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간소하게 단순하게, 그렇게 하느님께 /박철
강원도 정선에서 살 때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나미 시나미”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이라고 한다. 예전에 텃밭농사를 지을 때 이야기이다. 텃밭에 나가서 김을 매면서 어떻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김을 맬 수 있을까 궁리를 한다. 쪼그려 앉아서 하지 않고 서서 편안하게 김을 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후딱 해치울 수 있을까? 그러다 힘들면 슬슬 농땡이 부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내는 입을 꾹 다물고 호미질을 한다. 아내는 강원도 정선에서 배운 “시나미 시나미”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교부 테르툴리아노가 전해준 이야기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매사에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고 사랑하고자 늘 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일을 할 때마다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해 성호를 그었다는 것이다. 하루의 삶을 시작할 때, 집안에 들어가거나 나갈 때, 신발을 신을 때, 책을 펼칠 때, 식탁에 앉을 때, 램프에 불을 켤 때, 차를 마실 때, 침대에 누울 때, 모든 일상(日常)에서 성호를 그으며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십자 성호를 긋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남들 보란 듯이 성호를 그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마음으로라도 성호를 그으면 된다. 직장에 도착해서 또는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일과를 시작할 수 있다. 거래 상담이나 회합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또 책을 읽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그 책을 읽을 수 있고 전화를 받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전화를 받을 수 있다.
사진출처=anastpaul.tumblr.com생활의 공백
중세 수도사들은 ‘스타티오(statio)’수련을 했다고 한다. 스타티오란 ‘머물고 있는 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이 훈련은 서둘러 다음 행위로 넘어가지 않고 잠시 여유를 갖고 조금 전에 한 행위를 성찰함으로써 그 행위와 하게 될 행위 사이에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까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후 다음 일을 하기 전에 앞에서 했던 대화를 되돌아보고 대화 중의 내 태도와 행위에 대해 성찰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일에서 다음 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했던 일을 깊이 생각해 보는 행위는 통합된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참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성취와 경쟁을 우선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기를 보지 않으면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상의 파도 속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느려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사랑하는 일, 자연이나 사물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 저녁에 가족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면서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격려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그리스도교는 끊임없는 자기 수행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수행의 도구가 기도와 명상이다.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한다.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정신없이 살아간다. 바쁘게 사는 게 미덕인줄 안다. 삶의 목적이 없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느림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질적인 변화이다. 그런 깨달음이 있어야 사물도 자연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세상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다.우리 삶에 쉼표를...장자에 그 유명한 ‘기심기사(機心機事)’라는 말이 나온다.“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기계를)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속도가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에 우리의 삶도 속도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경쟁의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면 뒤 처질까봐 불안해하며 삶의 가속페달을 밟는다. 고도성장시대를 거치면서 ‘빨리 빨리’는 성취를 앞당기는 원동력이었고, ‘바쁘다, 바빠’는 생활인의 덕목이었다. 남보다 먼저, 남보다 빠르게 서두르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숨 가쁘게 살아왔다.삶은 단순할수록 좋다. 자연의 리듬은 단순하다. 새 울음소리를 들어보라. 바람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러나 자연의 소리는 일정한 리듬에 의하여 조화를 이룬다. 자연은 결코 서두는 법이 없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두기까지 자연은 순리(順理)에 의하여 조용히 움직인다.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가를 우리 모두는 안다. 다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 단순한 진실을 잊고 사는 것뿐이다. 지금 당장 숨넘어갈 듯 달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게 되리라는 생각 자체가 바쁜 현대 생활이 세뇌시킨 강박관념일 뿐이다. 잠시만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내면을 응시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이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우리의 삶 속에 ‘쉼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쉬는 것조차도 하나의 일이다. 휴식을 위한 스케줄을 억지로라도 따로 빼어놓지 않으면 ‘쉼표’ 하나 표기 할 자리가 없을 만큼 꽉 들어차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쉰다는 것은 숨을 고르는 일이다. 달리거나 노래할 때에도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당장 울화통이 치밀더라도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면 보다 차분하게 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
하루 하루요즘 나는 은퇴를 준비하며 비교적 한가하게 삶의 여유를 즐기며 살고 있다. 중세 수도사들이 경험한 삶의 명제 ‘솔비투르 암블란도'(solvitur ambulando), "걸으면 해결 된다"를 나의 삶에 적용하여 하루에 서너 시간씩 걷는다. 요즘 심정은 이렇다. “더욱 간소하게 단순하게 살자.” 그랬더니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기쁨과 의미로 충만하다. 작년부터 나홀로 맹세를 정해놓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침에 기상하여 30분가량 묵상기도를 바친다. 이때 하루의 화두를 붙잡는다.- 하루 한줄 시어를 나란히 메모지에 남긴다.- 아침 출근하는 아내를 위하여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는다.-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천천히 들판을 걷거나 산곡을 오른다. 나를 이어주는 모든 관계를 생각하며 기도한다. 나무나 꽃 풀 풍경 등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남긴다.- 오후 가장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한 시간 책을 읽는다.- 되도록 적게 먹으면서 초식동물의 되새김과 게으름을 명상한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성껏 저녁밥을 짓는다.- 무언가에 눈물겨워하는 사람에게 내 용돈의 일부를 나눈다.- 내게 지극한 마음으로 베푼 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는다.- 나를 불러주는 모임이나 고난 받는 자의 현장을 잊지 않고 찾아간다.- 잠은 6시간 숙면을 취하고 모자라면 30분 낮잠을 잔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며 30분가량 묵상기도를 바치고 하루를 완결한다. *박철샘터교회 동사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부산예수살기상임대표. 시인.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