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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멸망요인
1. 서론 - 로마 멸망에 대한 생각과 두가지 전제 -
가. 로마는 왜 멸망하였는가에 대한 고찰
18세기 중엽 이래 역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에 관해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는데, 일부는 새로운 통찰을 하게 하였고 일부는 쓰레기통에 던질 만한 것이었다. 이 주제에 관한 논쟁에서 학자들이 범한 대표적 오류는 단 하나의 원인만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사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같은 현상을 단일 원인으로 해명하려 한 것이 어리석은 시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지중해를 감싸안은 로마 제국이 해체된 다양한 부수적인 원인과 근본적인 원인들은 면밀히 얽혀져 있으므로 하나씩 따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아직 최종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이 주제에 대해 이전보다는 훨씬 뛰어난 이해가 존재한다.
나. 로마멸망에 대해 염두해둘 것 두가지
a.첫째 몰락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것과 달리 갑작스런 로마 제국의 붕괴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에 이르기까지 경제와 정치와 문화를 점진적으로 변형시킨 기나긴 과정이 있었고 A.D. 476년의 로마 멸망은 최종 결과였다. 사실 476년도 사학자들이 설정한 것이지 당시 사람들이 이 해를 로마 멸망의 해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b.둘째는 로마 제국의 절반은 살아남아 점진적인 변형을 거쳐 비잔틴 제국이 되었고 이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2. 본론 - 다양한 로마의 멸망 원인들 -
가. 타당성 없는 원인들
a.열등한 인종과의 혼혈
- 20세기 초에 인기가 있었던 이 견해는 초기의 로마인들이 동방에서 온 열등한 인종들간의 혼혈로 우수한 인종으로서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묘비들에 적힌 이름을 연구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름은 인종의 기원을 알려주는 믿을만한 지표가 되지 않는데다가 보존된 묘비도 통계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만큼 적절한 분포를 이루고 있지 않다. 더구나 서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은 이른바 열등한 인종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b.납 중독
- 로마의 지배층이 납으로 만든 상수도관을 통해 가정까지 물을 끌어다 썼으며 납 그릇으로 요리를 하여 납 중독을 일으켜 죽었다는 설이다.
이 설은 부적절하게 선정된 유골들을 분석하여 얻은 추론으로 유골들이 묻혀 있는 동안 외부로부터 납이 유골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극히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수도관이나 그릇 등을 통해 납이 인체에 유해할 만큼 흡수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납 중독이 있었더라도 납 주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동로마가 살아남은 사실을 보더라도 이 설은 타당하지 않다.
c.토양의 황폐
- 일부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토양이 황폐화되었고 이에 따라 농업 경제가 쇠퇴하여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몇몇 고립된 지역에서는 토양의 황폐화 현상이 있었으나 경작가능한 토지 전체에 비하면 그 비율은 미미하였다. 토양의 황폐화가 문제였다면 로마인들이 제국 말기에 농업이 쇠퇴할 때 광활하게 남아있던 비옥한 토지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d.기후 변화
- 어떤 학자들은 장기간에 걸친 기후 건조와 그로 인한 생산 감축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농업이 쇠퇴했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은 로마 제국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로마와 같은 위도에서 자라고 있던 캘리포니아 삼나무들의 나이테를 연구하여 나온 결론이다.
이 연구는 캘리포니아 연안의 기후를 같은 위도의 세계 다른 지역들의 기후와 다르게 만드는 대양의 기후와 지리적 여건 등 가변 요소들을 무시한 견해다.
기후 변화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떻게 로마 제국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는 좀더 많은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계급 투쟁
- 계급 투쟁 혁명으로 얼룩진 근대의 역사가 일부 역사가로 하여금 로마 제국의 해체 원인을 농민 계급과 이들을 전통적으로 착취하던 도시 계급 사이의 계급 투쟁의 결과로 설명하도록 이끌었다.이 설에 따르면 로마 군대가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로 구성되자 이들이 내전을 통해 도시민을 약탈하여 보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인들은 특정 계급에 기울어지지 않았고 도시 주민을 약탈하는 것 만큼이나 자주 농촌 주민을 약탈했다.
f.기독교
- 기독교가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는 5세기까지 기독교를 배척하며 로마 문화를 주도한 로마 지식인들이 내놓은 견해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제국의 군사적 열의를 침체시킨 위험한 평화주의(Pacifism)을 조장했고 병력 자원을 수도원으로 빼냈고 국가를 구하는데 필요한 우수한 인재들을 교회의 성직자로 끌어들였으며 타 종교들에 불관용하여 위기 때에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내부의 단결을 파괴했다고 보았다.
나. 부수적인 원인들
a.우발적인 사건과 게르만 족의 침공
-어떤 학파는 로마의 멸망을 설명할 만한 총괄적인 원인들은 없고 다만 연속성을 갖고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를 계승한 콤모두스가 그의 원대한 게르만 정복 계획을 단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 발렌스 황제가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앞두고 어리석게도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과,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어린 두 명의 남자 상속자만을 남겨 두고 죽음으로써 로마 제국을 항구적으로 분열시키는 데 기여한 것과, 서고트 족을 제압할 능력이 있었던 장군 스틸리코가 암살된 일 같은 사건들이 하나로 작용하여 로마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파는 서기 4,5 세기에 발생한 게르만 족의 쉴새없는 침공이 제국을 해체시킨 진정한 원인이었다고 강조한다.
이 설명들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우발적인 사건들과 게르만 족의 침공이 한데 겹쳐 제국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요인들만 중시하면 왜 그 사건들이 그토록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는가 하는 더 크고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다. 본질적인 원인들
a.로마 제국의 지리적 구조
- 로마 제국의 지리적 구조는 제국이 4,5세기에 발생한 훈족과 게르만족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본질적인 원인이었다. 제국은 도우넛을 옆으로 길게 늘여놓은 것 같은 형태로 지중해가 중간에 크게 뚫린 구멍에 해당했다.
여러 면에서 그 '구멍'은 크나큰 자산이었다. 왜냐하면 지중해는 고대 세계의 가장 유용한 운송 수단을 제공했고 지중해 연안 전역을 단일 제국으로 묶어둘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국의 이러한 지리적 구조는 육지의 국경선이 거주 가능한 영토의 면적에 비해 지나치게 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국경 지대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 그 지역들을 방어하는데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들었으며 제국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이 할애되었다. 서로마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서부 로마의 국경 지대는 로마의 동부 지역에 비해 더 길고 취약하였다. 게르만족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이어지는 2400킬로미터의 국경선을 넘어 침공해 들어온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동방이 아르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 황제 때 일리리쿰의 320킬로미터를 인수할 때까지 도나우 강 하류 지대를 제외한 전 지역을 방어할 책임은 모두 서방의 몫이었다. 더욱이 도나우 강 하류를 건너온 이민족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같은 방어에 가로막히면 서방으로 기수를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브리타니아도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넘어오려는 야만족과 해상에서 침략해오는 앵글로 색슨 족에 맞서 방어해야 할 지역이 매우 넓었고, 북아프리카 서부도 무어 족의 공세에 시달렸다. 동방의 로마는 이집트에 훨씬 안전한 국경 지대를 두고 있었고 페르시아와 가끔 전쟁을 치루기도 했으나 외교를 통해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다.
b.인력 부족
-방어할 국경 지대는 광활하고 이민족의 침입은 늘어만 가는 상황에서 후기의 로마 제국은 경제 활동과 병력 자원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였다. 로마 제국 전성기의 영토는 대략 350만 평방 킬로미터였으며, 인구는 7천만으로 추정된다. 제국의 인구가 전염병이나 그밖의 원인들로 심각하게 감소하지는 않았으며 정체 상태였다. 그러나 인력 수요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인구의 정체는 군과 경제의 활력을 감소시켰다.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동방에 비해 인구가 적은 서방은 인력 부족으로 더 큰 곤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서방은 갈수록 강력한 게르만족 군사 지도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서로마를 차지하게 되었다.
c.경제의 취약성
-로마 제국의 경제도 4, 5세기로 갈수록 무거워져 가던 국방의 짐을 지기에는 무리였다. 과거에는 제국의 번영이 정복 전쟁을 통한 전리품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국 후기에는 정복 전쟁으로 이익을 남길만한 곳이 없었다. 게르만 족은 가난했고 사산 조 페르시아는 너무 강했다.
로마 경제의 근간은 농업과 사치품 교역이었다. 로마의 농업은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노력에 비해 부가가치가 대단히 적었고 사치품 생산도 귀금속을 고갈시켰다. 귀금속 감소는 경제에 매우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의 화폐와 재정은 정화(正貨) 즉 액면상의 무게와 가치를 지닌 귀금속 주화들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런 화폐 체계로 사업을 확대하기 위한 목돈을 조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로마 경제는 확대재생산을 할 수 없었고 현상을 유지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국방에 문제가 생기면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과중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몰락하였다.
제국의 서방에서 경제 문제가 더 심각하였다. 정화(正貨)의 고갈은 동방에서보다 서방에서 두드러졌다. 동방 도시의 주민들이 중국, 아프리카, 인도와의 사치품 교역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수입한 비단과 상아, 보석류 등을 가공하여 서방에 팔아 이익을 남겼으므로 제국 동부의 무역수지는 균형을 유지했다.
d.불안정한 정치 문화
-부패하고 불안정한 정치가 로마 제국 멸망의 큰 원인이다. 소중한 인력과 자원이 파괴적인 정권 쟁탈전에 소모되었고 또한 국방을 약화시켰다. 관리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치부하였고 뇌물이 횡행하였다. 부자들은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세금을 피했고 중간층 도시 주민과 가난한 농민들이 가장 큰 착취를 보아 제국의 경제 기반이 더욱 약화되었다.
e.귀족적 가치관
-귀족들은 독립된 권력을 갖춘 대지주가 되어 문화 생활을 즐기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사고는 전 사회계층이 공유하는 것으로 생산을 위한 노동이나 상업은 노예들 같은 천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여겨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교육도 이러한 사고를 반영하고 있었다. 수사학과 법학을 통하여 언변과 추상적 사고를 키웠다. 로마 귀족들은 추상적 사고를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목적에 적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노동력을 절감하거나 생산성을 높이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도시의 발달도 경제적으로 역효과를 냈다. 고대의 도시는 대개 전쟁을 통한 이익과 노예에 의한 경작으로 돈을 번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귀족들은 도시를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고 도시민의 후원자로서 지위를 과시했다. 그들은 과시욕으로 자기들의 도시를 웅장하게 장식하기 위한 개선문, 신전, 원형극장, 공중 목욕탕을 건설하였으나 생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귀족들이 권력과 명예에 정신이 팔려 있어 정치 불안과 내전이 심했다. 이것은 공화정을 약화시킨 주원인이기도 하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그 직위에 따르는 최고의 권력과 명성과 영광을 얻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외침의 위기에서도 내전을 일으키면서까지 황제가 되려는 유혹은 컸다.
반면에 권력이 황제에 집중되다보니 많은 귀족들이 공직을 포기하고 재산 축적, 사적 군대 육성, 화려한 사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귀족들의 이러한 생활은 제국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출신 성분이 귀족이 아니었던 자들은 귀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동경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했다. 이들은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에 올라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긁어모았다. 고위직의 부패는 중간층과 하류층을 약화시키고 소외시켰다.
3. 제국 멸망의 결정타 - 게르만 족의 이동과 로마의 멸망
가 -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로마의 멸망
- 콘스탄티누스 사후 제국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 337~361)가 제위를 이었고 기독교 우대 정책을 이어나갔다. 그의 치세아래 게르만족의 갈리아 침공이 다시 활발해졌다. 거듭 패배를 맛본 콘스탄티우스는 전에 제위다툼에서 죽인 사촌의 아들인 율리아누스를 사령관에 앉혔다. 전투 경험은 없고 철학공부만 한 율리아누스지만 지휘능력은 탁월하여 삽시간에 게르만족을 격퇴하였다. 예부터 무훈을 세훈 장군에 의한 권력참탈은 흔한일이었고 로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율리아누스는 승전한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하여 황제가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제우스신을 섬겼으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하지 않고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빼앗은 재산을 다시 돌려주라고만 하였다. 검소한 율리아누스는 궁중의 미용사, 요리사, 환관 등을 모두 추방하였다. 그가 363년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 전사하지만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의 사후 제위는 발렌티아누스 1세(Valentianus, 364~375)와 발렌스(Valens, 364~378) 두 형제가 이었다. 이때의 로마군대는 이미 게르만족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375년 흉노족의 일파인 훈(Hun)족이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Ostrogoth)
족을 쳤다. 이에 놀란 6만의 서고트(Vishgoth)족이 로마 영내로 피난하기를 요청하였고 발렌스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식량문제로 인해 난민으로 들어온 서고트족과 로마는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서고트족은 폭동을 일으켰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가 이끄는 8만 로마군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아드리아노플에서 고트족과 대회전을 벌였다. 역사상으로도 유명한전투로 압도적인 서고트의 기병에 중장보병으로 거의 이루어진 로마군대는 철저히 유린당으며 발렌스황제도 전사했다. 이전에도 게르만족에 로마군이 패한적은 많았으나 이번의 패배는 의미가 달랐으며 이후 제국과 게르만족사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발렌스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황제는 그들을 격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제국내의 정주를 허가했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고트족은 다뉴브강 이남에, 반달(Vandal)족은 판도니아 지방에, 프랑크족은 라인강 이남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독자적인 법과 왕을 두었으므로 사실상 로마제국안에 새로운 국가들이 생긴것과 다름없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생전에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명의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하여 다스렸는데 395년 그가 사망한후 로마제국은 완전히 동서로 갈렸다. 장남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동로마황제가 되었고 차남인 호노리우스(Honorius)가 서로마황제가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요직에 앉은 게르만족을 추방하고 발칸지역에 뿌리를 둔채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침입으로 멸망할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은 그러하지 못했다. 410년 족장 알라리크(Alaric)가 거느린 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B.C 378년 켈트족이 로마를 점령한지 거의 80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고트족의 로마약탈도 453년에 있었던 반달족의 로마 약탈에 비할바는 못되었다.(영어로 Vandalisn은 약탈을 뜻한다.)마침내 최후의 로마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폐위됨으로써 로마는 역사의 막을 내렸다.
<로마시대의 존재를 상징하는 유적들>
▲ <콜로세움>
▲ <판테온>
▲ <세고비아 수도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