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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전쟁
출 8: 25-31
I. 가치관 전쟁
오래된 수필집 가운데 이어령 선생의 「아들이여 이 산하를」 하는 책이 있습니다.
선생의 어린 시절, 선생이 사시던 마을에는 넉넉한 수염을 달고 계셨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를 뵈면 턱 밑에 꽃바구니를 달고 다닌다 할 만큼 아주 수북한 수염을 달고 탐스럽게 생각하고 사셨습니다. 아무도 그 수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또 이상하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수염을 달고 계신 분들은 위엄 있어 보이기 때문에 좀처럼 가까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마을에 초등학생 한 아이가 그 수염을 볼 때 마다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할아버지에게 제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물어보려무나.”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이불 밖에 걸쳐놓고 주무십니까?”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잠잘 때 수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요. "얘야? 미안하다. 하룻밤 잠을 자보고 대답해 주마.” "그러세요.” 밤새도록 잠을 청하는데 수염을 붙들고 이불 속에다 푹 넣고 잠을 청하면 답답한게 이건 아닙니다. 이불 밖에 철퍼덕 걸쳐놓고 잠을 청하면 쓸쓸한게 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끄집어내면 쓸쓸하고 쓸쓸답답 답답쓸쓸 그러다가 밤을 지세웠습니다. 이른 아침 달려온 아이를 버선발로 맞이합니다. "얘야, 미안하다. 하루만 더 시간을 다오.” "그러세요.” 그 다음날도 역시 수염을 붙들고 전전긍긍, 밤을 지세웠으나 이불속에 넣어야 되는지, 밖에 걸쳐야 되는지 알지 못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깁니다만 이 교회가 정말 주님 안에 있는 교회인지, 주님 밖에 있는 교회인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인지 아닌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영혼이 정말 천국 안에 있는지 천국 밖에 있는지? 내 생각이, 내 가치관이, 내 삶이 성경 안에 있는지, 성경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금년 한해동안에는 성경 밖에 있는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사고방식, 삶의 스타일, 이 모든 것들을 규명해 내고 거룩한 전쟁을 선포해 보고 싶습니다.
구약성경은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약성경 또한 예수 믿는 것, 복음을 전하는 일을 영적 전쟁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철부지들의 소풍놀이가 아니라 영적 전쟁입니다. 전도는 사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전투입니다.
요즘 우리는 새벽마다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는데 애굽의 바로 왕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그의 왕국과 통치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께 보내기 싫어하는 작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2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바로의 이 말속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과 하나님의 백성을 사단의 노예로 묶어 두려는 사악한 욕심이 서려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한번 택한 백성을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바로 왕이 고집을 피우면 피울수록 그에겐 비참한 패배와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성도에게 싸움은 이미 승리가 확증된 싸움입니다. 즉 성도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겨 놓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포장된 선물이 아니라 싸워서 얻는 선물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멋진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바로의 전략, 사단의 작전을 알아야 합니다. 구태여 손자병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공격하는 요충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 가치관을 공격합니다. 북한 공산당이 내려온다면 틀림없이 청와대, 국방부, 방송국, 중앙청, 교각 이런데를 먼저 폭격하겠지요. 거기를 이름하여 요충지라 합니다. "가롯 유다에게 마귀가 예수 팔 생각을 넣은지라" 먼저 가롯 유다에게 생각을 정복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년 첫주일 설교를 통해서 세속적인 「가치관의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십시다.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세 번째 해 - 첫 번째 목표는 셀교회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소망의 모든 가족들이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운동을 벌여 보자는 것입니다.
II. 말뚝은 세상에 박아놓고 교회만 나가라
지난 2년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슬로건 아래 성경적 교회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 노력이라기 보다는 몸부림을 해왔습니다. 거기에 유혹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치관의 변화없이 교회론, 교회의 체계, 교회가 움직여 가는 활동과 시스템만 바꾸면 셀교회가 될 줄로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셀교회는 시스템 이전에 가치관이요 정신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작전이 바로 바로의 작전이었습니다.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예배하겠다는 모세의 제안에 바로는 멋진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타협안 오늘 본문 출애굽기 8:25 너희는 이 땅에서 즉, 애굽땅 안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지 말고 이 땅에서 예배하라! 하나님께 예배는 해라. 그러나 너희 신분의 본질은 노예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교회는 나가라. 그러나 세상 가치관을 떠나지 말아라.
이 작전이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사탄의 작전입니다. 예수는 믿어라. 그러나 네 가치관, 정신, 삶은 세상에 말뚝을 박아놓고 살아라. 사탄은 오늘도 변화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목줄을 붙들고 언제든지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작전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자연인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세상중심입니다. 세상에 박힌 말뚝을 뽑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때로 사단의 병정 놀음을 합니다. 때로 크리스챤을 비난하기도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하고 예수 잘 믿는 사람 박해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때로 사단의 선전물이 되기도 합니다. 저 사람 좀 봐라. 주일날 가서 예배드리고 세상에 타협하고 살아도 멀쩡히 잘 살고 있지 않느냐?
애굽을 떠나지 못한 사람, 세상의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 그는 종교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종교적 형식은 있을 수 있고, 직분은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 살아도 찝찝합니다. 교회안에 찾아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당당하지 못합니다. 예배는 드리면서도 실상은 세상 애굽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아무런 부담없이 종교인으로 지내다 보면 예배도 하고, 구원도 받고 그러다 죽으면 천국도 갈 거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이러한 바로 왕의 타협안 - 사단의 유혹에 대한 모세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8:26절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애굽 사람은 짐승을 섬기는 사람이요 우리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당신과 우리는 가치관이 다르고, 주권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르고, 입맛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른 사람이요.
① 때문에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변화받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 No.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세상도 즐기고 신앙도 즐기라. No.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세상은 공동 우승도 있고 무승부도 있느니라. 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승부도 없고 공동 우승도 있을 수 없습니다.
III. 너무 야단스럽게 믿지 마라!
첫 번째 타협안에 실패한 바로는 두 번째 타협안을 내어놓습니다.
8:28절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② 가라, 그러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예수 믿어라. 그러나 너무 유별나게 믿지는 말아라. 신앙생활 해라. 그러나 열성분자처럼 믿지는 말아라. 티내고 예수 믿는거 꼴불견이더라. 예수 믿는다고 하루 아침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주일날 가계 문 닫고, 예배시간마다 은혜 받았다고 찔찔짜고, 저녁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까지 야단법석 떠는 것 그거 별로 안좋더라. 이게 사단의 유혹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세상에서 우리를 교회로 풀어주는 듯한 유화정책을 쓰지만 자신이 붙들고 있는 고삐를 놓치 않으려고 몸부림을 합니다. 이럴때 일수록 단호해야 합니다. 사단! 네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열심을 다해 믿어라.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그리하라.
똑같이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도
㉠ 발목만 은혜의 강물에 담가놓고 찰싹거리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주제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 가라(408장)
㉡ 무릎까지 담그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응답도 곧잘 받습니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는 없습니다.
㉢ 가슴까지 담그고 살아갑니다. 감동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온전히 하나님 앞에 삶을 맡기지 못합니다.
㉣ 온 몸을 담그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온전히 맡겨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이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마귀는 오늘도 협박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아라. 멀리가면 너 빠져 죽는다. 바로 왕은 속입니다. 내가 법 먹여주고, 집 주고, 옷 입혀 주는 거야.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 광야에서는 예배만 하고 곧 애굽으로 돌아오는 거야.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교회 가서 예배만 하고 사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는 거야. 예수 믿는 사람도 타협하며 그렇게 사는 거야. 너 혼자 열심내고 흥분하고 그러지 말아라.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력해지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한때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20대 - 외출하는 부인 보고 같이 외출하자는 남자.
30대 - 외출하는 부인 보고 어디가? 묻는 남자.
40대 - 외출하는 부인 보고 몇 시에 돌아와? 묻는 남자.
50대 - 외출하는 부인 보고 쳐다만 봐도 간 큰 남자다.
왜 이렇게 가장들의 권위가 떨어졌습니까? 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권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무력한 집단이 되었습니까? 예수는 믿되 멀리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교회가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왜 교회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까? 너무 멀리가지 말라는 바로의 타협안에 넘어갔기 때문 아닐는지요. 왜 천만 그리스도인이 있어도 세상이 어둡습니까? 세상에서 멀리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오늘 교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디지털 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대 갑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인텔사의 엔드류 그로부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뭔가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더라.”
옛말에 미친놈이 곰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마귀 때려 잡는 것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뒤집고 복음에 미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안에 멀리가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가득찰때 셀교회는 불가능합니다. 멀리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초대교회의 원형은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너무 멀리가지 말라는 사탄의 유혹 앞에 주님은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깊은 은혜의 바다로 뛰어 들어라! 내가 너의 삶을 책임져 주리라.
IV. 공동체를 포기하라
애굽에 묶어두려던 바로의 시도도, 너무 멀리 가지 말라던 바로의 타협안도 거절되자 이번엔 세 번째 타협안을 가지고 나옵니다.
10:11절입니다. "온 가족과 우양 떼가 함께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③ 남자만 가라, 너 혼자만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패배시키려는 사단의 집념을 보십시오. 한번 두 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위인이 아닙니다. 오늘 성도들이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사단은 세 번째 타협안을 들고 나옵니다. 좋다. 열심히 믿어도 좋다. 그러나 너 혼자만 열심히 해라. 신앙은 자유니까. 남편까지, 자식까지, 이웃까지, 셀공동체가 어떻고? 하지 말고 너 혼자만 열심히 해라. 다른 사람의 구원은 책임지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위 공동체까지 운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 공동체안에 임하시며 그 공동체를 통해 경배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의 말을 아십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그러나 우리는 단호히 선포합니다. "나는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다" 네가 네 공동체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단호히 선포합니다. 나는 공동체를 지키는 자이며,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고, 공동체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너 혼자 가라. 사단의 이 타협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믿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함께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이웃 구도자들을 가슴에 품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라 말씀하십니다. 한소망 교회 모든 성도들이 같은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에덴동산 그리고 출애굽 이후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유혹과 죄로 그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끈질긴 집념의 부딪히는 장이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의 선민공동체, 구원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공동체, 셀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가시는 분들은 새해에 모두 셀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교회 깊숙이 들어가면 상처받는다. 밖에서 맴맴 돌아라. 그것은 사단의 소리입니다. 교회 공동체안에서 살 때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은혜받는 생활이요, 교회 생활은 그 상처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길 때 아버지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신념이 있습니다. "교역자와 교회,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리 할수록 좋다." 아닙니다. 사단의 말입니다. 교역자들과 가까이 하십시오. 영적 지도자들과 가까이 사귀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단의 유혹에 단호히 거절하십시오. 너 혼자 믿어라. 아니요. 우리는 함께 믿을 거요. 너 혼자 열심 내라. 아니요. 우리 공동체는 함께 성령의 불 가운데서 달려갈 것이요.
V. 물질은 빼놓고 믿어라
「너나 열심히 예배하라」는 바로의 유혹앞에 모세와 이스라엘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아내도, 어린아이 하나도 두고 갈 수 없소. 이때 바로는 네 번째 타협안, 마지막 타협안을 내어 놓습니다.
출애굽기 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양과 소는 두고 몸만 가라는 것입니다. 물질로까지 예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유혹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양과 소. 물질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유혹입니다. 여기에 넘어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질문제 때문에 신앙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과 축복을 상실하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일 때문에 물질적 손해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구제와 선교에 성실한 헌금을 드렸습니까?
주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힘에 지나도록 헌신하셨습니까?
주께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누가 18:29-30절 말씀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과(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가족을 버린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할렐루야.
출애굽을 하던 날 밤 떨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12:11 "너희는 유월절 양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팡이를 잡고 출발해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팡이를 의지하고 광야로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멋을 내고 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지팡이는 양을 모는 도구입니다. 애굽을 빠져나갈 때 양을 몰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의 재산입니다. 네가 거듭날 때 물질도 거듭나야 한다. 너희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에 물질도 세상을 떠나는 물질관이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을 갈라 생수를 내어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양을 몰고 나가라는 것입니까? 신앙인에게 물질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이 가치관이 분명하지 않을 때 두 가지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물질관을 가지게 됩니다.
첫째, 금욕주의적인 물질관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풍요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빈궁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있는 자들의 소유를 통해 일하십니다. 물질적인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이 땅에서 재물얻는 능을 그들에게 더하여 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잘못된 물질관은 물질 애착증, 집착증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와서도 온갖 관심이 물질에 있습니다. 세상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안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라면 신앙도 유보합니다. 교회안에서 물질 때문에 늘 시험듭니다. 물질이 왜 필요한지 우선순위를 모릅니다.
양을 몰고 나가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물질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넉넉한 사역의 승리를 위하여 아버지 나라의 영광을 위한 복음 선교, 사역을 위하여 내게도 넉넉한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물질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물질이 적으나 많으나 근심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물질이 적으나 많으나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물질을 쫓아가던 피곤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물질이 나를 따라 오는 편안하고 기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주께서 먹여주실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부어주시는 축복으로써 물질이 필요합니다. 원하시면 주께서 흑암중에 보화와 은밀한 곳에 재물을 내게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거듭난 가치관, 달라진 가치관, 변화된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며 살아가십시다. 물질에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함께 기도하도록 하십시다.
호주 한 마을에 성당과 유대회당이 함께 있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성당과 회당이기 때문에 승합차 한 대를 공동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새 차에다가 신부님이 물을 찍찍 뿌리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물었지요. "신부님 뭘 하십니까?” "성수로 지금 영세를 베풀고 있습니다.” 랍비가 방에 들어가더니 톱을 가져 나와서 배기통 5cm를 짤라 버리는 것입니다. "뭐하는 것입니까?”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새해 짜를 것 짜르고 씻을 것 씻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가십시다.
VI. 세속적 가치관과의 전쟁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가치관이 바뀌지 않고서는 1천만 성도가 아니라 7천만이 모두 교회안으로 들어와도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대형교회 1만개를 세워도 민족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많아지고 성도는 많아졌는데 이토록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무력해 보이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는 가치관의 변화없이 교인도되고 집사도되고 목사도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는 교회, 신약 성경의 교회 원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 우리를 변화받지 못하도록 묶고 있는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십시다.
사단은 우리를 계속해서 끊임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교인이 되라. 그러나 세상적 가치, 욕망을 포기하지는 말아라. 예수는 믿어라. 그러나 너무 열정은 내지 말아라. 신앙은 개인적인 거야. 너나 잘해! 다 좋은데, 물질은 잘 붙들어라. 교회는 네 주머니에 관심이 있어. 물질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우리는 선언하십시다. No! 그리함은 불가하니라!
변화된 그리스도인 한명은 변화받지 못한 그리스도인 1만명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한 교회는 무력한 1만 교회보다 더 영향력이 있습니다. 시대를 뒤집고 역사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는 한명을 세우는 교회가 진정한 셀 교회입니다.
이 한해동안 그 한명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단 1명을 세우기 위하여 온 교회는 헌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양보없이 하나님을 섬기라
출 8: 25-32
지금은 방송을 하지 않습니다만 10여년 전에 모 라면회사에서 이런 광고를 했었습니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코메디언 두 사람이 라면 한 그릇을 맛있게 끓여가지고 서로 먼저 먹으려했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못하였던 "아우 먼저" 드시게 하고 양보를 합니다. 동생도 미안했던지 "형님 먼저" 하면서 라면 그릇을 형님에게 살면시 양보합니다. 그러면서 "아우 먼저". "형님 먼저"가 계속되면서 라면 그릇은 형에게, 동생에게 왔다갔다하는 기분 좋은 광고였습니다.
왜 요즘에는 이런 광고를 자주 않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야당 먼저, 여당 먼저 서로 양보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도 서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양보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람 먼저 미국 사람 먼저 서로 양보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장님 먼저". "사원 먼저" 하면서 노사간에도 서로 양보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갈수록 산업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직업도 다양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직업의 종류가 약 11만 여종이라고 하고 우리 나라에서도 2만 종류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을 따라 자신의 경험과 생활 환경이 달라지고 그러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그 폭이 좁아 집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그 구성원간에 갈등이 많고 분쟁이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때 서로 싸우지 말고 형님 먼저 동생 먼저 서로 먼저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양보해야 할 것은 죽어라 양보를 않하고 죽어도 양보를 해서는 안되는 일에서는 슬그머니 양보를 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는 양보를 해야 합니다. 양보를 하면 양보를 하는 사람이 안전하고 또 양보를 받아서 앞에간 사람이 고맙다고 손이라 한 번 흔들어주면 하루종일 기분 좋은 하루가 되거든요. 아마도 운전 양보만 잘 해도 자동차사고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익은 양보를 해도 국민의 자존심은 양보를 해서는 안됩니다. 이익은 얼마든지 복구가 되지만 자존심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어렵거든요. 생활 방식은 얼마든지 양보를 해도 괜챦습니다. 서양식으로 하든 전통식으로 하든 조금 편리하고 불편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치관은 양보를 해서는 안됩니다. 신앙과 주일 성수 같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바로 우리 존재의 뿌리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 시대 때 일본이 우리에게 신사참배를 하고 동방요배를 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민족혼을 팔아먹는 일이라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그것이 국민의례와 같은 것이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여도 주기철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같은 분들은 감옥을 자기집 들나들이 하면서 6년씩, 혹 4년씩 옥고를 치루며 순교하기까지 게명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과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그 모세를 그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애굽 백성들과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순히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백성의 노동과 고역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바로 왕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서 애굽 전 지역에 10가지 재앙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1) 바로의 타협안
바로는 네 번째 재앙인 파리를 떼의 습격을 받은 다음 모세와 아론을 불러 적당한 타협안을 내 놓았습니다. "너희는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애굽은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죽 배반하기를 잘하고 우상을 좋아합니까? 그러므로 바로 왕은 우상 섬기는 것과 하나님 섬기는 것을 자기 나라 안에서 다 허락하므로 혼합신앙을 만들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잡아두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 타협안이 바로의 간계인 줄 았습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그럴 수 없노라"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바로는 다시 타협안을 내 놓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바로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보낼 수도 있고 안 보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 그러면 내가 보내주겠다고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할 때 꼭 바로가 모세를 유혹하는 것처럼 타협하자고 합니다. 사탄도 마치 역사를 자신이 주관한 것처럼 말합니다. 사탄도 세상이 다 자기 것 인양 우리를 시험합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이같이 시험했습니다.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 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주관자요 역사의 주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습니다.
바로는 다시 또 타협안을 내 놓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멀리 가지 않고 가까이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으면
언제라도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잡아 올 수 있을 것이라 계산하였습니다.
또한 바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다가도 생활에 지치고 불편하게 되면 애굽과 가까이에 있으니 애굽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하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보내 준 척 하지만 사실을 끝까지 이스라엘을 가까이에 붙들어두고자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벌써 애굽에서 나온지 일년이 지나고 저 멀리 시내 광야에서 살았으면서도 생활이 좀 고달프고 지겨우니까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하였습니다. 모세를 반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곳 애굽에 가까운 곳이 아니라 사흘길 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리라"
어디서는 하나님을 못섬기고 어디서는 희생의 제사를 못드리겠습니까?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보좌요 하나님이 계신 곳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제사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곳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막을 세우실 곳을 정해주셨습니다. 성막을 세우는 세밀한 부분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곳을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한 곳으로 정하십니다.
다윗이 성전을 세우고자 했을 때 기뻐하시고 다윗에게 한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할 때 역시 기뻐하시고 솔로몬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항상 계시며 그 백성을 살펴주시리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거기 와서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을 신원해 주시며 전쟁을 막아주시며 기근에서 구하여 주시리라 약속하였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기만 해도 그렇게 해 주리라 하나님은 약속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는 자리는 구별된 거룩한 곳이 입니다. 애굽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거룩한 곳은 세상 가까운 곳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먼 곳에 있습니다. 멀다고 하는 것은 거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거리에서 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 제사를 드리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때가 얼마나 어려운 때입니까? 애굽에서 해방이 되는 것도 것도 불확실한 때입니다. 바로의 타협을 거절하므로써 더 많은 시련과 노예생활이 계속됩니다. 이런 때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로의 타협을 받아들릴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바로의 타협에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하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이요 그 법은 어느 때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에서도 하나님의 법은 지켜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양보도 없습니다. 시절이 나쁘다고 변경하지도 않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 말씀이 어렵다고 내 마음대로 좀 편한대로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로 두고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 사정이 딱해졌다고 편리한대로 뜯었다 고쳤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대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 법을 지키지 못하면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제일의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희생제사를 드리는 여러가지 제사법은 가장 까다롭게 직접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법을 어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법을 어기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그 법을 잘 지켜 여호와께 희생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죠지 워싱톤 대통령은 독립 전쟁 때에도 주일에는 전쟁을 중단하고 꼭 쉬게 했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남북 전쟁 때에 주일을 쉬게 했으며 가필드 대통령은 주일날은 습관적으로 차르 타지 않고 교회에 걸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저만큼 부강한 나라고 된 것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보세요. 모세가 바로의 말만 믿고 바로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파리 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곧 바로 다시 강퍅해지고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바로에게 "거짓을 행치 마소서"했으나 바로는 끝까지 거짓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후에도 바로는 여러 차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10장 말씀을 보면 바로 왕은 모세와 아론을 다시 데려와 부분적이고 그럴싸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몇 사람만 대표로 가서 섬기라고 했다가 또 어린아이들은 애굽에 놔두고 어른들만 가서 섬기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을 놔두고 간다면 어른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못 잊어서 어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부르고 다른 타협안을 내 놓습니다. 바로는 한 발 물러서서 그럴싸하게 제안합니다.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애굽에 놔두고 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주산업은 목축업입니다. 양과 소를 기르고 거기서 생산되는 것으로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생활수단이 없이 몸만 가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정상적인 노동과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범죄하게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사회는 생존경쟁으로 인하여 전쟁터로 변하고 맙니다.이스라엘은 몇 날이 못되어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섬기고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고 희생 제사를 드리려면 양과 소를 잡아서 제물을 삼아야 하는데 양과 소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자유는 주어지지만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유만 있는 백성들은 방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양과 소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무 실속 없는 출애굽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바로의 타협을 모두 거절하였습니다(26절).
여러분! 모세가 바로의 타협안을 거절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종살이를 계속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친히 인도하시므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백성 전부와 그 소유를 다 가지고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오 역사의 주관자시오 역사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망했으나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성도들 여러분! 성도들이 너무 까다롭과 타협할 줄 모르고 옹고집이라는 비판을 듣습니다. 그러나 지킬 것은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고 희생제사를 드리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흔들리거나 타협을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타협하고 물러서면 모든 것을 다 잃게됩니다.
사탄은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를 애매하게 혼합시켜놓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역사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날과 세상 날을 애매하게 혼합시켜놓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간계입니다. 지엄하신 하나님과 세상 권세를 비슷하게 보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돈하고 갈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헤메이게 하다가 결국 쓰러지게 만듭니다.
서양의 어느 분이 풍자적으로 말하기를 옛날 증조부 때는 성일을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하더니 조부 때는 그냥 안식이라고 하고 아버지 때는 일요일이라 하고 오늘날은 주일을 주말(week-end)라고 한다고 타락의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주일이 주간의 첫날이 아니라 주간의 주말이요 이날은 먹을 것 싸들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나가는 날로 주말이 되고 말입니다. 거룩하게 지키는 것보다 주일이 아니라 더 오락과 놀이를 즐기는 주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이런데서부터 방탕과 방종과 타락과 범죄가 난무하고 놀자판 먹자판으로 곳곳이 혼돈으로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릭 리들(Eric Liddle)이라는 사람은 1924년 파리 올림픽 게임에서 그 나라의 유일한 금메달리스트 후보였는데 순서를 보니까 자신의 시합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 금메달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왕이 권고하고 왕자가 찾아와서 부탁해도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는 결코 그 시함에 뛰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영웅이 되고 평생 생활비를 걱정 안해도 되는 금메달을 포기하고 주일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목요일에 자기의 주종목 100M 대신에 400M 경기에 나가 뛰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업고 1등을 하고 금메달을 달았습니다. 기자들이 우루르 달려와 100M 선수가 어떻게 400M에서 우승했느냐고 질문할 때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100m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m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뛰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던 것입니다.
평생 생활비를 걱정 안해도 되는 금메달을 포기하고 주일을 지켰던 않았습니다.
성도들 여러분! 우리는 주일을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날을 다른 날로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날을 지켜야 복을 받습니다.
불란서 혁명때 교회를 파괴하는 방법의 하나로 주일을 못 지키도록 10일에 하루씩 쉬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의 능률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지쳐서 병에 쓰러지므로 다시 7일에 하루를 쉬게하고 주일을 지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도량이요.생활방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일을 타협하고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들이는 성도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탄의 네가지 타협안
출 8: 25-32
여러분,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삶을 때 어떠한 방법으로 삶는지 알고 계십니까? 개구리를 삶을 때 뜨거운 끓인 물에 집어 넣으면 개구리는 뜨거워서 속히 팔딱 뛰어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개구리를 찬물에 집어넣은 후 밑에서 서서히 불을 때면 개구리는 온도가 높아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펄펄 끓는 물 속에서 개구리 헤엄을 치다가 결국은 죽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우리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달콤하게 보이는 것으로 유혹하면서 우리로 서서히 영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을 인도하기 위하여 모세를 보냈습니다. 이때 애굽 왕 바로는 모세에게 계속해서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Ⅰ. 첫 번째 타협안 - 너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출8:25).
바로의 첫 번째 타협안은 너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긴 드리되 애굽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25절)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쪽으로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절대로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속하여 살도록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라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뜻이 '세상에서 하나님 쪽으로 불러낸 무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쪽으로 갈라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켜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7).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어두움의 일에 동참해서는 아니 되며 늘 하나님 편에 서서 어두움을 밝게 비추는 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관찰1. 바로는 모세에게 어떤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까?(25절)
Ⅱ. 두 번째 타협안 - 너희는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8:28)
바로는 첫 번째 타협안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곧바로 두 번째 타협안을 모세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가긴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 않게 되면 바로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 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28절)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경계선에 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발은 하나님 쪽에 디뎌 놓고 있지만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디뎌 놓은 채 살고 있습니다. 주일에 보면 신령한 그리스도인 것 같아 보이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멀찍이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단이 노리고 있는 공격 대상 1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도 섬기면서 세상 재미도 보겠다는 사람 가운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기는 하되 너무 하나님 쪽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는 사단의 속삭임을 과감하게 물리치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되어 성별된 생활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관찰2. 바로는 모세에게 제시한 두 번째 타협안은 무엇이었습니까?(28절)
Ⅲ. 세 번째 타협안 - 너희 남자들만 가서 하나님을 섬기라(출10:11)
바로는 모세에게 세 번째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모세는 남녀노소와 우양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말하자 바로는 그렇게는 해 줄 수가 없다고 하면서 가려면 너희 중에서 남자들만 대표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출10:11)
바로는 남자들만 보내게 되면 그들은 모두 다시 처자식이 있는 애굽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고 애착을 갖고 있는 것들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롯과 그의 가족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타는 소돔 성을 빠져 나왔지만 롯의 아내는 그 마음이 계속 소돔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 본 연고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창19:26).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겨 두고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한 장군이 배를 타고 적군과 싸우기 전에 먼저 모든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들이 타고 온 모든 배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면서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자, 우리들이 타고 온 배는 모두 불탔다. 이제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는 앞으로 나가서 적군과 목숨을 다하여 싸워 이겨야만 살 수 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뒤로 물러서서 안주할 곳을 가진 채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영적인 싸움에서 항상 패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갈 여지를 만들어 놓아서는 아니 됩니다(히10:38,39).
관찰3. 바로가 모세에게 제시하였던 세 번째 타협안은 무엇이었습니까?(출10:11)
Ⅳ. 네 번째 타협안 -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게 하라(출10:24)
바로는 자신이 제시한 3 가지 타협안을 모세가 모두 거절하자 마지막 타협안을 모세에게 다시 제시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해 주겠다. 그리고 너희 남자 뿐 아니라 가족들도 다 데리고 가게 해 주겠다. 단, 양과 소만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귀를 솔깃하기 하는 제안이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어다"(출10:24).
그렇지만 모세는 바로의 마지막 타협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모세는 지금 애굽에서 온 백성들이 나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나가서 하나님께 양과 소로 희생을 드림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출5:3,8:27). 그러므로 모세는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출10:25,26).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모세는 단지 애굽의 학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예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듯이 우리들도 단지 축복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요4:23,24). 그러므로 우리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먼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잘 돌보아 준 농장 주인의 생일에 닭과 돼지가 각기 드렸던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닭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달걀을 한 꾸러미 드릴 거야" 그러자 돼지는 한참 고민을 하면서 "나는 달걀을 낳지 못하니 주인에게 무엇을 드려야 할까?" 그때 닭이 말했습니다. "너는 햄 소시지를 드리면 되잖아?" 닭은 자기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었지만 돼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자기에게 있는 것 중에 일부를 드리면서 마치 엄청난 것을 드린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쓰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모세는 "애굽에는 단 한가지도 남겨 두지 않고 다 가지고 가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했듯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온전한 헌신이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올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바로의 타협안들을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신앙생활을 살기 위하여 과감하게 사단이 주는 여러 가지 시험들을 믿음으로 거절하면서 살아갑시다.
첫째,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쪽으로 갈라져 있는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빛의 자녀들답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머뭇거리며 넘나드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쪽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누가 나를 보더라도 "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갖고 무언가를 남겨 놓은 채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다시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는 불행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는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는 것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모세는 온 가족이 모두 다 출애굽 하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양과 소를 가지고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삶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고 믿음생활을 실족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단의 타협안들을 단호히 물리침으로 영적인 승리를 경험하면서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자의 유혹
본문: 출 8:25~32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
요즘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지시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20장 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리고 나머지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 율법을 허락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소개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 왕에게 갈 것을 명하십니다. 바로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출애굽기 3장 18절 말씀입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출애굽기 3:18 중)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바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아론과 더불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선포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더욱 완강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며 횡포를 부립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성을 건축하는 데 사용할 벽돌을 굽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벽돌 재료도 주지 않으면서 같은 분량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아래 신음하며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보내 바로를 만나게 하시고, 준비한 열 재앙을 바로 앞에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앞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일곱 재앙을 새벽기도회에서 함께 나누며 읽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장면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하나님이 끈질기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바로는 끈질기게 하나님의 백성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낼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여기서는 두 곳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8장 1절과 9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섬기게 하려는 바로 왕,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하나님! 바로 이 둘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출애굽기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나일강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첫 번째 재앙을 시작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재앙을 집행하셨습니다. 개구리가 물에서 올라오게 만드는 재앙을 일으키셨고,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을 일으키셨으며, 파리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재앙도 내리셨습니다. 이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가 등장할 때, 드디어 바로가 모세와 타협을 시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내줄 마음이 없었던 바로는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잠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마음을 비칩니다. 그러나 그의 실제 마음은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타협안이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바로가 재앙을 당하면서 네 번에 걸쳐서 모세와 타협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이 네 가지 타협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장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의 타협이 제사 곧 ‘예배’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시내산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과정을 끈질기게 방해했고, 타협안을 내놓으면서까지 이스라엘의 예배를 가로막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특히 바로의 네 가지 타협안을 ‘예배’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이 네 가지 바로의 타협안을 살펴보며, 이것이 어떻게 예배와 관련이 있는지, 나아가 우리 예배자들은 어떤 유혹 앞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말씀 속에 잘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만 예배하는 민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관된 의지였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 받기를 원하시며,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목적은 바로 ‘예배’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는 종말의 날 모든 피조물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요한계시록 5:13 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의 질문과 대답은 이렇습니다.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 예배, 곧 섬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사흘 길을 가서 호렙산, 즉 시내산에 이르러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킬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시작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 사탄은 편리하게 예배드리라고 유혹합니다. >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한 예배, 시내산에서의 귀한 예배를 꿈꾸는, 나아가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드릴 온전한 예배를 꿈꾸고 있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이때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네 가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타협안이 오늘 본문 25절에 나타납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출애굽기 8:25)
이 제안은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일부는 허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이 타협안은 “너희가 예배는 드리되, 사흘 길을 나가 예배드리지 말고, 여기 곧 애굽 땅에서 예배를 드려라.”라는 제안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이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이 조금은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마 지금도 인터넷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평면적인 의미에서, 곧 게으름을 피우거나 헌신이나 정성 없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 전에 나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편함을 위해서 인터넷과 같은 편리한 매체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유혹을 오늘 본문의 바로 왕의 제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라, 그러나 고생할 필요가 있겠니? 사흘 길까지 나가서 꼭 예배를 드려야만 하겠니? 그냥 이곳에서, 이 방에서 혼자 예배드리면 안 되겠니? 기도하고, 묵상하고, 나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은혜 내려주시지 않겠니? 그래도 좀 아쉽다면 소망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리면 되지 않겠니?” 이와 같은 타협안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매체를 통해 예배드릴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몸이 연약해서, 혹은 병이 들어 먼 곳에서 홀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까지 마음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는 이 말 앞에 부담을 가져야 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편의성과 편리함으로 계산되는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라는 말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애굽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속 곧 이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는 곳, 사탄의 힘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라는 말입니다. 애굽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땅이었습니다. 강의 신, 땅의 신, 하늘의 신, 대기의 신, 그 외에도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하나님도 동시에 섬기라는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예배하자는 제안입니다. 세상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원리와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그 원칙과 삶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께도 예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유혹은 세상의 원리와 방식을 따라 살면서, 마치 장신구처럼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살아가듯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괜찮다는 유혹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단호히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출8:26) 또한 모세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8:27)
< 사탄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
이제 바로는 두 번째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오늘 본문 중 28절입니다.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출애굽기 8:28 중)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너무 자주 가지는 말라. 예배만 드리고 와라. 봉사나 섬김이나 교육 같은 데까지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 이와 같은 의미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길을 나가서 예배하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이라는 땅을 완전히 떠나라는 의미, 예배만을 목적으로 사흘 밤, 사흘 낮을 걸어가는 정성스러움을 지키라는 의미, 또한 예배에 모든 것을 걸고 기대하며 나가는 예배를 드리라는 의미이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곧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말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온전하게 예배만을 집중하지는 말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너무 자주 나가지는 말라. 교회 일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 너무 많은 시간 드리지는 말라. 약간만, 조금만, 잠시만 드려라. 너무 멀리 나에게서,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세상 권력 잡은 자에게서 떠나지는 말라.”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너희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만한 거리에 있어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여차하면 세상으로 돌아와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여차하면 사탄에게로 돌아와라.”라는 유혹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예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직 사흘 길을 떠나는 그 길, 그 여정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 사탄은 신앙의 전수를 방해합니다. >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참으로 신기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평범한 바로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유혹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열 가지 재앙 속에서 바로의 세 번째, 네 번째 타협안이 나타납니다. 그중 세 번째 타협안은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을 경험한 후 제시됩니다. 출애굽기 10장 10~11절의 말씀입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출애굽기 10:10~11 중)
바로의 세 번째 유혹은 “너희가 예배하러 가기 위해 사흘 길을 가는 것까지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말라. 너희만 가라.” 장정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괜찮은 제안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엄청난 함정이 있습니다.
사흘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우니 아이들을 남겨두고 다녀오라는 말은 선의의 제안처럼 보입니다. 아이들까지 그 어려운 사흘 길을 떠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편하게 장정들만, 어른들만 다녀오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들도 나중에 장정이 된 후에 나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 아이들,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하느라 힘들었는데 사흘 길까지 나가 예배드리는 건 체력도 많이 소모될 텐데, 그냥 내가 혼자 다녀오마. 내가 대신 가서 기도해 주마. 내가 너의 몫까지 예배하고 돌아오마.” 이렇게 타협할 수 있습니다. 어른인 우리는 사흘 길을 떠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애굽 땅에 아이들을 남겨두라는 제안은, 아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그저 애굽 땅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바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우리의 2세들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을 믿음에서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세상의 권력 잡은 자요,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 권력과 권세 잡은 자는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며 다가옵니다. “너희만 가서 예배를 드려라. 아이들은 내 지배 아래 둘 것이다. 나 바로는, 나 사탄은, 나 세상은 너희 자녀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게 하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약 아이들을 애굽에 두고 사흘 길을 갔다면, 필경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두고 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결국 실패를 의미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집요하게 아이를 두고 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 사탄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굽히지 않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이 삼 일간 온 땅에 머물렀을 때, 바로는 마지막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10장 24절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출애굽기 10:24)
세상의 왕답게 바로는 가축들 곧 재물과 관련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세상은 결국 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세속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도 물론 돈이 필요하고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돈과 재물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바로 왕 역시 예배드리러 나가는 자들에게 “양과 소는 두고 가라.”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재산은 남겨두고 몸만 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좋으나, 몸으로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만도 얼마나 귀한 일이냐? 그저 한 번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귀한 일이니, 몸만 가라.”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더 깊은 의미는 “예배는 드리러 가되 제물은 가지고 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물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지만 바로는 지금 그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요구하는 짐승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는 양과 소를 두고 가라고 명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가지고 가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양과 소는 어떤 동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소와 양과 염소를 통해 그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는 지금,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으킨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애굽의 맏아들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신약의 사건과 어떻게 연관시키시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시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의 문설주에 그 보혈을 발라 주시고, 사흘간 무덤에 갇히셨다가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언젠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며 사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친히 준비하신 것으로 제물을 드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로의 마지막 타협안은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되 몸만 가라. 소와 양은 남겨두고 가라.” 이 말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온전하게 연결해 주신 유일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예배를 드리라는 유혹입니다.
< 완전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
우리를 위하여 유일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님, 그분과 함께 우리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왕 곧 사탄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그저 너의 힘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라고 유혹합니다. 그냥 나가도 된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참다운 예배자는 온전하고 유일하신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네 가지 유혹을 하며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자들에게도 세상의 권세자인 사탄은 수없이 유혹합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예배를 드려라. 이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떠나가지는 말라. 아이들을 두고 너희만 예배를 드려라. 제물을 놓아두고 빈손으로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유혹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7절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애굽기 8:27)
우리 주님도 사십 일을 굶으신 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 (마태복음 4:10 중)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