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 有是夫 공자께서 안연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써 주면 나가고, 세상에서 버리면 숨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尹氏曰 用舍無與於己 行藏安於所遇 命不足道也 顔子幾於聖人 故亦能之 윤씨가 말했다. “쓰이고 버려지는 것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도를 행하고 물러나 은둔하는 것은 만나는 바에 따라 편안히 하는 것이니, 운명은 말할 것이 못 된다. 안자는 성인에 거의 가까우니, 그래서 또한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朱子曰 用舍由在別人 不由得我 주자가 말하길, “쓰이고 버려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말미암는 것이고, 나를 말미암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遇用我則安於行 遇舍我則安於藏 無固必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나를 쓰는 경우를 당하면, 도를 행함에 편안해하고, 나를 버리는 경우를 당하면, 은둔함에 편안해하니, 고집하고 기필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命只是尹氏添此一脚 本文非有此意 주자가 말하길, “命은 그저 윤씨가 이 一脚을 붙인 것으로서, 본문에는 이러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孔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君子所性 雖大行不加焉 雖窮居不損焉 不爲堯存 不爲桀亡者也 用之則行 舍之則藏 皆不累於己爾 정자가 말하길, “공자께서 안연에게 일러 말하길, 쓰이면 행하고 버려지면 숨는데, 오직 나와 너만이 이런 것이 있다고 하였다. 군자가 본성대로 하는 바는 비록 크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더해지지 않고, 비록 궁박하게 거처한다 할지라도 줄어들지 않으며, 요임금 덕분에 보존되지 않고 걸왕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쓰이면 행하고 버려지면 숨는다는 것은 모두 나에게 누가 되지 않을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朱子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此八字極要人玩味 若他人 用之則無可行 舍之則無可藏 惟孔子與顔淵 先有此事業在其分內 若用之則見成將出來行 舍之則藏了 他人豈有是哉 故下文云 惟我與爾有是夫 有是二字 當如此看 用舍無預於己行藏 安於所遇 命不足道也 蓋只看義理如何 都不問那命了 雖使前面做得去 若義去不得也 只不做 所謂殺一不辜行一不義而得天下 有所不爲 若中人之情 則見前面做不得了 方休方委之於命 若使前面做得 他定不肯已 所謂不得已而安之命者也 此固賢於世之貪冒無恥者 然實未能無求之之心也 聖人更不問命 只看義如何 貧富貴賤 惟義所在 謂安於所遇也 如顔子之安於陋巷 他那曾計較命如何 주자가 말하길, “쓰이면 행하고 버려지면 숨는다. 이 여덟 글자는 사람들이 지극하게 음미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쓰이면 행할 만한 것이 없고, 버려지면 숨을만한 것이 없다. 오직 공자와 안연만이 먼저 이러한 사업을 그 분수 안에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쓰인다면 곧 장차 나와서 행함을 이루는 것이 보일 것이고, 버려진다면 곧 숨을 것이니, 타인이 어찌 이러한 것을 갖고 있겠는가? 그래서 아랫글에서 이르길, ‘오직 나와 너만이 이를 갖고 있구나!’라고 하였던 것이다. ‘有是’ 두 글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쓰이고 버려지는 것은 내가 행하고 숨는 것과 관여됨이 없고, 만나는 바에 편안해하니, 命은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대체로 그저 義理가 어떠한지만 살펴볼 따름이지, 모두 저 命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앞에서는 할 수 있었더라도, 만약 義에 비추어 가서 할 수 없다면, 그저 하지 않을 따름이다. 이른바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하나의 불의한 일을 행하여 천하를 얻는 일은 하지 않는 바가 있다는 것에 있어서, 만약 中人의 情이라면, 앞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알았다면, 바야흐로 그만두고, 바야흐로 운명에 맡겨버릴 것이다. 만약 앞에서 할 수 있었더라면, 그는 반드시 그만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부득이하여 운명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세상의 저 탐욕스럽고 무모하며 후안무치한 사람에 비하면 현명한 것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을 구하려는 마음조차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성인은 더욱 命을 묻지 않고, 그저 義가 어떠한지만 살펴볼 따름이다. 貧富貴賤은 오직 義가 있는 곳이니, 만나는 상황에 편안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안자가 陋巷에서도 편안해한 것과 같은데, 그가 어찌 일찍이 命이 어떠한지 따졌겠는가?”라고 하였다.
問用之則行 舍之則藏 竊意 漆雕曾閔亦能之 曰 舍之則藏易 用之則行難 若開用之未必能行也 聖人規模大 藏時不止藏他一身煞藏了 事譬如大船 有許多器具寶貝撑去 則許多物便都藏了 衆人便沒許大力量 然聖人行藏 自是脫然 無所係累 救世之心雖切 然得做便做 做不得便休 他人使有此 若未用時 則切切於求行 舍之則未必便藏 耿直之向 有書云 三代禮樂制度 盡在聖人 所以用之則 有可行 某謂 此固其可行之具 但本領更全在無所係累處 有許大本領 則制度點化出來 都成好物 故在聖人 則爲事業 衆人沒那本領 雖盡得他 禮樂制度 亦只如小屋收藏器具 窒塞都滿 運轉都不得 누군가 묻기를, “쓰이면 행하고 버려지면 숨는다고 하였는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칠조개와 증자와 민자건도 역시 이를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고 하였다. 말하길, “버려지면 숨는다는 것은 쉽고, 쓰이면 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칠조개가 쓰인다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인께서는 규모가 거대하므로, 숨을 적에도 그 한 몸만 숨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것이 다 숨겨질 것이다. 일을 큰 배에 비유하자면, 수많은 기구와 보배가 있어서 지탱해 나가는데, 수많은 물건도 곧 모두 함께 숨겨지는 것과 같다. 뭇사람들은 곧 거대한 역량이 없지만, 성인께서는 행하고 숨는 일에 있어서 저절로 초탈하니, 얽매이는 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비록 간절하다 할지라도,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곧바로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곧 그만두는 것이다. 타인이 만약 이러한 것이 있다면, 아직 쓰이지 않을 때라면, 곧 행하기를 구함에 간절할 것이고, 버려진다면 곧 반드시 숨어서 지조가 굳고 곧음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서경에 이르길, ‘삼대의 예악제도는 모조리 성인에게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쓰이면 곧 행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본래 행할 만한 것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다만 그 本領은 더욱 얽매이는 바가 없는 부분에 온전히 달려 있는 것이다. 거대한 본령을 갖고 있으면, 제도는 점차 造化되어 나오는데, 모두 좋은 사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에게 있어서는 사업을 하는 것이고, 뭇사람은 저 본령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비록 저 예악제도를 다 터득하였다고 할지라도, 또한 그저 마치 작은 집에 온갖 기구를 거두어 감추어서 집안에 가득 들어찬 것과 같아서, 그것을 운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章 專在兩箇則字上 如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之類 孔顔於用舍行藏之間 如霽則行 潦則止 이 장은 오로지 두 개의 ‘則’자 위에 달려있다. 예컨대 벼슬을 할 수 있으면 벼슬하고, 그칠 수 있으면 그친다는 부류와 같은 것이다. 공자와 안자는 쓰이고 버려지고 행하고 숨는 사이에서, 마치 날이 개면 길을 가고 큰비가 오면 그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常人用之則行 乃所願 舍之則藏 非所欲 舍之則藏 是自家命恁地不得已不奈何 聖人無不得已不奈何底意 何消更言命 到得無可奈何處 始言命 聖人說命只爲中人以下說 如道之將行將廢 命也 此爲子服景伯說 得之不得曰有命 是爲彌子瑕說 下一等人 不知有命 又一等人知有命 猶自去計較 中人以上 便安於命 到聖人便不消言命矣 보통사람에게 있어서, 쓰이면 행한다는 것은 마침내 원하는 바이나, 버려지면 숨는다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버려지면 숨는다는 것은 자기의 명이 이러하므로 부득이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인에게는 부득이하고 어쩔 수 없다는 뜻이 없으니, 어찌 더 나아가 命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부분에 이르면, 비로소 命을 말하는 것이다. 성인께서 命을 말한 것은 그저 중인 이하의 사람을 위하여 말한 것이다. 예컨대 ‘道가 장차 행해질 것인지 장차 폐지될 것인지는 命이다.’ 이 말은 자복경백을 위해서 말한 것이고, ‘얻으려고 하였으나, 얻지 못한 것을 일러 命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은 미자하를 위하여 말한 것이다. 한 등급 아래의 사람은 命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또 한 등급의 사람은 命이 있음을 알고서 오히려 스스로 가서 따진다. 중인 이상의 사람은 곧 命에 편안해하니, 성인에 이르러서는 바로 명을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厚齋馮氏曰 道本期於用 非獨善其身而已也 然時不我用 則有退藏而已 用之而欲藏 不仁也 舍之而欲行 不知也 是時欲扶世立功名者 知行而不知藏 欲潔身遺世者 知藏而不知行 此夫子所以旁觀一世 惟子淵與己同也 說者乃謂淵不願仕 是以其迹而不知其心也 爲邦之問 槪可見矣 후재풍씨가 말하길, “道란 본래 쓰이기를 기약한 것이지, 단지 제 몸을 선하게 할 따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가 나를 쓰지 않는다면, 물러나 숨음이 있을 뿐이다. 쓰임에도 숨고자 하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고, 버려짐에도 행하고자 한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이때에 세상을 부축하여 공명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행할 줄은 알지만 숨을 줄 모르는 것이고, 제 몸을 깨끗이 하면서 세상을 버려두는 것은 숨을 줄 알지만 행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께서 한세상을 방관했던 까닭이다. 오직 子淵(안회)만이 자신과 더불어 같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말한 것은 오히려 안연이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그 자취로써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그 대강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用之舍之存乎人 則行則藏應乎己 則無意無我 可見矣 用之行矣 至舍之則藏 舍之藏矣 至用之則行 則無必無固 可見矣 면재황씨가 말하길, “쓰이고 버려지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고, 그러면 행하고 숨는 것은 자신에게 대응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의도함이 없고 자아도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쓰이면 행하다가 버려짐에 이르면 숨고, 버려지면 숨다가 쓰임에 이르면 행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기필함도 없고 고집함도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用行舍藏 玩集註及語錄 一當就有字上看 常人未必有此也 二當就則字上看 用舍在人而聖人無所必也 三當合兩句互看 循物者忘義循祿 用之雖行 而舍之未必藏 絶物者潔身亂倫 舍之雖藏 而用之未必行 운봉호씨가 말하길, “쓰이고 행하고 버려지고 숨는 것에 대하여 집주와 어록을 음미함에 있어서, 첫째 마땅히 ‘有’자 위로 나아가 살펴보아야 한다. 보통 사람은 이러한 것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마땅히 則자 위로 나아가 살펴보아야 한다. 쓰이고 버려지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으니 성인께서는 기필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셋째 마땅히 두 구절을 합하여 서로 살펴보아야 한다. 외물을 따르는 자는 義를 잃고서 녹봉을 따르므로, 쓰이면 비록 행하기는 하겠지만 버려지면 반드시 숨지는 않을 것이다. 외물을 끊어버린 자는 제 몸을 깨끗이 함으로써 윤리를 어지럽히므로, 버려지면 비록 숨기는 하겠지만 쓰인다면 반드시 잘 행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 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으려 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려 하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사람과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 성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暴虎徒搏 馮河徒涉 懼謂敬其事 成謂成其謀 言此皆以抑其勇而敎之 然行師之要 實不外此 子路蓋不知也 暴虎는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이고, 馮河는 맨몸으로 건너는 것이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일을 공경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이룬다는 것은 그 도모한 바를 이룬다는 말이다. 이것들 모두 자로의 용맹함을 억누르고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러나 군대를 통솔하는 요체는 사실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음에도 자로가 대체로 이를 알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徒徒手而無所持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徒란 맨손으로서 붙잡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子行三軍則誰與 朱子曰 三軍要勇 行三軍者要謀 旣好謀 然須要成事 蓋人固有好謀而事不成者 却亦不濟事 又問謀在先成在後 成非勇亦不能決 曰 然 누군가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에 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삼군은 용감해야 하고, 삼군을 통솔하는 자도 계획을 잘 세워햐 하니, 이미 좋은 계책을 세웠더라도 반드시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 대체로 사람 중에는 본래 계책을 잘 세웠지만 일은 이루지 못한 자가 있으니, 이는 도리어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도모하는 것은 앞에 있고, 이루는 것은 뒤에 있으니, 성사시키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또한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子行三軍則誰與 宜作相與之與 非許與之與 好謀而成 人固有好謀者 然疑貳不決往往無成者 多矣 孔子行三軍 其所與共事者 必臨事而懼好謀而成者也 子行三軍則誰與에서 마땅히 서로 함께한다는 與로 삼아 풀이해야지, 허여한다는 與가 아니다. 계책 세우기를 좋아하여 그것을 이룸에 있어, 사람 중에는 계책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지만, 그러나 의심하고 두 마음을 가져 결단하지 못하여 종종 이룸이 없는 자가 많은 것이다. 공자가 삼군을 통솔함에 있어, 그가 더불어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계책 세우기를 좋아하여 그것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好謀而成 旣謀了須是果決去做敎成 若徒謀而不成 何益於事 所謂作舍道旁三年不成者也 臨事而懼 是臨那事時又須審一審 蓋閑時已自思量 都是了 都曉得了 到臨事時又更審一審 這懼字正如安而後能慮底慮字相似 此本爲行三軍而發 故就行師觀之 又見精密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여 이를 이룬다는 것은 이미 계획을 세웠으면, 반드시 과감하게 결단하여 가서 행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헛되이 계획만 세울 뿐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는 이른바 ‘길옆에 집을 짓되 3년이 지나도록 완공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일에 임하여 두려워한다는 것은 저 일에 임할 때 또다시 반드시 살피고 또 살핀다는 것이다. 대체로 한가할 때 이미 스스로 생각하고 헤아리기를 다 마쳐서 모두 환하게 알아차렸다가, 일에 임할 때에 이르면 다시 더욱 살피고 또 살핀다는 것이다. 이 懼자는 바로 ‘편안하게 된 이후에 능히 깊이 생각할 수 있다.’의 慮자와 서로 비슷한 것이다. 이것은 본래 삼군의 통솔을 위하여 발언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부리는 일에 나아가 살펴본다면, 더욱 정밀한 것을 볼 것이다.
南軒張氏曰 臨事而懼 戒懼於事始 則所以爲備者 周矣 好謀者或失於寡斷 好謀而成 則思慮深而其發也必中矣 敬戒周密如此 古之人所以能成天下之事而不失也 豈獨可行三軍而已哉 남헌장씨가 말하길, “일에 임하여 두려워한다는 것은 일의 시작에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대비하는 것이 주밀해지는 것이다.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간혹 결단함이 부족한 데에서 잘못하기도 한다.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고 이를 이루는 경우라면, 사려가 깊으면서도 그 도모함도 반드시 적중할 것이다. 공경하고 경계함이 주밀하기가 이와 같았으니, 옛날 사람들이 능히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으면서도 실패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어찌 단지 삼군을 통솔하는 것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臨事而敬懼 則有持重謹畏之心 好謀而圖成 則有周悉萬全之計 敬其事 則無忽心無惰氣 臨事必能戒懼 非怯懦而恐懼也 成其謀 則不妄動 不亟取於事 必有一定之謀 旣成而 不愆于素 自無僥倖速成之弊也 無非抑其血氣之勇而敎之以義理之勇焉 면재황씨가 말하길, “일에 임해서 공경하며 두려워한다면,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삼가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계획하기를 좋아하여 이루기를 도모한다면, 주도면밀한 만전의 계책이 나올 것이다. 그 일을 공경한다면 소홀히 하는 마음과 게으른 기운이 없어질 것이다. 일에 임하면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는 겁이 많고 나약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계획한 바를 이루려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일에서 너무 빨리 취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한번 정한 계획이 있어서 이미 이루어지고 잘못되지 않는다면, 평소에도 저절로 요행을 바라고 너무 빨리 이루려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니, 그 혈기의 勇을 억누르고 의리의 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