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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를 비유하거나 혹은 지나친 복수를 비유하는 말이다.
掘 : 굴 굴(扌/8)
墓 : 무덤 묘(土/11)
鞭 : 채찍 편(革/9)
屍 : 주검 시(尸/6)
(유의어)
도행역시(倒行逆施)
부관참시(副官斬屍)
출전 :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이 성어는 오(吳)나라에 목숨 바쳐 충성한 오자서(伍子胥)의 행위에서 연유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보필하여 패자로 만든 오자서(伍子胥)의 집안은 원래 6대에 걸쳐 초(楚)나라에 충성을 바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다.
당시의 초평왕에게는 건(建)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평왕은 오사를 태자 건의 태부(太傅)로, 비무기(費無忌)를 소부(少傅)로 임명했는데, 비무기는 태자 건에게 불성실했다. 얼마 후, 평왕은 태자비를 진(秦)나라에서 맞아 오기 위해 비무기를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공주가 미인인 것을 본 비무기는 말을 달려 돌아와 진나라의 공주를 태자에게 주지 말고 평왕이 취할 것을 건의했다.
평왕은 진나라 공주를 가로챘으며, 그녀를 더없이 사랑하여 아들 진(軫)을 낳았다. 태자에게는 따로 비를 맞이하게 해 주었다. 이 공로로 비무기는 평왕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비무기는 평왕의 사후가 걱정이었다. 태자가 왕이 되면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므로 겁이 난 나머지 태자 건을 중상하기 시작했다.
평왕은 차츰 태자 건을 멀리하더니 마침내는 변경인 성보(城父; 하남성 보풍현(寶豊縣)) 태수로 임명하여 국경을 지키게 했다. 비무기는 계속해서 왕에게 태자를 참소했다. “태자는 진나라 공주의 일로 분명히 원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태자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태자는 성보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므로 때가 되면 제후들과 교제를 맺고 수도로 쳐들어 와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평왕은 비무기의 참소에 넘어가 즉시로 태자의 태부인 오사를 불러들여 사실을 추궁했다. 오사는 비무기가 태자를 왕에게 참소한 것을 알았으므로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참소로써 사람을 해치려는 소인배의 말을 믿으시고 친자식을 멀리하려 하십니까?”
목숨을 걸고 태자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비무기는 필사적으로 나왔다. “왕께서 지금 당장 누르시지 못해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결국 포로가 되실 뿐입니다.” 평왕은 즉시 오사를 옥에 가두고, 성보의 사마(司馬, 군정관(軍政官))인 분양(奮揚)에게 태자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분양은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태자에게 사람을 미리 보내 도망치라고 알려 줬다. 태자 건은 송(宋)나라(하남성 상구(商邱) 일대)로 도망했다.
태자를 내쫓은 비무기는 다음 차례로 오사 일가를 지목했다.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현명합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초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비를 인질로 잡아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초나라의 화가 될 것입니다.” 왕은 옥중의 오사에게 두 아들을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물론 불러들이면 오사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조건이었다.
오사가 거절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불렀다. 큰아들 오상(伍尙)이 가려 하자 작은아들 오자서가 말렸다.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가 후환이 될까 두려워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우리 둘을 불러들이려는 것입니다. 가는 날이면 부자가 함께 죽고 말 뿐, 조금도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면 아버지의 원수마저 갚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 힘을 빌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만 못합니다. 부자가 함께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오상은 동생 오자서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함께 죽기 위해 자진해서 옥에 갇혔다. 오자서는 도망쳐 송나라에 있는 태자 건에게로 갔다. 오상이 수도로 호송되자 평왕은 오사와 오상 부자를 함께 처형해 버렸다. 오자서가 송나라에 도착한 직후에 송나라에서는 때마침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鄭)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에서는 건을 극진히 예우해 주었으나, 건은 정나라는 작은 나라라서 힘이 되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진(晉)나라로 떠났다. 태자 건이 정나라와 친한 사이로, 정나라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진경공(晉頃公)은 그를 이용해 정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건을 꼬드겼다.
진경공은 건이 안에서 내응하고 진나라가 밖에서 공격하여 정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곳에 태자 건을 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태자는 욕심을 품고 다시 정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그의 종자가 정나라 조정에 이 음모를 고발해 버렸다. 어떤 일로 태자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자신이 살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건을 주살하고 말았다.
오자서는 건의 아들 승(勝)을 데리고 허둥지둥 오(吳)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국경 지대에 이르러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쫓겼으므로 할 수 없이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했다. 추격자에게 쫓기던 오자서는 가까스로 강수(江水)에 이르러서 한 어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자서는 강을 건너자마자 차고 있던 일백 금의 값어치가 나가는 칼을 끌러 어부에게 사례했다.
어부는 칼을 받지 않았다. “초나라에 이런 방이 붙었소. 오자서를 잡는 사람에게는 속(粟) 5만 섬과 집각(執珏; 초나라 최고의 작위)의 벼슬을 준다고 말이오. 만일 내게 욕심이 있었다면 그런 일백 금의 칼이 문제겠소?”
오자서는 오나라에 들어섰으나 도성으로 가는 도중 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걸식을 하는 등 심한 고생을 겪었다. 오자서는 장군인 공자 광(光)을 통해 오왕 요(僚)를 알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고을이 함께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양쪽 여자들이 뽕 때문에 시비 붙은 것이 원인이 되어 두 고을이 서로 공격을 했고, 이것이 양국 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오나라는 공자 광을 시켜 초나라를 치게 했다. 광은 국경 지대 일부 고을을 함락시킨 다음 돌아왔다. 오자서는 오왕 요에게 이 기회를 틈타 광을 보내 초나라를 계속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광은 오자서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와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이런 공자 광의 반응을 보고 오자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광은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지금은 외부의 문제를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자서는 전저(專諸)라는 자객을 공자 광에게 천거하고, 자신은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5년 후 초평왕이 죽었다. 그리고 앞서 태자비가 될 뻔했다가 평왕의 비가 된 진나라 공주의 아들 진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그가 곧 소왕(昭王)이다. 오왕 요는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두 공자(요의 아우 개여(蓋餘)와 촉용(燭庸))를 시켜 초나라를 기습 공격하게 했지만, 두 공자는 오히려 퇴로를 차단당하고 말았다.
오나라의 군대가 초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여 국내가 텅 비다시피 되자 공자 광은 자객 전저를 시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춘추 오패의 한 사람인 오왕 합려이다. 합려는 즉시 오자서를 불러들여 행인(行人, 외교 고문)에 임명하고 함께 국사를 꾀했다. 이럴 즈음 초나라의 대신 백주리(伯州犁) 부자가 주살되고, 그의 손자인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망명해 왔다. 합려는 그를 대부에 임명했다.
한편, 앞서 초나라를 공격하러 갔다가 퇴로를 차단당하고 곤경에 처하게 된 두 공자는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에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초나라는 그들을 서(舒) 땅에 봉했다. 합려는 즉위 3년 후에 군사를 일으켜 오자서, 백비 등과 함께 초나라를 쳐서 서를 함락하고, 초나라에 투항했던 두 공자를 사로잡았다.
합려와 오자서는 이번 기회에 초나라의 수도 영초까지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 있으므로 좀 더 기다리자는 손무(孫武)의 의견에 따라 군사를 물리고 돌아왔다. 합려 6년(BC510), 이번에는 초나라의 군대가 오나라를 침공했다. 합려는 오자서에게 이를 맞아 싸우게 했다. 오자서는 초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초나라의 거소(居巢, 안휘성 소호시(巢湖市) 동북)를 점령했다.
합려 9년, 오자서에게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다. 합려가 오자서, 손무 등과 상의를 통해 대대적으로 초를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합려는 먼저 초나라의 속국이면서도 초나라와 원한 관계가 깊은 당(唐), 채(蔡)와 연합하고, 국내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로 쳐들어 갔다.
오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다. 소왕은 수도 영을 탈출하여 도망했다. 오자서는 소왕을 잡으려고 했지만 소왕이 탈출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300번이나 매질을 했다.
及吳兵入郢, 伍子胥求昭王, 旣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尸, 鞭之三百, 然後已.
산중으로 피난 갔던 초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오자서가 천리에 어긋난 일을 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오자서는 사자에게 말했다.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해라. 해는 지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日暮途遠)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 오자서는 합려가 죽은 후에, 그 뒤를 이은 부차와 틈이 벌어져 부차가 내린 칼로 자결한다.
굴묘편시(掘墓鞭屍)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정치가로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의 태부(太傅: 왕의 고문 격)요 충신이었던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다. 건의 소부(少傅)였던 비무기가 오사를 시기해 평왕에게 참소하자, 평왕은 오사와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을 죽이고 자서까지 죽이려 했으나 재빨리 몸을 피해 오나라로 망명했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를 도와 강대국을 이룬 뒤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초나라로 쳐들어갔지만 평왕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생전에 오자서의 보복을 예견한 평왕이 자신의 무덤을 깊은 연못 속에 만들고 묘를 조성한 일꾼 500명을 모두 죽여 버린 탓에 무덤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인의 도움으로 왕의 무덤을 찾은 오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철장(鐵杖) 300을 쳐 분을 풀었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그대의 그러한 복수 방법은 지나친 게 아닌가”라고 책하였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얘기다. 굴묘편시(掘墓鞭屍)는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하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도를 넘는 지나친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을 추시하던 부관참시(剖棺斬屍)도 의미가 비슷하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우리나라는 특히 연산군 때 성행했으며 김종직(金宗直), 송흠(宋欽),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성현(成俔) 등이 이 형을 받았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한 극형은 능지처참(陵遲處斬)이다. 팔다리와 어깨·가슴 등을 잘라 낸 뒤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陵遲)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 가도록 한 잔혹한 처형이다. 거열형(車裂刑)도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 죄인을 찢어서 죽이는 끔찍한 형벌이다.
굴묘편시(掘墓鞭屍)는 무덤을 파고 시체를 채찍질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때로는 복수심이 지나쳐 도를 넘는 행동을 경계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굴묘편시(掘墓鞭屍)는 복수심이 극에 달해 상대방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복수심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지나친 복수심이 결국 도를 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성어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복수나 보복을 추구할 때 그 한계와 경계를 인식해야 함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했을 때 복수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 있지만, 그 복수가 지나치면 결국 자신에게 더 큰 해를 끼치게 된다.
굴묘편시(掘墓鞭屍)는 복수심이 도를 넘지 않도록, 그리고 감정에 휩싸여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굴묘편시(掘墓鞭屍)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중국의 진시황은 자신의 정치적 적을 죽인 후에도 그 원한을 풀지 못하고, 그들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를 했다. 이러한 복수는 단순한 원한 해소를 넘어, 상대방의 영혼까지 저주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진시황 자신의 잔혹한 이미지와 악명을 남기게 되었고, 그의 권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졌다.
비슷한 사자성어로 '장지수지(長恨終之)'가 있다. 이는 한을 오래 품으면 끝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오랜 원한이 결국 복수로 이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굴묘편시'와 '장지수지'는 모두 복수심이 어떻게 사람을 망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사자성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의미를 어떻게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 우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했을 때 복수심에 휩싸여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에 휘둘려 도를 넘는 행동을 하기보다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가능한 한 화해와 용서의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도덕적인 기준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감정에 휩싸여 무분별한 복수에 나서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덕적 기준을 지키며 행동하시기 바란다.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며, 언제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를 넘어 지나친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스페인 영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이나 이탈리아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란 작품이 있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혈육을 찾아 나선 과정을 그려 당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같이 감동을 주는 스토리는 없어도 반대되는 말이 떠오르는데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이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펼치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오자서(伍子胥)의 변명이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초(楚)나라 명문 출신 오자서에서 유래한 널리 알려진 성어 중 무덤을 파고(掘墓) 시체에 매질을 했다(鞭屍)는 이 말도 그 중의 하나다.
오자서의 부친은 초평왕(楚平王)의 태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간신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을 받고 형과 함께 죽음을 당한다. 오자서는 복수를 위해 이웃 나라를 떠돌다 오(吳)나라에서 10년이 넘도록 절치부심 끝에 마침내 기회를 잡는다. 오나라의 공자 합려(闔閭)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뒤 중책을 맡고 병법의 대가 손무(孫武)와 함께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침공하게 됐다.
당시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평왕과 간신 비무기가 이미 사망한 이후였으나 원한에 사무친 오자서는 평왕을 이은 소왕(昭王)이 도주한 뒤에도 수도 영(郢)을 유린했다. 사기(史記) 오자서열전에는 이 부분을 간략히 기술했다. "오자서는 소왕을 찾는데 실패하자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300번이나 매질을 했다(伍子胥求昭王 既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尸 鞭之三百)."
여기에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등에는 살을 붙인다. 평왕은 보복을 예견하고 호수 속에 무덤을 만들고 50여 명의 석공을 시켜 가짜 석곽 아래 관을 따로 만들게 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석공을 무덤 속에서 살해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나온 한 노인이 원귀들의 한을 푼다며 오자서에게 가르쳐줘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상세한 묘사는 이렇다. "손에 아홉 마디로 된 구리 채찍을 들고 평왕의 시신을 300번이나 후려치니,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부러졌다(手持九節銅鞭 鞭之三百 肉爛骨折)."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복수의 수법이 잔인하다고 질책하자 갈 길이 멀어 순서를 거꾸로 하게 됐다고 해명하는 도행역시(倒行逆施)가 더 따르는 이야기다.
오자서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죽은 원수의 시체를 찾아 매질을 가했을까. 일견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시체까지 욕보인 점에서는 지나치다는 평이 따른다.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도 잘못을 고치면서 더 어그러지게 하는 일은 흔하다. 근래의 사건 하나만 보자. 이전 정권의 미운 놈 몰아내기 블랙리스트를 단죄하면서 그보다 더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서도 뻔뻔한 처사를 보면 시체 매질 그 이상이다.
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헤쳐서 시체를 매질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 또는 지나친 복수를 이르는 말이다.
굴묘편시(掘墓鞭屍)는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사전적으로 잘 알려진 의미는 통쾌한 복수와 설욕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도에 넘는 지나친 복수에 대한 비판의 의미 또는 주변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복수에만 치중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及呉兵入郢, 伍子胥求昭王. 既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屍, 鞭之三百, 然後已.
오나라의 병사들이 영(초나라 수도)에 들어왔을 때 오자서는 소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 채찍질을 한 다음 그만두었다.
申包胥亡於山中, 使人謂子胥曰: 子之報讎, 其以甚乎. 吾聞之,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
산속으로 도망간 신포서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말했다.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내가 듣기에 사람이 많아서 하늘을 이긴다 하더라도 결국 하늘이 정한 것이 능히 사람을 물리친다고 했소. 그대는 과거 평왕의 신하로서 몸소 북쪽을 향하고는 그를 섬겼거늘 지금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이 어찌 하늘의 도가 없는 흉악한 일이란 말인가.”
伍子胥曰: 為我謝申包胥曰, 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오자서가 대답했다. “신포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일러주시오. '나의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어서, 내 일부러 거꾸로 (하늘의 도를) 행하고 (하늘의 도를) 거슬러 시행했다’고 말이오.” (사기 오자서열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왕 초평왕은 태자 건과 결혼하여 며느리가 될 진나라의 공주 맹영이 절세미인이라 하여 신하 비무기의 권유를 받아 자신이 취했다. 태자 건은 불만없이 공주의 시녀와 결혼해 자식을 보았으나 초평왕과 비무기는 태자 건이 원망하려 한다 여겨 죽이려 들었다.
태자의 스승 오사(吳奢)는 자신은 일족과 함께 죽음을 택했으나, 아들 오자서는 태자일행을 모시고 도망가게 하였다. 후일 온갖 죽을 고생을 한 오자서는 오나라의 대신이 되었고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쳐서 수도 영(郢)에 이르러 함락시켰으며, 평왕과 진나라 공주의 아들인 초소왕은 간신히 도주한다. 그러나 오자서의 일가를 몰살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영성을 함락시킨 오자서는 원한을 결코 잊지않아 평왕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 뒤 구리 채찍으로 수백 대를 쳐 시체가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박살내고서야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굴묘편시(掘墓鞭尸)의 고사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껏 무덤을 찾았더니 도굴 방지용 가짜 무덤이라 오자서는 이를 갈며 분통해했는데, 소문을 듣고 어느 노인이 찾아와 진짜 평왕의 무덤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병사들을 시켜 무덤을 파내고 시체를 아주 박살낸 오자서가 비로소 노인에게 "노인장은 어찌하여 무덤 위치를 아는 거요?" 질문하자, 자신은 노역으로 끌려와 무덤을 만들던 장인인데 무덤을 다 만들고 나니 낌새가 안 좋아 겨우 달아나 목숨은 구했지만, 친구와 이웃, 동료들 대다수 무덤 노역에 동원된 이들은 무덤의 비밀을 지키고자 학살당했다는 것이었다.
늙은이 주제에 큰 보물은 필요없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을 기리는 작은 사당이라도 짓고 싶다면서 그 부탁할 겸 찾아와 무덤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자, 오자서는 한숨을 쉬며 "평왕 그놈이 여기에도 원한을 남겼구나!" 탄식하였고, 노인에게 후한 재물로 보답했다고 한다.
이때,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한때 왕을 모셨던 신하로서 시체 훼손은 차마 못할 짓이 아니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日暮途遠 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하였소이다(倒行逆施 도행역시)"라고 변명한다.
오자서의 답변을 듣고 실망한 신포서는 진애공(영성) 앞에서 일주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면서 애공과 신하들을 감동시켜서 원군을 청해 결국 오자서를 초나라 땅에서 몰아내어 버린다.
본래 오자서는 함께 망명하였던 태자 건의 아들 왕손 승을 초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려 했으나, 초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반격을 허용한 것이다. 결국 초가 오에 막대한 영토를 할양하고, 왕손 승을 백공(白公)으로 세워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초나라에는 시신을 포함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면 처형하는 법이 생겼고, 후일 오기가 최후의 승부수를 띄우는 데도 일조하였다.
후대에도 굴묘편시(掘墓鞭屍)가 있었는데 남조의 진나라를 세운 무제 진패선의 무덤인 만안릉 사건이다. 남조의 양나라가 후경의 난으로 거의 몰락하자 한족 출신 장군 진패선과 선비족 출신 장군 왕승변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후경을 박살내고 권력을 잡는다. 이 둘은 겉으로는 서로 겹사돈을 맺고 의기양양했으나, 속으로는 서로를 해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황제였던 원제 소역이 서위의 군대에게 잡혀 죽자 후계를 두고 대립하게 된다. 진패선은 원제의 아홉 번째 아들 소방지를 밀었다. 한편, 왕승변은 예전에 동위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사로잡혔던 무제 소연의 조카 소연명, 즉 소방지의 육촌 아저씨를 밀었는데 결국 세력이 더 강한 진패선은 소방지를 즉위시키니 그가 경제가 되었다.
그러자 왕승변은 북제의 군사를 끌어들이려다가 진패선에게 살해당하고 북제의 군대는 양나라의 백성들의 열렬한 지원에 힘입어 패퇴하고 말았다. 정해진 형식에 따라 소방지는 진패선에게 선양하니 진패선은 진나라를 세웠다.
일단 진패선은 559년에 재위 3년 만에 병사하고 만안릉에 안장된다. 그러다가 정확히 30년 후인 589년에 일이 터진다. 원래 죽은 왕승변의 가솔은 북제에 투항했는데 북제는 서위의 제위를 얻은 북주에게 멸망했다.
북주는 수문제 양견에게 멸망하고 수나라가 589년에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할 때 왕승변의 아들 왕반은 장강을 건너와 진패선의 무덤을 파헤쳐 재물을 취하고 관을 부수고 시신을 수백 대 매질한 다음 그 시신을 불태우고 그 재를 물에 섞어 마셨다. 섬뜩한 것은 이전에 후경도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현재 옛 진나라의 수도였던 현재 남경 북쪽에 가보면 만안릉 유지가 남아있는데 바로 그때 왕반이 파헤쳐 놓은 빈 무덤 터다. 이런 식의 시체 훼손이 공식 형벌로 된 경우로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있다.
조선시대 폭군인 연산군 때 횡행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으로 몰아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 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대표적이다. 결과론적이지만 복수는 또 다른 화를 불렀다. 연산군은 서른 나이에 역병으로 죽고 김종직을 모함한 간신 유자광 역시 말로가 비참했다.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됐다가 눈이 멀어 죽었다.
보복(報復)은 받은 만큼 피해를 되돌려 주고, 복수(復讐)는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불구대천(不俱戴天), 즉 하늘을 같이 맞대고 있을 수 없는 만큼 원수는 끝까지 쫓아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누구든 인간적 굴욕이나 부당함에 대해서는 되갚음을 다짐한다. 하지만 원(怨)은 원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게 세상 이치다. 남 피눈물 쏟지 않도록 처신하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다.
굴묘편시(掘墓鞭屍)
한 남자의 응징
중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보복은 오자서(伍子胥)의 응징이다. 춘추시대 초나라 귀족이었던 오자서의 집안은 하루 아침에 역모(逆謀) 죄로 기소되어 멸문의 화를 당한다.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던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큰아들 오상과 함께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오자서는 죽고 싶었다. 혼자서 비겁하게 살아가며 마음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가치 없는 죽음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응징할 것을 다짐하며 오(吳)나라로 망명한다. 오자서는 왕위 계승순위에서 밀려 있던 공자(公子) 광(光)을 왕으로 만들며 킹메이커로 부상하여 권력의 중심에 선다.
오자서는 권력을 남용한 초나라 평왕을 응징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결국 자신이 만든 오나라 왕 합려의 동의를 받아내어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와 함께 자신의 조국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영을 함락시킨다.
자신의 가족을 풍비박산 낸 평왕이 이미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에서 평왕의 시신을 파내어 채찍으로 300대를 내리쳐 부모의 원수를 갚아준다. '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내고 시신을 꺼내서 채찍으로 때린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조선의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 윤씨를 참소하여 죽게 한 신하들에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으니, 묘를 파내고 죽은 시신을 훼손하여 응징하는 전통은 동양의 역사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지독한 응징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의 옛 친구였던 신포서의 충고를 '사기'에 적고 있다. "그대는 이미 죽은 사람을 묘에서 파내 욕보이니 한때 신하였던 자로 너무 극악무도하지 않은가?"
이런 충고를 들은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해는 저물고 응징할 시간은 없다(日暮途遠 일모도원).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무도한 대가를 치러야겠다(倒行逆施 도행역시)."
자신의 부형을 죽이고,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에 대한 응징, 아마도 오자서는 그 일념 하나로 모진 세월을 견뎌왔기에 응징이 잔인하다는 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의 응징은 비장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두려울 것도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한 맺힌 남자의 멋진 응징을 응원한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 속에 응징의 대상을 하나씩 갖고 살기 때문일까.
오자서의 응징 이야기를 열전(列傳)에 기록한 사마천도 49살 나이에 아무 죄 없이 궁형을 당하였다. 억울하고, 답답하여 잠을 자다가도 몇 번이나 깨어 일어나서 입은 옷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멍하니 생각에 젖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장이 꼬이는 고통을 받았으니 그 억울함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적에 의한 모함으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 선생도 억울함이 있었을 것이고, 8년간 유배지에서 고통 받은 김정희도 통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가족을 무참히 파괴하고 인생을 나락으로 몬 상대를 원망하며 살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복수와 응징을 '열전'에 기록하며 응원한다. '오자서가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면 한낱 개미의 목숨과 무슨 구별이 있었겠는가? 끝까지 살아서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겼으니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생명의 끈을 놓아 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나, 끝까지 살아서 재기하는 것은 대장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마천의 평가가 귀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온다.
굴묘편시(掘墓鞭屍)
군자의 복수, 지연된 정의
君子報仇 十年不晩(군자보구 십년불만)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나오는 고사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재상이 된 범저(范雎)가 자신을 모함했던 위(魏)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았다는 데서 비롯됐다. 중국 역사의 또 다른 복수의 화신은 오자서(伍子胥)다. 부친과 형을 죽인 초평왕(楚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 삼백 대의 채찍질(掘墓鞭屍 굴묘편시)을 했다.
이처럼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이 중국인의 정서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대외정책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사적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무협의 기본 베이스는 '복수와 정의'다. 복수를 위해 무림(武林)의 고수가 되기까지 절치부심하는 과정이 무협 소설과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다. 진용(金庸)의 '사조영웅전'이나 '천룡팔부'는 강호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복수라는 기본 서사를 충실하게 따른다. 가족의 원한 따위는 잊어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밀면서 복수는 꿈도 꾸지 않고 원수도 사랑하는 우리의 정서와 판이하게 다르다.
조희대 대법원이 공직선거법 제270조의 재판 '강행규정'(1심 6개월, 2·3심 각 3개월)을 지키라며 법원에 권고문을 보낸 것이 2024년 9월 30일이었다. 하지만 어길 경우 처벌 규정이 없어 사문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 대법원장의 조치는 만시지탄의 조치였다.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기소된 것이 2022년 9월 8일이었다. 재판 기한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1심은 2023년 3월, 2심을 거쳐 3심까지 2023년 9월, 늦어도 그해 연말에는 판결이 내려졌어야 했다. 그러나 1심은 6개월이 아니라 20개월이 더 지난 2024년 11월 끝났고, 2심도 한 달여 더 늦어진 3월 26일에야 선고가 났다.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상고심은 오늘 당장 선고하더라도 선고 기한이 19개월이나 지난 재판이다.
만일 상고심에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된다면 이 후보는 대선 출마 자격을 상실하고 민주당은 선거보전금 434억원을 반환해야 한다. 이런 중차대한 정치적 운명이 걸린 상고심에 온 국민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 1차적 책임은 사법부에 있다. 지난 대선 때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판이 다음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사법 정의가 사라진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무림에선 복수에 시효가 없다지만 선거사범에 대한 재판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민주주의와 법치가 정치인들에 의해 조롱·무시당하고 형해화(形骸化)된다. 그것이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이다. 사법 정의의 실현은 사적 복수도, 군자의 복수도 아니다.
무엇보다 선거 과정의 허위사실공표 혐의에 대한 판례를 지금 시점에 명확히 하지 않을 경우, 불과 보름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허위사실공표를 통한 국민 기만 행위가 재연돼도 처벌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법치(法治)는 사소한 규정을 제대로 지키는 데서부터 확립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격언을 다시 기억하자. 대법원이 29일 이 후보의 선거법 상고심 선고 일정을 5월 1일로 확정했다. 대법원의 신속한 선고는 헌법 제84조 논란 등 대선 후 더 큰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고 법의 존엄과 법치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굴묘편시(掘墓鞭屍)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채찍질하다라는 뜻으로, 극단적이고 통렬한 복수를 의미한다. 주로 큰 원한이나 복수심을 품고 죽은 자에게도 복수를 감행하는 강한 원망과 미움을 표현한 말이다.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인물이다. 말도 못할 고초를 딛고 집안을 궤멸시킨 원수에게 복수해 전설이 된 호걸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큰 치욕을 갚아 이름을 후세에 남겼으니 참으로 비장하도다”며 찬탄했다.
오자서는 본시 초(楚)나라 충신 집안 후손이었다. 부친 오사(伍奢)는 태자 건(建)의 스승이었다. 그런데 암군 평왕(平王)이 사달을 일으켰다. 간신 비무기(費無忌)의 말에 혹해 며느리를 제 첩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정적으로 돌린 아들 건과 대쪽 같은 오사 부자까지 해치려 들었다.
평왕은 오사를 인질로 붙잡고서 그의 두 아들 오상(伍尙)과 오자서에게 입궁을 명했다. 오상은 “나는 아버님과 죽어 집안의 명예를 지키겠다. 너는 꼭 아비와 형의 원수를 갚아라”고 당부했다. 피눈물로 형님과 작별한 오자서는 태자 건과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과정은 험난했다. 태자 건은 정(鄭)나라에서 참살됐고 오자서는 추격병을 피해 유랑걸식 신세가 됐다. 젖먹이 왕손 승(勝)을 품에 안고 주야장천 내달린 끝에 오나라 국경에 도착했으나 거대한 강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하룻밤 만에 머리가 세어버린 오자서는 한 늙은 어부의 기적 같은 도움으로 도강했다.
오자서는 비상한 계책으로 오나라 정변 일등공신이 됐다. 새 오왕이 된 합려(闔閭)는 기원전 512년 초나라를 쳤다. 복수귀로 각성한 오자서는 손무(孫武)와 함께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공격해 초나라 수도 영(郢)에 이르렀다. 오자서는 이미 자연사한 평왕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낸 뒤 수백 번의 채찍질을 가해 가루로 만듦으로써 마침내 기나긴 복수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여기서 굴묘편시(掘墓鞭屍·통쾌한 복수)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불구대천 원수에 대한 복수의 집념은 확인사살까지 할 정도로 조금의 인정도, 시간 낭비도 허용치 않았다. 초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胥)는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하늘의 도를 어기는 행동 아닌가!”고 따졌다.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일모도원 日暮途遠)”고 일축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과거 ‘보수 궤멸’을 주장하며 많은 우파 인사들을 영어(囹圄)의 몸 또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다. 민주당은 지금도 ‘보수 궤멸’을 운운 중이다. 민주당은 현재 각종 사법리스크 앞에 폐당(廢黨) 가능성까지 언급된다. 이럴 때일수록 여당 지도부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일념으로 임해야 한다. ‘보수 학살극’에 치를 떠는 많은 우파 시민이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掘(팔 굴, 뚫을 궐, 서투를 졸)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屈(굴)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掘(굴, 궐, 졸)은 ①파다, 파내다 ②움푹 패다 ③다하다 ④우뚝 솟다 ⑤(끝이)모지라지다, 그리고 ⓐ뚫다(궐) ⓑ구멍(궐) ⓒ암굴(巖窟)(궐) ⓓ움직이지 않는 모양(궐) 그리고 ㉠서투르다(=拙)(졸)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땅을 파거나 바위 등을 뚫음을 굴착(掘鑿), 무덤을 파냄을 굴총(掘塚), 미신적 관념에서 남이 묘를 쓴 것이 해가 된다고 하여 그 해골을 파내게 하는 일을 굴매(掘埋), 땅속에 묻힌 것을 파내어 가짐을 굴취(掘取), 나무 뿌리를 캐어 내는 일을 굴근(掘根), 무덤을 파서 옮김을 굴이(掘移), 굴 모양을 이루면서 땅을 파 들어감을 굴진(掘進), 구멍이나 구덩이를 팜을 굴혈(掘穴), 땅 속에 묻힌 물건을 파냄을 발굴(發掘), 땅을 파서 땅속에 있는 광석 따위를 캐냄을 채굴(採掘), 광상의 채굴 가치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적으로 파 보는 일을 시굴(試掘), 무덤 따위를 허가 없이 몰래 파내는 일을 도굴(盜掘), 남의 무덤을 허가 없이 함부로 파냄을 사굴(私掘), 구멍이나 굴을 파 들어감을 착굴(鑿掘), 남의 무덤을 강제로 파게 함을 늑굴(勒掘), 광물이나 무덤 등을 독촉하여 파냄을 독굴(督掘), 파묻혀 있는 광물 등을 파냄을 개굴(開掘),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라는 뜻으로 준비없이 일을 당하여 허둥지둥하고 애쓴다는 말을 임갈굴정(臨渴掘井), 논을 갈 때가 되어서야 낼 물이 없어서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미리 마련해 두지 않고 있다가 일이 임박해서야 허둥지둥 서두름을 이르는 말을 임경굴정(臨耕掘井) 등에 쓰인다.
▶️ 墓(무덤 묘)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莫(막)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莫(막)은 暮(모)의 본디 글자이며 풀 저쪽편으로 해가지다, 해질 녘, 쓸쓸하다, 물건이 없다의 뜻이 있다. 土(토)는 토지(土地), 곳, 墓(묘)는 죽은 사람을 묻는 쓸쓸한 곳이다. ❷회의문자로 墓자는 ‘무덤’이나 ‘묘지’, ‘장사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墓자는 土(흙 토)자와 莫(없을 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없다’라는 뜻을 가진 莫자에 土(흙 토)자를 더한 墓자는 '땅에 묻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墓자는 죽은 사람이 묻혀있는 ‘무덤’이나 ‘묘지’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墓(묘)는 뫼의 뜻으로 ①무덤 ②묘지(墓地) ③장사(葬事)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덤 영(塋), 무덤 총(塚), 무덤 분(墳)이다. 용례로는 묘소로서 경계를 지은 구역을 묘역(墓域), 죽은 사람의 신분과 성명과 행적과 자손과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을 묘비(墓碑), 무덤이 있는 땅 또는 그 구역을 묘지(墓地), 무덤이 있는 곳을 묘소(墓所),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을 묘표(墓表), 무덤의 대표 연고자를 묘주(墓主), 뫼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하고 작은 돌비석을 묘갈(墓碣),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묘제(墓祭), 뫼를 쓸 때 구덩이 안에 널이 들어갈 만큼 알맞게 파서 다듬은 속 구덩이를 묘혈(墓穴), 무덤으로 가는 길을 묘수(墓隧), 신분이나 품계에 따라 정한 무덤의 구역을 묘계(墓界), 무덤 근처에 가꾼 나무를 묘목(墓木), 무덤 앞으로 들어 가는 어귀를 묘문(墓門), 무덤을 만드는 사람을 묘공(墓工), 묘지나 묘표에 쓴 글을 묘문(墓文),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묘석(墓石), 무덤 속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방을 묘실(墓室), 소출을 묘제의 씀씀이로 쓰는 논밭을 묘위(墓位), 남의 뫼를 지키고 거기에 딸린 일을 보살피는 사람을 묘직(墓直), 무덤을 분묘(墳墓),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 무덤을 다른 데로 옮김을 천묘(遷墓), 부모의 거상 중에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 동안 사는 일을 시묘(侍墓), 오래 된 무덤을 고묘(古墓), 예전에 전사한 병사의 시체를 한데 몰아서 묻던 무덤을 도묘(都墓), 널리 알려진 무덤으로 묏터가 좋아서 자손이 잘되어 나가는 무덤을 명묘(名墓), 조상의 산소를 살펴봄을 배묘(拜墓), 지관을 데려다가 묘지를 가려잡음을 상묘(相墓),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일컫는 말을 구묘지향(丘墓之鄕), 먼 윗대 조상의 무덤을 일컫는 말을 고현분묘(高玄墳墓),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등에 쓰인다.
▶️ 鞭(채찍 편)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가죽 혁(革; 가죽)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便(편)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鞭(편)은 ①채찍, 회초리 ②채찍질하다, 매질하다 ③형벌(刑罰)의 이름 ④대의 뿌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볼기 칠 태(笞), 꾀 책/채찍 책(策)이다. 용례로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 또는 어떤 사람을 잘 할 수 있도록 따끔하게 나무라는 것을 편달(鞭撻), 채찍의 끝을 편말(鞭末),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채찍으로 치는 일을 편추(鞭芻), 매로 치는 형벌을 편형(鞭刑), 채찍 따위의 끝에 달리어 늘어진 끈을 편수(鞭穗),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혁편(革鞭), 마구 채찍질을 함을 방편(放鞭), 구슬을 달아서 꾸며 만든 채찍을 주편(珠鞭), 채찍질하여 걸음을 더 재촉함을 가편(加鞭), 극기하기 위하여 수도자가 제 몸을 때리는 채찍을 고편(苦鞭), 수업이나 강의할 때 교사가 필요한 교수 사항을 가리키기 위한 가느다란 막대기를 교편(敎鞭), 짤막한 매를 단편(短鞭), 말을 모는 데 쓰는 채찍을 마편(馬鞭), 채찍이 길어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돕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치 못함을 이르는 말을 편장막급(鞭長莫及),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형편이나 힘이 한창 좋을 때에 더욱 힘을 더한다는 말을 주마가편(走馬加鞭),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가로막는다는 뜻으로 물을 건너는 군사가 극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투편단류(投鞭斷流), 말이 제 고삐를 씹는다는 뜻으로 자기 친척을 헐뜯으면 결국 자기에게 해가 됨을 이르는 말을 교편지마(嚙鞭之馬),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음탕한 입과 지독한 채찍이라는 뜻으로 까닭 없이 남을 헐뜯고 못 살게 구는 짓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음훼독편(淫喙毒鞭), 초헌에 채찍질이라는 뜻으로 격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초헌마편(軺軒馬鞭) 등에 쓰인다.
▶️ 屍(시)는 회의문자로 尸(시)는 동자(同字)이다. 尸(주검 시)와 死(죽을 사)의 합자(合字)이다. 屍(시)는 주검, 시체를 뜻한다. 용례로는 죽은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을 시신(屍身), 사람이나 생물의 죽은 몸뚱이를 시체(屍體), 사람의 죽은 몸뚱이를 시구(屍軀), 시체를 간음함을 시간(屍姦), 시체가 있는 방을 시실(屍室), 살해를 당한 사람의 친척을 시친(屍親), 사람이 죽은 뒤 6~12시간이 지나서 피부 조직에 생기는 자줏빛 얼룩점을 시반(屍斑), 입관하기 전에 시체를 얹어 놓는 평상을 시상(屍床), 땔 나무와 마실 물을 시수(屍水), 시체가 박테리아의 작용으로 분해될 때 생기는 유독물을 시독(屍毒), 시체를 검안한 증명서를 시장(屍帳), 시체에서 나는 썩는 냄새를 시취(屍臭), 자기 자신을 죽여서까지 임금에게 간언함을 시간(屍諫), 시체를 넣는 관을 시구(屍柩), 얼어 죽은 송장을 동시(凍屍), 추워서 얼어 죽은 송장을 강시(僵屍), 변사자의 죽은 원인을 알기 위해 시체를 검사함을 검시(檢屍), 지난날 죽은 사람의 목을 베던 일 또는 그 형벌을 육시(戮屍), 집터를 가릴 때 흉살이 든다고 하여 꺼리는 자리의 하나를 강시(扛屍), 시체를 내다 버림 또는 그 내다 버린 시체를 기시(棄屍), 태 안에서 죽은 태아의 시체를 태시(胎屍), 피가 아직 식지 않은 갓 죽은 시체를 혈시(血屍), 예수의 시체를 일컫는 말을 성시(聖屍), 송장의 머리와 팔다리를 바로잡음을 수시(收屍), 유기된 시체를 유시(遺屍), 시체를 해부함을 해시(解屍), 송장을 무서워함을 외시(畏屍), 겹겹이 쌓인 시체를 적시(積屍),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말함을 일컫는 말을 마혁과시(馬革裹屍), 가죽에 싼 시체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를 이르는 말을 과혁지시(裹革之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을 추시하던 일을 일컫는 말을 부관참시(剖棺斬屍),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죽은 사람은 장사지내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적시재상(積屍在床),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전쟁터에서 먹고 마실 식량과 물이 떨어져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고 자기의 오줌을 받아 마심을 이르는 말을 식시음뇨(食屍飮尿)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