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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를 비유하거나 혹은 지나친 복수를 비유하는 말이다.
掘 : 굴 굴(扌/8)
墓 : 무덤 묘(土/11)
鞭 : 채찍 편(革/9)
屍 : 주검 시(尸/6)
(유의어)
도행역시(倒行逆施)
부관참시(副官斬屍)
출전 :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이 성어는 오(吳)나라에 목숨 바쳐 충성한 오자서(伍子胥)의 행위에서 연유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보필하여 패자로 만든 오자서(伍子胥)의 집안은 원래 6대에 걸쳐 초(楚)나라에 충성을 바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신하였다.
당시의 초평왕에게는 건(建)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평왕은 오사를 태자 건의 태부(太傅)로, 비무기(費無忌)를 소부(少傅)로 임명했는데, 비무기는 태자 건에게 불성실했다.
얼마 후, 평왕은 태자비를 진(秦)나라에서 맞아 오기 위해 비무기를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공주가 미인인 것을 본 비무기는 말을 달려 돌아와 진나라의 공주를 태자에게 주지 말고 평왕이 취할 것을 건의했다.
평왕은 진나라 공주를 가로챘으며, 그녀를 더없이 사랑하여 아들 진(軫)을 낳았다. 태자에게는 따로 비를 맞이하게 해 주었다. 이 공로로 비무기는 평왕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비무기는 평왕의 사후가 걱정이었다. 태자가 왕이 되면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므로 겁이 난 나머지 태자 건을 중상하기 시작했다.
평왕은 차츰 태자 건을 멀리하더니 마침내는 변경인 성보(城父; 하남성 보풍현(寶豊縣)) 태수로 임명하여 국경을 지키게 했다.
비무기는 계속해서 왕에게 태자를 참소했다. “태자는 진나라 공주의 일로 분명히 원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태자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태자는 성보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므로 때가 되면 제후들과 교제를 맺고 수도로 쳐들어 와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평왕은 비무기의 참소에 넘어가 즉시로 태자의 태부인 오사를 불러들여 사실을 추궁했다.
오사는 비무기가 태자를 왕에게 참소한 것을 알았으므로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참소로써 사람을 해치려는 소인배의 말을 믿으시고 친자식을 멀리하려 하십니까?”
목숨을 걸고 태자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비무기는 필사적으로 나왔다. “왕께서 지금 당장 누르시지 못해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결국 포로가 되실 뿐입니다.”
평왕은 즉시 오사를 옥에 가두고, 성보의 사마(司馬, 군정관(軍政官))인 분양(奮揚)에게 태자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분양은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태자에게 사람을 미리 보내 도망치라고 알려 줬다. 태자 건은 송(宋)나라(하남성 상구(商邱) 일대)로 도망했다.
태자를 내쫓은 비무기는 다음 차례로 오사 일가를 지목했다.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현명합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초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비를 인질로 잡아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초나라의 화가 될 것입니다.”
왕은 옥중의 오사에게 두 아들을 불러들일 것을 명령했다. 물론 불러들이면 오사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조건이었다. 오사가 거절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불렀다.
큰아들 오상(伍尙)이 가려 하자 작은아들 오자서가 말렸다. “초나라에서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가 후환이 될까 두려워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우리 둘을 불러들이려는 것입니다. 가는 날이면 부자가 함께 죽고 말 뿐, 조금도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면 아버지의 원수마저 갚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 힘을 빌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만 못합니다. 부자가 함께 죽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오상은 동생 오자서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함께 죽기 위해 자진해서 옥에 갇혔다. 오자서는 도망쳐 송나라에 있는 태자 건에게로 갔다. 오상이 수도로 호송되자 평왕은 오사와 오상 부자를 함께 처형해 버렸다.
오자서가 송나라에 도착한 직후에 송나라에서는 때마침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鄭)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에서는 건을 극진히 예우해 주었으나, 건은 정나라는 작은 나라라서 힘이 되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진(晉)나라로 떠났다.
태자 건이 정나라와 친한 사이로, 정나라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진경공(晉頃公)은 그를 이용해 정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건을 꼬드겼다.
진경공은 건이 안에서 내응하고 진나라가 밖에서 공격하여 정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곳에 태자 건을 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태자는 욕심을 품고 다시 정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그의 종자가 정나라 조정에 이 음모를 고발해 버렸다. 어떤 일로 태자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자신이 살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정나라에서는 태자 건을 주살하고 말았다.
오자서는 건의 아들 승(勝)을 데리고 허둥지둥 오(吳)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국경 지대에 이르러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쫓겼으므로 할 수 없이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했다.
추격자에게 쫓기던 오자서는 가까스로 강수(江水)에 이르러서 한 어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자서는 강을 건너자마자 차고 있던 일백 금의 값어치가 나가는 칼을 끌러 어부에게 사례했다.
어부는 칼을 받지 않았다. “초나라에 이런 방이 붙었소. 오자서를 잡는 사람에게는 속(粟) 5만 섬과 집각(執珏; 초나라 최고의 작위)의 벼슬을 준다고 말이오. 만일 내게 욕심이 있었다면 그런 일백 금의 칼이 문제겠소?”
오자서는 오나라에 들어섰으나 도성으로 가는 도중 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걸식을 하는 등 심한 고생을 겪었다. 오자서는 장군인 공자 광(光)을 통해 오왕 요(僚)를 알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양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고을이 함께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양쪽 여자들이 뽕 때문에 시비 붙은 것이 원인이 되어 두 고을이 서로 공격을 했고, 이것이 양국 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오나라는 공자 광을 시켜 초나라를 치게 했다. 광은 국경 지대 일부 고을을 함락시킨 다음 돌아왔다. 오자서는 오왕 요에게 이 기회를 틈타 광을 보내 초나라를 계속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광은 오자서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와의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전쟁을 반대했다. 이런 공자 광의 반응을 보고 오자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광은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지금은 외부의 문제를 말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자서는 전저(專諸)라는 자객을 공자 광에게 천거하고, 자신은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5년 후 초평왕이 죽었다. 그리고 앞서 태자비가 될 뻔했다가 평왕의 비가 된 진나라 공주의 아들 진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그가 곧 소왕(昭王)이다.
오왕 요는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두 공자(요의 아우 개여(蓋餘)와 촉용(燭庸))를 시켜 초나라를 기습 공격하게 했지만, 두 공자는 오히려 퇴로를 차단당하고 말았다.
오나라의 군대가 초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하여 국내가 텅 비다시피 되자 공자 광은 자객 전저를 시켜 오왕 요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춘추 오패의 한 사람인 오왕 합려이다.
합려는 즉시 오자서를 불러들여 행인(行人, 외교 고문)에 임명하고 함께 국사를 꾀했다. 이럴 즈음 초나라의 대신 백주리(伯州犁) 부자가 주살되고, 그의 손자인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망명해 왔다. 합려는 그를 대부에 임명했다.
한편, 앞서 초나라를 공격하러 갔다가 퇴로를 차단당하고 곤경에 처하게 된 두 공자는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에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초나라는 그들을 서(舒) 땅에 봉했다.
합려는 즉위 3년 후에 군사를 일으켜 오자서, 백비 등과 함께 초나라를 쳐서 서를 함락하고, 초나라에 투항했던 두 공자를 사로잡았다.
합려와 오자서는 이번 기회에 초나라의 수도 영초까지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 있으므로 좀 더 기다리자는 손무(孫武)의 의견에 따라 군사를 물리고 돌아왔다.
합려 6년(BC510), 이번에는 초나라의 군대가 오나라를 침공했다. 합려는 오자서에게 이를 맞아 싸우게 했다. 오자서는 초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초나라의 거소(居巢, 안휘성 소호시(巢湖市) 동북)를 점령했다.
합려 9년, 오자서에게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다. 합려가 오자서, 손무 등과 상의를 통해 대대적으로 초를 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합려는 먼저 초나라의 속국이면서도 초나라와 원한 관계가 깊은 당(唐), 채(蔡)와 연합하고, 국내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초나라로 쳐들어 갔다.
오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다. 소왕은 수도 영을 탈출하여 도망했다. 오자서는 소왕을 잡으려고 했지만 소왕이 탈출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300번이나 매질을 했다.
及吳兵入郢, 伍子胥求昭王, 旣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尸, 鞭之三百, 然後已.
산중으로 피난 갔던 초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오자서가 천리에 어긋난 일을 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오자서는 사자에게 말했다. “부디 신포서에게 잘 전해라. 해는 지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日暮途遠)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고.”
오자서는 합려가 죽은 후에, 그 뒤를 이은 부차와 틈이 벌어져 부차가 내린 칼로 자결한다.
■ 굴묘편시(掘墓鞭屍)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오자서 전기(伍子胥 傳記)에 나오는 고사이다.
묘(墓)는 저물 모(莫)에 흙 토(土)를 받친 글자로서, 인간이 숨을 거두면 찾아 들어가는 땅을 뜻한다. 따라서 무덤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자서(伍子胥)의 고사에서 나왔는데, 그는 초(禁)나라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요 충신이었던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다.
건의 소부(少傅)였던 비무기(費無忌)가 오사를 시기하여 평왕에게 참소하자, 평왕은 오사와 큰 아들 오상(伍尙)을 죽이고 자서까지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재빨리 몸을 피해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자서는 드디어 뜻을 이루어 초나라로 쳐 들어가 그때는 이미 죽은 평왕의 무덤을 찾았는데, 평왕은 생전에 이미 그의 보복을 예견하고 자신의 무덤을 깊은 연못속에 만들고 묘의 조성 작업에 종사한 일꾼 500명을 모두 죽여 버린 까닭에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작업에 종사했다가 유일하게 살아 남은 한 노인이 알려주어,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철장(鐵杖) 300을 치는 등 분을 풀었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이 소문을 듣고,“그대의 그러한 복수방법은 지나친 게 아닌가.”라고 책하였다 한다.
이때부터 굴묘편시는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한다는 뜻으로, 지나친 복수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굴묘편시(掘墓鞭屍)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를 넘어 지나친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스페인 영화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이나 이탈리아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란 작품이 있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혈육을 찾아 나선 과정을 그려 당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같이 감동을 주는 스토리는 없어도 반대되는 말이 떠오르는데 일모도원(日暮途遠),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이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펼치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오자서(伍子胥)의 변명이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초(楚)나라 명문 출신 오자서에서 유래한 널리 알려진 성어 중 무덤을 파고(掘墓) 시체에 매질을 했다(鞭屍)는 이 말도 그 중의 하나다.
오자서의 부친은 초평왕(楚平王)의 태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간신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을 받고 형과 함께 죽음을 당한다. 오자서는 복수를 위해 이웃 나라를 떠돌다 오(吳)나라에서 10년이 넘도록 절치부심 끝에 마침내 기회를 잡는다.
오나라의 공자 합려(闔閭)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뒤 중책을 맡고 병법의 대가 손무(孫武)와 함께 대대적으로 초나라를 침공하게 됐다.
당시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평왕과 간신 비무기가 이미 사망한 이후였으나 원한에 사무친 오자서는 평왕을 이은 소왕(昭王)이 도주한 뒤에도 수도 영(郢)을 유린했다.
'사기(史記)' 오자서열전에는 이 부분을 간략히 기술했다. "오자서는 소왕을 찾는데 실패하자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300번이나 매질을 했다(伍子胥求昭王 既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尸 鞭之三百)."
여기에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등에는 살을 붙인다. 평왕은 보복을 예견하고 호수 속에 무덤을 만들고 50여 명의 석공을 시켜 가짜 석곽 아래 관을 따로 만들게 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석공을 무덤 속에서 살해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나온 한 노인이 원귀들의 한을 푼다며 오자서에게 가르쳐줘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상세한 묘사는 이렇다. "손에 아홉 마디로 된 구리 채찍을 들고 평왕의 시신을 300번이나 후려치니,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부러졌다(手持九節銅鞭 鞭之三百 肉爛骨折)."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복수의 수법이 잔인하다고 질책하자 갈 길이 멀어 순서를 거꾸로 하게 됐다고 해명하는 도행역시(倒行逆施)가 더 따르는 이야기다.
오자서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죽은 원수의 시체를 찾아 매질을 가했을까. 일견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시체까지 욕보인 점에서는 지나치다는 평이 따른다.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도 잘못을 고치면서 더 어그러지게 하는 일은 흔하다. 근래의 사건 하나만 보자. 이전 정권의 미운 놈 몰아내기 블랙리스트를 단죄하면서 그보다 더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서도 뻔뻔한 처사를 보면 시체 매질 그 이상이다.
▶️ 掘(팔 굴, 뚫을 궐, 서투를 졸)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屈(굴)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掘(굴, 궐, 졸)은 ①파다, 파내다 ②움푹 패다 ③다하다 ④우뚝 솟다 ⑤(끝이)모지라지다, 그리고 ⓐ뚫다(궐) ⓑ구멍(궐) ⓒ암굴(巖窟)(궐) ⓓ움직이지 않는 모양(궐) 그리고 ㉠서투르다(=拙)(졸)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땅을 파거나 바위 등을 뚫음을 굴착(掘鑿), 무덤을 파냄을 굴총(掘塚), 미신적 관념에서 남이 묘를 쓴 것이 해가 된다고 하여 그 해골을 파내게 하는 일을 굴매(掘埋), 땅속에 묻힌 것을 파내어 가짐을 굴취(掘取), 나무 뿌리를 캐어 내는 일을 굴근(掘根), 무덤을 파서 옮김을 굴이(掘移), 굴 모양을 이루면서 땅을 파 들어감을 굴진(掘進), 구멍이나 구덩이를 팜을 굴혈(掘穴), 땅 속에 묻힌 물건을 파냄을 발굴(發掘), 땅을 파서 땅속에 있는 광석 따위를 캐냄을 채굴(採掘), 광상의 채굴 가치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적으로 파 보는 일을 시굴(試掘), 무덤 따위를 허가 없이 몰래 파내는 일을 도굴(盜掘), 남의 무덤을 허가 없이 함부로 파냄을 사굴(私掘), 구멍이나 굴을 파 들어감을 착굴(鑿掘), 남의 무덤을 강제로 파게 함을 늑굴(勒掘), 광물이나 무덤 등을 독촉하여 파냄을 독굴(督掘), 파묻혀 있는 광물 등을 파냄을 개굴(開掘),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라는 뜻으로 준비없이 일을 당하여 허둥지둥하고 애쓴다는 말을 임갈굴정(臨渴掘井), 논을 갈 때가 되어서야 낼 물이 없어서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미리 마련해 두지 않고 있다가 일이 임박해서야 허둥지둥 서두름을 이르는 말을 임경굴정(臨耕掘井) 등에 쓰인다.
▶️ 墓(무덤 묘)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莫(막)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莫(막)은 暮(모)의 본디 글자이며 풀 저쪽편으로 해가지다, 해질 녘, 쓸쓸하다, 물건이 없다의 뜻이 있다. 土(토)는 토지(土地), 곳, 墓(묘)는 죽은 사람을 묻는 쓸쓸한 곳이다. ❷회의문자로 墓자는 ‘무덤’이나 ‘묘지’, ‘장사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墓자는 土(흙 토)자와 莫(없을 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莫자는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없다’라는 뜻을 가진 莫자에 土(흙 토)자를 더한 墓자는 '땅에 묻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墓자는 죽은 사람이 묻혀있는 ‘무덤’이나 ‘묘지’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墓(묘)는 뫼의 뜻으로 ①무덤 ②묘지(墓地) ③장사(葬事)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덤 영(塋), 무덤 총(塚), 무덤 분(墳)이다. 용례로는 묘소로서 경계를 지은 구역을 묘역(墓域), 죽은 사람의 신분과 성명과 행적과 자손과 나고 죽은 때 등을 새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을 묘비(墓碑), 무덤이 있는 땅 또는 그 구역을 묘지(墓地), 무덤이 있는 곳을 묘소(墓所),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을 묘표(墓表), 무덤의 대표 연고자를 묘주(墓主), 뫼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하고 작은 돌비석을 묘갈(墓碣),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묘제(墓祭), 뫼를 쓸 때 구덩이 안에 널이 들어갈 만큼 알맞게 파서 다듬은 속 구덩이를 묘혈(墓穴), 무덤으로 가는 길을 묘수(墓隧), 신분이나 품계에 따라 정한 무덤의 구역을 묘계(墓界), 무덤 근처에 가꾼 나무를 묘목(墓木), 무덤 앞으로 들어 가는 어귀를 묘문(墓門), 무덤을 만드는 사람을 묘공(墓工), 묘지나 묘표에 쓴 글을 묘문(墓文),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묘석(墓石), 무덤 속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방을 묘실(墓室), 소출을 묘제의 씀씀이로 쓰는 논밭을 묘위(墓位), 남의 뫼를 지키고 거기에 딸린 일을 보살피는 사람을 묘직(墓直), 무덤을 분묘(墳墓), 조상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살피는 일을 성묘(省墓), 무덤을 다른 데로 옮김을 천묘(遷墓), 부모의 거상 중에 그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3년 동안 사는 일을 시묘(侍墓), 오래 된 무덤을 고묘(古墓), 예전에 전사한 병사의 시체를 한데 몰아서 묻던 무덤을 도묘(都墓), 널리 알려진 무덤으로 묏터가 좋아서 자손이 잘되어 나가는 무덤을 명묘(名墓), 조상의 산소를 살펴봄을 배묘(拜墓), 지관을 데려다가 묘지를 가려잡음을 상묘(相墓),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일컫는 말을 구묘지향(丘墓之鄕), 먼 윗대 조상의 무덤을 일컫는 말을 고현분묘(高玄墳墓),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등에 쓰인다.
▶️ 鞭(채찍 편)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가죽 혁(革; 가죽)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便(편)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鞭(편)은 ①채찍, 회초리 ②채찍질하다, 매질하다 ③형벌(刑罰)의 이름 ④대의 뿌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볼기 칠 태(笞), 꾀 책/채찍 책(策)이다. 용례로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 또는 어떤 사람을 잘 할 수 있도록 따끔하게 나무라는 것을 편달(鞭撻), 채찍의 끝을 편말(鞭末),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채찍으로 치는 일을 편추(鞭芻), 매로 치는 형벌을 편형(鞭刑), 채찍 따위의 끝에 달리어 늘어진 끈을 편수(鞭穗),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혁편(革鞭), 마구 채찍질을 함을 방편(放鞭), 구슬을 달아서 꾸며 만든 채찍을 주편(珠鞭), 채찍질하여 걸음을 더 재촉함을 가편(加鞭), 극기하기 위하여 수도자가 제 몸을 때리는 채찍을 고편(苦鞭), 수업이나 강의할 때 교사가 필요한 교수 사항을 가리키기 위한 가느다란 막대기를 교편(敎鞭), 짤막한 매를 단편(短鞭), 말을 모는 데 쓰는 채찍을 마편(馬鞭), 채찍이 길어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돕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치 못함을 이르는 말을 편장막급(鞭長莫及),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형편이나 힘이 한창 좋을 때에 더욱 힘을 더한다는 말을 주마가편(走馬加鞭), 채찍을 던져 강의 흐름을 가로막는다는 뜻으로 물을 건너는 군사가 극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투편단류(投鞭斷流), 말이 제 고삐를 씹는다는 뜻으로 자기 친척을 헐뜯으면 결국 자기에게 해가 됨을 이르는 말을 교편지마(嚙鞭之馬),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음탕한 입과 지독한 채찍이라는 뜻으로 까닭 없이 남을 헐뜯고 못 살게 구는 짓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음훼독편(淫喙毒鞭), 초헌에 채찍질이라는 뜻으로 격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초헌마편(軺軒馬鞭) 등에 쓰인다.
▶️ 屍(시)는 회의문자로 尸(시)는 동자(同字)이다. 尸(주검 시)와 死(죽을 사)의 합자(合字)이다. 屍(시)는 주검, 시체를 뜻한다. 용례로는 죽은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을 시신(屍身), 사람이나 생물의 죽은 몸뚱이를 시체(屍體), 사람의 죽은 몸뚱이를 시구(屍軀), 시체를 간음함을 시간(屍姦), 시체가 있는 방을 시실(屍室), 살해를 당한 사람의 친척을 시친(屍親), 사람이 죽은 뒤 6~12시간이 지나서 피부 조직에 생기는 자줏빛 얼룩점을 시반(屍斑), 입관하기 전에 시체를 얹어 놓는 평상을 시상(屍床), 땔 나무와 마실 물을 시수(屍水), 시체가 박테리아의 작용으로 분해될 때 생기는 유독물을 시독(屍毒), 시체를 검안한 증명서를 시장(屍帳), 시체에서 나는 썩는 냄새를 시취(屍臭), 자기 자신을 죽여서까지 임금에게 간언함을 시간(屍諫), 시체를 넣는 관을 시구(屍柩), 얼어 죽은 송장을 동시(凍屍), 추워서 얼어 죽은 송장을 강시(僵屍), 변사자의 죽은 원인을 알기 위해 시체를 검사함을 검시(檢屍), 지난날 죽은 사람의 목을 베던 일 또는 그 형벌을 육시(戮屍), 집터를 가릴 때 흉살이 든다고 하여 꺼리는 자리의 하나를 강시(扛屍), 시체를 내다 버림 또는 그 내다 버린 시체를 기시(棄屍), 태 안에서 죽은 태아의 시체를 태시(胎屍), 피가 아직 식지 않은 갓 죽은 시체를 혈시(血屍), 예수의 시체를 일컫는 말을 성시(聖屍), 송장의 머리와 팔다리를 바로잡음을 수시(收屍), 유기된 시체를 유시(遺屍), 시체를 해부함을 해시(解屍), 송장을 무서워함을 외시(畏屍), 겹겹이 쌓인 시체를 적시(積屍),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뜻으로 옛날에는 전사한 장수의 시체는 말가죽으로 쌌으므로 전쟁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말함을 일컫는 말을 마혁과시(馬革裹屍), 가죽에 싼 시체라는 뜻으로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시체를 이르는 말을 과혁지시(裹革之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을 추시하던 일을 일컫는 말을 부관참시(剖棺斬屍),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죽은 사람은 장사지내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적시재상(積屍在床),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을 굴묘편시(掘墓鞭屍), 전쟁터에서 먹고 마실 식량과 물이 떨어져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고 자기의 오줌을 받아 마심을 이르는 말을 식시음뇨(食屍飮尿)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