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22] 그리로부터 오시리라 믿나이다 : 파루시아 (2)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주님께서 어떤 ‘때’에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는 그 ‘때’를 향해 나아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파루시아를 ‘향한’ 삶이 될까요?
아마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형제 여러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때”라는 단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리적 시간, 혹은 연대기적 시간을 가리키는 ‘크로노스(ΧρƼνοƲ)’가 아니라 ‘카이로스(ΚαιρƼƲ)’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카이로스는 질적 시간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9시부터 10시까지 강의를 듣는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은 1시간이지만, 강의의 내용이나 질에 따라 내가 체험한 시간은 5시간의, 혹은 무한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본래 성경에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쉬스텔로(συστƝλλω)’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접는다’는 뜻으로, ‘짧아진다’는 파생적 의미가 있습니다. 깃발을 접어서 작게 만드는 것을 상상하시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파루시아가 일어나면, 곧 주님께서 오시면 내가 그때까지 짜던 나의 인생이라는 직물이 ‘접혀’ 주님 앞에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나의 삶 전체가 더 이상 물리적 시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의미 있는 시간은 영원 안에서 높이 들어 올려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시간은 영원히 버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루시아는 그냥 우두커니 기다려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나의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향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매 순간, 오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께 봉헌함으로써 나의 이 물리적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이렇게 매 순간이 파루시아를 향한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파루시아는 다가올 시간, 크로노스에 일어날 일, 그래서 교회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사건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삶의 매 순간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 안에서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도록 요청하는
사건입니다.
파루시아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주님의 현존’, ‘주님의 오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2천 년 전에 오셨던 것처럼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온 우주의 주인이심이, 그분의 권능, 선과 정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온 우주 안에 충만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오심은 ‘영광중에 오심’이고,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이며, 구원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완성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파루시아는 기쁨이고 설렘이며 희망입니다.
[2023년 7월 23일(가해) 연중 제16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