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케네 1 - 코린토스만을 둘러보고는 버스를 타고 피흐티를 거쳐 미케네에 가다!
어제 2024년 4월 30일 크레타섬에서 아테네 공항에 내려 X93 버스를 타고 키피소스
버스터미널에 시외버스를 타고 펠레폰네소스반도의 코린토스에 도착해 아파트
(연립주택)에 체크인후 택시로 고린도로 가서는 옛 유적지를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2024년 5월 1일 아침에 숙소를 나와 4~5분을 걸어서 코린트만으로 가서
광장에 여러 조형물과 푸르디 푸른 코린트만을 구경하다가 문득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코린토스’ 로 인해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을 떠올립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년∼BC 404년)은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나이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끈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이었으니, 동맹에 속하거나 중립을
내세웠던 나라들이 하나둘씩 전쟁에 말려들면서 다툼은 ‘세계 대전’ 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주변국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같은 희생자였을까?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 일면적
이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는 거대한 파국이 어떻게 ‘먼 나라의 불화’ 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유사한 사건의 반복을 경고하는 투키디데스 의 ‘징비록’ 입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는 전쟁의 도화선인 코린토스- 케르퀴라- 에피담노스
의 갈등 이야기에서 시작하는데..... 기원전 433년 시보타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해전을 묘사한 그림이 당시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가장 참된 원인’ 을 아테나이의
세력 팽창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두려움에서 찾았지만 어떤 사건에서든
주된 원인이 있다면 보조적 원인도 있기 마련이니 아테나이의 팽창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주된 원인이었다면 배후에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고유한 갈등 구조가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여러 나라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정체 갈등을 겪었고, 이런 내부 갈등은 다른 나라들
과의 동맹 관계와 얽혀 더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니, 나라 안에서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동맹 관계가 달라졌고 동맹 관계에 따라 국내 정체가 좌우 되었기 때문입니다.
얽히고설킨 갈등은 특히 식민지와 모시(metropolis) 사이에서 자주 불거졌으니.... 나라 A
가 인구 과잉이나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B를 개척한다.
B 역시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서 식민지 C 를 세운다. 피를 나눈 A, B, C 의 관계는 어떨까?
A는 B의 내정에 간섭하고 B는 이에 반발한다. A와 B의 갈등이 B와 C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게다가 A, B, C
가 저마다 정체 갈등에 빠져들면 상황은 더 꼬일 수밖에. 투키디데스 전쟁사는 이런 갈등속 ‘삼대
(三代)’ 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니 코린토스 - 케르퀴라 - 에피담노스의 갈등이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것입니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퀴라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였는데..... 먼 곳 작은 나라의 내분이 큰
전쟁의 불씨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에피담노스에서
민주파가 귀족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분쟁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쫓겨난 귀족파는 외부 세력을 끌고 돌아와 민주파를 공격하니 민주파는 케르퀴라에 도움을
청했지만 케르퀴라는 중립을 내세워 지원을 거절했는데.... ‘아버지’ 에게 외면당한
에피담노스는 ‘할아버지’ 코린토스에게 손을 벌렸으니 주권을 넘기겠다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코린토스인들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으니 평소 모시(母市) 를 깔보던 케르퀴라를 응징할
기회가 왔다! 괘씸한 ‘아들’ 을 혼내려 ‘손자’ 편을 드는 ‘할아버지’ 의 심정이
그럴까? 에피담노스 사태에 코린토스가 개입하자 이후 케르퀴라의 입지가 흔들립니다.
에피담노스의 지배권을 놓고 코린토스와 충돌한 케르퀴라는 마침내 중립을 포기하고 아테나이와 동맹
을 맺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으니까!
아테나이가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개입하면서 집안 싸움이 온 동네 싸움으로 비화된 셈입니다.
코린토스의 입장에서는 케르퀴라가 미운 자식이라면 아테나이는 오랜 원수였으니 경쟁심과 복수심에 불타
오른 코린토스가 동맹국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전쟁을 벌이려 한 것은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아테나이도
스파르타도 전면전을 원치 않았으니 투키디데스는 평화를 위한 두 나라의 외교적 노력을 자세히 서술합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전략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케르퀴라의 함대가 문제로 이 함대가 아테나이
수중에 들어가면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넓은 바다에 배 한 척 띄울수 없는 처지가 되는 반면에
케르퀴라의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넘어가면 해군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아테나이가 위태로워집니다.
투키디데스 모델로써 국제전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마땅히 전쟁의 ‘가장 참된
원인’ 만큼 보조적 원인도 함께 따져야 할 것이니.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의 세력 팽창에 대한
영국인들의 두려움에서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르비아의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을 새로 ‘투키디데스의 함정’ 으로 지목한 그레이엄 앨리슨은 대만이
‘케르퀴라’ 가 될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어디 대만 뿐일까? 내부 갈등에 휩싸인 나라, 이
내분이 외부 동맹 관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나라는 언제든 더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될수 있습니다.
전쟁의 동기를 제공한 케르퀴라의 운명은 어땠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몇 년뒤 케르퀴라
는 잿더미가 되었는데 도시를 파괴한 것은 외침이 아니라 내전이었으니.....
에피담노스 사태의 복제판으로 코린토스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전향자들이 민주파를 공격합니다.
법정 소송에서 시작된 공격은 암살과 테러, 권력 탈취로 이어졌는데.... 하지만 지원하던 스파르타 군대가 퇴각
하자 민주파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니 격렬한 내전에 중립은 불가능해서 여자들까지 싸움에 나섰을 정도
라?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 원한 때문에 죽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빚을 준 탓에 채무자 손에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참상은 케르퀴라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으니
“각지에서 분란이 일어나 민중의 지도자들은 아테나이인들을, 소수파는
스파르타인들을 끌어들이면서..... 나중에는 그리스 세계 전체가 동란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는 ‘전쟁 (polemos)’ 의 기록이기에 앞서 ‘내분(stasis)’ 의 기록이다.
‘한 나라의 내분이 동맹국들의 전쟁을 부르고 이 전쟁이 다시 내전을 격화시켜
문명을 야만 상태로 끌어내린다.’ 나는 이것이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요약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국가’ 에서 정치의 목적을 내분을 막는 데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내분의 위험과 파괴력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처방이 모든 정치적 의견 차이를 배척할 정도로 강박적인 것은 문제이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케르퀴라의 현재 모습.
현재 ‘코르푸’ 로 불리는 이곳은 그리스의 유명 관광지로 손꼽힌다.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경고가 과장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73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남북한 군인
사망자가 44만 명인데 반해 민간인 사망자는 65만 명이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
수많은 사람이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에 희생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의 경고를 ‘길 건널 때 조심해라’ 라는 노모의 걱정처럼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
가 여기 있다. 내분을 막는 정치 이외에 ‘케르퀴라의 운명’ 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런저런 옛날 일을 생각하며 배낭을 메고 광장을 지나 남쪽으로 10분 가량을 걸어서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데.... 그렇다고 무슨 큰 건물과
주차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아주 작은 사무실 하나에다가 버스는 그냥 도로변에 섭니다.
여행 가이드북에 보면 코린토스 버스 터미널에서 남쪽 나브플리온 Navplion
(니프삘리오이) 행 버스는 토요일에는 08시 30분, 09시 30분 이고 일요일은
09시, 10시 30분 이며 월 ~ 금요일에는 08시, 09시 30분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우린 미케네 Mycenae 로 가야 하는지라 시외버스를 타고 피흐티 Fichti 에 내려서 택시를 갈아타야
한다고 들었기에 이런 내용을 적은 종이를 창구에 내밀고는 피흐티 버스표를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직원의 표정이 신통치 않은 것이 뭐라 딴 소리를 하는데.... 아니? 여기서 나프플리온
Navplion 으로 가는 버스가 중간에 피흐티 Fichti 에 서지 않소? 그 표를 달라니깐?
그러니까 버스 회사 직원이 하는 말이 여기서는 나프플리온이나 피흐티
Fichti 로 가는 버스가 없답니다? 아니? 세상에.... 이건 또 뭔 말이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디로 가서 타야 한다는데..... 그 발음이, 그러니까 히어링이 되지
않는지라 종이를 내밀며 스펠링을 적어 달라고 하니 Isthmos 라? 그럼 “이스트모스”
그럼 이스트모스 Isthmos 는 택시를 타야 하느냐니까... 여기서 버스가 간다면서 1인당
2유로를 받으면서 하는 말이 거기 내려서 다시 터미널에 들어가 버스표를
끊으랍니다! 그때 우리 말을 듣고 있던 할머니가 자기가 내릴 곳을 말해주겠다나나요?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는지라 올라타니 한 10분 가량을 달려서는 코린토스 시내를 벗어난
한적한 곳으로 대로변에 세우는데..... 보니 이미 버스는 도착해 있는지라 황급히
매표소로 뛰어가 4.5 유로 하는 버스표를 사서 떠나기 직전의 버스에 간신히 올라탑니다!
운전수에게 피흐티! 라고 말하니 버스표에 적힌 좌석에 앉으라는데..... 버스는 남쪽으로
달리다가 어떤 이유에선지 큰 도로를 버리고는 작은 길로 들어서서 달리는데....
그럼 나프플리온 Navplion 으로 가는 이 버스는 아테네에서 출발했으며 코린토스 시내로
들어오지 않고 외곽으로 코린토스 운하 근처의 대로변에서 사람을 태우는 모양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옛날에는 저 버스가 코린토스 시내로 들어왔는데 언제부턴가 외곽에 선다는?
그러는중 작은 마을에서 할아버지가 타기로 배낭을 치워주니 창가로 들어가 앉으면서 내 배낭은 그냥 그대로
두랍니다? 그러고는 내 버스표에 적힌 피흐티 Fichti 라는 글자를 힐껏 보고는 도착하면 말해 주겠답니다!
아테네 주위로는 황량하고 토지도 영양가가 없어보이지만 오늘 우리 버스가 달리는 여기 펠로폰네소스 반도
는 밀과 올리브에 오렌지와 채소등 많은 농작물을 재배 중인데..... 한눈에 보아도 참 비옥해 보입니다!
그러고도 20분을 달린것 같은데, 버스에 처음 탔을때 어느 신사분이 피흐티 Fichti 는 40분 가량 걸린다고
했으니 얼추 다왔지 싶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어는 마을에 버스가 서기로 물어보고는 내립니다.
여자애 2명과 우리 부부 달랑 4명만 내렸는데 보아하니 저 여자애들은 관광객이 아니라 여기 주민인 것
같으니, 관광객은 우리뿐이라 듣던 것 과는 달리 미케네 유적지는 좀 썰렁한가 보다?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오산이니.... 관광지에 도착하니 학생 단체등 관광객으로 인산인해, 미어터지니!
그럼 우리 부부 처럼 버스등 대중교통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1 % 도 안되고
80% 이상은 여행사 패키지이며 15% 는 차량으로 오고 4% 가량은 오토바이나 자전거 라는?
여기 미케네 Mycenae 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름이니....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쓴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중에 일리어드에는 미케네왕 아가멤논이 이끈
그리스 연합군이 멀리 흑해 입구에 자리한 트로이를 공격한 전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택시 요금은 5유로 정찰제인지라 돈을 주고 내리면서 나중에 우리가 다시 피흐티
Fichti 로 돌아가야 하는지라 시간을 약속할려고 하니.... 기사는 저기
전화번호가 적혀있으니 나중에 구경을 마치고 전화를 하면 바로 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