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유수(落花流水) / 남인수 (1942년 취입한 원곡)
박남포 개사. 이봉룡 작곡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낙화유수(落花流水)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
재 취입 ▼ 스테레오
[예비 음원]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서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많은 인생살이 꿈 같이 갔네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꽃다운 이강산에 봄맞이 가세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시들은 내청춘은 언제 또 피나
남인수(南仁樹)
남인수는 우리 가요계 사상 최고의 미성가수로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반영하듯 성이 다른 이름만 셋이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나 최창수와 강씨 문중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가 강문수
그리고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예명 남인수다.
고향은 진주고 봉래보통학교 출신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온통
베일에 가려 있다.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3옥타브의 음역을 소유한 목소리는 "백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반듯한 매너, 술, 담배를 멀리하는 자기 절제가 몸에 밴 생활 태도는 뭇 가수들의
모범이 되어 후배들로부터 진정한 “서정가요의 황제”로 추앙받았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때론
나라 잃은 망국민의 처참한 마음을 때론 아물지 않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한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진 국민가요들이다.
1935년 어느날, 학생복 차림의 잘생긴 18세 청년 강문수는 '시에론레코드'사
음악실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는다.
이때 부른 노래가 “눈물의 해협”인데 기타 반주를 해주었던 작곡가 박시춘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방송 출연과 본격적인 가수 수업을 받게 된다.
“눈물의 해협“으로 1936년 데뷔하여 시에론레코드 시절 강문수의 장래성을 발견한
작사가 강사랑은 그를 메이저 레코드사인 오케이레코드로 스카우트한다.
남인수란 예명은 오케이레코드가 1936년 “범벅서울”을 내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눈물의 해협)은 멜로디에 이부풍의 신작 가사를 붙여
발표한 곡이다.
1937년 애수의 소야곡 발표는 그에겐 인기 정상으로 향한 힘찬 첫 발자국으로 이 음반을
주문하려는 전국의 레코드 소매상들이 서울로 구름같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당시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오빠부대”를 능가했다.
그가 출연한 악극단은 벌떼처럼 몰려든 청중들의 거듭된 앵콜 요청으로 진행이 어려웠을
정도였다.
사회자들은 번번이 무릎을 꿇고 프로그램 진행을 사정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중들의 탄성과 흐느끼는 여성 관객들로 객석은 늘 술렁이고 극장 밖에는 남인수를
데려가려는 인력거꾼들이 서로 다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인기상종가는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해 남인수는 결핵으로 병약해졌다.
민족분단의 상징인 38선이 굳어져가던 46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발표한
“가거라 38선”은 해방 후 첫 취입곡으로 박시춘이 운영하던 은방울 쇼단을 맡으며 치밀한
계산과 과감한 투자로 “돈인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공한다.
1953년 휴전 후 발표한 또 하나의 명곡은 “이별의 부산정거장” 이다.
1955년 추억의 소야곡, 청춘고백, 56년 산유화, 58년 무너진 사랑탑 등으로 히트 퍼레이드가
계속됐다.
1962년(45세) 지병의 악화로 남인수는 세상을 떠난다.
조계사에서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장송곡은 온 국민이 사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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