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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6일
말씀 : 고전:15:3-4
제목 : 이중적 구조
오늘은 신앙생활에서 혼란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을 다루어볼까 합니다. 그중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이중적 구조 형태의 말씀(예를 들어 성경은 뱀을 사탄으로 묘사하고 있고 창세기에서도 사탄이 뱀의 몸을 빌려 하와를 유혹했지만,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는 ‘뱀처럼 지혜로워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성육신(成肉身)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만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죄가 유전되는 인간의 씨로는 이 땅에 오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지만 죄가 없으신 '이중적 구조'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즉 성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이중적 구조'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중적 구조'와 '이중성'은 다릅니다. 이중성은 예를 들면 마약 단속반이 마약을 하거나, 검사가 정의에 관심이 없거나, 기자가 진실에 관심이 없거나, 의사가 환자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중성이 한 사람에게서 두 가지 행동이 나오는 것이라면, 이중적 구조는 한 사건이나 한 사람을 통해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며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지만 믿는 세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는 명확해서 100% 믿을 수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세계는 막연하고 불분명하며 확실성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지만 무섭습니다. 그런데 무서워하는 만큼 조심하지는 않습니다. '설마 걸리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마스크 쓰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입니다. 이용하거나, 배신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가식을 떠는 이유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보이는 세계를 위해 사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사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분명해야 삶의 과정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계를 잘 알고 창조의 섭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과학자들이 자연의 물질들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창조주가 아니라면 이 세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중적 구조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헌신과 예물 또한 그 삶의 과정의 한 표현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삶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결과물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이중적 구조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후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교회를 선택할 때도 보이는 것을 통해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거대한 건물, 잘 짜인 프로그램, 성도들의 열정, 성가대의 웅장함 등을 보고 선택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하며, 그곳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곳을 볼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중적 구조’를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사랑으로 우리를 다루신다고 하셨는데, 편안함을 보장하셨는데, 기도만 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고난이 내 인생에 나타났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간섭만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다른 사람들처럼만 살게 해주세요’라고 대부분 반응합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 당해야 하고, 왜 누명을 써야 하고, 왜 손해를 봐야 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저 말씀대로 살다 보니까 세상에서 대접 받지 못하고 바보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제 인생에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기도한 대로 다 이루어져서 간증도 풍성하게 하고, 그 간증을 책으로도 내면서 승승장구하면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메시지나 권면이 단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영역에서 체험하고 알게 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간절함이나 주님의 긍휼과 사랑은 배제된 채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을 수도 있어. 성경을 그대로 믿고 기도하면 나처럼 될 텐데.’와 같은 오만함이 마음속에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중적인 구조로 작동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려움을 이길 힘을 위로부터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암에 걸린 것으로 인해 영적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왜 암에 걸렸는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암 때문에 보험금을 타게 되었고 그것으로 필리핀 가는 데 필요한 경비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리핀 사역의 문을 여셨구나'라고 깨달을 정도로 정확하게 돈을 주신 것입니다. 저는 암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더 깨달았고, 하나님께서 이런 과정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저에게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생명 연장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했고, 응답으로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습니다(이사야 38장). 기도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예화로 많이 활용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가 15년 더 살면서 뭘 했습니까? 나라를 구했습니까? 아니면 우상을 다 제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블레셋 사절단에게 왕궁과 무기고를 열어 재물과 무기들을 다 보여주면서 자랑했고, 이로 인해 그가 죽은 후 블레셋인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그것들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빨리 죽는 사람도 있고 오래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산다고 복 받은 것도 아니고, 빨리 죽는다고 저주 받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중적 구조로 결정하신다고 생각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이처럼 히스기야 사건은 생명을 연장할 이유가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빨리 죽더라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모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각각 다르며, 모든 시간과 결정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실수한 것이 있다면 '믿음으로 다 되는데', '기도하면 다 되는데', '말씀에 순종하면 다 되는데' 등의 말을 자주 한 것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중적 구조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고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체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그것도 태초에 우리를 계획하시고 이 땅에 보내기로 작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설정하신 개인의 훈련과 사명과 역사는 이중적, 더 나아가 다중적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나는 기도하면 되는데 너희는 안 되니?'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응답이 없는 것이 응답보다 확실할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물론 강조해야 합니다. 그런데 겨울에 얇은 옷을 입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감기에 걸렸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때 지도자가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뜨겁게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강조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적 질서를 잘 지키며 그분의 뜻과 의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말씀과 훈련과 연단을 잘 받아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도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지금 이 땅에 보내셔서 그분의 뜻대로 이끌고 계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은사와 비교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동일시해도 안 됩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 말씀에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립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는 각자 맡은 배역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자기 배역에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만이 있으면 안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은 책임감을 갖고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합니다. 배역은 매우 다양합니다. 나무나 행인일 수도 있고, 곰의 탈을 쓸 수도 있으며, 선하거나 악한 조연 역할을 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을 위해서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 주인공은 더욱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들 또한 아무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역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그 자리에서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대사가 많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없는데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본주의적이며 기복적인 설교인 것입니다. 결국 어떤 아픔이나 슬픔, 또는 위기를 만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높이는 일에 동원되고 사용된다는 생각은 이중적 구조를 알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이중적 구조를 알면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강요하지 않습니다. 평가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옳거나, 정당하거나, 동정과 도움을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공원의 비둘기들에게 계속 과자나 간식을 주면 비둘기들은 공원으로 모이게 되고, 많아진 비둘기들이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머리에 똥을 싸거나 공원을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관리자들의 골칫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팁 문화가 있는 나라가 꽤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필리핀에 와서 골프를 치면 팁을 너무 과하게 준다고 합니다. 물론 개인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적정한 팁을 주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할 수 있고, 더 많은 팁을 요구함으로써 즐거운 분위기를 깰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를 드는 이유는 정당하고 올바른 요구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결정권자, 즉 주권자의 사랑과 공의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인자하시며 공의를 베푸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법궤를 빼앗기고,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보면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지만 그분께서 부활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중적 구조를 모르면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하나님의 계획도 실패했고, 동정녀 탄생도 이해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이기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철이 들어야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나를 비롯해 나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것 안 잡아가고’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을 보면 '그렇구나. 천국은 철이 들어야 갈 수 있는 곳이구나'라고 이중적 구조의 관점에서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드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내어주신 것으로 볼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우리를 열심히 다듬으시고 훈련하시겠구나'입니다. 예수님 잘 믿고 순종하고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들이 빨리 죽는 이유도, 저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을 정도로 타락한 사람들이 오래 사는 이유도 이중적 구조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믿는데 왜 저렇게 못사는가?', '예수 믿는데 왜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가?', '예수 믿는데 왜 자식들이 저 모양인가?' 등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삶의 결과물을 천국에서 풍성하게 받도록 이끄시는 그분의 계획 또한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이 아닌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정을 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한시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그분의 엄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기도 바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와 이 땅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와 하나님나라 또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면 신앙생활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비교해보면 시험에 들 만큼 서운하거나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성경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중적 구조에 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잘 알기 위한 방법론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장의 증인들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구조를 우리는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 많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약하게 다가온 천국을 믿음으로 맛보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믿음으로만 맛볼 수 있는 이유는 천국과 오늘의 삶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그곳에 갔을 때 비로소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맛을 본다고 표현한 이유는 지금은 천국이 나약하게, 표시 나지 않게 와 있기 때문이며, 천국이 나약하게 와 있는 이유는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표시가 나지 않아서, 천국을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어서 우리가 세상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을 맛본 자들은 세상에서 강력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부인할 수 없는 맛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 맛은 순교까지 이어질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 강력함을 소유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