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묵동마을 뒤편 어래산(御來山) 야산에 있는 이 미륵불(彌勒佛)을 작년부터 지나치며 보게 되었다. 충청내륙 고속화도로 인근에 있어 몇 해 전 문화재당국에서 지표조사를 할 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충주시 문화재에 관련된 어느 책자에도 이 미륵불이 소개(紹介)된 적이 없기에 나름 신기(神奇)해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야산(野山)에 있다보니 잡목(雜木)이 우거져서 일부 사람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잡목이 제거되어 멀리서도 볼 수 있다.
2026년 4월 26일 직접 찾아가서 사진을 촬영하고 실측(實測)하였다.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어느 무속인이 최근까지 치성(致誠)을 드렸던지 술잔과 촛대가 남아 있었다. 이 부분은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인근마을에 사시는 나이많은 어르신들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요새 시골에 가도 노인분들 만나기가 쉽지 않다.
가장 중요한 불두(佛頭) 부분이 훼손(毁損)되었는지 시멘트로 급조(急造)하였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갓머리(천개, 天蓋)를 흉내내서 씌어 놓았다.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던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묵동(墨洞)마을 옆마을이 미락(美樂)마을인데 풀이를 다르게 하나 <미륵(彌勒)에서 유래한 마을>이라고 봐야 한다. 대소원면(예전 이류면)에 이런 사례가 있다. 미륵이 있어 미락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 [중원향토기2(장기덕 著, 1979년)]
p310 ~ p311
삼청리(三淸里)
○대왕당【 골】삼청리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대왕당(大王堂)이 있었음.
○돌부처【 미륵】부처댕이에 앉은 돌부처. 묻혀있던 것을 근년에 캐냄.
○미나기(미락곡, 미락골)【 마을】평지말 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김자점이 이곳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고 함. ---> 아래 『 충주의 지명 』산정마을 미락골을 볼 때 미륵에서 온 마을이름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사진에 소개하는 미륵은 묵동마을에 있다. 미락은 한자로 美樂으로 쓴다. 김자점 云云은 글자풀이인 걸 알 수 있다.
○미력【 미륵】먹벅골 뒷산에 있는 미륵. 땅에 묻힌 것을 몇 해전에 캐내어 세워 두었는데 목이 부러져 양회(洋灰)로 이어 놓았음. ---> 먹벅골은 묵동(墨洞)마을의 원래 이름이다. 먹벅골은 먹박골로 <먹바위가 있는 골>이란 뜻이다. 이 곳 어래산 일대는 철광산(성지사 위)이 있었고 검은 철분을 함유한 바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미륵이 아래 사진에 나오는 미륵이다.
『소태면 야동리(冶洞里) 뒤에 있는 큰 산이 묵봉산(墨峰山, 486.8m)이다. 충청북도에서 1987년에 펴낸 《地名誌》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p794
○묵봉산(墨峰山, 묵방산) : 蘇台面 九龍里, 冶洞, 五良洞에 걸쳐 있는 435m의 산. 山이 검게 보인다고 함. 』 지금과 산높이가 다르게 나오지만, 기반암이 철성분이 많이 함유되어서 검게 보인다고 본다. 근처에 冶鐵址가 있었으니 타당하다 하겠다. 묵방산은 한자로 墨傍山으로 쓴 것 같은데 묵동마을의 <먹벅골>을 닮았다. 묵벅산, 묵벙산, 묵방산. 그럼 墨傍의 傍은 바위의 뜻이다.
일제시대 1934년 이병연(李秉延)이 쓴 《조선환여승람》충주군 山川 항목에 다음과 같이 써있다. 墨芳山: 在郡北四十五里. 1里를 420m로 가정하고 직선거리를 측정하니 약간의 오차가 있으나 소태면 묵봉산(墨峰山)이 맞다. 한자로 芳을 썼을뿐이다. 』
○부처댕이【 산】삼청리에 있는 산. 돌부처가 있음.
○불지암(佛池庵)【 절】어래산에 있는 절. 약 40년 전에 지었으며 절 마당에 연못이 있음. ---> 묵동마을 옆에 성지골이 있고 성지사(聖池寺)가 있다. 성지암(聖池庵)을 잘못 쓴 것 같다. 《중원향토기》가 쓰인 것이 50여년 전이니 불지암이 성지암으로 이름이 바뀐 것인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충주의 지명, 1997년]
p184
이류면 두정리 산정
미락골【 마을】산정(山井)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미륵
이 있어 미락으로 변했다 함.」
바닥에서 목부분까지 높이가 150cm이고, 목부분에서 머리높이는 75cm, 가슴폭은 60cm, 옆면은 30cm, 가슴둘레는 160cm 된다.
머리부분을 다시 복원하고 조금 손을 대면 훌륭한 문화재가 될 터인데, 왜 이곳에 서있게 되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2007년 출판된 《주덕읍지》를 살펴보니 관련 내용이 나온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삼청리 미륵석불
ㆍ소재지: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산 24-1 (묵동)
ㆍ시대: 미상
ㆍ유적내용: 단군전 뒤로 200m 정도 올라가면 서쪽 가섭산 방향으로 서 있는 미륵석불을 볼 수 있다. 미륵석불은 1970년대 청주로 이사간 원씨 꿈에 현몽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땅을 파고 발견하여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륵석불은 높이 160cm, 둘레 160cm로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다. 미륵석불은 기단석, 머리(불두), 머리갓은 시멘트로 1970년대 세워 만든 것으로, 몸통부분은 땅에서 출토된 것이다.
미륵석불 뒷부분은 특별히 조각된 흔적이 없고, 앞부분은 통견(通肩)으로 11개의 줄이 나 있으며 오른쪽 우측 허벅지 다리 옆에 다섯 손가락을 펴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이 배꼽 밑에서 다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가슴부분은 볼록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지방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의 흔적으로 보인다.」
---> 위치는 삼청리 산 24-1이고, 바라보는 방향은 정서쪽에서 약간 북쪽이며 삼방마을 뒷산이다. 미륵석불 높이도 바닥에서 목부분까지 150cm 가량이다.
묵동마을에는 원주 원씨 집안이 유명하다. 원덕상 효자문(元德常 孝子門)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이 곳 출신 원씨가 청주로 이사간후 꿈에 현몽 받았다 하나 부처댕이라는 지명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은 아니다.
석불 일부는 지면에 노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 현몽받은 원씨는 이 곳 묵동마을이 고향이나 청주로 이사간 것 같은데, 어릴적 어르신으로부터 이 미륵불에 관련된 얘기를 들었을 것이고 미륵댕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객지에서 생활하다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꿈으로 나타났다고 봐야 한다. 그리 신비화할 얘기는 못된다. 이런 유(類)의 얘기는 사찰의 창건설화에 흔하게 볼 수 있다. 신비화하고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하려는 의도이다.
[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도 <삼청리 미륵석불>을
을 검색하면 관련 내용이 나온다.
의문점은 묵동마을 뒷산인 어래산 삼청리 미륵석불이 원래 이 위치에 있었나 하는 점이다. 부처댕이라는 지명도 보이고 불두(佛頭)가 훼손되어 땅에 묻혀 있었다 하니 오래전부터 지금 위치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두(佛頭)가 훼손된 무거운 미륵불을 굳이 먼 곳에서 옮겨와 신앙의 대상으로 모실 필요가 있을까? 이 미륵불과 관련있는지 모르지만 대왕당(大王堂)이란 지명도 보인다.
그럼 옆마을 미락(美樂)마을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묵동마을과 미락마을에는 밀양 박씨, 파평 윤씨, 순흥 안씨가 몇몇 살고 있다. 예전 대가족이 모여 살던 때에는 이웃마을에 분가(分家)하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동족촌(同族村)을 이루어 타성받이에 대한 견제(牽制)가 심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성글게 살았다. 이 곳에서 살다 떠난 집안도 많았을 것이다. 어느 마을에 한 집안이 옮겨와 살다가 떠나고 다른 집안에서 이주하여 흥(興)한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미락마을이 원마을이고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묵동마을이 분동(分洞)되어 생겼다고 봐야 한다. 지금 묵동마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고 조금 살았고 통틀어 미락마을이라 칭했을 것으로 본다. 미락마을은 <미륵>과 관련있는 마을이라 했다.
아래에 나오는 자료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이나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충주군도(1: 50,000)]를 보면 묵동마을이 나와 있지 않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지도에는 나오나 3차지도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집들이 보인다.
위에서 미락마을이 원마을이고 분동(分洞)되어 나중에 묵동마을이 생겼다고 했다. 아래 [호서읍지(湖西邑誌, 1871년]를 보면 미락(美樂)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마을이름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량, 미락, 묵동마을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어래산 자락을 따라 이웃해 있다.
※ 청량(淸凉) ---> 미락(美樂) ---> 묵동(墨洞).
호서읍지 충주목편 주류면(周柳面)에는 상동(上洞), 창전(昌田), 청량(淸凉), 삼방(三方)마을이 보이는데 상동(上洞)마을이 지금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지지자료 충주군 주덕면, 1914년> 이하 같음.
리동명: 창전리(倉田里), 대곡리(大谷里), 삼청리(三淸里; 三方, 上淸), 신양리(新陽里; 新垈, 陽地), 신중리(新中里), 화곡리(花谷里), 사락리(社樂里), 제내리(堤內里), 장록리(長菉里), 덕련리(德蓮里), 당우리(堂隅里)는 법정리(法定里)다.
삼청리에 속한 부락명으로 삼방(三方) 삼방이, 평지(平地) 졍양골이 보인다.
내청(內淸) 움치거리.
장록리(長菉里)에 속한 부락명 지내(池內) 못안, 초처(草䖏) 새뢰, 장록(長菉) 장록개가 보인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충주군 주덕면.
11개 법정리가 있고 창전리에 면사무소가 있다.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충주군도(1: 50,000)>
아래 확대한 부분.
통합전 이류면(利柳面)의 유등면(柳等面)과 주덕면(周德面)의 주류면(周柳面)이 보인다. 접해있지 않고 떨어져 있다. 이는 주덕면(周德面)이나 신니면(薪尼面)은 요도천(堯渡川)을 경계로 주류면(周柳面)과 덕면(德面), 신석면(薪石面)과 신니면(申尼面)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이류면의 경우 요도천을 경계로 하지 않고 대소원(大召院)과 가까운 부연동, 성종리, 장재리, 금곡동을 이안면(利安面) 관할에 두었기 때문이다. 가까워서 생활권이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류면(周柳面)은 주류등면(周柳等面)을 줄인 것으로 유등면(柳等面)을 의식한 것으로 봐야 한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1780년, 정조4) 충주목(忠州牧) 방리(坊里) 항목에 주류등면(西周柳等面), 호구총수(戶口總數, 1789년, 정조13) 충청도 충주목에 주류등면(周柳等面)으로 나온다. 다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글자로 줄인거로 봐야 한다.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 충주군도(1: 50,000)>
통합전 주덕면 덕면면(德面面)과 주류면(周柳面) 지역이 보인다. 위 지도를 보면 요도천(堯渡川, 용안내)를 경계로 두 면이 나누어졌음을 볼 수 있다.
덕면(德面)을 덕면면(德面面)으로 써놓았다. 세글자로 맞추기 위한 것으로 덕면(德面)과 같다.
주류면(周柳面)에 신대, 양지동, 평지, 미락동, 능촌, 이목동, 삼방리, 상청리가 보인다. 묵동(墨洞)이 보이지 않는다.
주덕면(周德面)은 주류면(周柳面)과 덕면(德面)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주류면은 위에서 설명했다. 그럼 덕면(德面)은 무슨 뜻일까? 德은 큰 덕이다. 우선 <들이 넓은 면>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요도천 북쪽 지역인데 요도천 주변으로 넓은들이 있다. 그리고 뒤로 낮은 구릉지대와 들판이 펼쳐져 농사에 유리한 곳이다. 주변에 있는 면(面)과 비교하면 땅덩어리가 큰게 아니고 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두번째 해석은 언덕을 줄여 <덕>이라 하는데 덕면(德面)은 요도천 북쪽으로 낮은 구릉(邱陵)이 있으니 타당성이 있다 하겠다. 강원도 높은 산에 펼쳐진 고위평탄지(高位平坦地)를 <덕>이라 한다. 강릉시 <안반데기>가 이에 속한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1914년) 음성군 맹동면에 우리말지명 된언덕을 돈덕(敦德)으로 표기했다. 언덕을 줄여 한자 德으로 표기한 것이다. 안동군(安東郡) 부내면(府內面) 야평명(野坪名)에 광덕평(廣德坪) 넙대기들이라 써있다. 지명 뒤에 오는 데기, 덕이를 德으로 음(音)을 옮겼다. 데기는 붉은데기처럼 언덕을 말할 때도 있다.
위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을 보면 주류면(周柳面)에 속했던 곳은 신중리(新中里), 창전리(倉田里), 대곡리(大谷里), 삼청리(三淸里)이고 덕면(德面)에 속했던 곳은 당우리(堂隅里), 덕연리(德蓮里), 장록리(長菉里), 제내리(堤內里), 사락리(社樂里), 화곡리(花谷里)이다.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 충청북도 충주군편, 조선총독부 발행>,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이라 한다.
주류면(周柳面)에 24개 里가 보인다.
양지리(陽地里), 평지리(平地里), 상청리(上淸里), 내청리(內淸里), 이목리(梨木里), 미락리(美樂里), 능촌(陵村), 삼방리(三方里), 동산리(東山里), 대곡리(大谷里), 석포리(石浦里), 월암리(月岩里), 학성리(鶴城里), 칠성리(七星里), 창전1리(倉田一里), 창전2리(倉田二里), 창전3리(倉田三里), 창전4리(倉田四里), 창전5리(倉田五里), 창전7리(倉田七里), 신대리(新垈里), 마치리(馬致里), 신평리(新坪里), 망청리(望淸里).
이 중 석포리(石浦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니면(薪尼面)에 속하게 된다. 마치리(馬致里)는 보통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마을을 말하는데,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이류면을 보면 대소리에 마치리(馬致里)가 보인다. 예전에는 이안면(利安面)에 속했다. 이는 마치리 일부 지역이 대소리에 포함되었음을 말한다. 주덕읍 마치, 대소원면 마치가 있는 셈이다.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 충청북도 충주군편, 조선총독부 발행>
주덕면에 해당하는 주류면과 덕면지역.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라고도 한다.
덕면(德面)에 23개 里가 보인다.
삼주리(三洲里), 이암리(耳岩里), 계막리(桂幕里), 제내리(堤內里), 풍덕리(豊德里), 장록리(長菉里)
, 신대리(新垈里), 당우리(堂隅里), 석우리(石隅里), 하류동(下柳洞), 상류동(上柳洞), 초처리(草處里), 조동(鳥洞), 장내리(墻內里), 창동(倉洞), 지내리(池內里), 음동(奄洞), 매남리(梅南里), 사락리(社樂里), 중리(中里), 정구리(井口里), 전천리(前川里), 화곡리(花谷里).
이 중 삼주리(三洲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류면(利柳面)에 속하게 된다.
지금 대소원면(大召院面)은 예전 이름이 이류면(利柳面)인데 이안면(利安面)과 유등면(柳等面)에서 한 자씩 따서 지었다. 유등(柳等)은 유등곡(柳等谷)에서 나온 것으로 <버들골, 버드실>을 한자 유등곡(柳等谷)으로 옮긴 것이다. 面이름이 되어 유등곡면(柳等谷面)이 되었으나 글자수를 세 자로 맞추어 유등면(柳等面)이 되었다.
참고로 엄정면 유봉리(柳峰里)는 유등(柳等), 중봉(中峰), 축현(杻峴) 일부가 합쳐진 법정리이다. 여기 유등(柳等)도 <버드실, 버들골>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주류면(周柳面)은 주류등면(周柳等面)을 줄인 것으로 <유등면(柳等面) 주위에 있는 면>이란 뜻이다.
수안보 오미마을 뒷산을 주정산(周井山)이라 하는데 <溫井 주위에 있는 산, 溫井을 두루고 있는 산>으로 풀어야 한다. 溫泉을 조선시대에는 溫井이라 했다. 수주팔봉(水周八峰)의 수주(水周)는 <물이 두루고 흐른다>는 뜻이다. 회(回)자와 通한다. 경찰학교가 있는 수회리(水回里)는 <무두리>라 하고 <물이 돌아 흐른다>는 뜻이다.
그럼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德周寺)는 무슨 뜻일까? 제천시 덕산면(德山面)에 있는 절인데 덕산(德山)은 월악산(月岳山)을 가리킨다. 큰산이란 뜻이다. 가까운 제천시 백운면 덕동계곡(德洞溪谷)에 놀러갔다 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수량도 많고 꽤 긴 계곡이다. 德洞의 德도 크다는 뜻이고 계곡이 크고 기니 德洞이라 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 月嶽在淸風 【三國時, 稱月兄山, 在祀典, 今革。 」라고 나온다. 월형산(月兄山)의 형(兄)은 훈몽자회에 <ㅁㆍㄷ형>으로 나온다. <맏, 맏이>인데 <처음, 으뜸, 높다, 크다>의 뜻이 있다. 구약성서를 보면 맏배라는 말이 나온다. 짐승의 처음 나온 새끼를 맏배라 하는데 평안도 방언일 것이다. 충주지방에서는 맏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맏형, 맏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 德周寺。在月嶽山下。諺傳德周夫人建此寺,因名之。」라고 나온다. 諺傳은 전설(傳說)로 새기면 된다. 사람들이 말하길 덕주부인이 시주(施主)하여 원찰(願刹)을 세웠기에 덕주사(德周寺)라 이름 지었다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미륵리에 있는 미륵불이 덕주부인을 본뜬 것이고 마의태자 妃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미륵리에 있는 미륵불은 누가 봐도 곱상한 여인상이다.
하지만 덕주(德周)라는 절이름을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두루(周) 드리우길 기원하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새기면 안될까? 이게 원뜻이라고 본다.
이안면(利安面)에는 영평동(永平洞), 대소리(大召里), 금곡리(金谷里), 장성리(長城里; 長在, 城宗), 본리(本里), 완오리(完五里), 검단리(檢丹里)가 속했다.
유등면(柳等面)에는 만정리(萬井里; 萬積, 篤井), 탄용리(炭用里; 炭洞, 所用), 두정리(斗井里; 斗潭, 山井), 매현리(梅峴里; 梅山, 修峴), 문주리(文周里; 文朴, 水周), 하문리(河文里; 河潭, 池文)가 속했다.
이안면(利安面)에 19개 里가 보인다.
하검리(下檢里), 성종리(城宗里), 부연동(釜淵洞), 장재동(長在洞), 금곡리(金谷里), 대소원동(大召院洞), 마치리(馬致里), 두산리(斗山里), 영평리(永平里), 당저리(堂底里), 가정리(佳亭里), 독동(篤洞), 본리(本里), 노옥리(老玉里), 흑평리(黑坪里), 불방리(佛方里), 거리(巨里), 주정동(酒井洞), 상검리(上檢里).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 충청북도 충주군>
이류면(지금 대소원면)에 해당하는 이안면과 유등면지역.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라 한다.
유등면(柳等面)에 18개 里가 보인다.
팔봉리(八峰里), 수주리(水周里), 문박리(文朴里), 즉문리(卽文里), 하담리(河潭里), 월은리(月隱里), 기동(基洞), 매산리(梅山里), 장승리(長承里), 수현리(修峴里), 탄동(炭洞), 궁동(弓洞), 소용리(所用里), 두담리(豆潭里), 내포리(內浦里), 산정리(山井里), 용두원(龍頭院), 만적리(萬積里).
지금 충주시 주덕읍 소재지는 신양리(新陽里)이다. 신대(新垈)와 양지리(陽地里)에서 한 자씩 따서 법정리(法定里)가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주덕면(周德面)이었고 창전리(倉田里)가 면소재지였다. 창전리는 주덕농공단지 서쪽 일대가 된다.
법정리 삼청리(三淸里)는 평지리(平地里, 평지말), 능촌(陵村, 능말), 미락리(美樂里, 미락골), 이목리(梨木里, 배나무골), 삼방리(三方里), 상청리(上淸里)가 합쳐진 것이고 삼방리(三方里)와 상청리(上淸里)에서 한 자씩 딴 것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이나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모두 묵동(墨洞)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유심히 볼 것이 삼방리(三方里)이다. 지금 주덕읍 삼방(三訪)마을인데, 삼방리(三訪里)를 잘못 쓴게 아닌가 의문을 표시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래 호서읍지(湖西邑誌)를 보면 삼방리(三方里)가 보인다.
호서읍지(湖西邑誌), 1871년(고종 8).
방리(坊里) 부분.
서주류면(西周柳面) 상동리(上洞里), 창전리(昌田里), 삼방리(三方里), 청량동리(淸凉洞里)가 보인다. 청량동은 지금 청량마을로 미락마을 북쪽에 있는 인근 마을이다.
편호: 394호,
인구: 남; 490명, 여; 348명, 계:838명.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지도. 1910년 측도, 1913년 제판>
아래는 확대한 부분.
미락동(美樂洞)과 묵평동(墨坪洞)이 보인다. 묵평동은 묵동(墨洞)이다. 미락동은 일본어 문자 가타카나로 미라아코루, 묵평동은 몬포코루라고 음표기했다. 우리말 먹은 한자 묵(墨)에서 온 말로 (먹 墨)이다.
위에서 썼지만 묵동(墨洞)마을은 원래 이름이 <먹벅골>이다. 묵평동은 <먹벅골>을 한자로 옮긴 말로 보인다. 음(音)을 한자로 옮기다보니 묵평동(墨坪洞)이 되었다.
양지동(陽地洞, 양지말), 평지(平地, 평지말), 능촌(陵村, 능말), 이목동(梨木洞, 배나무골), 산청리(山淸里), 막동(幕洞, 막골), 내삼방리(內三訪里), 관전(冠錢, 갓돈)이 보인다. 산청리는 상청리(上淸里)를 잘못 쓴 것이다. 3차지도에 상청리(上淸里)로 나온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이 지도에는 미락리(美樂里)와 삼청리(三淸里)가 보인다. 삼청리(三淸里)라 쓴 곳이 묵동마을이다. 2차지도 삼방리(三訪里)가 삼방리(三方里)로 표기되어 있다. 불정면 삼방리(三訪里)는 어래산(御來山) 아래에 보인다. 2차지도에는 내삼방리(內三訪里)로 나온다.
삼방리(三訪里)는 어래산(御來山)으로 태조 이성계가 배극렴(裵克廉, 1325년 ~ 1392년)을 세 번 찾아왔다(三訪)는 전설이 있는데, 괴산군 불정면에 있는 삼방리(三訪里)를 원삼방(元三訪)이라 한다. 배극렴의 묘는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에 있다.
주덕읍 삼방(三訪)마을을 삼방리(三方里)로 썼다고 오류(誤謬)라고 볼 수는 없다. 삼방(三方)은 삼거리(三巨里)와 동의어(同義語)로 볼 수 있다. 이 곳을 조금 지나면 충주와 음성군 소이면, 괴산군 불정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논어 학이편의 유명한 구절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에서 보듯 遠方은 먼곳이란 뜻인데, 四方, 五方, 불경의 시방세계(十方世界)에서 보듯 方向과 方位를 가리킬때 쓰는 말이다. 三方은 세방향이다. 近方, 가近方은 가까운 곳을 말한다. 한자 方은 이외에 다른 뜻도 있다.
주덕읍 삼방마을은 분명히 불정면 삼방마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접경(接境)지역을 지경(地境)이라고 하는데 같은 마을이름이 두군데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아래는 확대한 지도.
어래산 아래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를 보면 삼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덕읍 삼방리도 마찬가지다. 음성군 소이면 후미리를 통해 음성 읍내로 갈 수 있고, 괴산군 불정면으로 갈 수 있다.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三訪里)도 원래 삼거리(三巨里)를 뜻하는 삼방리(三方里)였을 것이다. 대소원면 금곡리(金谷里)로 갈 수 있고 막골(幕谷)을 거쳐 주덕으로 갈 수 있고, 안촌(安村)을 지나 괴산쪽으로 갈 수 있다. 혹은 후미리(厚美里)를 지나 음성읍내로 갈 수 있다.
배극렴과 어래산 관련 전설은 후대에 생긴 것으로 봐야 한다. 배극렴(裵克廉)은 고려말 1325년에 태어나 조선이 건국한 1392년에 졸(卒)한 인물로 고려말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무신(武臣)이자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죽기 며칠전까지 고려에 이어 조선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있었으니 태조 이성계가 세 번 찾았다는 전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셈이다. 개국공신 1등이 되었다 하니 늘 이성계와 함께한 인물로 벼슬을 사양했다는 것도 훗날 지어낸 이야기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사(故事)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에 묘(墓)를 썼다고 하니 이 곳 어래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병연(李秉延)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4년) 충주군지(忠州郡誌) 산천(山川) 항목에
「御來山在郡西 三十里 ○ 俗云昔裵克廉隱居此山 朝鮮太祖三次御來訪故山之得名以此山下村稱三訪里者亦以是也」라고 나온다.
「 어래산(御來山)은 군(郡) 서쪽 30리에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배극렴이 이 산에 은거하였는데, 조선 태조가 세 번이나 친히 방문했기 때문에 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산아래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참고※
「배극렴(裵克廉)
*고려 후기에, 진주·상주의 목사, 합포진첨사 등을 역임한 문신·공신.
*본관:경산(京山)
*사망 연도:1392년(태조 1)
*주요관직: 진주도원수|경상도도순문사|문하찬성사|도총제사
*출생 연도:1325년(충숙왕 12)
*출생지: 문음(門蔭)
배극렴은 조선전기 개국1등공신에 책록된 공신이자 문신이다.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나 1392년(태조 1)에 사망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밀직부사에까지 승진했다. 1388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회군을 도왔으며, 이어 3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가 되어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했다. 1392년 문하우시중으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공으로 문하좌시중이 되어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으나 그 해 세상을 떠났다.고려 후기에, 진주·상주의 목사, 합포진첨사 등을 역임한 문신·공신.
*개설: 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 주금당(晝錦堂). 문음(門蔭) 출신. 아버지는 위위시소윤(衛尉寺少尹) 배현보(裵玄甫)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말 진주 · 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윤(鷄林尹) · 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해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 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 완성했는데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
한편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겨울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에는 진주 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울주전투와 청도전투 · 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 1380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1389년(창왕 1) 7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 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 해에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해 7월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어 1등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1392년 11월 세상을 떠났으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다.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이 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참고문헌『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태조실록(太祖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이니, 위위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여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癸卯/門下左侍中星山伯 裵克廉卒。 上輟朝三日, 素膳七日, 命有司禮葬。 克廉, 京山府人, 衛尉少尹玄甫之子。 性廉謹, 持身勤儉。 牧晋、尙二州, 又尹雞林、和寧, 皆有惠政; 出帥合浦, 築城開隍, 安集流亡。 善於守禦, 但戰勝攻取, 非其所長。 及前朝衰季, 歸心於上, 與趙浚等, 協謀推戴, 遂爲首相。 然不學無術, 無所建白, 至於建儲之議, 乃阿上意, 請立幼孼, 自以爲功, 識者歎之。 卒年六十八, 諡貞節。 無子。
태조실록2권, 태조 1년 11월 26일 계묘 1/1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대동기문(大東奇聞), 배극렴 관련 전기(傳記)
대동기문은 1926년 한양서원에서 간행한 역대 인물들의 전기와 일화를 모은 책으로 맨 처음에 배극렴이 나온다.
대동기문 권일(大東奇聞 券一)
태조조(太祖朝)
배극렴봉국새(裵克廉奉國璽)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2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 [원문]
大東奇聞 券一
太祖朝
裵克廉奉國璽
裵克廉은 星州人이니 字는 量可다.
高麗恭愍王朝에 文科하야 累官至門下左侍中하고 以廉謹으로 稱하니라. 恭讓王壬申六月十六日에 克廉이 與趙浚鄭道傳等大小臣僚及閒良耆舊로 奉國璽寶하고 詣太祖邸하야 合辭勸進하니 太祖遂登寶位하시다.
太祖妃神懿王后 淸州韓氏 誕六男하시니 定宗居第二하시고 太宗이 居第五라 同妃神德王后 谷山康氏 誕二男五女하시니 芳蕃은 序居七하고 芳碩은 序居八이라 太祖嘗引裵克廉趙浚于內殿하사 議立世子하신대 裵克廉等이曰“時平立嫡이요 世難先功이니이다.” 神德后聞之하시고 哭聲이聞外어늘 遂罷出하다. 他日에又召克廉하시니 時議無復以功以嫡爲言者라 克廉等이 退而議曰“康氏必欲立己出일새 芳蕃은狂悖하고 其季稍可라”하야 遂請封芳碩爲世子하다. 本朝左侍中으로 策開國功臣一等하고 特進輔國領相 星山伯이니 諡는 貞節이러라. 裵克廉은 星州人이니 字는 量可다. 高麗恭愍王朝에 文科하야 累官至門下左侍中하고 李廉謹으로 稱하니라. 恭讓王壬申六月十六日에 克廉이 與趙浚鄭道傳等大小臣僚及閒良耆舊로 奉國璽寶하고 詣太祖邸하야 合辭勸進하니 太祖遂登寶位하시다.
太祖妃神懿王后 淸州韓氏 誕六男하시니 定宗居第二하시고 太宗이居第五라 同妃神德王后 谷山康氏誕二男五女하시니 芳蕃은 序居七하고 芳碩은 序居八이라 太祖嘗引裵克廉趙浚于內殿하사 議立世子하신대 裵克廉等이曰“時平立嫡이요 世難先功이니이다.”神德后聞之하시고 哭聲이聞外어늘 遂罷出하다. 他日에又召克廉하시니 時議無復以功以嫡爲言者라 克廉等이 退而議曰“康氏必欲立己出일새 芳蕃은狂悖하고 其季稍可라하야 遂請封芳碩爲世子하다.
소대기년(昭代紀年)
本朝左侍中으로 策開國功臣一等하고 特進輔國領相 星山伯이니 諡는 貞節이러라.
※한량(閒良) : 관직을 그만두고 향촌에 사는 사람을 이른다.
※耆舊(기구) : 기로(耆老)와 구신(舊臣)을 뜻한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을 말한다.
※소대기년(昭代紀年) : 조선 태조부터 제19대 숙종까지 사실(史實)을 수록한 역사서이다. 빨간 글씨 소대기년 앞은 소대기년(昭代紀年)에서 인용했다는 뜻이다. 원문에는 작은 글씨로 써있다.
[번역] 배극렴이 국새를 받들다.
배극렴은 성주사람으로 자는 양가였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올라 문하좌시중에 이르렀고, 청렴하고 근검한 것으로 일컬어 졌다. 공양왕 4년(1392) 6월 16일에 배극렴이 조준, 정도전 등 대소신료들과 한량(閑良)과 기구(耆舊)와 함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입을 모아 권유하여, 태조가 드디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 신의왕후는 청주 한씨이다. 6형제를 낳았는데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같은 왕비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방번이 일곱째 왕자이고, 방석이 여덟째이다. 어느 날 태조가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세자 책봉을 상의하였다. 배극렴 등이 말했다. “태평 시대엔 맏아들이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 우선입니다.”
신덕왕후가 이 말을 엿듣고 우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의논을 끝내고 나갔다. 그 뒤로 배극렴이 또 태조에게 불려 갔는데, 이때엔 공로가 우선이니 맏아들이 우선이니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배극렴이 물러 나와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였다. “ 강씨가 자기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방번은 무절제하니 막내를 세우는 것이 그래도 조금 낫겠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昭代紀年
배극렴은 조선 조정에서 좌시중으로, 개국공신 일등에 책봉되고, 보국영상에 특진되었으며, 성산백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절이다.」
묵동마을과 미락마을이 보인다. 이 미륵불의 위치는 묵동마을에서 충청내륙 고속화도로 지하차도를 지나 어래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다.
<주덕읍 삼청리 일대 지도, 인터넷자료>
<주덕읍 삼청리 주변 지도, 인터넷자료>
충북선(忠北線, 1928년 12월 25일 개통)이 지나며, 이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충청내륙 고속화도로가 작년말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
◇삼방의 유래와 자랑◇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三訪里)
「 우리마을은 임금이 세번 방문하였다 하여 삼방리(三訪里)라 불리워지는 곳으로써 수려한 자연과 후덕한 인심속에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자랑스런 마을이다. 삼방(三訪)이란 지명는 조선개국공신이자 초대 영의정을 지낸 필암 배극렴(筆菴 裵克廉)이 이곳에 은거할때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국사를 논의 하기 위하여 세번 찾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뒷산도 임금이 온산이라 하여 어래산(御來山)이라 부르며 산 정상에는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마당바위와 북바위등 기암괴석이 장엄한 모습으로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삼방리 갓돈(冠錢)골 야산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마애불좌상이 있으니 전설에 의하면 이 불상은 어떤 대사가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의 덕을 흠모하여 축조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삼방리가 역사적 유래를 지닌 유서깊은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소중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우리 삼방마을 주민들은 이를 큰 자랑으로 여기며 자손만대에 전하기 위하여 이 비에 적어 오래도록 기리고자 함이다.」
------------------------------------------
◇삼방(三訪)마을 자랑비◇
‐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 삼방리 ‐
「 우리 마을은 동편의 어래산(御來山)과 서편의 수리산 양산 자락이 맞닿은 위치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남달리 총애를 받고 있던 배극렴은 왕의 시역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잃고 부인과 충주 고을로 낙향하여 은거했다.
당시 왕명을 받고 요동정벌(서기1388)에 출정하였다가 4불가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 회군한 좌우군 도통사 이성계가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후 그의 정권을 위한 대의적인 명분 때문에 고려의 중신들이 그의 자문직으로 필요하게 되어 팔도 수령에게 배극렴을 찾아내도록 영을 내린 후 우연한 기회에 배극렴이 어래산 중에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세 번씩이나 찾아와 만났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삼방(三訪)이라 이름짖고 임금이 찾아온 산을 ‘어래산’이라 칭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 마을은 근면, 자조, 협동정신으로 선진조국 창조에 일익을 담당하며 새농촌 건설에 전 주민이 참여하는 뜻을 기리기 위해 자랑스러운 비를 이곳에 세우다.
1992년 6월
삼방마을 주민일동」
-----‐--------------------------------‐------------
몸체에 비해 얼굴부분이 지나치게 크다. 불두(佛頭)가 훼손되어 시멘트로 급조하여 만들다보니 괴이한 모습이 되었다.
바라보는 곳이 답답하게 보인다. 확 트인 곳을 바라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에 드러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감추어둔 비밀이 많은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