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
글을 쓰기 전에 반드시 전제하고 싶은 내용이 한 가지 있다.
한 나라의 국민성을 두고 이를 평가하거나 또는 이를 규정짓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수치로 정확히 드러난 근거도 없고 또 이것을 증명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더욱이 국민성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은 대부분 감성적으로 기억되는 성격이어서
저마다 느끼는 감정 또한 다른 것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고 어떤 근거를 내세우더라도 결국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글을 읽을 때, ‘사람마다 다르다’는 결론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국민성이라고 해도 어쨌든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감히 국민성이 이렇고 저렇고 논할 수 있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 나라 국민들 중 약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공통적인 특징을 가졌다고 치자.
단지 20%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전 국민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그 나라 국민들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는 없다.
20%라는 수치는 전 국민을 대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치다.
그러나 여기에 묘한 상황을 대입시켜보자.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아니 다른 나라와 비교할 필요도 없이
그냥 우리나라와 비교해본다고 치자.
우리나라에서는 약 5% 미만의 사람들이 가진 특징을
어떤 나라에서는 20%의 국민들이 그런 성격을 나타낸다면?
이때는 같은 20%라도 계산이 달라진다.
이 경우의 20%라는 수치는 엄청난 인구에 해당하는 국민들의 특성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런 경우라면 그 나라의 국민성을 대표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충분한 수치가 된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필리핀의 국민성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자존심에 관한 얘기다.
어느 여행 책자를 펼쳐봐도 필리핀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 과연 세계의 수많은 나라 중에 자존심이 약한 나라, 자존심이 없는 나라가 있을까?
설령 그러한 나라가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을 문서화 하여 책자에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말은 표현할 수 있어도 자존심이 없는 나라라는 말은
어떤 경우라도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여부를 떠나 이 세상에서 국가를 이루고 사는 국민들 중
자존심이 강하지 않은 나라의 국민은 없다.
그러니 이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말이다.
필리핀 국민에 관한 설명 중 빠짐없이 등장하는 자존심 문제,
이 정보에는 중요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어느 책을 봐도 필리핀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하다는 이야기는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어느 누구도 왜 자존심이 강한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은 본 적이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얘기만 등장하는데,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줄 뿐이며,
어떤 책이든, 누구의 말이든 그 내용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똑같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모욕을 당하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이 대목이다.
자존심이 강한 이유와 근거는 없고 단지 딱 이 문장뿐이다.
오로지 이 한 문장이
필리핀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는 모든 얘기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과연 필리핀 사람들은 자존심이 셀까?
* * *
조금 긴 얘기이지만 충분한 이해를 위해 역사를 들춰봐야겠다.
한 국가를 이루는 국민들의 성격 중 자존심에 대한 것은 그 역사적 배경에 근거를 둔다.
우선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역사를 주름잡았던 과거가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자긍심이 바탕이 된 자존심이다.
대영제국의 영국, 로마제국의 이태리, 신흥 강국 미국, 게르만 민족의 독일,
프랑크 왕국의 프랑스, 무적함대 시절의 스페인 등
현재까지도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강대국은 아니지만 세계 역사와 문화에 당당히 한 축을 담당했다는 나라도 있다.
중국, 인도, 그리스, 이집트, 이라크 등 문명의 발상국이거나
한때 찬란한 문명을 선도했던 나라들이다.
여기에 시리아, 터키, 러시아 등
세계역사의 한켠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은 국가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나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배경으로 특별히 강한 자존심을 자기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외의 나라들은 이런 강대국들의 주변국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당당히 이들과 싸워 자신의 국가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런 배경으로 생겨난 강한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에 속하며, 나름대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일본,
한 때 중국이 자신들을 보고 벌벌 떨었다는 몽골,
유럽의 강대국들 틈에서도 국가를 존속시켰다는 스위스,
세계의 초강대국인 중국, 프랑스, 미국과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진
베트남이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물론 이런 경우 이외에도 나름대로 특별한 배경을 내세워
강한 자존심이 형상되는 국가들이 있다.
한 번도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나라, 축구를 잘하는 나라,
특정 산업이 뛰어나게 발달한 나라 등이다.
이렇게 한 나라의 국민들이 가지는 자존심은 그 배경을 가지고 형성된다.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에서도 그다지 신뢰성이 떨어지는 무언가를 내세워
자존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추지 못했거나
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경이라면 자존심이 없어도 된다는 얘길까?
그건 아니다. 이 경우에는 매우 특별한 자존심이 생긴다.
자부심과 자긍심에 근거를 두지 않은 자존심인데,
매우 폭력적이며 다혈질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은 아마도 이 경우에 해당하는 자존심일 것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내가 판단하는 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그다지 강하지 않다.
그저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에서도 자부심을 느낄만한 사건은 거의 없고,
이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게 실행되지 않는다.
서두에 밝혔지만 이런 내용은 결국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에 대해 “YES or No" 식으로 질문한다면
나는 당연히 ‘없다’ 또는 ‘약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굳이 이런 전제를 들어 이런 사실을 악착같이 규정하려는 것은,
시중에 나와있는 여행책자나 마간다 같은 여행 커뮤니티를 통해
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에 대한 얘기가 잘못 전달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다시 정리해보자.
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에 관한 주제를 꺼낸 이유는
필리핀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하다는 얘기의 근거와 역사적 배경은 어디서든 찾을 수 없고,
단지 ‘망신을 당하면 살인도 불사한다’는 한 문장만이 이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굳이 한두 가지 추가로 더 얘기한다면.
‘다툼을 하면 다시는 서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정도다.
이 대목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망신을 당했다고 사람을 죽인다?
이것이 과연 자존심이 강한 것인가?
내가 보기엔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교육의 부재요 철학의 차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이런 일을 쉽게 볼 수 있지도 않다.
누군가에게 망신을 당했을 때, 훗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으로
망신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배워왔다.
따라서 망신을 당했다고 살인도 불사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자존심이 아니다. 그냥 ‘악’만 남은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국민이 사는 나라는 적어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
* * *
간혹 마간다 카페의 글을 보면 다양한 정보가 오가고 있다.
거기에는 훌륭한 정보도 많이 있지만
특별한 근거도 없이 전해오는 얘기로만 그것이 진리라고 인식하는 얘기들이 간혹 있다.
자존심에 관한 얘기가 바로 대표적이다.
지금 쓴 내용들은 어쩌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 확연히 다른 얘기일 것이다.
그래서 매우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얘기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느낀 점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얘기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필리핀을 바라보는 각도를 조금 다르게 본다면
이것도 이 나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부Hi
그래도 굳이 이 나라를 찾는 이유는 비용, 시간, 언어라는 빅3가 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