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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호(蘭湖) 땅, 全羅道 高敞郡(고창군)? 京畿道 長湍(장단), 長淵(장연)?
2025년 03월 30일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이라고 칭(稱)하며, 이는 일제(日帝)가 만들어낸… … 식민지(植民地) 2천만(千萬) 백성(百姓)들을 통치(統治)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라고 필자(筆者)는, 확신(確信)하며 주장(主張)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고전(古典) 원전(原典)【고대, 중대(中代), 근대(近代)의 왕조(王朝) 또는 개인(個人)이 기록(記錄)한 문집(文集), 사서(史書), 지리지(地理志) 등 모두를 말한다】속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과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의 자연환경(自然環境), 기후대(氣候帶), 토산물(土産物), 강역(疆域), 지형지세(地形地勢) 및 지명(地名) 등등(等等)을 비교(比較), 검토(檢討)해 보면 정확(正確)하게, 명백(明白)하게, 명료(明瞭)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비교(比較), 검토(檢討)해보고서도 합리적(合理的)인 반론(反論)이 없다거나,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이 없다면… …이게 바로 현실(現實)과 타협(妥協)하는 것으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에 머리를 숙이고,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런 행위(行爲)는,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에게 무릎을 꿇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과거(過去)의 망령(亡靈)인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과 이들의 상징(象徵)이었던 “천황(天皇)”에게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은 행위다. 한민족(韓民族)의 철천지한(徹天之恨)인 원수(怨讎)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日本) 극우(極右) 패거리」들을 제외(除外)한 「일본(日本)의 일반(一般) 국민(國民)들과는 관계(關係)없는 이야기다.」
「잃어버린 강역(疆域)은 찾을 길이 없다 하더라도, 정신(精神)까지, 영혼(靈魂)까지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과 함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도(半島) 땅의 모든 지명(地名)은, 그 땅의 본래(本來)의 것은 대부분(大部分) 없어지고, 그 위에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 지명(地名)이 덮어 씌워져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명(地名)이 만들어진 연유(緣由)나 사유(事由) 또는 전래(傳來)되는 지명(地名)의 탄생(誕生) 설화(說話)들은 없어지고, 전승(傳承)되었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르게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이야기로 변질(變質)되어버렸다.
그동안 조선사(朝鮮史) 강역(疆域)과 관련(關聯)된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들인 “지형지세(地形地勢), 방위(方位), 기후대(氣候帶), 토산물(土産物), 거리(距離)” 등등(等等) 의 요소(要素)들에 대한 비교(比較), 검토(檢討)를 통해 “식민지(植民地) 용(用)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신랄(辛辣)하게 비판(批判)해 왔다.
오늘의 주제(主題) 역시(亦是) 위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같다. 또 이미 예고(豫告)한 대로 “난호지방(蘭湖地方)”에 대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의 허울 좋은 가면(假免)을 벗기고자 한다.
(1) 「난호지방(蘭湖地方)」
아마도 조선사(朝鮮史)에 많은 관심(關心)을 가지고 계신 분 중(中)에서도 “난호지방(蘭湖地方)”하면? 그곳이 어딘데… …한문(漢文)을 좀 알고 계시는 분 같으면 : “난호지방(蘭湖地方)”이라면 : 아마도 “난호(蘭湖)”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湖水) 주위(周圍) 특정(特定) 명칭(名稱)이 아닐까? 추측(推測)하시리라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반도(韓半島) 땅에 “난호(蘭湖)”라는 호수(湖水)가 어디에 있지? 참 알 수 없네! 하실 것은 거의 100%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한반도(韓半島) 땅에는 사실 호수(湖水)다운 호수(湖水)는 없다. 거기다가 “난호(蘭湖)”라는 이름은 없다.
한반도(韓半島), 특히 지명(地名)이나 특정지명(特定地名)의 별칭(別稱) 등을 보면 : 한반도(韓半島) 땅에는 거대(巨大)한 담수호(淡水湖)가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어야 마땅하며, 대강(大江)과 늪(澤), 저지(低地) 등이 지세(地勢)를 뽐내며, 이러한 거대(巨大) 호수(湖水), 큰 강(江), 대령(大嶺) 등을 기준(基準)하여 지방(地方)의 별칭(別稱)으로도 사용(使用)되었다.
곧 대표적(代表的)인 것들을 찾아보면 : 「호남(湖南), 호북(湖北), 호우(湖右), 호좌(湖左), 강남(江南), 강북(江北), 강동(江東), 강서(江西), 관북(關北), 관남(關南), 관동(關東), 관서(關西), 영북(嶺北), 영남(嶺南), 산남(山南), 산북(山北), 산동(山東), 산서(山西)」등으로 전래(傳來)되어 왔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 큰 호수(湖水), 큰 강(江)이나 하천(河川), 늪(澤), 대령(大嶺), 대산(大山) 등이 실제(實際) 존재(存在)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와는 전혀 별개(別個)다.
오늘의 주제(主題)인 “난호지방(蘭湖地方)” 역시(亦是) 위에서 말한 것들과 똑같은 사안(事案)이다. 「난호지방(蘭湖地方)」이란 「난호(蘭湖)」라고 부르는 호수(湖水) 인근(隣近) 또는 그 주위(主位)의 땅을 별칭(別稱)으로 불렸던 곳이다.
㈠ 조선사(朝鮮史)에서 “난호지방(蘭湖地方)”은 :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을 말한다」리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㈡ 또 어떤 곳에서는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이나 장연(長淵)에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미상(未詳)”이다」라고 전하는데, 이건 실로 ‘코미디 사학(史學)’다운 코미디극(劇)이요, 한반도(韓半島) 백성(百姓)들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계몽(啓蒙)의 대상(對象)으로 만들어 놓아 스스로 비참(悲慘)함을 느끼게 한다.
【하기야 2,025年, 오늘에도 “윤(尹)석열”및 그 잔당(殘黨)들과 “전한길”이라는 웃기는 자(者)들은, “계몽(啓蒙)”이라는 어설프고 시대(時代)에 맞지 않는, 1,900년대(年代)에 어울렸던 무덤의 귀신(鬼神)들을 불러들이고, 그런 단어(單語)를 외쳐대며 소리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이미 끝난 이야기다.】
「어떻게 “지”나라 땅에 있는 땅이름도 “알 수 없다”라는 “미상(未詳)”이라는 말로 설명(說明)할 수가 있다」라는 것일까? 「웃고 넘기기엔 너무 ‘무책임(無責任)’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 조선 정조 때 서유고가 지은 수산에 관한 책으로, 지금의 고창군인 난호(蘭湖)지방의 어족에 관하여 조사한 기록 1권 1책, 사본(寫本)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그렇다면, 언뜻 「아! 반도(半島) 땅 전라도(全羅道)의 고창군(高敞郡) 땅에 난호(蘭湖)라고 불리는 큰 호수(湖水)가 있어 이곳 주위(周圍)인 고창군(高敞郡) 땅을 별칭(別稱)으로 “난호지방(蘭湖地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이해(理解)할 수 있다.
➨ 그러나 한반도(韓半島) 남부지방(南部地方)인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에 난호(蘭湖)라는 호수(湖水)는 없다.” 그러면 “난호지방(蘭湖地方)”이라는 별칭(別稱)은 뭐냐? 당연(當然)한 의문(疑問)이요, 당연(當然)한 의심(疑心)이다.
► 이게 “난호(蘭湖)”란다. 기막힌 이야기다. 【사진(이미지) 出處 : 만돌(蘭湖) 고창디지털문화대전】
그런데 이러한 ‘만돌(蘭湖)’이라는 이름은, “1,91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官報)”에서 보인다. 「이 나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나라의 자존심(自尊心)도 모르는, 자존심(自尊心)도 없는 어이없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實際) 국민(國民)들 대부분(大部分)이 이를 모르고 있다.」
왜 “만돌(萬突)”이 “난호(蘭湖)”가 되어야 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특히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난호(蘭湖)[일명 난물], 만돌, 두어(斗於) 일부를 병합하여 만돌리라 하고 심원면에 편입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라고 하였으니, 1,914년 이전(以前)에는 난호(蘭湖)라는 지명(地名)은 없었다는 것이고, 난호염전(蘭湖鹽田)이란 곳도 있었다고 하는데 역시 왜 난호(蘭湖)인지는 누구도 설명(說明)하지 못한다.
이런 실정(實情)이다 보니, 동방(東方) 또는 동국(東國)이 아닌 한반도(韓半島) 땅의 지명(地名)을 보면 : 설명(說明)조차 하지 못하는 지명(地名)의 유래(由來)가 대부분(大部分)인데, 이런 예(例)는, 전부(全部)라고 해도 과장(誇張)된 말이 아닐 정도(程度)다.
그런데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사건(事件)은, AD 1.914년에 처음 등장하는 “만돌(蘭湖)” 땅에, 「AD 1,845년에 죽어 묘지에 묻힌 ‘서유구(徐有榘)’라는 사람이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를 저술(著述)했다」라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묘안(妙案)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설명(說明)대로라면 : AD 1,845년(年)에 죽어 묘지(墓地)에 묻혔던 “서유구(徐有榘)”가 백골(白骨)이 되었을 70년(年) 뒤, 미래세기(未來世紀)인 AD 1,914년(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회귀(回歸)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한국사(韓國史)는 모두 이 모양(模樣)이다.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도대체 오늘의 한국사(韓國史)를 강의(講義)하는 분들은 뭔 자료(資料)를 가지고 강의(講義)하며, “일타강사”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매스컴에 통용(通用)되는 것일까?
「빨간 목도리나 티셔츠를 입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힘줄 솟아나게 침을 질질 흘리며 “계몽(啓蒙)합시다”를 주창(主唱)하면 그게 ‘일타강사’라는 것일까?」
「“계몽(啓蒙)”이란 말은, 20세기(世紀) 초(初)의 시대적(時代的) 용어(用語)였고, 일백(一百) 년(年)이 지나 갑자기 ‘무덤’에서 튀어나온 귀신(鬼神)이다.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21세기(世紀) 오늘날 최고조(最高潮)로 발달(發達)한 과학문명사회(科學文明社會)에서 「어떤 “새끼”가 “어떤 사람을 계몽(啓蒙)한다”라는 것이냐?」 국민(國民)이 개(犬)나 돼지(猪)로 보이는가? “이런 뭐 같은 ‘새끼’들에게, 윤(尹)석열이 파면(罷免)되고 나면, 그 대가(代價)를 혹독(酷毒)하게 받아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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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호지방(蘭湖地方) : 고창군(高敞郡) 땅? 장담(長潭), 장연(長淵) 땅?
(2)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 [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후기 문신·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년(영조40)∼1845년(헌종11) 저술(著述)로는 이 밖에도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경솔지(鶊蟀志)』·『옹치지(饔치志)』·『누판고(鏤板考)』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가 어류학에 관하여 1,820년경에 저술한 연구서. 기술서. 1책 70장. 인본(印本). 서문 · 목차 · 발문 등이 없다.」라고 하면서, 이어 설명(說明)하기를
「본문 가운데 ‘어명고(魚名攷)’ 에서는 강어(江魚) · 해어(海魚) · 논해어미험(論海魚未驗) · 논화산미견(論華産未見) · 논동산미상(論東産未詳) 등으로 나누어 논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으로 보아 어명고라기보다는 어류학이라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
‘강어’에는 잉어〔鯉〕 · 숭어〔鯔〕 · 거억〔鱸〕 · 독너울이〔鱒〕 · 붕어〔鮒〕 · 납작어〔imagefont〕 · 참피리〔鰷〕 · 모래무지〔鯊〕 · 잠마자〔〔杜父魚〕 · 소갈어〔鱖〕 · 위어〔鱭〕 · 끼나리〔細魚〕 · 누치〔訥魚〕 · 모장이〔0x963f章魚〕 · 발강이〔赤魚〕 · 깔담이〔葛多岐魚〕 · 그리채〔文鞭魚〕 · 망둥이〔望瞳魚〕 · 밀어〔0x964a魚〕 · 거북자라 · 큰자라 · 게 · 가장작은조개〔蚌〕 · 말씹조개〔馬力〕 · 가막조개〔蜆〕 · 우렁〔田蠃〕 · 달팽이 등 55종을 수록하고 있다.
‘해어’에는 조기〔石首魚〕 · 황석수어〔黃石首魚〕 · 민어〔鰵魚〕 · 준치〔鰣〕 · 반당이〔勒魚〕 · 도미〔禿尾魚〕 · 비웃〔靑魚〕 · 가자미〔鰈〕 · 서대〔舌魚〕 · 넙치〔華臍魚〕 · 병어〔鯧〕 · 방어〔魴〕 · 연어(年魚) · 송어(松魚) · 전어(錢魚) · 황어(黃魚) · 선비〔鮮白魚〕 · 범고기〔虎魚〕 · 물치〔水魚〕 · 삼치〔麻魚〕 · 중고기〔和尙魚〕 · 횟대〔膾代魚〕 · 무럼〔洪魚〕 · 청다래〔靑障泥魚〕 · 수거리〔繡imagefont魚〕 · 몃〔鮧鱒〕 · 오징어〔烏賊魚〕 · 호독이〔柔魚 : 꼴뚜기〕 · 문어〔章文〕 · 낙지〔石距〕 · 주꾸미〔望潮魚〕 · 물암〔水母〕 · 해삼(海蔘) · 새우〔鰕〕 · 대모(玳瑁) · 생복〔鰒〕 · 바다긴조개〔海蚌〕 · 대합조개〔文蛤〕 · 모시조개〔白蛤〕 · 참조개〔蛤蜊〕 · 함진조개〔0x982c0x976c〕 · 가장큰조개〔車螯〕 · 강요규〔蚶〕 · 홍합〔淡菜〕 · 가리맛〔蟶〕 · 굴조개〔牡蠣〕 · 흡힘〔海蠃〕 등 78종을 수록하고 있다.
‘논해어미험’에서는 저자가 경험하지 못한 물고기들을 『본초강목(本草綱目)』 ·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등을 인용하여 풀이하고 있는데, 그 수는 전(鱣) 등 9종이다. ‘논화산미견’에서는 중국 서적에 있는 것으로 저자가 보지 못한 물고기를 『산해경(山海經)』 등을 인용하여 서(鱮) 등 11종을 들고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으로 알 수 없는 담라(擔羅) 1종을 들고 있는데, 총체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물고기의 총수는 154종에 이른다.
서술방식은 물고기의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각각 적은 뒤 그 모양과 형태 · 크기 · 생태 · 습성 · 가공법 · 식미(食味)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후일 서유구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의 전어지(佃漁志)에 대부분 인용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出處) 인용(引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이러한 설명(說明)으로 보면 :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은,
〈❶ “난호(蘭湖)”라고 불리는 큰 호수(湖水)가 있어 이곳 주위(周圍)의 땅을 “난호지방(蘭湖地方)”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고, ➋ 또 하나의 추측(推測)은 “고창군(高敞郡) 땅은 바다(海)와 연(連)해 있는데, 그 바다(海)가 내륙(內陸) 깊숙이 들어와 있어 큰 호수(湖水)와 같아 난호(蘭湖)라고 불렀다”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반도(半島) 고창군(高敞郡) 땅이 위에서 말하는 “❶ + ➋” 중에서 어느 하나에 속(屬)해야 “고창군(高敞郡)”을 “난호지방(蘭湖地方)”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으며, 이해(理解)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면 : 사학자(史學者)들의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국민(國民)들에게 사기극(詐欺劇)을 벌이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는 무엇이라고 했을까? 그 연유(緣由) 또는 별칭(別稱)을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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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선(于先)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강역(疆域)의 동서(東西), 남북(南北) 사이의 거리(距離)와 삼경(三京)의 방위(方位)에 대한 기록(記錄)부터 찾아보자. 과연(果然) “한반도(韓半島) 조선사(朝鮮史)가 가능(可能)했을까?”부터인데… …이는 필자(筆者) 자주 애용(愛用)하는 문구(文句)인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라고 자신(自信) 있게 말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2권의 ‘비고(備考)’편을 보면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1편 / ‘경도(京都)’ 편(篇)이 있는데, 이곳에서 말하기를 :
❶ 「경도(京都)」 : 〈고조선(古朝鮮) 마한(馬韓) 지역이다. 「동경(東京 경주)ㆍ서경(西京 평양)ㆍ개경(開京 개성)」 세 서울의 형세가 그 만에 하나도 방불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아름답고 성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➋ 「강역(疆域)」에 대해서는 : 「남북(南北) 간이 2천 9백 98리(里)이며, 동서(東西) 간은 2천 3백 리(里)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글 “❶+➋”를 보면서, 한반도(韓半島) 땅의 방위(方位)와 종횡(縱橫)【동서(東西), 남북(南北)】거리(距離)를 보자. ‘경도(京都)는 한양(漢陽)’이다.
서경(西京)은, 평양(平壤)이 아닌 인천(仁川)이나 강화(江華)가 맞다.
동경(東京)은,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이어야 맞는 말이다.
개경(開京)은, 북경(北京)이어야 맞는 말이다.
한양(漢陽)은, 중경(中京 : 京都)이어야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그런데 여기에 「“동경(東京)과 서경(西京)과 북경(北京)과 중경(中京)”을 딱 맞게 배치(配置)할 수 있었던 땅【領土】이 실제(實際)했다」라는 것이다. 곧 조선(朝鮮) 강역(疆域)【영토(領土)】는, 「남북(南北)이 2천(千) 9백(百) 98리(里)이며, 동서(東西) 간은 2천(千) 3백(百) 리(里)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은 ‘길쭉한 모양의 땅, 토끼(兎) 모양의 땅’이 아니라, ‘곰(熊)과 같은 직사각형(直四角形) 모양의 땅이었다’라는 뜻이다. 곧 「횡(橫)【가로 : 동서(東西)】으로 2,300리(里)요, 종(縱)【세로 : 남북(南北)】으로 3,000리(里)에 달했다」라는 것인데, 이를 면적(面積)으로 환산(換算)하면 :
➨➨➨ 〈3,000리(里)는 : 1,200㎞요, 2,300리(里)는 : 920㎞이니 : 그 면적(面積)은, 「1,104,000㎢」이다. 이는 「한반도(韓半島) 220,000㎢의 5배(倍)」에 이르는 거대(巨大)한 땅이다.〉
「1,104,000㎢」의 땅은 : 「㈠ 흑룡강성(黑龍江省) 473,000㎢ ㈡ 길림성(吉林省) 187,400㎢ ㈢ 요녕성(遼寧省) 148,000㎢ ㈣ 한반도(韓半島) 220,000㎢ ㈤ 대만(臺灣) 36,000㎢ ㈥ 해남도(海南島) 33,000㎢」를 모두 합(合)친 것보다 “더 큰 땅”이다.
이건 농담(弄談) 따먹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통’ 크게 ‘배 째라’하는 식(式)의 통 큰 결단(決斷)이나,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도 아니다. 이건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말하고 있는 강역(疆域)의 실체(實體)이니, 곧 팩트(Fact)다.
또… …만약(萬若), 진실(眞實)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가 맞다“라고 한다면 :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과 열도(列島) 일본(日本) 땅은, 서로 육지(陸地)로 이어져 있었다」라는 것이 된다. 그래야 조선(朝鮮) 영토(領土)의 횡(橫)【동서(東西)】의 거리(距離)가 ”2,300리(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➌ 「설성(雪城)」 : “택리지(擇里誌)”에 이르기를, “한양에 외성(外城)을 쌓으려고 하나 아직 주위의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하룻밤에 눈이 와서 밖은 쌓이고 안은 녹았다. 우리 태조가 크게 이상히 여겨, 명하여 눈을 따라 성 터를 정하였으므로 설성(雪城)이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자! 우리 기억(記憶)을 더듬어보자. 「한양(漢陽) 도성(都城)」을 말할 때, “설성(雪城)”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네이버(Naver)에 ‘설성(雪城)’을 쳐도 검색(檢索)이 되지 않을 정도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외성(外城)인 나성(羅城)을 “설성(雪城)”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어디에서도 “설성(雪城)”이라고 하는 기록(記錄)은 찾아볼 수 없다.
한양(漢陽) 도성(都城) : 나성(羅城)은 곧 외성(外城)을 말하는 것이고. 내성(內城)은 곧 황성(皇城)을 말하는 것인데, 한양(漢陽) 도성(都城)이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축조(築造)되었나?
또 한양(漢陽) 도성(都城)에 대해서 말하기를 : [출처(出處) : 한국고고학사전 / 유적 / 용어명 / 한양(漢陽) 도성(都城) 편(篇)]을 보면 : 〈도성(都城) : 구릉과 산지를 통과하는 성벽은 19,200척의 길이를 높이 15척으로 석축하고, 평탄지를 통과하는 40,300척의 길이는 성벽의 높이 25척, 바닥 너비 25척, 성벽 위쪽 너비 18척으로 정하여 흙으로 축조되었다.〉라고 하였는데,
❶ 오늘날의 ‘한양 도성(漢陽 都城)’을 보면 : 「특히 북한산(北漢山)을 등산(登山)하기 위해 올라가 보면 : 성(城)을 만나는데 무슨 성(城)이 이러한가? 이게 성(城)이냐? 담장이지! 그것도 높이(高) ‘2m’도 되지 않는 담장이다.」
➋ 또 「평탄(平坦)한 지형(地形)에서는 성(城)의 바닥 너비(幅)가 25척【7.5m】이요, 높이(高) 또한 18척(尺)【5.4m】이요, 성벽(城壁) 위(上)가 18척(尺)【5.4m】이니, 군사(軍士)들이 말을 타고 성벽(城壁)을 다닐 정도가 되게끔 축조(築造)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問題)는 돌(石)이 아닌 흑(土)으로 축조(築造)되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위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구릉(丘陵)과 산지(山地)를 지나는 성벽(城壁)은 높이가 15척이라고 하였으니 1척(尺)은 30㎝이니, 15척(尺)이면 「4.5m」에 이르는 높이가 되어 성(城)다운 성(城)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1,422년 1월(月)에 토축(土築)을 석축(石築)으로 개축(改築)하였다고 하며, 1,704년에도 개축(改築)하며, 그 이후(以後)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改築)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오늘날 그것을 증거(證據), 증명(證明)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 “고전번역원 DB”에서는 / 「설성(雪城) : 충청북도 음성의 옛 이름이다」라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만이 ‘한양 도성(漢陽 都城)’을, “택리지(擇里志)”를 인용(引用)하여 “설성(雪城)”이라는 별칭(別稱)이다」라는 설명(說明)이 있을 뿐이다.
자! 이제 본론(本論)으로 들어가자. 「위에서 설명(說明)한 것들은 본시(本是) 조선사(朝鮮史) 강역(疆域)은, 결코 한반도(韓半島) 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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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난호지방(蘭湖地方)”에 대하여 :
현존(現存)하는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金富軾 外, 1,145 (仁宗 23)】,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1,392年∼15 世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6年(1,424)∼1432年 完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행(李荇) 等, 1,611年】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柳馨遠, 1,656年】, 여지도서(輿地圖書)【弘文館, 1,760年】, 대동지지(大東地志)【金正浩 1,866年】, 여도비지(輿圖備志)【崔瑆煥 等, 1,853年】, 여재촬요(輿載撮要)【오횡묵(吳宖默), 1,894年】」등(等)에 “난호지방(蘭湖地方)”을 특정(特定)한 고을은 없으며, 또한 이를 별칭(別稱)으로 사용(使用)한 예(例)도 발견(發見)되지 않는다.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또는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이나 장연(長淵) 등지(等地)를 “난호지방(蘭湖地方)”이라고 했다는 근거(根據)나 연유(緣由), 전래(傳來)되는 설화(說話) 등(等)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반만년(半萬年)을 이어왔다」라는 여러 왕조(王朝)는 모두 무엇이었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나라(國家)다운 나라(國家)인가? 의심(疑心)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렀다. 겨우 200년 전(前)의 이 땅의 땅이름(地名)조차도 “미상(未詳)”이요, “이곳이다 저곳이다” 말만 앞세운다면… …이게 나라(國家)냐?
확신(確信)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世紀) 중반(中般)까지도 한반도(韓半島) 땅에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예(例)’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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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어디에도 “난호(蘭湖)”와 관련(關聯)이 있는 기록(記錄)이니 고사성어(故事成語)조차도 없다. 인터넷(Inter net) 검색(檢索)을 통해 본 “난호지방(蘭湖地方)”에 대한 이야기는 「택리지(擇里志)」가 유일(惟一)한 것 같은데, 택리지(擇里志) 저자(著者)는 전라도(全羅道) 땅은 가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傳)해오고 있다.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에 “난호지방(蘭湖地方)”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고 기록(記錄)했느냐? 하는 문제(問題)다.
「난호지방(蘭湖地方)」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아본 결과(結果)는?
(5)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 「조선 정조 때 서유고가 지은 수산에 관한 책으로, 지금의 고창군인 난호(蘭湖)지방의 어족에 관하여 조사한 기록 1권 1책, 사본(寫本)」을 말한다고 하면서 설명(說明)하기를,
❶ 「난호지방(蘭湖地方)」 :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을 말한다」라고 한다. 【출처(出處) / 「낯선 곳의 경계인 ‘유배자(流配者)‘, 지역의 역사, 문화, 풍속을 기록하다. 고영화(高永和)」 [출처(出處) : 낯선 곳의 경계인 ‘유배자(流配者)‘, 지역의 역사, 문화, 풍속을 기록하다 고영화(高永和)] / 작성자 인생 세레머니 : 인생 세레머니 / 2021. 4. 7. 18:42]】
➋ 「디지털고창문화대전」 : 〈만돌리(萬突里)【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 형성 및 변천 : 조선 시대 무장군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난호(蘭湖)[일명 난물], 만돌, 두어(斗於) 일부를 병합하여 만돌리라 하고 심원면에 편입하였다.
자연환경 : 난물 서쪽에 산세가 닭이 울고 있는 형국인 계명산(鷄鳴山)[일명 달구지], 신월리에 작은 달구지가 솟아 있다. 난호염전(蘭湖鹽田) 북쪽에 밀물 때면 물에 잠겨 거미만큼 조그맣게 보이는 거무여, 거무여 동쪽에 가막바우 등의 바위가 있고, 대섬[일명 죽도] 남동쪽에 도구여[일명 도구녀], 대섬 서쪽 3㎞ 지점에 큰쌍여·작은쌍여 등의 암초가 있다. 난물 뒤 갯가에 해풍과 바닷물에 밀리어 쌓인 분등이라는 모래톱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현(茂長縣) 조(條)를 보면 : 「申叔舟詩:“信宿孤城城上亭,西風吹入夢魂淸。桐飄殘葉吟中老,菊嚲新花分外明。地盡海天生遠意,秋深鼓角作邊聲, 欲賡高韻無佳句,敢道爲詩記姓名?”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외로운 성 위의 정자에 두 밤 자는데, 서풍이 꿈속에 맑게 불어오네. 오동나무는 남은 잎을 나부끼어 읊는 가운데에 늙어가고, 국화는 새 꽃을 늘어뜨렸는데 특별히 밝구나. 육지 끝 바다 하늘에 먼 생각을 일으키고, 가을 깊은데 북과 호각소리 변방에 울리네. 높은 시에 화답하려 하나 좋은 글귀가 없으니, 어찌 시를 지어 성명(姓名)을 기록한다하랴.” 하였다.」하였는데,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에서, 「어떤 나라(國)와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었길 레, 북(鼓)과 호각(角) 소리가 변방(邊)에 울린다(鼓角作邊聲)」라는 것일까? 「망망대해(茫茫大海)일 뿐인 서해(西海)에서 어떤 나라와 접(接)하고 있어, 어떤 이민족(異民族)과 맞대고 있어, 이곳 고창군(高敞郡) 땅이 변방(邊方)이었다는 말이냐?」 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이야기다.
➌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 난호지방(蘭湖地方) : 「장단(長湍)지역의 임진강(臨津江) 상류(上流)로, 정확한 곳은 모른다」라고 하였다.
「난호(蘭湖)」【출처(出處)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난호(蘭湖)’는, “장단(長湍)지역 임진강 상류의 특정 구간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다.”「다만 서유구가 지은 풍석전집(楓石全集)에 “내가 난호에 집을 지었는데, 동원(桐原)【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과는 20리의 거리로 가까웠다【余卜築蘭湖距桐原二十里而近.】” “내가 단주(湍州:장단)의 난호에 집을 지었는데, 공【서유구의 족숙 서미수(徐美修)의 묘】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와는 5리 거리로 가까웠다【余卜築于湍州之蘭湖去公衣履之藏五里而近.】”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용산리”나 그 동쪽의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일대”로 추정된다. 중략(中略). 그 외로 ‘확인하지 못한 바닷물고기’ 9종, ‘중국산으로 우리나라에서 아직 확인하지 못한 어족’ 11종, ‘국내산이지만 알지 못하는 물고기’ 1종 등 21종을 포함하여 『난호어목지』에서 다룬 어종은 총 154종이다〉【출처(出處)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라고 너무도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해주고 있다.
➍ 「서유구(徐有榘 1764∼1845)」【출처(出處) : 우리역사넷】 : 〈작은아버지인 서형수가 1806년에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서유구는 이 일에 연좌되어 “1806년에서 1824년까지 임진강(臨津江) 북쪽 장연(長淵)지역의 금화, 대호와 서울 주변 도봉산(道峰山) 아래 번계(樊溪)에 이어 남한강 유역의 두릉(斗陵)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출처(出處) : 우리역사넷】〉라고 하였다.
곧 “난호지방(蘭湖地方)”은 「오늘날의 장단(長湍) 및 임진강(臨津江) 북(北) 장연(長淵) 지역 등(等)을 말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整理)해보면 :
◆ 「난호지방(蘭湖地方)」은,
㈠ 난호지방(蘭湖地方) :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이다.」【위의 글 ❶+➋】
㈡ 난호지방(蘭湖地方) :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및 임진강(臨津江) 북(北) 장연(長淵) 등지(等地) 땅이나, 미상(未詳)이다.」【위의 글 ➌+➍】
㈢ 그런데 또 여기서 의문(疑問)은, 위의 글 “➌+➍”에서 말하는 땅【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또는 장연(長淵) 땅】은, 내륙(內陸)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오지(奧地)로, 이곳에 은거(隱居)하고 있었던 관리(官吏)가 무슨 재주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라는 ‘바다 어족(魚族)’에 대한 상세(詳細)한 기록(記錄)을 남길 수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란 바로 “난호(蘭湖) 또는 난호(蘭湖)와 이어지는 강(江), 하천(河川)과 이어지는 바다(海)에서 생산(生産)되는 어족(魚族)에 관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이게 가장 타당(妥當)한 핵심(核心) 내용(內容)일 것으로 사료(思料) 된다.
곧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를 보면 : 바다(海)에서 또는 가까이에서 생활(生活)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어족(魚族)에 대한 다양한 기록(記錄)이 있다고 하였다. 내륙인(內陸人)은, 불가능(不可能)한 일일 수밖에 없다.
➨➨➨ 또 여기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기록(記錄)한 어족(魚族)은, 확인하지 못한 바닷물고기’ 9종, ‘중국산으로 우리나라에서 아직 확인하지 못한 어족’ 11종, ‘국내산이지만 알지 못하는 물고기’ 1종 등 21종을 포함하여 154종이나 된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는 한반도(韓半島) 것이란 말인가? 대륙(大陸)의 남해(南海)의 것이란 말인가?」
한반도(韓半島) 땅을 벗어나지 못한 째 생(生)을 마감한 관리(官吏) 출신(出身)「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무슨 재주로 한반도(韓半島)에서 확인(確認)도 되지 않은 21종(種)의 바다 어족(魚族)에 대해 상세(詳細)한 기록(記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일까? 더더구나 중국산(中國産)으로 한반도(韓半島)에서 확인(確認)되지도 않은 11종(種)의 바닷물고기에 대한 기록(記錄)을 남겼다는 말은, 「한반도(韓半島) 기록(記錄)이 아니다」라는 의심(疑心)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설명(說明)일 뿐이다.
거기다가 이르기를 : ‘산해경(山海經)에서, 본초강목(本草綱目)’ 등(等)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게 도대체 뭔가? 우리나라 곧 반도(半島) 조선(朝鮮)에서 산출(産出)되지도 않는 어족(魚族)을 무엇에 쓸려 했을까?
➨ 도대체 이게 뭔… … “말”인가? “똥(糞)”인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官報) 제3905호【발행일 / 昭和15年 01月 30日 (1940년 01월 30일)】 / 「商業及法人登記 : 蘭湖殖產契 金炳益」라고 하였으니, 1940년에 상업(商業)과 법인(法人)등기에 ‘난호식산계(蘭湖殖產契) 깁병익(金炳益)’이라고 하는 곳에 “난호(蘭湖)”가 등장한다는 것인데… …이걸 가지고 지명(地名)이라고 하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다.
(6) 이는 다른 각도(角度)로 분석(分析)이 요구(要求)된다. 예(例)를 들면 “한반도(韓半島)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는 탐라(耽羅)”【오늘날의 제주도(濟州島)】에 토산물(土産物)을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보면 :
➨ 芝峯類說 卷二 諸國部 風俗【이수광(李睟光, 1,563~1,628)】편의 “탐라(耽羅)”편에서 이르기를 :
「耽羅在絶海中。居人以海爲家。以漁採爲食。歲多漂溺。男子之得葬者寡矣。以其男少女多。故一夫而數十妻者有之。雖甚貧窶者。亦不下十婦。其婦常力作。以食其夫焉。濟州村巷之女。鮮有伉儷。每歲三月。援兵入歸時。女輩凝粧携酒。來待於別刀浦。勸酒相狎。迎至其家。八月罷防。則涕泣追送。林子順作迎郞送郞曲。備記其事. ➥桂海志曰。土人以鸚鵡爲鮓。孔雀爲腊云。乃土産。非怪也。」라고 기록(記錄)하였다.
곧, 「제국부(諸國部) 풍속(風俗) 탐라(耽羅)」편에서 이르기를 : ➥「桂海志曰. 土人以鸚鵡爲鮓. 孔雀爲腊云. 乃土産. 非怪也. : 계해지(桂海志)에서 이르기를, 토인(토착민)들은 앵무(鸚鵡)로 젓을 담그고, 공작(孔雀)을 포(腊)로 만든다고 하는데, 이곳의 토산(土産)으로, 기이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계해지(桂海志)」는, 「계해우형지(桂海虞衡志)」를 말하는 것으로, 남송(南宋) 범성대(范成大)의 기록(記錄)으로, 오늘날의 중국(中國) 남해(南海)를 지칭(指稱)하고 있다.【桂海虞衡志[作者:范成大, 南宋] : 鸚鵡,近海郡尤多。民或以鸚鵡為鮓,又以孔雀為臘,皆以其易得故也。此二事載籍所未紀,自余始志之。南入養鸚鵡者云,此物出炎方,稍北,中冷則發瘴,噤戰如人患寒熱,以柑子飼之則愈,不然必死】
➨➨ 「계해지(桂海志)」의 「계해(桂海)」는 「교지(交趾) 및 광서(廣西), 광동(廣東) 땅의 연안(沿岸) 일대(一帶)와 해남도(海南島) 및 남해(南海)를 총칭(總稱)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의 “중국(中國) 남해(南海)”를 일컫는 말이다.
➨➨➨ 결국(結局), 「탐라(耽羅)」는, 한반도(韓半島) 남(南)쪽의 제주도(濟州島)가 아니라 “계해(桂海)” 곧 중국(中國) 남해(南海) 가운데 있던 섬(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앵무(鸚鵡)로 젓을 담고, 공작(孔雀)으로 포(腊)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 8편, 금부(禽府)를 보면 : 『南人以為 食』이라고 하였다. 【우리 카페(Cafe)에 이미 게재(揭載)되어 있음】 오늘날의 반도(半島) 전라도(全羅道) 남(南)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제주도(濟州島)=제주도(濟州道)”와는 전혀 관계없는 땅이다.
앵무(鸚鵡)로 젓을 담가 먹고, 공작(孔雀)을 포(脯)【저미어 말린 고기】떠먹는 것은, 그곳 땅에서 대대손손(代代孫孫)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남해(南海)의 음식(飮食) 곧 토종식(土種食)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제주도(濟州島)에서 이런 남해식(南海食)이 전래(傳來)되어 오고 있는가? 현존(現存)하나? 그러한 정황(情況)은 있고?
중요(重要)한 것은, 제주도(濟州島) 땅에 앵무(鸚鵡)와 공작(孔雀)이 자생(自生)하고, 또는 사람들이 이를 길렀다는 것인데… …반도(半島) 제주도(濟州島) 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다. 곧 「그 땅은, 그 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인들은 꿈도 야무지다”라는 비웃음을 당할 뿐이다. 그걸 알기는 하고… …!
반복(反復)되는 설명(說明)이지만 : “계해지(桂海志)에 탐라(耽羅)의 토산물(土産物)을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은 : 「당시(當時)의 탐라(耽羅)는 계해(桂海)라고 일컫던 대륙(大陸)의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었던 섬(島)이었다」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6)- 1) 嶺表錄異(영표녹이)【作者 : 劉恂(唐) : 당(唐)의 유순(劉恂)이 찬한 것으로, 3권이다. 당(唐)나라 남해(南海)의 기후(氣候)와 풍속(風俗), 지리(地理), 교통(交通) 등에 대해 기록하였다.】에 의하면 :
‘공작(孔雀) 및 앵무라(鸚鵡螺)’등이 산출되었는데, 많은 교지인(交趾人)들은 공작(孔雀)을 사육(飼育)하였다.【交趾人多養孔雀,採金翠毛為扇.孔雀翠尾,自累其身.比夫雄雞自斷其尾,無所稱焉. 鸚鵡螺,旋尖處屈而朱,如鸚鵡嘴,故以此名。殼上青綠斑文,大者可受三升,殼內光瑩如雲母,裝為酒杯,奇而可玩,又,紅螺大小亦類鸚鵡螺殼,薄而紅,亦堪為酒器,刳小螺為足,綴以膠漆,尤可佳尚】고 하였다.
(6)- 2) 「廣東新語 23 : 대모(玳瑁)」편을 보면 : 「玳瑁,產廉,瓊州,一作玳瑁龜.夜伏沙江,注目上視, 與月爭光, 月之精華因入焉, 而爲文介. 漁人捕得. 中略. 又雲:是爲玳瑁, 穴於丹水,遊於桂海. : 당시에 대모(玳瑁)는 ‘렴주(廉州), 경주(瓊州)’에서 나온다. 중략(中略). 대모(玳瑁)는 단수(丹水)의 동굴(穴)에, 계해(桂海)를 떠돌며 산다」라고 하였다. 「남해(南海)에 있는 섬(島) 주변(周邊)에서 산출(産出)되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廣東新語 卷二十三 介語 / 玳瑁, 玳瑁,產廉、瓊州,一作玳瑁龜。夜伏沙江,注目上視,與月爭光,月之精華因入焉,而為文介。漁人捕得之,覆其背即不能去,比曉,其介文采益鮮明,因厄於沙而磨瑩焉,自脊兩分,得十四版,以厚而黃多有物形者為貴。區懷瑞賦云:「其物也,非黿非鼉,非蜴非蛙。鼊皮鸚喙,六甲千葩。紺采斑駁,若雲若霞。」 又云:「是為玳瑁,穴於丹水,遊於桂海。餌於珠茁,吸於瓊瀣。既異蟕蠵,又非蓍蔡。珍隃百朋,章含九貝。函茹五英,以為幅背。映日凝丹,流文薆葑。繡錯金相,飛潛譎怪。變幻出沒,螭鏤鬼繪。血禦鴆毒,甲搖蠱憝。島之諸夷,是帶是佩」 蟕蠵,山巨龜也,巧匠以其甲黃明無日腳者,煮而拍之,陷黑玳瑁,狀甚明媚。日腳,謂甲上有散黑暈也。一種赤魿與相似,然介脆薄,文采亦晦。】
이러한 「대모(玳瑁) 또는 앵무라(鸚鵡螺)」등이 육지(陸地) 땅인 「동정호(洞庭湖) 주변(周邊) 일대(一帶)에서 산출(産出)된다」라고 하면, 이런 것들이 바로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하는 것이고,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조작(造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는 “탐라(耽羅)”는, 지리적(地理的)으로, 환경(環境)적으로, 생태(生態)계 등 모든 분야(分野)로 봐도 반도(半島)에 딸린 “탐라(耽羅)”가 될 수가 없다.
◆ 이는 곧 여러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기록(記錄)된 「제주도(濟州島)」편은 : ❶「장강(長江)과 동정호(洞庭湖) 동(東)쪽의 제주(濟州)」와 ➋「남해(南海) 가운데 있었던 탐라(耽羅)」를 짜깁기해 편집(編輯)한 모조품(模造品)이다.
이렇게 “난호지방(蘭湖地方)” 역시(亦是) 발상(發想)의 전환(轉換)이 필요(必要)하다고 보아 진다. 곧 “난호(蘭湖)” 역시 남해(南海) 북(北)쪽의 육지(陸地)와 접한 곳에 있었던 “호수(湖水)와 강(江)과 바다(海)가 함께 어우러진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 「계해(桂海)」는 「교지(交阯), 광서성(廣西省), 광동성(廣東省), 해남도(海南島), 파라셀제도(Paracel Islands) 등지(等地)의 바다를 남송(南宋) 때 불렀던 말이다. 이곳에 “탐라(耽羅)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결과(結果)로 “난호(蘭湖)”를 이곳저곳의 원서(原書)를 찾아보았는데,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만족(滿足)할만한 결과(結果)를 얻었다.
곧 「蘭湖」[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蘭湖 又稱 芝蘭湖」라고 하였다.
(7) 「蘭湖」[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蘭湖又稱芝蘭湖,是中國廣州市昔日的一處湖泊。位於現時的解放北路象崗之西,北至桂花崗,南至東風西路與人民北路交匯處附近,西有司馬涌與珠江相連。為小北江天然堤外窪地渚水而成的湖泊,漢代至宋代均為廣州城西北的避風港和碼頭,隋、唐、宋代南海縣署均在蘭湖旁。唐代時是城郊的重要遊覽景點,湖東岸有餘慕亭、朝漢台等名勝。至明代逐漸淤塞為沼澤地,清代成為種植茭筍、菱角的窪地,20世紀50年代後期挖深為流花湖。現時蘭湖裡、流花湖一帶即為蘭湖的遺址.【出處 :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蘭湖】〉
➨ 곧, 〈난호(蘭湖)는 또 지난호(芝蘭湖)라고 불리는데, 광주시(廣州市)의 오래된 일처(一處)의 호박(湖泊)【호수(湖水) 가운데 물 밖으로 드러나 있는 땅】이다. 서(西)쪽으로 주강(珠江)과 서로 연이어져 있다. 한 대(漢代)에서 송대(宋代)에 이르기까지 광주성(廣州城) 서북(西北)에 있는 항(港)인데 바람을 피해 배들이 정박(碇泊)하는 곳(碼頭)인데, 수(隋), 당(唐), 송(宋) 대(代)에는 남해현(南海縣) 관청(官廳)이 빠짐없이 난호(蘭湖) 가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 湖泊(호박) : “호수(湖水) 가운데 물 밖으로 드러나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광주(廣州)는 광동성(廣東省)의 성도(省都)로 주강(珠江) 하류(下流)에 건설되었다.
(7) -1) 蘭湖裡、流花湖 / 廣州市流花湖公園(「花」在廣州話中習慣上讀若「化」,粵拼:faa3)位於中華人民共和國廣東省廣州市越秀區流花街道流花湖社區流花路100號,是一個由低丘和湖泊構成的公園。座落於流花路以南、東風西路以北、人民北路以西。占地54.43萬平方米,其中水域面積33萬平方米,綠化占陸地面積88%,園內有個3大湖4小湖,還有一座面積3000多平方米的鳥島。公園以棕櫚植物、榕屬植物、開花灌木及草坪、湖面與嶺南建築相互配合,形成以南亞熱帶特色的風光。公園功能集遊覽、娛樂、休憩功能、蓄水防洪為一體。有遊覽休息區、娛樂活動區、花鳥盆景觀賞展覽區三個開放性區域。
➥ 난호리(蘭湖裡) 유화호(流花湖) / 더불어 “난호(蘭湖)”에 대한 역사(歷史) 설명(說明)을 보면 :
歷史 : 流花湖古時為天然湖泊,稱為蘭湖或芝蘭湖。漢、晉時期,湖面連通珠江,是廣州主要內港。唐代這裡建有西侯津亭,仍是廣州的水路樞紐,來往船隻可經駟馬涌進入出廣州,是軍事、交通要地。到明代湖面日漸縮小,淤塞成水塘。1958年廣州市政府為解決城區水患,建成流花湖等四個人工湖,後闢為公園,因湖東北有南漢古蹟流花橋而得名。1986年時值中英聯合聲明簽署不久,英女王伊莉莎白二世曾到訪公園,並植下紀念樹。現正興建的康王路隧道將由南北從公園中間穿過。位於本公園南面的廣州地鐵8號線彩虹橋站也在2022年9月28日正式啟用[1]。
➥ 「유화호(流花湖)」는 옛날의 천연(天然) 호박(湖泊)으로 부르기를, “난호(蘭湖) 혹은 지난호(芝蘭湖)”라고 불렸다.
➨ 오늘날의 광주시(廣州市) 유화호(流花湖) 곧 옛 난호리(蘭湖裡) 난호(蘭湖)【蘭湖 : 芝蘭湖】
※ 광동성(廣東省) 광주시(廣州市) : 주강(珠江)이 흐른다. 내륙(內陸)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바다(海)와 주강(珠江)이 만나고, 이곳에 “난호(蘭湖)”가 형성(形成)되어 있어, 이곳은 예부터 풍랑(風浪)을 피해 배들이 정박(碇泊)할 수 있는 천연적(天然的)인 항구(港口)였다고 전(傳)해진다. 【이미지 출처(出處) : 위키백과】
➨ 「廣東新語 二湖」 편(篇)을 보면 : 〈회성(會城) 가운데에 2개의 호수(湖水)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서호(西湖 : 仙湖)요, 또 그 하나는 난호(蘭湖)이다. 번우(番愚)의 북쪽에 지난호(芝蘭湖: 蘭湖)가 있다. 광주지(廣州志)에 의하면 난호(蘭湖)는 쌍정위(雙井街)에 있는데, 그 물은 늘 웅덩이에 고여 있다. 지금은 없어졌다. 그 땅은 다만 난호(蘭湖)의 뒤에 있다. 【廣東新語 4 語 / 二湖 / 會城中故有二湖,其一曰西湖,亦曰仙湖,在古甕城西,偽南漢劉()之所鑿也。其水北接文溪,東連沙澳,與藥洲為一。長百餘丈,歲久淤塞,宋經略陳峴疏浚之,輦()故苑奇石置其旁,多植白蓮,因易名白蓮池而湖亡。其東偏,今有仙湖裏遺焉。其一曰蘭湖,《南越志》「番愚北有芝蘭湖。」《廣州志》「蘭湖在雙井街,其水常瀦。」今亦亡。其地亦猶曰蘭湖裏雲。城中又有二洲,一曰粵洲,在玄覽台西,為白雲之水所注。一曰藥洲,在越王台西南一里,即()所鑿仙湖,與之為一者也。二水既廣,復與番禺二山青蒼映帶,每當春秋佳日,登臨者不出三城之外,其觀已足。今也三城連而為一,三山亦失其二,番與禺僅存培塿,而洲與湖之煙波浩淼皆不可問矣。王於一有言:世之變也,誌風雅者,當紀亡而不紀存。嗚呼,吾粵之所亡者,今豈惟二湖二洲之勝概而已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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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호(蘭湖)」라는 지명(地名) 또는 특이지명(特異地名)은,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즉(卽),
❶ 「전라도(全羅道) 고창군(高敞郡)」 땅에 “난호리(蘭湖里) 또는 난호(蘭湖)”라는 특이지명(特異地名)이 만들어진 것은 서력(西曆) 1,914년(年)이라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官報)에서 말해주고 있고, 「현재(現在)의 대부분(大部分) 이것에 근거(根據)를 두고 있으니, AD 1,914년(年) 이전(以前)에 고창군(高敞郡) 땅에 “난호(蘭湖)”라는 지명(地名)은 없었다」라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➋ 또 하나의 “난호(蘭湖)”는,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및 임진강(臨津江) 북(北) 장연(長淵) 등지(等地) 땅이나, 미상(未詳)이다.」라고 하였으니, 결국(結局) 이곳에도 “난호(蘭湖)”라는 지명(地名)은 존재(存在)한 적이 없다」라는 말과 같다.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모든 것이 이 모양이다.」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모든 것이 「“미상(未詳), 또는 알 수 없다, 추정(推定)한다거나 추측(推測)한다‘」라는 식(式)으로 끝난다. 그러고 어떻게 이를 역사해설(歷史解說)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그 얼굴이 뻔뻔하기 그지없다. 자신(自身)들의 얼굴에 ’개기름‘이 뻔뻔하게 칠해져 있다는 것은 알고나 있을까?
2025년 03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편으로는 :
동방(東方)의 악(樂)에 대한 여러 문현들을 보면서 : 과연 東方(동방)이 한반도를 말하는 것일까? 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동이(東夷)는 한반도 땅에서 사는 종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동방(東方)에 사는 종족이고, 총칭하여 동이(東夷)요, 구이(九夷)이며. 三韓(삼한)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동방(東方)이 19세기 말경부터 20세기 초로부터 한반도로 인식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과연 역사서 속에서는 동방종족의 음악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김빠지는 소리지만 : 동방의 악은 "만물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는 천하를 논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성장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류는 소멸되고 말겠지요?
* 또 준비되어 있는 것은,
소위 식민사관 논자들이 말하는 중국에서 조선 땅으로 사신으로 와 : 보고 듣고 이를 기록한 중국 관리들의 기록을 보면 : 한반도 땅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잘못일까요?
잘못된 역사관때문입니다.
500년 전에, 그 이전에 사신으로 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옛 관리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오직 죄는 역사관때문에 반도 땅에 매몰된 우리들의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