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 내 기억 속
너는 언제나 집채만 한 들소였다. 훅 내뿜는 콧김 한 줄기에 온 마당이 들썩이는 듯했고, 굵직한 목을 울리며 길게 포효할 때면 세상 어떤 맹수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어른들은 그저 일 잘하고 순하디순한 누렁이라 불렀지만, 작고 보잘것없던 소년의 눈에는 깊은 산골을 누비다 우리 집으로 불쑥 찾아온 든든한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돌담에 등을 기대고 선선한 그늘 아래 고삐를 쥐고 앉아 있던 나른한 오후가 여전히 눈에 선하다. 다랑논을 훑고 지나온 바람이 귓가를 스치면, 너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여물 대신 달큰한 풀뿌리를 뜯었다.
깊고 아득한 눈망울을 껌뻑이며 묵묵히 턱을 움직이던
그 고요한 되새김질. 억센 털이 돋은 따스한 가죽에 등을 대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와 세상 어떤 곳보다 아늑한 평화를 주곤 했다.
무거운 멍에를 목에 얹고 가파른 비탈밭을 갈아엎던
너의 등허리에는, 어쩌면 우리 가족의 고단한 생계와 계절의 무게가 온통 실려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훌쩍 지나 너와 나를 잇던 볏짚 고삐가 풀려버린 그날, 나는 끝내 묻지 못했다. 너는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서도 배불리 풀을 뜯고 있는지. 가난했던 시절 집안의 든든한 밑천이자 식구로서의 몫을 다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간 너의 뒷모습은, 오랜 시간 가슴 한구석에 먹먹한 빚으로 남아있다.
너는 지금 어디서 어떤 숨을 쉬고 있을까.
코를 꿰던 지긋지긋한 코뚜레와 무거운 쟁기를 진작에 벗어던지고, 발길 닿는 곳마다 부드러운 풀꽃이 넘실대는 언덕을 자유롭게 뛰놀고 있을까.
새벽부터 논둑을 오르내릴 필요도, 채찍질에 걸음을 재촉할 일도 없이, 온종일 맑은 개울물에 목을 축이며 늘어지게 단잠을 자고 있기를 바란다.
혹여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 무렵 바람결에 실려 오는 풀잎 냄새가 스친다면, 그것은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한 시골뜨기 꼬마의 안부 인사로 여겨주면 좋겠다.
유년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나의 유일한 들소이자 둘도 없던 동무야,
너는 지금 그곳에서 평안하느냐(ㅡ_ㅡ^)
첫댓글 어릴때의 귀한 추억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말없는 소에게 코뚤은 이야기. 부림의 표현에서 인간으로서의 넉넉한 마음씨를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집소를 왜. 들소라고.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