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은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총은 붓 역할을 못한다”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 사람 냄새 물신 풍기는 이야기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그 두 번째 이야기!
『중국인 이야기2』
“아무리 불러도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청사에 빛나는 일이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파도는 성찬이었고, 만리강산은 한 잔의 술이었다.”
- 장쉐량을 두고 대서법가이며 시인인 위유런이 읊은 말
“진리는 하녀의 속성이 있다. 권위에 의존해야 빛을 발한다. 권위가 약한 진리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둔갑한다. 대다수가 진리를 숭상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권위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이 점을 간과했다.”
-「펑더화이, 마오쩌둥을 비판하다」 中
▣ 국판|반양장|456쪽|값 18,000원| ISBN 13 :9788935662197
40년 중국통 김명호의 붓끝에서 살아나는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 그 두 번째 이야기다. 중국 근현대사에 명멸했던 숱한 재자(才子)와 가인(佳人)들의 이름이 여지없이 호명되고, 개성 강한 그들의 삶이 40년 중국통 저자 김명호의 붓끝에서 생생히 살아난다. 이런 인물도 있었던가, 그 인물의 이런 면이 있었던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인물들과 그에 얽힌 일화와 사건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 김명호식 ‘인물 오디세이’의 특징이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모두 기록 속에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일기집, 서한집, 회고록 같은 1차 자료를 통해 무미건조한 역사 이면의 진짜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들춰낸다. 책을 살아 있게 만드는 풍부한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며, 그 자체로 역사의 선연한 한 장면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 진한 사람 냄새 풍기는 이야기
청․일전쟁, 신해혁명, 국․공합작, 북벌, 국․공내전, 항일전쟁,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는 숨가쁘게 전개되며,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자들은 하나같이 진한 사람 냄새를 풍긴다. 그들은 혁명의 이름으로 인생을 걸고, 사랑의 이름으로 자유를 추구했던 풍운아들이다.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구국을 결단하고, 뜻이 다르면 철천지원수처럼 결별하는가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어 다시 뭉치기도 한다. 명분과 실리 앞에 갈등하고, 의리와 배신의 양단에서 위태롭게 줄을 타기도 한다.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가 하면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중국인 이야기’는 심각한 사건도 대단한 역사도 그 뒷면을 알고 나면 한바탕 코미디 아닌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한다. 더한 슬픔도 더한 기쁨도 없으며, 패해도 이긴 것 같고 이겨도 진 것 같은 역사와 인생의 아이러니를 말해준다.
중국의 혁명가들…쑨원․장제스․마오쩌둥에서 쑹자수․펑더화이․장쉐량까지
제2권에서도 제1권과 마찬가지로 걸출한 주인공들과 그에 못지않은 주연급 조연들이 드라마를 연출한다. 단연 두드러진 인물로 관우와 장비를 합해놓은 인간형으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며 실각했던 펑더화이(彭德懷), 두고 보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일거에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의 전략으로 반대파들을 겁박하는 마오쩌둥(毛澤東), 1959년 여름 루산(廬山)에서 열린 회의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쟁론이 뜨겁다. 투쟁철학이 곧 인생철학이었던 마오의 냉혹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또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출병 요청을 받은 마오쩌둥의 속내와 참전에서 정전(停戰)에 이르는 숨은 비사(秘史)가 공개된다.
공화제를 선포한 위안스카이(元世凱)에게 기꺼이 총통직을 내놓은 ‘민주혁명의 선구자’ 쑨원(孫文)과 혁명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던 수완 좋고 대범한 사업가 쑹자수(宋嘉樹)가 만나 의기투합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쑨원은 “중국의 링컨이 돼라”고 한 쑹자수를 통해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게 됐고,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쑨원의 별명이 ‘대포’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임시대총통에 부임하기 위해 입국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귀국 선물은 단 한 가지, 혁명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였다. 그 호언장담은 유치하지만 국민들에게 먹혀들었다. 북벌(北伐)을 단행하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해 중국의 ‘황금 10년’(1927~1937)을 열었던 장제스(蔣介石)와 쑹메이링의 결혼 과정, 장쉐량과의 삼각관계, “호랑이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며 시안사변(西安事變)의 주동자인 장쉐량을 죽을 때까지 연금시킨 은원(恩怨) 관계도 다룬다.
이런 큰 줄기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 주변으로 뻗어 있는 지류 이야기도 풍성하다. 동북왕(東北王)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 동북의 군정 대권을 장악해 한때 천하를 삼분했던 장쉐량(張學良), 민국 최고의 미남이자 쑨원의 후계자였으나 항일(抗日)에서 입장을 달리하며 매국노로 전락한 왕징웨이(汪精衛), ‘장제스의 예리한 비수’라 불리며 국민당 첩보기관 ‘군통’(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을 이끌었던 다이리(戴笠), 위안스카이의 심복으로 북양정부 최대의 파벌 ‘교통계’(交通系)의 영수로 정부 재정을 한손에 움켜쥐었던 ‘재신’(財神) 량스이(梁士詒), 북방의 대(大)군벌로 비록 돈을 써서 총통이 되긴 했지만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던 지도자 차오쿤(曹琨) 등이다.
중국 역사를 움직인 기개 넘치는 여성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실제 여자라 했던가. 중국 역사에서 이 말은 더욱 분명한 듯하다. 쑹씨 집안의 세 자매, 쑹아이링(宋藹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이야기가 소개된다. 쑨원과 쑹칭링,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만남과 결혼에 이르는 에피소드는 천하를 호령한 지도자들의 안주인으로서 그 자질을 엿보게 한다. 모두 부모의 결혼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쑨원의 오른팔, 제1세대 혁명가 랴오중카이(廖仲愷)를 내조한 허샹닝(何香凝)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역사에 이름 남김을 쟁취하라”며 송별시로 남편을 독려했고, 구차한 후원금을 받는 대신 스스로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던 고귀한 인품의 소유자다. 왕징웨이의 부인 천비쥔(陳璧君) 또한 난징 괴뢰정부의 퍼스트레이디답다. 일본 패망 후 한간(漢奸)재판 법정에서 남편의 선택과 삶을 변호하며 장제스를 매도했다. “일본과 쓸데없는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쉬워도 국민들에게 평화를 안겨주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밖에도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수양딸로 선전의 명수였던 쑨웨이스(孫維世), 아버지의 주검을 욕보였다며 대군벌 쑨촨팡(孫傳芳)을 암살해 ‘중국 역사상 최후의 정통파 자객’이라 불린 스구란(施谷蘭) 모두 기개 넘치는 여성들이다.
드높은 학문세계에서 노닌 학자들, 풍류를 즐긴 지식인들
정치적 격변과는 아랑곳없이 드높은 학문 세계에서 노닌 학자나 지식인, 문화인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괴팅겐대학 도서관의 산더미처럼 쌓인 고문서 속에 파묻혀 동방 고문자 연구에 열정을 바친 지셴린(季羨林)은 여든이 넘어서까지 도서관 열람실을 드나든 국보급 학자다. 1905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자본론』을 들고 들어온 마이푸(馬一浮)는 젊은 시절 이미 『사고전서』 3만 6,000여 권을 독파한 독서광이었고, 루쉰으로부터 “상갓집에서 빈둥대는 자산계급의 주구”라는 비판을 받은 량스치우(梁實秋)는 셰익스피어 번역에 하루 2,000자씩 40년간을 매달린 집념의 영문학자였다. 『성경』과 『사기』를 챙겨들고 작가가 되겠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났던 선충원(沈從文)은 무학(無學)에도 불구하고 “학력(學歷)보다는 학력(學力)”이 중요하다고 믿은 후스(胡適)에 의해 교수로 발탁되고, 위다푸(郁達夫)와 쉬즈모에 의해 그 문학성을 세상에 드러냈다. 쉬즈모(徐志摩)는 서정시인답게 린후이인(林徽因), 링수화(凌叔華), 루샤오만(陸小曼) 등 당대의 재녀(才女)들과 낭만적 연애를 즐겼다. 한편, 중․일전쟁 시기 전시수도 충칭(重慶)에는 피난 온 내로라하는 문화인들이 ‘이류당’(二流堂)이라는 살롱 풍경을 연출했다. 극작가 우쭈광(吳祖光), 시사만화가 딩충(丁聰), 화가이자 서예가 황먀오쯔(黃苗子)를 비롯해 저우언라이, 린뱌오(林彪) 등도 함께 어울렸다. “우리는 정객이 아니다. 소시민들이다”라는 기치 아래 전란의 신산함을 유쾌하게 이겨냈다.
변화무쌍한 시대사와 개인사, 개성 넘치는 인물들의 끝없는 이야기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전체 기승전결의 체계를 잡고 연대기 순으로 평이하게 씌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건의 한순간을 포착하여 거기에서 출발하고 또 거기에서 끝난다. 따라서 하나의 인물도 한 번의 이야기로 끝날 수 없다. 젊은 시절과 말년의 모습이, 어제와 오늘이, 이 사람과 저 사람과의 관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숱한 이야기의 단편들이 모여 퍼즐조각이 맞춰지며 전체 이야기를 드러내는 일종의 옴니버스 역사다. 그것이 읽는 독자에 따라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개성 넘치는 수많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시대사와 개인사를 풀어내는 방법으로는 제격이 아닐 수 없다. 멀끔하고 단정한 샌님 같은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중국인 이야기’는 금방 캐내어 흙 묻은 고구마, 뛰어놀아 땀에 흠뻑 젖은 아이처럼 싱싱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