점포 상인.
차인은 월급을 받거나 점포 이익분배에 참여.
1930년대 기록에 의하면 차인의 규모는
대상인 30명 이상, 소상인의 경우는 2∼3명.
이와 같은 조직을 기초로 전국에 송방을 설치.
개성상인 조직력은 국내 여타 상인에 비해 월등.
전국을 대상으로 한 도고상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 개성상인은 삼남지방 백면지(白綿紙) 총판.
삼남지역의 제지업자들에게 선금을 주고 이를 독점
1810년(순조 10) 갓 만드는 원료 양태(凉台)를 산지인
제주의 길목인 강진과 해남에 차인을 파견하여 전량 매점.
한양 양태전(凉台廛)의 상권을 침해하기도 했다.
또한 1817년(순조 17)에는 면화의 흉년을 계기로
황해·충청지역의 면화를 독점하여 상당한 시세차익.
개성상인들은 상당한 자본력으로 선상(船商)활동.
1753년(영조 29) 개성의 사공 김중재는 개성의 부상인
물주 김진철(金振哲)의 돈 2,200냥을 가지고, 예성강을 출발.
충청도 은진 강경포, 경상도 영일 포항, 강원도 삼척에서
미곡 540석을 토대로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을 구매.
배의 선장인 사공 김중재는 개성상인의 차인으로 활약한 것.
17세기 후반 이후 청과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개성상인들은 의주 만상(灣商), 동래 래상(萊商)과 함께
국제무역을 주도하며 중강개시(中江開市)에 참여하기 시작.
중강개시는 임진왜란때 창설후 중단되었다가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1646년부터 재개되었다.
2월15일과 8월 15일 1년에 두 차례 열린 중강개시에서
농우, 소금, 지물, 해대(海帶), 해삼, 면포, 사기 등을 수출.
개성상인들은 의주상인과 함께 중국과 교역에서 주도권 장악.
원래 개성상인과 같은 사상(私商)들의 무역행위는
불법으로 지목되어, 정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그러나, 1681년(숙종 7) 조선 조정에서는 사행 비용과
군수품 조달을 위해 부상들을 무판별장(貿販別將)에 임명
사상들의 대외무역 참여의 길을 열었다.
개성상인들은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전반까지
일본과 중국과의 직교역 단절을 계기로 중일 중개무역.
인삼을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인삼 유통허가권을 보유한 개성부에서 이 권한을
개성상인에게 부여하였기에 국내 인삼유통을 장악.
개성상인은 공식적 인삼무역 외, 밀무역에도 적극적.
1821년(순조 21) 기록에는 정부의 공식 홍삼무역량은
1년에 200근, 중국에 수출되는 밀무역 홍삼은 수천 근.
공무역에 비해 밀무역 규모가 열배 이상이었던 것.
조정에서는 의주에서 밀무역을 철저하게 통제했는데,
개성상인은 서해안에서 밀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편, 개성상인은 신용을 토대로 금융거래기법을
합리적인 상업 관행을 정착시키는데에도 크게 기여.
개성은 조선에서 가장 일찌기 금속화폐가 유통된 지역.
1925년 현재 당화거간 86명, 환전거간 51인으로 조직되었다.
이와 같은 시변제 융통금액은 1929년 300만원~ 최대 800만원.
신용거래가 정착된 개성지역에서는 조선 최초 신용화폐도 유통.
신용화폐의 일종인 환과 어음, 신용전표로, 상인 간 거래.
19세기, 개성 지역에서 통용되는 송환(松換)을 비롯하여,
'인천, 전주,· 선천, 철산, 해주' 전국적으로 널리 쓰였다.
일제시대에는 종로 민족자본을 형성해 일본 상권과 대항.
조선 초기에는 고려왕조의 부흥을 위해 조선 정권과 대항.
조선시대에는 개성 사람을 중요한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
'개성상인들의 막강한 재력이
조선을 뒤엎을까 두려웠던 탓.'
'구한 말 ~ 일제'시대 개성상인으로서
거액의 재화를 축적한 자본가는 많았으나,
근대 기업가로 전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손봉상(孫鳳祥), 공성학(孔聖學),
김정호(金正浩), 박우현(朴宇鉉) 등.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기업으로는
합자회사 영신사(永信社), 합명회사 개성사(開城社),
개성전기주식회사, 고려삼업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 등.
국가상대로 거래하는 거상의 재력은 예나 지금이나 막강.
정경유착으로 밀착된 먹이사슬 고리는.,'보이지 않는 큰 손.'
특히, 첨단무기 취급상들은 국가 간의 전쟁 승패를 좌우한다.
덧 말.
임진왜란때 일본이 조선 침략때 사용한.,조총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조총.
약 47m 이내 새의 몸통이나 깃털이., 산산조각.
약 78미터 거리에서는 몸통은 남아나며,
약 155미터 거리에서는 위력이 없어지는 조총.
"철포(뎃포) 없이 전쟁에 나간다." 무데뽀(無鐵砲).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무데뽀."라 불렀던 일본군.
일본이 초창기 조총을 수용했을때 성능은 조잡하여서,
한발 쏘고 다시 쏘려면 10~15분 장전시간이 요구되었다.
화력도 갑옷으로 유효사거리 조총 탄환을 막아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이를 종자도총 또는 철포라고 불렀다.
초기 받아들인 조총은 수렵용으로 쓰인 조잡한 성능.
일본은 조총을 계속 발전시켜 화력과 연사력을 대폭 향상.
1560년대에는 교차사격 전술을 도입하며
연사력의 문제점을 보완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일본의 총포기술은 유럽보다 앞섰다.
조총이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사무라이 중요성이 퇴색.
이에 위기감을 느낀 사무라이 반발로 총포류는 점차 폐기.
19세기 근대화 시기 직전까지 일본은 칼 중심 군사체제를 유지.
오늘날까지 일본칼은
전세계 최고의 인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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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공단이 북측 근로자 일방 철수로 5개월 폐쇄
다시 재가동 된지는 2014년 9월 16일로 만 1년 째 였다.
2012년 월평균 4000만$ 생산액도., 2014년 3월부터 회복.
5만3000여명 북측 근로자들도 평온을 되찾았고
입주기업들은 123개 업체에서 두 곳 더 늘었던 곳.
통신 통관 통행, 국제화 추진, 출입 체류 문제도 개선.
개성공단 전담 상사중재위원회 구성
외국기업들도 투자지원센터를 찾는다.
그러나, 남북 합의사항 대부분 경색국면.
화해와 교류·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은
개성 명성에 걸맞게 정치와 경제를 분리.
‘행복통일’의 ‘마중물’이 되어야 마땅한 곳.
근래까지, 북한 개성공단으로 진출했던 남한 기업들.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에게 가장 인기 높았던.,초코파이.
그리고, 남한에서 생산된.,라면, 스타킹, 화장품, 생필품 등.
북한을 개방시키는.,첨단무기.
그 역활을 톡톡히 했던 생활필수품.
원자탄의 위력 못지 않았던.,초코파이.
그리고, 라면, 스타킹, 화장품, 생필품.
가전제품, 전자 제품, 낚시대, 핸드폰 등.
북한의 도발적인 핵개발로 폐쇄된 개성공단.
개성공단 폐쇄로 사라진.,남북한 완충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