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영화를 통으로 본 적이 거의 없다. 한두시간 계속 집중해서 보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가끔 유투브를 통해 소개된 요약본을 보는데 전혀 모르는 수작들이 눈에 띈다. 한번은 대기업회장의 죽음... 이라는 소개가 들어있어서 미스테리물인가 들여다 보았다. 나치시대 독일군대의 범죄에서 비롯된 사건을 다룬 법정영화인데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독일에서 대기업을 운영하며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한스 메이어. 그런데 그가 묵은 한 호텔에서 콜리니라는 사람이 그를 살해하였다. 그가 살해한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1급살인으로 처벌받을 수밖에 없는데... 콜리니는 살해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터키인인 신출내기 라이넨이 국선변호를 맡게 된다. 라이넨은 어린 시절부터 한스 마이어를 알고 자랐으며 그의 후원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의 손자와 함께 컸으며 손녀와는 한때 애인사이였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로 설정하였는데 꽤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나름 긴장감을 주기도 하니 이런 정도로 봐 줄 수 있을 듯하다. 라이넨은 살해당한 사람이 한스 메이어라는 사실을 모르고 국선변호를 맡았지만 알고 나서는 매우 부담스러웠으며, 어쨌든 맡은 이상 콜리니를 최대한 변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무엇보다도 그가 한스 메이어를 왜 살해했는지를 알아내려 한다.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콜리니는 전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배심원 판결인데... 이래서야 조금이라도 형을 줄여줄 수 있는 여지도 없다. 게다가 세 발을 쏘아 죽이고 나서도 잔인하게 그의 머리를 짓밟았으니 배심원의 분노를 살만하였다. 그런데 라이넨은 콜리니가 살해할 때 사용한 총의 종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라이넨은 이러한 종류의 총을 한스 메이어 서재에서 발견하였다(뒤의 이야기와 연결해 볼 때 아마도 나치 장교들이 사용하던 총이었던 듯하다). 콜리니가 이 총으로 살해한 것은 뭔가 비밀이 있지 않을까? 라이넨은 콜리니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혀내려고 그의 고향이었던 이탈리아 몬테카티니로 갔다. 여기서 콜리니의 아버지가 나치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음을, 그리고 마이어가 나치친위대였다는 것을 밝혀낸다. 마이어는 2차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 주둔한 나치 무장 친위대의 장교였는데, 1944년 피사의 사탑 카페에서 폭탄테러로 독일군 2명에 사망하자 몬테카티니에서 10배에 달하는 민간인 20명을 학살하였는데 거기에 콜리니의 아버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라이넨은 학살현장을 지켜보고 콜리니에 대해 아는 증인까지 출석시켜 콜리니 대신 사실을 말하게 하였다. 배심원을 비롯하여 법정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메이어가 저지른 학살에 대한 응징이라고 하더라도 재판은 달라지지 않았다. 메이어가 콜리니의 아버지를 죽인 전범이나 1968년 제정된 ‘드러 법’ 때문에 무혐이 처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드러 법은 나치 전범이 지시한 일을 시행한 일반 군인들이 행한 범죄는 '과실치사'로 정했다. 과실치사의 공소시효는 20년이기 때문에 68년에 도입되어 수많은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따라서 콜리니의 살인은 그저 살인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라이넨은 상대편 변호사 메팅거를 증인으로 세웠다. 그는 법학대학에서 라이넨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였다. 메팅거는 '드러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법학자로서 참여한 인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왜 그 법을 찬성하였느냐고 묻자 그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이에 라이넨은 집요하게 그럼 지금 당신의 의견은 어떻냐고 물었다. 한때 드러법을 찬성하였고, 지금은 상대편 마이어의 변호사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당신이 강의한 정의는 무엇이냐고 캐묻자, 긴 침묵 끝에 지금은 드러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하였다. 가르쳤던 제자 앞에 학문적 양심을 어그러뜨리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콜리니는 이전에 이미 마이어를 주민학살죄로 고발하였지만 '드러법' 때문에 실패(아마도 공소시효 때문인 듯)하였기에 결국 그의 행동은 처벌받아야 할 학살자가 법의 보호를 받은 것에 대해 울분의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콜리니는 법에 의해 그의 행동을 판결받기 전에 감옥에서 자살하고 영화는 끝났다. 꼭 자살로 마무리했어야만 했을까... 영화의 메시지는 아마도 이런 정도가 아닐까? 그도 살인은 잘못된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자기가 보는 앞에서 학살당한 아버지의 죽음, 그 죽음은 결코 잊을 수 없고, 법에 호소하였지만 오히려 법이 그를 보호하자 어쩔 수 없이 학살자를 처단하는 길로 나섰다. 마이어가 사용하던 권총을 구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총을 쏘았고, 심지어 마이어를 살해한 뒤 시신을 짓밟은 그의 행위도 알고보니 당시 그의 아버지가 쓰러진 뒤 군홧발로 짓누르던 그 행동을 재현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인정받은 이상 자신이 저지른 살인은 스스로 단죄한다는 식으로...
독일사의 문외한으로서 당시 독일 상황을 유추해보자. 패전 후 자국 내 나치 전범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처벌하는 일이 쉬웠을까? 가령 프랑스에서 전후 독일에 협조한 반역자들을 대거 처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외세 침탈에 저항한 세력이 전후 권력을 잡았기에 외세 협력 세력의 실체는 뚜렷이 드러났기에 이들을 처벌하기는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어떠했을까? 나치권력과 그 협조세력을 모두 제외시키고 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패전을 수습해야 하는 정부도 크게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이들로서는 전범들을 무조건 처벌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보듯이 독일에서 나치 전범이었지만 사회 지도자로 성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을 듯하다. 그만큼 독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독일은 아마도 매우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이다. 우리가 독일이 과거 청산의 모범적 사례로 꼽게 된 과정에는 주변 국가와 유태인학살의 가장 큰 피해국가인 이스라엘의 끈질긴 요구도 있었고 내부에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성도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영화도 독일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소설을 영화화하였다고 하니 실화는 아닌 듯하지만 가능한 상황을 그렸기에 많은 공감을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드러법’도 실제 있는 법일 것이며, 아마도 <콜리니케이스>처럼 찾아보면 수많은 케이스가 있을 수 있다. 한편 비슷한 상황의 일본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과거 친일 세력 가운데 스스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있었을까 반문하게 된다. 공부를 좀 하고 제대로 써야 하는데 게을러서 그냥 억측에 의존한 점은 매우 부끄럽다. 다만 독일영화는 거의 본 기억이 없는데... 몇년 전 <타인의 삶>을 보면서 감동받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런 감동을 약간 정리했을 따름이다.
*2020년 7월에 개봉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이 영화에 대해 왜 전혀 들어보지 못했을까? 아무튼 학교 강의에 사용하면 매우 좋은 공부가 될 듯하다.
첫댓글 유선방송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흐릿한 기억으로는 독일 장교가 어린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세우고 아버지가 죽는 장면을 똑똑히 보게했던 화면만 뚜렷합니다.
그냥 대충 넘겼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고 새롭게 정리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칙칙한 화면, 어두운 장면들, 공포와 분노, 나찌장교의 표정과 훗날 선의만 품었던 것처럼 행동하던 노년의 신사가 오버랩이 됩니다.
'드러법'도 면죄부를 위한 것이었다 생각합니다. 우리 해방정국을 생각하게 하네요.
저도 주인공이 자살을 선택했어야 하나 했지만, 아무래도 살인이란 정당방위가 아니란, 판단을 관객에게 돌리는 앤딩이라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학교 강의에 소재가 신선하게 다가올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