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흘 째날, 아헤스를 떠나 엘시드의 고향 부르고스(Burgos)을 향해 19km를 걸었다.
어제 오르막길을 힘들게 오른 수고를, 오늘 내리막길이 보상을 해주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먼발치 앞서 가는 사람의 랜턴 불빛을 따라 새벽길을 걸었다.
약 3km정도 지나 작은 마을이 나타났는데, 골목길에 접어 들어서자
어디에선가 달콤한 빵 냄새가 났다.
순례자를 위해 새벽 일찍 문을 연 바르(bar)였다.
따뜻한 커피의 향긋한 향과 갓 구워낸 토스트 빵 냄새는 순례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다.
아직 잠이 덜 깬 서벅서벅한 오십대 부부가 분주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결코 부지런하지 않은데,
순례자들을 위해 꼭두새벽에 문을 열었으니 고마울 수밖에.
마을을 빠져나가기 직전, 어둠 속에 특이한 입간판을 발견했다.
인류 조상의 유적을 발굴한 장소임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아타푸에르카(Atapuerca)라는 마을에서 12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직립 원인(Homo erectus)들의 거주지를 발굴하고 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직립을 하고 도구를 사용해 사냥하며 불을 사용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인 셈이다.
순례 길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데다가 너무 이른 새벽이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 위의 생명체에 대한 끝없는 논쟁이 생각났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발표한 ‘진화론’이냐,
아니면 창조주에 의한 ‘창조론’이냐에 대한 논쟁 말이다.
나는 애매모호한 ‘불가지론’에 기대고 있는데,
어찌 보면 ‘불가지론’이 가장 현명한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천동설이던 지동설이던 우주는 우주 그 자체이며,
창조론이던 진화론이던 인간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이제는 신의 경지를 넘보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향해 맹렬하게 도전하고 있다.
120만 년 전에 인간의 조상인 직립 원인(Homo Erectus)이 존재했던 것처럼
120만 년 후에도 인간의 후손은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마을을 벗어나자 가파른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길을 따라 철조망 쳐진 목장 안에는 양떼들이 새벽이슬을 맞은 채 서있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잠시 생각났다. 조금 지나서 돌길이 나왔는데 느낌이 묘했다.
송구공만한 크기의 거무칙칙한 색상의 돌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마치 해골바가지들이 산지사방에 널브러져 뒹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골이 널려있는 골고다 언덕인가.
언덕 꼭대기에 돌무덤이 쌓여있고 정중앙에 높다란 나무십자가가 서있었다.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이 없는 단아한 나무십자가였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다보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수천 개, 수만 개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지만,
동터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이 나무십자가가 내 마음에,
그리고 내 영혼에 가장 와 닿았다.
십자가가 서있는 돌무덤 곁 넓은 평지에는 순례자들이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걸작품이
하나 있다.
순례자들이 언덕길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집어 와서 동그라미를 만든다.
호수 위에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언덕 위에는 순례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만들어가는 동심원이 점점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신비의 동심원(mystic circle)이다. 나도 돌 하나 들어다 동그라미에 보탰다.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중세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가는 순례자들이 찾아와 머물고 가는 부르고스는
중세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답게 위용이 당당하다.
수많은 성당의 첨탑과 수도원 건물, 궁전,
대학교와 병원 건물들이 쉽게 범접하지 못할 중세 도시의 위용을 과시한다.
대성당 바로 뒷켠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1시 조금 넘어 도착했는데,
한참 길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했다.
진화론에 따르면 알베르게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위치도 좋을 뿐 아니라 시설도 현대식으로 진화됐다.
그걸 어찌 아는지, 1시 반에 등록이 시작되는데도 불구하고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 후에 곧장 대성당을 향했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1984년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1221년에 건축이 시작된 대성당은 15~16세기에 크게 증축됐으며
18세기에 고틱 양식으로 개축됐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규모면에서나 실내장식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성당 중에 하나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성당들은 항상 개방되어 있는데,
부르고스 대성당의 경우 입장료 7유로를 받는다.
순례자들에게는 다소의 할인혜택이 있다. 대성당 외벽 파사드(facade)와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의 위용을 스마트폰 카메라로는 담을 수가 없었다.
대성당 내부에는 넓은 회당이 중앙에 자리하고 있고,
대회당 곁으로 15개가 넘는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회랑을 따라 배치돼있다.
각각의 작은 예배당(chapel)들은 당대의 재력가의 후원으로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이 동원돼 만든 제각기 다른 분위기의 성소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작은 예배당들은 대리석으로, 혹은 타일로, 혹은 옥으로, 혹은 상아(ivory)와 흑단(ebony)으로 장식돼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예배당 구석구석에 있는 조각품이나 부조물, 그림들은 하나같이 보물이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었던 스페인의 부귀와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대성당에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인 엘시드의 시신을 모셨던 목관과 그림이 있다.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엘시드(El Cid)는 스페인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전설적인 영웅이다.
엘시드는 스페인 안에 있는 이슬람 세력들을 포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여 국가의 위난을 극복했다. 국왕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추방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국왕과 왕국에 충성을 다하다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두 차례나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12척의 배로 왜군을 물리쳤던 이순신 장군과 같은 국민적인 영웅이다.
이순신 장군이 ‘싸움이 중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하며 최후를 맞은 것 까지도 흡사하다.
엘시드나 이순신 장군, 두 사람 모두 전설적인 국민영웅으로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것까지도 같다.
대성당 광장 한 구석에서 특이한 조형물을 발견했다. 벤
치에 앉아 있는 병들고 지친 순례자의 모습이다.
온 몸에 피고름이 흐르는 듯, 순례자의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중세 때에 순례자들이 마을과 마을에 소식을 이어주는 역할도 했지만 마을과 마을에 전염병을 퍼트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몹쓸 병을 얻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례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은 일어났을까.
하나님은 이들의 처절한 기도에 어떻게 응대하시고 위로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