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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세계
-Raffaello Sanzio
온화한 힘 라파엘로 산치오
[Probable self-portrait drawing by Raphael in his early teens]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 1483~1520). 영어권에서는 '라파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산티'라고도 부르는 그는 도시파가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역시 '빈치'라는 시골 출신이다. 미켈란젤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메디치家의 영광을 받았지만 사실 노천 채석장에서 유년기를 보냈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에게는 빈치의 시골밭 지렁이가 신비하게 보였고, 미켈란젤로에게는 채석장의 끌과 망치, 그리고 돌가루 냄새가 그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것을 보면 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은 어쩌면 우리 주변에 사소함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한 때, "나는 환경이 그렇지 않으니 위대한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렸던 사춘기적 기억이 있었다. 내 안으로만 시선을 돌리고 있으면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없으니, 두 위인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이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서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을 결코 모자람 없이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우르비노는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이 속한 움브리아는 예술이 꽃 피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조상 중에는 예술에 관련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집안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의 삼촌이자 실험농부였던 프란체스코의 밭일을 도와주면서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반면,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번듯한 화가였고, 움브리노派에서 꽤 유명했었다. 르네상스 문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으며, 1474년에 교황으로부터 작위(공작)를 받은 페데리코 3세가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 움브리노이다. 그의 궁전에는 시인과 화가들이 찾아와 자신의 실력을 뽐냈는데, 이 때부터 움브리아派가 결성된 것이다.
그곳에서 활약하던 라파엘로의 아버지 지오반니 산치오는 화가로써 뛰어난 화력畵力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북 이탈리아 화풍과 저 멀리서 내려온 플랑드르 화풍까지 섭렵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당시 페데리코 궁전에서 화가보다는 시인을 더 높이 평가하자 시단에서 뛰어 들어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와서야 인문학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에 반해 라파엘로는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과 움브리노 특유의 예술이 준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가 특별히 인문학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는 사실을 미술사가들은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자화상 드로잉을 보면 그에게 상당한 미적 감각이 있었다는 주장에 동감할 것이다. 라파엘로의 어머니는 1491년, 그렇니까 어린 라파엘로가 막 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 세상을 떠났다.
양어머니를 둔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공방에서 양어머니와 함께 일을 도와줬다고 하며, 이를 조르지오 바사리는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했는지, 지오반니는 당시 움브리아派파의 지도자격이었던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446~1523)가 운영하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양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혹여나 고생을 할까 눈물을 머금었다. 바사리의 기록에는 라파엘로가 너무 어린 나이에 견습을 시작했다고 적혀 있어서 이를 믿지 않는 현대 미술사가들도 있다.
몇몇은 1495년까지, 즉 12세 무렵까지 우르비노의 궁정 화가였던 티모테오 비티에게 미술 수업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는 절충안으로 1500년 이전에는 그가 공방에서 일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하지만 1500년 이전이라면 라파엘로의 나이 17세 이전이다. 결국 그의 천재성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했다.
[San Sebastiano] Pietro Perugino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의 다소 '안이한' 화풍을 철저하게 배격했고, 원래 전문 분야가 스승과는 달랐다. 레오나르도 역시 자신의 전문 분야가 회화였던 것에 반해 그의 스승 베로키오는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이를 청출어람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라파엘로는 분명 청출어람이 확실하다. 페루지노는 이탈리아에서 유화를 도입한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며, 미켈란젤로가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남긴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의 양쪽 벽화 중의 하나를 남겼을 정도로 유명했다.
교황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화가에게는 굉장한 영예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페루지노의 스타일은 유화의 풍성함을, 즉 플랑드르의 색채를 모방하려고 했는지 차분하며 안정적이다.
우리는 앞서 "르네상스의 동양화" 같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기억한다. 단순해보이지만 순백의 성스러운 정신이 느껴졌던 수도승 출신의 화가 말이다.
페루지노의 회화 양식 역시 당대와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교황들의 마음을 쏙 빼놓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무언가를 회화에서 포기했었다. 위의 그림은 앞서 살펴본 폴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안>과 똑같은 내용의 작품이다.
수학적 계산을 통해 어색한 그림을 만들며, 우리에게 당대 화가들이 겪은 기하학에 대한 '체습'의 고통을 전해준 화가가 폴라이우올로였다. 다양한 원근법적 구도에 대한 연구 말이다. 색채와 소묘가 끊임없이 화가들을 괴롭히던 시대. 하지만 페루지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원근법의 능숙한 표현은 바닥의 타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눈에 페루지노의 것 역시 뭔가 어색해보인다. 양 기둥의 섬세한 조각과 대비되는 단순한 자연 풍경 때문이다. 자연의 충실한 묘사를 거절하면서 페루지노는 화폭의 안정감을 얻었다. 마치 수학적 묘사를 포기하고 아름다운 비너스를 얻은 보티첼리처럼 말이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전시 가능한 상태로 지금까지도 상당수가 보존되어 있다. 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비슷한 유형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하나만 봐도 열 가지는 족히 알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유순한 화폭, 그 근원을 알고자 한 사람이라면 페루지노의 그림에서 라파엘로의 것과 닮은 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Mond Crucifixion]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첫 손가락에 꼽는 도제였다. 미술사가 뵐플린은 "다른 제자들 중에 라파엘로처럼 그의 스승이 가르치는 것들을 쉽게 흡수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얼마나 잘 흡수했는지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최근의 미술사가들은 기법 면에 있어서 놀랍도록 빼닮은 것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가 1502년부터 다음 해까지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을(위의 그림) 한 번 보라. 라파엘로의 초기 작품들은 유화층을 두텁게 칠했다. 그리고 중간 정도의 색조를 주었고, 그림자 부분은 마치 어두운 겉옷처럼 표현했다.
반면 밝은 부분은 굉장히 얇게 칠하면서 어느 정도 입체감을 주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정확한 수학적 구도까지. 폴라이우올로가 그린 <성 세바스티안>의 전체적 구도가 확연히 연상될 정도이다. 페루지노의 것 역시 이러한데, 하지만 화풍의 모방은 잠시 뿐이었다. 단 2년도 안 되서 그의 화풍에는 극명한 변화가 일어난다.
페루지노의 공방을 떠난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들을 떠돌기 시작했다. 몇몇 미술사가들은 이를 "유목의 생활"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하지만 그의 화풍이 변화하기 시작한 무렵은 '예술의 도시' 피렌체로 향한 뒤부터였다. 그곳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의뢰받으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명성에 도전하게 되었다.
두 거장과는 다르게 라파엘로는 어린 시절부터 인문학의 세례를 받아 본격적인 사교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다. 공방의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얻게 된 친분과 원래 모나지 않은 성격 탓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 각계에서 작품을 주문할 때는 그 화가의 인품도 역시 고려했다.
막연히 명성만 믿고 했다면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따라갈 화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은 유독 위대했던 두 화가 외에도 거장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라파엘로는 더욱 인기가 있었다. 동글동글한 성격 때문이다. 항상 밝고 부드럽지만 예술적 열정에 있어서는 남 못지 않았던 그를 아버지 지오반니는 매우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사후 세계에서 말이다. (라파엘로는 아버지는 11살 때에 떠나보내야 했다
[Bezeklik caves (near Turpan), Xinjiang, China] Photo by T Chu
라파엘로에 대해서 알아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최근 나는 KBS-NHK-CCTV에서 공동제작한 <신新실크로드> 다큐멘터리를 리뷰하고 있었다. 중국 신장 위구르 투르판에 있는 한 천불동에 관한 이야기.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앞길을 막은 거대한 화염산이 실제로 존재하는 투르판의 중턱에 위치한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상당한 규모의 불화佛畵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서양 열강들의 유물 탐사 때에 모조리 빼앗겨 버렸고, 현재는 독일과 영국, 인도와 한국(일본 제국이 조선중앙총독부에 남겨둔 것), 일본, 그리고 러시아 에르미타쥬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고등학생 때에 나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한창 위치우위(余秋雨)의 <중국문화답사기>에 빠져 있었다. 둔황의 막고굴에 있던 천문학적인 고고학 가치를 지닌 벽화를 눈 파랗고 코 높은 서양인들이 내놓은 은화에, 고작 은화 몇 푼 따위에 넘겨준 왕王도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타들어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천진난만했고, 그래서 문화 의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한 시시껄렁한 도사가 막고굴 전체를 관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서양인들은 대번에 짐작했으리라. 쉽게 속이고 최대한 많이 가져갈 수 있겠구나.
그들은 황제의 명을 받아 동양 최고의 유물들을 고국으로 실어나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였다. 천 년, 아니 혹은 2천 년은 족히 될 수도 있는 '국보급' 유물은 그렇게 유럽으로 날아갔다.
벽화를 떼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칼 하나로 벽에 금을 내어 상자에 담기 좋게 자른다. 알다시피 벽화는 벽에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회반죽 위에 그린다. 그것을 떼어내면 벽화를 위해 껴놓은 또 다른 벽 층이 함께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박물관에서 꺼내어 퍼즐 맞추듯 하면 전시 준비는 끝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라간 것들을 다시 하나로 맞추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독일에서는 벽화의 밑부분을 떼어가고, 이탈리아에서는 오른쪽 부분을 떼어가고. 현재 남은 것은 실크로드를 상징하는 보상화문 문양이 그려진 천장화와 승려들의 머리만 남아 있는 벽화 몇 개.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굉장히 많은 호실들이 있지만 남아 있는 그림은 거의 없다.
이것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일본의 컴퓨터 작업만도 1년이 족히 걸렸다. 헝가리 탐험가 스타인을 '사대인휘대약'이라고 부른 왕도사는 스타인이 자신을 "당나라의 고승을 너무도 존경하기 때문에 그 고승들의 발자취를 쫓아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경을 가지러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소개하자, "하오(好)"라고 하며 불경을 내주었다.
말이 한 궤짝 씩이지, 그렇게 궤짝이 모이면 얼마나 많은가.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자신들의 고국으로 출발하면 왕도사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중국문화답사기>를 쓴 위치우위도 사실 스타인과 같은 모험가들의 열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하지만 유산을 몰래 훔쳐가는 짓은 야만적인 행각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들의 오래된 고고학적 논리를 반박할 만한 근거가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충분히 예전의 일이라 되돌리기에도 늦었다는 그의 한탄에 나는 한껏 동의하면서도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몽유도원도>를 떠올렸다. 가슴이 아리다. 나도 위치우위처럼 그 때로 돌아가 유물을 싣고 떠나는 차량 앞에 서서 이를 막고 싶을 뿐이었다.
내가 라파엘로와 불화佛畵를 연결시킨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의 복원 작업을 하면서 서서히 들러난 실체를 보면 그림체가 매우 동글동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투르판은 서西위구르 왕국이 다스릴 무렵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중간 거점으로 매우 많은 민족들이 함께 생활했다.
이를 반영했기 때문에 천불동 벽화 여기저기에 서양인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의 군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나는 마치 아비 바르부르크가 쉬파노이아 궁전의 벽화에 대한 비밀을 풀어낸 것처럼 무언가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가끔 우리는 뜬금없이 무언가를 특정 대상과 연관지어 생각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를 반복하게 된다. 주로 관심 있는 분야끼리의 조합일 것이다. 이는 도상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직관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다소 위험하지만 때론 바르부르크처럼 신비 속에서 잠들어 있던 진실을 일으켜 세우게 하는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
미술은 나에게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라고 끝없이 요구하는 선생님이다. 바이블과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시 읽어봐야 하는 이유를 중세의 그림들을 전혀 해석하지 못하는 나의 '우둔한' 모습 앞에서 찾았으며, 동일한 주제가 반복되는 "어쩌면 선형적 패턴"을 가진 서양 미술이 아직까지도 어렵게 느껴지는 나의 '막연함'에서도 찾았다
[Portrait of Maddalena Doni]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가 베제클리크 천불동 불화佛畵의 인물상처럼 동글동글하게 사람을 표현하기 시작한 무렵을 정확한 시점으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 1504년, 다시 말해서 그의 피렌체 시기가 시작되던 시점인 것으로 미술사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도니의 초상화>는 타고난 성품, 페루지노에게 배운 화법, 그리고 자신이 동경하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연구가 점철된 작품이다. 이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은 당시 잘 나가던 상인인 아그놀로 도니. 그의 아내인 마달레나 도니와 함께 한 쌍의 초상화를 의뢰한 그가 라파엘로를 찾아갔던 해는 1503년이었지만 라파엘로가 완성작을 아그놀로에게 준 것은 1506년의 일이었다.
이 시기는 <모나리자>가 제작되던 시기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라파엘로가 <모나리자>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럴 확률은 적어보이지 않은가?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한 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생활하면서, 이제 막 오십 줄을 넘긴 그가 <모나리자>를 작업하던 때에는 그 누구와도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제자들과도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게끔 이동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스푸마토에 대한 철저한 연습을 해왔고, 이는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아도 구사하던 기법이었다.
이를 본 라파엘로는 <도니의 초상화>에 배경과 인물이 조화가 되어 더욱 입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게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모나리자>에 대한 구도의 소문이 있었던 것일까. <도니의 초상화>는 <모나리자>의 포즈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다만 분위기가 전혀 다를 뿐이다. 라파엘로의 것에는 신비함 대신에 포근한 느낌이 가득하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풍만한 여체에서는 정情이 묻어나오며, 그녀 역시 <모나리자> 못지 않게 교양과 덕이 있는 것 같다. 이유는 풍경화의 배경이다. <모나리자>가 다소 복잡하며, 불확실하지만 신비함과 오묘함을 동시에 풍기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도니의 초상화>는 구름 몇 점을 제외하면 마치 가을 하늘처럼 파릇한 배경이 그려져 있다.
그녀의 왼편에 자리잡은 나무는 그녀의 성스러움을 더해준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를 연구하는 미술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도니의 초상화> 이후, 흔히 '라파엘레스크(Raphaelesque)'라고 불리는 그의 동질적 양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바로 라파엘로의 미적 성숙을 입증하는 좋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Saint Catherine of Alexandria]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가 얼마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존경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캐서린(이하 성 캐서린)>이며, 작품 완성시기는 150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1504년부터 1508년까지 굉장히 많은 작품을 의뢰받았다. 자화상 한 점을 빼고, 총 25점의 작품이 현존한다.
사실 로마 시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양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남은 생애를 로마에서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집중적인 창작 기간이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것이다. 피렌체에서 지낼 무렵에 만든 <성 캐서린>이 어째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연관 있는 것일까?
미술사가들은 조르지오 바사리의 기록에 나와 있는 라파엘로의 성품과 그가 가지고 있던 레오나르도에 대한 동경에 착안해서 두 거장의 작품들을 샅샅이 비교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구조와 스푸마토 기법에서 일치를 보이는 것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고, <성 캐서린>은 레오나르도가 미완성으로 남긴, 때문에 세사레 세스토(Cesare da Sesto : 1477~1523)가 모사하여 색칠한 <레다와 백조>와 일치했다.
그림의 주인공인 캐서린과 레오나르도가 스케치했던 그림의 주인공인 레다의 포즈는 완벽하게 똑같다. 이러한 포즈를 '콘트라포스토'라고 한다. 체중을 한 쪽 발에 싣기 때문에 어깨와 팔, 엉덩이가 교차되어 운동감이 생기는 것이다. 몇몇 미술사가들은 이를 예로 들어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완성 작품을 보고 독창적으로 창안을 시도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캐서린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3세기의 인물이다. 당당한 여성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인데, 18살의 나이에 로마의 황제 막시무스에게 찾아가 이교도의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여 승리한 가톨릭敎의 성인聖人이다. 그녀는 서양에서도 화가들이 자주 인용한 성인聖人 중의 한 명이며, 그녀의 옆에 항상 그려져 있는 나무 바퀴는 사실 그녀를 처형할 때에 쓴 도구였다.
그녀의 화술에 감명받아 자신의 황후와 장군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이에 분노한 막시무스는 캐서린과 함께 황후, 그리고 개종한 모든 고위 관료들을 단칼에 처형해버렸다. 단, 캐서린에게는 철 스파이크가 박혀 있는 나무 바퀴로 고문한 뒤에 효수형을 당하게 하라는 극형이 내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시신을 6세기에 한 천사가 내려와 가지고 올라갔다고 한다. 여하튼 서양 그림에는 한 인물을 상징하는 어떠한 도구들이 항상 같이 들어있기 마련인데, 이를 읽는 것이 도상학의 여러 가지 목표 중 하나이다.
[Madonna of the Pinks]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가 '성모聖母의 화가'라고 알려진 이유는 후세 사람들이 '성모'했을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를 그가 창조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죽음은 앵그르의 그림으로. 그리고 사실 <성 캐서린>은 라파엘로의 것보다는 조금 뒤의 사람인 이탈리아의 이단아 카라바조가 그린 것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양 미술은 신화와 성서의 내용을 번안하며 수없이 많은 반복을 했다. 마치 노래에서 사랑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된 것처럼, 그리고 남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축구 이야기와 군대 이야기처럼 말이다.
또한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세상에 존재했었는가. 유독 우리가 라파엘로의 그림에 나온 성모를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성모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연상 관계에 대해 보편적인 답을 내리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 라파엘로가 성모를 유순한 필체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은 성서에 나온 인물들이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한 이동 생활을 하던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수는 물론이고, 성모도 마른 체격일 것이라는 생각은 은연 중에 하게 된다. 멜 깁슨이 선보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온 모습이나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에서처럼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한편으로는 성모로부터 한없는 성스러움과 포근함을 느끼려고 하는 것 역시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의 심리이다. 오늘날 역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성모의 머리카락이 검은색 일 것이라고 확언한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완벽하게 중세의 것으로 번안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이유였다. 아담과 이브가 존재했다면 흑인이었을 것이라는 최근 과학紙의 발언, 그리고 성모를 흑인으로 표현하고 게다가 코끼리 똥을 화폭에 붙여 신성모독의 논란(이는 나이지리아의 화가 오필리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실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똥은 풍요로움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논쟁은 유럽에서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했다.)이 있었던 작품이 나온 1990년대 무렵. 항상 비교되는 작품이 라파엘로의 성모 그림들이었다.
스승 페루지노의 작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 했지만 피렌체에서 활동할 시기에는 이미 스승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은 천재적 기지를 발휘한 라파엘로. 그의 화폭에 남아 있는 한없은 생명력은 견고하면서도 운동감이 있어 매우 신비하다.
곰브리치의 말마따나 "조금이라도 뭘 더 보태거나 빼면" 화면의 균형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완벽함'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라파엘로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무살을 넘긴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가 흔히 '김삿갓'하면 삿갓을 떠올리고, '씨름'하면 김홍도를, '빨래터'하면 윤선도를 떠올리듯이 서양인들은 '캐서린'하면 철심이 박힌 나무 바퀴를 떠올린다. 조금 더 예를 들면, 중세미술에서 마태는 인간의 얼굴, 마가는 사자, 요한은 독수리, 누가는 송아지를 곁에 끼고 있다.
이는 <요한 계시록>에 나온 네 동물의 형상, 그리고 선지자 에제키엘의 꿈에 나온 사면四面의 형상과 연관지어서 일컬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도구를 전문용어로 어트리뷰트(Attribute)라고 한다. 캐서린의 어트리뷰트는 나무 바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칼이 있는 경우도 있고, 캐서린의 발밑에 왕관이 있는 그림도 있다. 아마 로마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철학자들의 수호자답게 책이나 여러 철학자들의 군상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파리 국립대학의 수호자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징인 평화를 뜻하는 비둘기도 가끔 그려져 있다고 한다.
[Madonna del Granduca] Raffaello Sanzio
부족함 없이, 그리고 세간의 비난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라파엘로. 피렌체에서의 대성공으로 주목을 받던 그는 이미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글동글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명성이 높았다. 1505년 무렵에 그린 <대공大公의 성모>는 점점 유럽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성모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화가가 직접 나서서 "이것은 무엇을 그린 그림이며"라고 설명할 필요 자체가 없는 그림들을 그렸기 때문에 굳이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하진 않았어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그림들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이미 '고전'이 되었다. 이를 '전형'이라고 한다. 원래 그렇게 존재했을 것만 같은 그림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그림들 앞에서 결코 쉬운 '감정'을 내리면 안 된다.
곰브리치의 말처럼 '알기 쉬운'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쉬운 것에서부터 자신의 오만을 견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파엘로가 겨우 스무살이 되어 그린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이 작품에는 응축된 '단순함'으로부터 나오는 세심한 계획, 라파엘로의 유순하면서도 깊은 생각,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에 가졌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고단계까지 진전된 예술의 지혜 등이 모두 들어 있다.
1년 전에 그린 페루지노 풍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라파엘로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화풍을 그 어린 나이에 확실히 구축할 수 있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한 것은 그의 스승도 그러했으니 둘째치더라도 안정적 구도와 화폭에서 묻어나오는 성스러움을 표현한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볼륨감 있는 육체에서 나오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은 예술에 대한 엄청난 혜안을 가진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은 경지이다. 만약 성모와 아기 예수가 시선을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중심이 아기 예수를 감싸쥐고 있는 성모의 오른팔에 집중되어 있는 그림의 구도가 완벽하게 흐트러질 것이다.
또 하나의 가정. 성모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만약 라파엘로가 성모의 표정을 보다 확실하게 표현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아기 예수의 표정과 어울릴 수 있는 오묘한 미소는 자애慈愛가 가득해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대공의 성모>가 어떤 그림의 연장선상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어로 'Magi'라고 하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맞이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이미 앞서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접견하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을 여러 작품을 걸쳐 살펴본 바 있다. 우리는 <대공의 성모> 그림 밑에 몇몇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도 충분히 예상하게 된다.
[The Triumph of Galatea] Raffaello Sanzio
미술사가들은 보통 1508년 즈음에 라파엘로가 로마로 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라파엘로가 로마로 간 이유는 그곳에서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린다는 소문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변덕쟁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 때문이었다.
새로 교황이 된 그는 건축은 브라만테에게, 조각은 미켈란젤로에게, 그리고 회화는 라파엘로에게 맡기고자 했었다. 마치 축구의 삼각편대를 연상케 하는 그의 프로젝트는 원래 순탄치 못했노라고 언급한 적 있었다. 피렌체 시장만 중간에 끼어서 진땀을 흘렸던, 미켈란젤로와의 신경전 말이다.
교황은 이 세 사람 중에서 라파엘로를 가장 신임할 수밖에 없었다. 고분고분하면서도 유순하며,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가장 어리기도 했다.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이 부르게 된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의 스탄차에 들어가 벽면을 장식하는 일을 하도록 명 받았다. 스탄차는 바티칸 궁전의 큰 방을 의미한다.
유화 뿐만 아니라, 프레스코畵에도 능했던 그는 일명 "라파엘로의 방"이라고 하는 4개의 스탄차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림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 엘리오두루스의 방, 세냐투라의 방, 그리고 보르고의 화제의 방이 그가 작업한 스탄차였으며 현재 14개의 작품이 현존한다.
라파엘로 최고의 걸작이라고 흔히 말하는 <아테네 학당>도 그가 작업을 한 방 중 '세냐투라의 방'에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畵였다. 바티칸에서 작업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들도 함께 의뢰받았기 때문에 라파엘로는 거의 쉴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의뢰 작품은 <갈라테아의 승리>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은행업이 발달했다고 언급했었다. 세계 화폐 시장의 등장도 보통 이 시기로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본격적인 유통 말이다. 성공한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에 그려준 이 프레스코畵는 높이 3m, 가로 2m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였지만 사실 그가 함께 작업하고 있었던 스탄차의 벽화보다는 작은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모든 노력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 쏟고 있을 무렵에 젊은 라파엘로는 스탄차의 작업과 여러 의뢰작을 함께 했으니 그도 미켈란젤로 못지 않은 예술적 정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The Triumph of Galatea] - detail - Raffaello Sanzio
우리는 이미 갈라테아를 알고 있다. 다만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피그말리온 효과를 떠올리면 어떨까. 우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왕성의 위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키프로스의 왕이었던 피그말리온은 도덕적으로 문란한 여자들을 봐오면서 결국에는 여성혐오자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름다운 여성의 조각을 하나 만들었다.
원래는 여신 아프로디테가 여성을 싫어하는, 즉 '사랑'하지 않는 피그말리온에게 "조각을 사랑하게 하는 형벌"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여신 아프로디테가 결국 피그말리온을 귀하게 여겨 여성의 조각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
흔히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라는 19세기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장면. 여기에 등장하는 님프도 갈라테아. 라틴어로 "우윳빛 살결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갈라테아는 바다의 님프이다. 그녀는 원래 양치기 아키스를 사랑했다. 헨델이 작곡한 가면극인 <아키스와 갈라테아>에 보면 이 둘은 전원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하던 사이였다. 갈라테아는 반半은 신이기 때문에 한낱 인간인 아키스와의 사랑은 초월적 사랑이었을 테다. 하지만 비극이 찾아온다.
근대에 들어서는 여러 작품들에 '괴물'이라고 소개된, 하지만 원래 <변신 이야기>에는 추한 외모의 외눈박이 거인으로 등장했던 폴리페모스가 갈라테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가면극에서 합창단들은 입을 모아 아키스와 갈라테아에게 폴리페모스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는 질투가 아주 심하답니다. 잔인하기도 하지요." 보통 사랑 이야기에는 예측은 현실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아름다운 사랑의 한복판에는 마치 폭풍 전야의 잔잔함처럼 평온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사랑했다가 내일은 헤어졌다가 그리고 다시 만나고. 그것이 다른 사람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든, 아니면 사랑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한편으로는 보듬어주는 것이든 사랑은 순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때문에 로맨스는 완성될 수 없는 합일점 같은 것이다.
어느 날, 폴리페모스가 갈라테아에게 강제로 구애하겠다고 협박했다. 동료 양치기였던 고리돈은 폴리페모스에게 신사적 방법을 쓰라고 충고하는 한편, 다른 양치기인 다몬은 아키스에게 "그렇다고 해서 폴리페모스와 싸우면 자네가 불리해지지 않겠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사랑을 두고 펼치는 싸움은 늘상 있어왔던 일. 아키스는 폴리페모스와의 결투를 자청한다. 갈라테아와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것이다. 이를 본 폴리페모스는 그 우락부락한 덩치로 잔인하게 아키스를 살해했다. 이에 슬퍼하던 갈라테아에게 합창단들은(그들을 요정으로 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가 반신半神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 그녀는 아키스를 아름다운 샘으로 변신시킨다. 불멸의 사랑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갈라테아도 결국 폴리페모스에게 살해 당한다. 사랑이 부른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 레퍼토리는 아직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The Triumph of Galatea] - detail - Raffaello Sanzio
라파엘로가 그린 장면은 폴리페모스가 노래로 구애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워낙 거친 목소리의 소유자였고, 갈라테아는 이를 조롱하면서 멀리 달려가려고 한다. 그녀를 바다 위로 멀리 데려가려고 하는 두 마리의 물고기는 사실 물고기가 아니라 돌고래이다.
이 풍요로운 그림은 굉장히 안정적인 구도를 하고 있다. 라파엘로를 포스팅하면서 '안정적'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학적 계산 속에서 헤매던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일명 'High Renaissance' 시대의 화가들은 안정감을 익숙하게 사용했다는 점을 계속해서 언급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
마니에리스모와 바로크 시대로 들어가고, 이 후 신고전주의로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갈수록 안정적 구도의 문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풀렸기 때문이다. 그 중간 지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리고 라파엘로 산치오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이 세 명의 거장으로부터 미술사가들은 '근대의 씨앗'을 봤노라고 주장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갈라테아의 머리 위에서 시위를 당기며 날고 있는 세 명의 작은 요정들이 보인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편에서 환상적인 하모니를 보여준 세 명의 귀여운 아기 큐피드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연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활'로부터 연상되는 한 명의 화가이다. 앞서 수 번도 넘게 언급했던 화가 폴라이우올로 말이다. 요정들의 머리에 점을 찍고, 갈라테아의 지점으로부터 하나씩 선을 이어보자. 십자가形이 나온다. 폴라이우올로가 그토록 고민했던 구도의 문제가 여기에서는 단박에 풀린 듯 하다.
갈라테아를 지점으로 왼편에 세 명, 오른편에 세 명씩 나뉘어져 있는 것 역시 폴라이우올로의 <성 세바스티안의 순교>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라파엘로 못지 않게 폴라이우올로 역시 근육의 긴장감에도 꽤 신경 썼다고 언급한 적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로와 그가 다른 점은 바로 흡수성이다. 폴라이우올로는 구도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한 탓에 색채에서 거의 실패 아닌 실패를 했다. 언덕과 토스카나의 배경이 너무나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그런 점에서 성 세바스티안은 제대로 부각되지도 못했다. 진한 언덕 색깔 탓이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갈라테아의 승리>에는 시점의 차이를 두면서 살펴봐도 항상 모든 것은, 신기하게도 갈라테아에게로 향한다.
우선 갈라테아에게로 모이는 세 개의 지점은 작은 요정들로부터 나온다. 갈라테아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해신海神들의 무리는 갈라테아를 향하는 네 명과 벗어나는 두 명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두 명 중 하나, 즉 화면의 맨 오른쪽에 위치한 해신은 돌고래와의 방향성이 일치하고, 맨 왼쪽에 위치한 해신은 갈라테아와 바라보는 고개의 각도가 일치한다.
갈라테아의 앞에 있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 커플 해신은 갈라테아와 대각선으로 일치한 구도 속에 있다. 갈라테아의 뒤에 있는 해신 커플도 역시 그러하다. 수면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고 있는 작은 요정 역시 자칫 허전할 수 있었던 바다 위의 구도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이렇듯 모든 것은 갈라테아를 중심으로 하늘과 바다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으면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어 '안정감 있는 운동감'을 보여준다. 이 점이 바로 미술사가들이 극찬하는 라파엘로의 특징이다.
인물들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과 구도적 성숙, 게다가 색채에서도 월등한 점을 보여준 20대 후반의 라파엘로는 이전 시대의 화가들이 그토록 구사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갈라테아의 승리> 안에 고스란히 집어넣었다.
[The Triumph of Galatea] ※ 18세기 프랑스 화가 반 루가 그린 <갈라테아의 승리>
Jean-Baptiste van Loo
라파엘로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그들이 보기에 갈라테아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나 보다. "어떻게 해서 저렇게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었는가?" 젊은 라파엘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상상했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스승 페루지노도 자연의 묘사를 포기했었다. 이는 곧 상상 속의 '가장' 아름다운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라파엘로 시대에 불쑥 등장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들은 흔히 1.618:1의 황금비율을 따른다고 한다. 이것은 철저한 관찰을 통해 등장한 것이었다.
미美에 대한 제작적 비례를 만든 중세에는 모델 세우지 않아도 아름다운(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에) 조각과 회화를 만들 수 있었다. 수학으로 계산한 회화. 바흐가 대위법을 사용해서 만든 푸가를 듣고 있으면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차이콥스키의 서곡이 그리워지는 것처럼 그러한 그림들에는 일련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비례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많이 봐왔던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 등장했다. 비례론의 집착증 환자 격으로 평할 수 있는 뒤러는 이 후 인체를 거의 1/1800의 비율로 나눠 살펴봤다고 한다.
하지만 뒤러 이후에는 비례론이 그다지 효력을 갖지 못했고, 회화에서 더 이상 중요한 문제로 회자되진 않았다. 마치 끝없이 치고 올라간 높은 궁륭의 후기 고딕 건축물들이 브루넬레스키의 소박한 르네상스 양식 앞에서 퇴색하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모델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따서 조각했던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이상적 비례와 미美의 기준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양귀비가 아름답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사실 '아름다움'이라는 용어 자체도 정확하게 정의내리기 굉장히 힘들다. 그렇다면 라파엘로가 가지고 있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렸던 그로테스크한 인물상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하나의 특정한 개념이다.
곰브리치도 이를 '전형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일컬었는데, 플라톤의 이데아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 즉 이상화理想化를 실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당대의 미적 이상화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다소 무리가 있으나 이것은 통시대적으로 생각했을 때에 오늘날 우리의 '이상형'에 대한 보편적인 시각과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로가 그린 갈라테아는 그저 '님프' 중 하나가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하나의 고전, 즉 앞서 설명한 <대공의 성모>에 나온 성모와 같은 의미라고 봐야 된다.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작품에서 '전형'을 만든 젊은 라파엘로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Self-Portrait] Raffaello Sanzio
한 뉴욕 출신 큐레이터가 쓴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오늘날, 뉴욕과 런던 등의 세계적인 미술 시장에서 작가와 큐레이터 간의 애매모호한 애증의 관계는 가벼운 미술책 몇 권만 살짝 들춰봐도 알 수 있다. 일단 계약을 따내면 갤러리 측에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실행할 것이라고 통보하여 제작 비용을 받아낸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더 이상 갤러리가 재정을 감당하지 못하면 자신을 발굴해준 큐레이터 측과 매정하게 계약을 끊어버리는 전략적 행각. 그러한 능력도 예술계에서는 필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몇몇 현대 화가들은 별다른 철학이 담겨져 있지도 않은데 괜한 명성을 얻은 경우에 해당한다.
책을 쓴 큐레이터도 이 애증 섞인 관계를 들여다보면서 미래의 예술 시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었다. 하기사 요즘 작가들이 화폭에다 물감만 칠했던 전통적 장인들이 아니니 갤러리 측에서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보는 것도 사실 재미있긴 하다.
소재들도 다양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비싼 재료들을 사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깐깐한 작가 같은 경우에는 프로젝트 팀원 중 한 명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작품을 부숴버리고 다시 재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돈이 주는 물질적 만족 때문일까.
간혹 현대 화가들은 "현대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그 작품 자체에서 오만함이 묻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불가능했다. 엄청난 제작 의뢰를 받는 화가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의뢰자 기준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때문에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보다 유순한 라파엘로가 더욱 인기 있었던 것이다.
사실 19세기에 이르러서도 미술가의 권위라고 해봤자, 살롱展에 출품하여 인정을 받는 아카데미 기준 안에서만 존재했다. 화가가 이젤을 들고 아틀리에 밖으로 걸어나가기까지는 거의 300여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바르비종派와 마네를 현대미술의 시발점이라고 일컫는 거시적인 시각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화가 연합을 만들어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자존自存의 예술, 그 역사는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며 고위층에게 맞불을 놓았던 사건은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시인詩人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으리라. "어디 감히!" 여기에 레오나르도가 대응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가 유독 高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걸어간 선구적인 길을 따라만 간 것이 아니면서도 동시 사회와 유순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전범들을 남겨 주목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의 짧은 삶 안에 모두 응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라파엘로가 어색한 이유,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익숙했던 이유는 라파엘로 그 자신이 이룬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회 각층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유독 라파엘로만 그렇지 않은 이유. 한 번은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했다
[The School of Athens] Raffaello Sanzio
라파엘이 그림 1510년 ~1511년작으로 바디칸 궁의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에 있는 프레스코이다. 아테네 학당의 배경 좌우에는 예술과 지혜를 상징하는아폴론과 아테나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유크리트, 피타고라스 등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총출연한다. 둥근 아취 형태의 르세상스 건축물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그림은 원근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이 많아도 산만하지 않고 웅장한 분위기와 우아함을 지닌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같이 인문학 위주의 학자들은 그림 상단부를 그렸고,하단부에는 자연과학을 주로 연구한 학자들을 그렸다.
미켈란젤로가 공방에 일꾼을 스무 명을 두었다는 말을 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자산은 오늘날 가치로 따졌을 때 어마어마하다. 호나우두가 레알 마드리드로 가면서 약 1700억원을 벌었다. 그보다 많다. 하지만 놀라지 말 것. 라파엘로는 무려 5~60명의 일꾼을 두었다. 물론 그 중 아주 뛰어난 제자들도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지울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 1499~1546)와 지안프란세스코 펜니
(Gianfrancesco Penni : 1488/1496~1528), 라파엘리노 델 콜레(Raffaellino del Colle : 1490~1556) 등이 있는데, 이 세 명은 사실 미술사에서도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펜니는 동료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여하튼 라파엘로의 공방은 쉴 틈이 없었다. 우선 바티칸 궁에 있는 세 개의 방과 한 개의 홀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해야 했는데,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 규모 자체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사실 라파엘로 혼자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장화 작업을 오로지 혼자서 했던 미켈란젤로의 업적이 이 앞에서 결코 과소평가 받을 수는 없다.
1508년경,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을 받아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스케치 습작과 함께 작업에 착수한 라파엘로. 1514년에는 브라만테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설계 작업도 해야 했고, 온갖 부유층들의 작품 문의가 끊이지 않는 바람에 눈코 뜰 사이 없이 뛰어다녀야만 했다.
우리에게 바티칸 궁의, 흔히 "라파엘로의 방(Stanze di Raffaello)"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은 시스티나 예배당과 함께 바티칸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사실 교황을 보러가는 것 뿐만 아니라, 이 두 개의 명소名所에 가기 위해서 바티칸을 찾는, 아니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도 한 해에 400만명이 넘는다.
라파엘로의 방은 총 네 개로 이뤄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프레스코畵가 있는 방은 '서명의 방'이라고 해서 율리우스 2세의 서명실이었는데, 여기에 바로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이 있다. 총 세 개의 프레스코 벽화가 있으며, 모든 작품을 라파엘로 스스로가 만든 유일한 방이다. <아테네 학당> 뿐만 아니라, 신앙을 상징하는 <성사토론/성체논의(Disputation of the Holy Sacrament)>와 예술적 미美를 상징하는 <파르나수스(Parnassus)>도 '서명의 방'을 채우고 있다.
완성 순서로 보면 <파르나수스> <성사토론/성체논의> <아테네 학당> 순서이다. 나머지 두 개의 방과 한 개의 홀에 있는 그림들은 라파엘로가 밑그림을 그리거나 더러는 완성했지만 그의 사후인 1520년부터 로마노, 펜니, 그리고 델 콜레 등이 작업을 시작한 것들도 많이 있다.
[The School of Athens] - Platon & Aristotles - Raffaello Sanzio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티마이오스라는 책을 옆구리에 낀 사람은 추상적인 이상을 중시하는 플라톤이고 이에 반해 땅을 가르키고 있고, 윤리학을 든 사람은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철학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두사람은 진리의 본질을 두고 논쟁을 벌리고 있다.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어째서 바티칸의 궁전에 이교異敎의 모습을 그렸을까? 가톨릭의 입장에서 그리스는 이교이다. 중세 시대에도 사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여러 장르를 통해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중 자체가 달랐다.
르네상스는 '부활'이라는 뜻이라고, 르네상스 첫 번째 포스트에서 언급했었다. 무엇의 부활인지, 다시 적는다면 그건 너무 식상하다. 신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브루넬레스키의 르네상스 양식을 주거용으로까지 발전시킨, 또한 만능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알베르티의 <회화론>을 통해 중세의 내용 중심 미술이 다시 표현 중심 미술으로 귀환하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인들이 미켈란젤로를 신神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르네상스를 통해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었던 그리스 시대 사상이 재탄생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톨릭 종교 중심이었던 중세 시대에는 당연히 교리에 따라서 내세가 중요했다.
때문에 중세 미술은 형식 따윈 신경쓰지 않은 상태로 과거의 전범들을 따랐다. 그들의 문제는 "얼마나 화려하게 만드냐?"였다. 신의 빛. 중세의 미술이 유난히 번쩍번쩍거린 이유, 또한 건축 양식이 하늘로 치솟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아테네 학당>에 심지어 조로아스터敎의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까지 그려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위의 세부 그림은 교양으로써의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봤을 것이다. 굳이 도상학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한 눈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나타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은 하늘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현실주의자로 묘사된다. 자연계와 과학의 탐구를 상징하는 손바닥을 보여준다. 둘의 손이 서로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는 이유이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군중'이 아니라, '제자'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누굴 닮은 것 같지 않은가? <아테네 학당>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단박에 눈치 챈 사람은 눈썰미가 정말 좋은 사람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실 라파엘로가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플라톤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을 그려 넣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앞서 5부에 걸쳐 살펴본 레오나르도는 사실 둘 중 하나의 모델이 된다면 당연 아리스토텔레스 쪽에 가깝지 않은가.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콜라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가. 그의 상징은 중세이다. 플라톤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새로 연구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종교와 반대되는 개념은 '관념'이다. 철저한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 르네상스 시기에 일어난 가톨릭의 변화와 코드를 같이 하여 사유하면 왜 라파엘로가 플라톤에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을 붙여줬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 같은 노란 옷을 입은 테오프라스토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에게 사사를 받았다. 그리고 아래에 뒷통수만 보이는 이가 에피쿠로스, 그 옆에 육체의 쾌락이 정신적 쾌락보다 우위에 있다는 바람직한 이론이 창시자 아리스티포스
[The School of Athens] -
Euclid, Zarathustra, Ptolemaeos, & Raffaello Sanzio - Raffaello Sanzio
콤파스를 들고 칠판에다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는 유클리트, 그의 주위에는 엠페도클레스. 에피카르모,아르키타스, 등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이다
별이 반짝이는 천구를 한 손으로 받쳐든 조로아스타(Zarathushtra), 지구를 두 손으로 든 사람은 천동설을 주장한 푸토레마이오스 (Claudios Ptolemaeos)
검은 모자를 쓴 라파엘과 그의 친구인 흰 모자를 쓴 화가 소도마이다
플로티누스 -플라톤의 사사에 깊이 감동하였고,이후 플라톤 철학의 해설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아테네 학당>에서 재미있게 봐야 하는 부분이 두 개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모임들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당신은 이 그림을 확대해서 살펴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프레스코畵에서 우리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위의 그림을 잘 보라. 대번에 알아차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측에서 두 번째 인물. 바로 라파엘로이다. 잘 모르겠다면 이 포스트의 맨 위에 올린 자화상을 보고, 다시 한 번 보면 된다.
그러면 또 한 명의 사람은 누구일까? 라파엘로의 연인인 마르게리타이다. 그녀는 전체 그림의 좌측에서 하얀색 옷을 입고 우리를 바라본다. 가만히 보면 라파엘로는 상당한 재치를 지닌 화가라는 사실에 동감할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서 관객들을 조용히 관조하는 그의 모습. 어딘가 <월리를 찾아라>를 생각나게 만들지 않는가? 표정을 살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이 대가들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그려놓았지만 자신은 라파엘로 그 자신 그대로를 그렸다. 얼마나 큰 자부심이었는지 짐작이 가는가.
하지만 저 부분의 주인공은 사실 라파엘로가 아니다.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리고 약간은 탈모가 있는 노인은 르네상스 시대에 플라톤과 함께 가장 많이 부각된 인물이다. 우리는 앞서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이 '기하학'을 잘 이해하지 못해 고뇌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아봤었다.
중세에서 이어져 오는 관습에 따르면 화가는 기술직이었고,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복잡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러한 그림을 더욱 쉽게 그리기 위한 형식적 전범들은 있었지만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할 '필요'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중세 미술은 어딘가 정지된 느낌을 준다고도 했다.
그 과도기였던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을 괴롭혔던 '기하학'의 주인공 유클리드이다. 라파엘로는 유클리드의 얼굴을 브라만테의 것으로 그려 놓았다. 그는 지금 땅바닥에 두꺼운 종이를 하나 깔아놓고 컴퍼스로 기하학을 설명하고 있다.
왕에게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 오늘날 우리에게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불변진리의 명언을 제공한 주인공. 기하학을 잘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를 한 번 쯤은 수학책에서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최대공약수 말이다. 이를 지금도 '유클리드 호제법'이라는 용어로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본을 들고 있는 사람과 천체를 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천체를 든 노인이 누군지 금방 알아낸 사람 있을 것이다.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이다. 천 년이 넘도록 서양의 모든 사람들에게 천동설을 믿게 한 천문학자. 그리고 지구본은 차라투스트라가 들고 있다. 조로아스터敎의 창시자 말이다.
흰 옷을 입고 팔장을 낀 플라톤의 애제자 크세노크라테스, 존재론에 심취했다.
왼쪽부터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소크라테스의 열성적인 제자 아이스케네스, 소크라테스의 제자 이자 군인이자 정치가인 알키비아데스,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역사저술가인 크세노폰,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알렉산더 대왕과 지금까지 열거한 제자들 앞에서 열강 중인 대머리의 소크라테스이다.
상체를 벗고있는 사람이 디아고라스 그리고 그 뒤에 머리만 빼꼼이 보이는 사람이 소피스트학파의 고르기아스 그리고 그 옆으로 크리티아스
철학의 목적은 자연과의 일치에 있다고 역설한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녹색 모자)과 원자론을 주장한 데모클이토스(월계관)
[The School of Athens] - Pythagoras, Margherita & Heraclitus - Raffaello Sanzio
왼쪽 부터 해시계를 발명한 아낙사만드로스, 얼굴색이 검은 사람이 단일지성론을 주장한 이슬람의 철학자 아베로에즈, 열심히 무언가를 책에 적고 있는 사람이 피타고라스, 그리고 그에게 칠판을 내밀어 보이는 사람이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와 그 왼쪽에 책 같은 것을 펴들고 약간 상체를 비틀고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이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는 말을 남긴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만물은 유전한다"고 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미켈란젤로을 모델로 하고 있다
만물의 근원이 '숫자'라고 주장한 피타고라스가 여기 있다. 왼쪽의 하얀색 옷을 입은 노인. 그의 사후에 피타고라스 학파가 설립되었고, 흔히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종교 단체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에 관한 모든 전설은 그 때부터 나온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금욕을 하면서 수학과 음악을 연구했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워낙 유명하다. '천구天球들의 음악'이라고 해서 그가 주장한 것이 하나 있는데, 사뭇 흥미롭다.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음악 소리라는 뜻이다.
모든 고체는 움직일 때에 조화로우면서도 정갈한 음악 소리를 내게 되며, 이것이 우주의 조화라는 것이다. 이것을 천체에까지 확대해서 그가 주장한 것은 "천체들의 집합적인 소리가 천구들의 음악을 만든다."였다. 이를 들을 수 없으니 애석할 뿐이다.
\그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는 두 명의 학자들 모습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 라파엘로의 애인도 이 부분에 그려져 있다. '마르게리타'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마치 르네상스 화가들이 화폭에 그리던 천사를 닮았다. 우측에서 불편한 자세로 고뇌하고 있는 학자는 최근에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기원전 6세기경의 학자로 세상의 원질이 '불'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는 생성과 변화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내린 결론이자 명언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히 의미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모든 상황은 변하며 심지어 익숙한 것 같은 상황도 실은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것. 중국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흘러가는 황허를 보며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말을 했다. 황허의 중간 정도 되는 곳에 '호구 폭포'라는 것이 있는데, 강폭이 1/10으로 줄어들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물살의 세기가 가히 굉장하다. 그곳으로 떨어져 하류로 흐른 물고기는 이곳으로 다시 올라오기 위해 호구 폭포의 위를 향해 도약을 한다.
하지만 워낙 강한 물살 때문에 "아가미가 벌어져" 다시 떨어진다. 이를 거슬러 올라온 물고기는 훗날 용이 된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한 번 흐른 물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동양철학과 연관되었고, 최근 동양을 주목하고 있는 서양의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려운 말을 굉장히 많이 한 철학자이다. 하지만 동양철학으로 돌아와서 장자, 노자 등의 고서古書를 읽어보면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애매모호한 표현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그를 '스코테이노스'라고 부른다. '어두운 철학자'라는 뜻이다.
물론 그에게도 어트리뷰트가 있다. 하나는 로댕의 '생각하는 나상'처럼 심각한 고뇌에 빠진 그가 어둠에 둘러싸인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있거나 지구본 혹은 지도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자였는지는 이 어트리뷰트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미켈란젤로이다
[The School of Athens] - Alexander the Great & Socrates - Raffaello Sanzio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으면 그도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왼편의 '장군' 같은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상대방의 무지無知를 폭로한 통쾌한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원래 석공이었다. 아버지가 조각가였기 때문에 아마 가업을 이을 생각이었나보다.
문답법, 즉 디알렉티케(Dialektike)를 사용하면서 엄격한 논쟁을 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 앞에서는 애매모호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전혀 공격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미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부폐한 소피스트들을 공격한 것은 좋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성향을 폴리스에서는 그다지 좋게 바라보지 않았고, 결국에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아테네가 붕괴되었고, 불경과 타락죄로 고소당한 것이다. 이상한 신을 만들어 섬겼으며, 청년들에게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그를 위험 인물로 지목한 것은 기존 보수적인 세력이 취하는 정치적 태도로써는 지극히 역사적이며 당연했던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희생양이 되기로 결심했고, 결국 스스로 헴록을 마시고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서양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수제자 플라톤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알렉산더 대왕에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무언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은 어째서 <아테네 학당>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는 알다시피 사상가가 아니다. 하지만 동서양의 접촉으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그의 시대부터 약 300년의 그리스 시대를 이른바 '헬레니즘'이라고 한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미술과 종교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앞서 컴퍼스를 들고 등장했던 유클리드, 그리고 우리에게 "유레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르키메데스가 있다.
지리시간에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에라토스테네스. 그는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측정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도 헬레니즘 시대의 인물. 이 시기에는 쾌락주의인 에피쿠로스派와 금욕주의의 스토아派가 서로 양립하였는데, 알다시피 스토아派는 로마와 가톨릭敎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이 모든 것의 근원지로써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그는 진정으로 <아테네 학당>에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었던 것이다.
[The School of Athens] - Diogenes - Raffaello Sanzio
디오게네스, 견유학파의 한사람으로 자족과 무치가 행복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반 문화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실천하였다. 키니코스학파의 창시자이다
사실 <아테네 학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 정중앙에서 거의 반라로 계단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노인이다. 사람들은 생각할 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계단까지 걸어오는 형상인데, 과연 그들의 무리가 자신에게 오면 이 노인은 자리를 비켜줄 것인가? 아니면 무리가 그를 에둘러 갈 것인가?
노인의 이름은 디오게네스이다. 거리낌 없을 것 같은 그는 중국 진晋나라 시대의 죽림칠현을 떠올리게 만들지 않은가. 개가 들어가서 잠을 자는 '통'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퀴닉이었다. 그리스어로 퀴온(Kyon)이 '개가 사는 통'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를 콕 집어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원시주의'에 가깝다. 그는 평소에도 이런 말을 하고 다녀서 사람들의 관심을 샀는데, 평생 한 벌의 옷과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만 썼다고 한다. "아무런 부족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 앞서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도 신神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3대 사상은 이거다. 첫째, 아스케시스(askesis)는 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도록 훈련하는 것. 둘째, 아나이데이아(anaideia)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마지막,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는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들도 동양 사상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것이 서양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었을리 없다. 게다가 그는 알렉산더 대왕마저 별 어려움 없이 상대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다 이루게 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귀를 긁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 좀 비키시오. 당신이 해를 가리지 않소." 그를 유럽의 화가들이 자주 테마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반라의, 거리낌 없을 것 같은 인상의 노인이 등장했다면 그를 어느 정도 '디오게네스'라고 확정하고 그림을 읽어가도 무방할 정도이다
[Disputation of the Holy Sacrament] Raffaello Sanzio
'서명의 방'에는 <아테네 학당> 외에도 두 개의 벽화가 더 그려져 있었다. 밑변이 8m에 이르는 <성체논의/성사토론>는 한눈에 봐도 2단 구조를 이루고 있다. 상단에는 구약(왼쪽)과 신약(오른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천사가 배치되어 있고, 하단에는 교회의 성인聖人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의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가톨릭 성당에서 미사 중에 하는 "성찬의 전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도를 미술사가들은 굉장히 중요하게 바라봤다. 성체합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 대각선은 물론이고, 바로 위에 있는 예수까지 이어지는 점들을 연구해보면 안정적인 구성의 비밀이 밝혀진다.
이 벽화가 그려진 벽은 아치형이다. 아치에 역逆모양의 반원을 또 하나 그려넣으면 평면에 상당한 입체감이 생긴다. 게다가 건축물 안에 또 하나의 세계를 그려넣은 형태가 아니라, 교회 건축물을 그려넣은 형태이기 때문에 인물들 하나하나는 마치 높고 견고한 기둥처럼 단단해보인다.
그 비밀은 역逆모양의 반원, 즉 금색으로 물든 반원 모양에 선이 그어져 있는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 역시 <아테네 학당> 못지 않은 대단한 그림이다.
[Parnassus] Raffaello Sanzio
<파르나수스>는 라파엘로의 재치가 보이는 작품이다. 그리스 코린토스 만灣 북쪽에 있는 높이 2,457m의 파르나수스 산에는 아폴론과 아홉 명의 무사가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판 '노아의 홍수'인 데우칼리온 신화에도 이 산이 나온다. 제우스가 지상에 홍수를 보냈는데, 데우칼리온이 탔던 배만 둥둥 떠 있다가 물이 마르자 파르나수스 산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
실제 노아의 홍수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아라랏 산 꼭대기에 방주가 걸려 있다. <파르나수스>는 그나마 밑변이 짧았다. 620cm. 하지만 문제는 하단에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이 있었다는 것. 자칫 그림의 구도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젊은 라파엘로는 물론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기지를 발휘했다. 창문 위에 언덕을 그려 언덕이 돌출되는 효과를 낸 것이다.
불리함을 유리함을 끌고 간 통쾌한 사례이다. <파르나수스>에는 당연히 산의 주인인 아폴론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에서 그는 역시 음악을 켜고 있으며, 아홉 명의 뮤즈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의복과 악세사리, 악기를 보면 모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의 연구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는 보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이는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니, 주의 깊게 들을 것. 먼저 왼쪽으로 가자. 어깨를 드러낸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녀는 사포이다. 그녀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아폴론과 뮤즈들이 산의 정상에서 노래를 하며 춤을 추고 있는 예술의 세계로 향하라고 조언한다.
그곳에는 위대한 시인 단테도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암송하며, 또한 춤을 추면서 척박한 삶 속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그곳에는 기분 좋은 광기들이 있어 한동안 사람들은 예술에 미칠 수가 있다.
하지만 산을 오르면 산을 내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잡아 끄는 오른쪽의 늙은 노인은 '현실'을 상징한다. 결국에 우리가 돌아와야 하는 곳은 현실이다. 한없이 예술을 즐기면서 감회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다.
이성이 잡아 끄는 곳. 늙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만큼이나 우리의 얼굴 역시 그렇게 만드는 힘든 현실. 조그마한 행복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더 힘들어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파르나수스>는 우리에게 삶의 주기를 말해준다..
Pope Julius Ⅱ- Raffaello Sanzio
"회화 예술에서 대가를 이루는 사람은 그가 남긴 작품이 찬탄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화가 자신도 '또 하나의 신神'이라는 평판을 누리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의식에 지대한 자부심을 남긴 <회화론>의 저자 알베르티의 말이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모델을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화가들이 어려워했다. 그러자 "그러면 조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라고 충고해주기도 한 그의 말은 라파엘로의 시대에 이르러서 어느덧 고전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라파엘로는 신神이라고 굳이 불리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가였다. 모든 것은 탄탄대로였고, 교황과의 친분마저 좋았기 때문에 평판은 이탈리아 전역과 플랑드르,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까지 퍼졌다.
우리는 앞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을 지켜본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가 자신의 퐁텐블로 성城에 라파엘로의 작품도 전시했다는 사실을 알아봤었다. 미술사가들과 미술을 좋아하는 대중들은 굳이 르네상스 3대 거장 사이에 암묵적인 서열을 설정하지만 사실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유희일 뿐이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라파엘로보다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들의 삶과 작품의 독특함 때문이었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대공의 성모>를 나란히 놓고 보라. 각자 고유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전범이 되어준 작품들이다.
1514년. 바티칸의 스탄차를 리모델링하는 작업 중에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0세.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 사업, 그 시작을 맡은 야심찬 노인이었다. 교황도 바뀌어 있었다. 라파엘로를 아꼈지만 미켈란젤로는 유독 변덕스럽게 대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도 브라만테와 같은 일흔 살의 나이로 1513년 선종했었다.
율리우스 2세의 목표는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교황의 권위를 앞세워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를 불렀다. 라파엘로는 그의 선종 1년 전에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를 만들어줬다. 심술이 가득할 것 같은 그의 표정에는 고뇌와 걱정 역시 가득하다.
프랑스, 베네치아, 에스파냐 등의 세력들과 외교 줄다리기를 하며 교황청의 대외적 영향력을 높이고자 그의 말년 10년을 교황으로 지내며 생긴 주름이다. 그는 고독해보인다. 중세시대였다면 저 그림에는 온갖 보석과 금, 은, 그리고 울트라마린이 넘쳐 났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한낱 상인의 아내를 <모나리자>라는 위대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것에 반해 라파엘로는 교황의 모습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의자의 귀퉁이를 꽉 쥐고 있는 왼손에서는 율리우스 2세의 불안증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라파엘로는 평소 율리우스 2세를 그렇게 심중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상체를 벗고있는 사람이 디아고라스 그리고 그 뒤에 머리만 빼꼼이 보이는 사람이 소피스트학파의 고르기아스 그리고 그 옆으로 크리티아스
철학의 목적은 자연과의 일치에 있다고 역설한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녹색 모자)과 원자론을 주장한 데모클이토스(월계관)
[The School of Athens] - Pythagoras, Margherita & Heraclitus - Raffaello Sanzio
왼쪽 부터 해시계를 발명한 아낙사만드로스, 얼굴색이 검은 사람이 단일지성론을 주장한 이슬람의 철학자 아베로에즈, 열심히 무언가를 책에 적고 있는 사람이 피타고라스, 그리고 그에게 칠판을 내밀어 보이는 사람이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와 그 왼쪽에 책 같은 것을 펴들고 약간 상체를 비틀고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이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는 말을 남긴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만물은 유전한다"고 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미켈란젤로을 모델로 하고 있다
만물의 근원이 '숫자'라고 주장한 피타고라스가 여기 있다. 왼쪽의 하얀색 옷을 입은 노인. 그의 사후에 피타고라스 학파가 설립되었고, 흔히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종교 단체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에 관한 모든 전설은 그 때부터 나온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금욕을 하면서 수학과 음악을 연구했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워낙 유명하다. '천구天球들의 음악'이라고 해서 그가 주장한 것이 하나 있는데, 사뭇 흥미롭다.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음악 소리라는 뜻이다.
모든 고체는 움직일 때에 조화로우면서도 정갈한 음악 소리를 내게 되며, 이것이 우주의 조화라는 것이다. 이것을 천체에까지 확대해서 그가 주장한 것은 "천체들의 집합적인 소리가 천구들의 음악을 만든다."였다. 이를 들을 수 없으니 애석할 뿐이다.
\그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는 두 명의 학자들 모습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 라파엘로의 애인도 이 부분에 그려져 있다. '마르게리타'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마치 르네상스 화가들이 화폭에 그리던 천사를 닮았다. 우측에서 불편한 자세로 고뇌하고 있는 학자는 최근에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기원전 6세기경의 학자로 세상의 원질이 '불'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는 생성과 변화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내린 결론이자 명언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히 의미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모든 상황은 변하며 심지어 익숙한 것 같은 상황도 실은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것. 중국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흘러가는 황허를 보며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말을 했다. 황허의 중간 정도 되는 곳에 '호구 폭포'라는 것이 있는데, 강폭이 1/10으로 줄어들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물살의 세기가 가히 굉장하다. 그곳으로 떨어져 하류로 흐른 물고기는 이곳으로 다시 올라오기 위해 호구 폭포의 위를 향해 도약을 한다.
하지만 워낙 강한 물살 때문에 "아가미가 벌어져" 다시 떨어진다. 이를 거슬러 올라온 물고기는 훗날 용이 된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이다. 한 번 흐른 물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동양철학과 연관되었고, 최근 동양을 주목하고 있는 서양의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려운 말을 굉장히 많이 한 철학자이다. 하지만 동양철학으로 돌아와서 장자, 노자 등의 고서古書를 읽어보면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애매모호한 표현 때문에 서양 사람들은 그를 '스코테이노스'라고 부른다. '어두운 철학자'라는 뜻이다.
물론 그에게도 어트리뷰트가 있다. 하나는 로댕의 '생각하는 나상'처럼 심각한 고뇌에 빠진 그가 어둠에 둘러싸인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있거나 지구본 혹은 지도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자였는지는 이 어트리뷰트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미켈란젤로이다
[The School of Athens] - Alexander the Great & Socrates - Raffaello Sanzio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으면 그도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왼편의 '장군' 같은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상대방의 무지無知를 폭로한 통쾌한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원래 석공이었다. 아버지가 조각가였기 때문에 아마 가업을 이을 생각이었나보다.
문답법, 즉 디알렉티케(Dialektike)를 사용하면서 엄격한 논쟁을 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 앞에서는 애매모호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전혀 공격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미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부폐한 소피스트들을 공격한 것은 좋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성향을 폴리스에서는 그다지 좋게 바라보지 않았고, 결국에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에 아테네가 붕괴되었고, 불경과 타락죄로 고소당한 것이다. 이상한 신을 만들어 섬겼으며, 청년들에게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그를 위험 인물로 지목한 것은 기존 보수적인 세력이 취하는 정치적 태도로써는 지극히 역사적이며 당연했던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희생양이 되기로 결심했고, 결국 스스로 헴록을 마시고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서양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수제자 플라톤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알렉산더 대왕에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무언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은 어째서 <아테네 학당>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는 알다시피 사상가가 아니다. 하지만 동서양의 접촉으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 그의 시대부터 약 300년의 그리스 시대를 이른바 '헬레니즘'이라고 한다.
과학과 철학, 그리고 미술과 종교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앞서 컴퍼스를 들고 등장했던 유클리드, 그리고 우리에게 "유레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아르키메데스가 있다.
지리시간에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에라토스테네스. 그는 지구의 둘레를 정확하게 측정한 '최초'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도 헬레니즘 시대의 인물. 이 시기에는 쾌락주의인 에피쿠로스派와 금욕주의의 스토아派가 서로 양립하였는데, 알다시피 스토아派는 로마와 가톨릭敎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
이 모든 것의 근원지로써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그는 진정으로 <아테네 학당>에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었던 것이다.
[The School of Athens] - Diogenes - Raffaello Sanzio
디오게네스, 견유학파의 한사람으로 자족과 무치가 행복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반 문화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실천하였다. 키니코스학파의 창시자이다
사실 <아테네 학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 정중앙에서 거의 반라로 계단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노인이다. 사람들은 생각할 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계단까지 걸어오는 형상인데, 과연 그들의 무리가 자신에게 오면 이 노인은 자리를 비켜줄 것인가? 아니면 무리가 그를 에둘러 갈 것인가?
노인의 이름은 디오게네스이다. 거리낌 없을 것 같은 그는 중국 진晋나라 시대의 죽림칠현을 떠올리게 만들지 않은가. 개가 들어가서 잠을 자는 '통'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퀴닉이었다. 그리스어로 퀴온(Kyon)이 '개가 사는 통'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를 콕 집어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원시주의'에 가깝다. 그는 평소에도 이런 말을 하고 다녀서 사람들의 관심을 샀는데, 평생 한 벌의 옷과 지팡이 하나, 자루 하나만 썼다고 한다. "아무런 부족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 앞서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도 신神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3대 사상은 이거다. 첫째, 아스케시스(askesis)는 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도록 훈련하는 것. 둘째, 아나이데이아(anaideia)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마지막,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는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들도 동양 사상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것이 서양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었을리 없다. 게다가 그는 알렉산더 대왕마저 별 어려움 없이 상대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다 이루게 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귀를 긁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거, 좀 비키시오. 당신이 해를 가리지 않소." 그를 유럽의 화가들이 자주 테마로 사용하진 않았지만 반라의, 거리낌 없을 것 같은 인상의 노인이 등장했다면 그를 어느 정도 '디오게네스'라고 확정하고 그림을 읽어가도 무방할 정도이다
[Disputation of the Holy Sacrament] Raffaello Sanzio
'서명의 방'에는 <아테네 학당> 외에도 두 개의 벽화가 더 그려져 있었다. 밑변이 8m에 이르는 <성체논의/성사토론>는 한눈에 봐도 2단 구조를 이루고 있다. 상단에는 구약(왼쪽)과 신약(오른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천사가 배치되어 있고, 하단에는 교회의 성인聖人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의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가톨릭 성당에서 미사 중에 하는 "성찬의 전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도를 미술사가들은 굉장히 중요하게 바라봤다. 성체합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 대각선은 물론이고, 바로 위에 있는 예수까지 이어지는 점들을 연구해보면 안정적인 구성의 비밀이 밝혀진다.
이 벽화가 그려진 벽은 아치형이다. 아치에 역逆모양의 반원을 또 하나 그려넣으면 평면에 상당한 입체감이 생긴다. 게다가 건축물 안에 또 하나의 세계를 그려넣은 형태가 아니라, 교회 건축물을 그려넣은 형태이기 때문에 인물들 하나하나는 마치 높고 견고한 기둥처럼 단단해보인다.
그 비밀은 역逆모양의 반원, 즉 금색으로 물든 반원 모양에 선이 그어져 있는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 역시 <아테네 학당> 못지 않은 대단한 그림이다.
[Parnassus] Raffaello Sanzio
<파르나수스>는 라파엘로의 재치가 보이는 작품이다. 그리스 코린토스 만灣 북쪽에 있는 높이 2,457m의 파르나수스 산에는 아폴론과 아홉 명의 무사가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판 '노아의 홍수'인 데우칼리온 신화에도 이 산이 나온다. 제우스가 지상에 홍수를 보냈는데, 데우칼리온이 탔던 배만 둥둥 떠 있다가 물이 마르자 파르나수스 산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
실제 노아의 홍수에서는 널리 알려진대로 아라랏 산 꼭대기에 방주가 걸려 있다. <파르나수스>는 그나마 밑변이 짧았다. 620cm. 하지만 문제는 하단에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이 있었다는 것. 자칫 그림의 구도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젊은 라파엘로는 물론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기지를 발휘했다. 창문 위에 언덕을 그려 언덕이 돌출되는 효과를 낸 것이다.
불리함을 유리함을 끌고 간 통쾌한 사례이다. <파르나수스>에는 당연히 산의 주인인 아폴론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에서 그는 역시 음악을 켜고 있으며, 아홉 명의 뮤즈가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의복과 악세사리, 악기를 보면 모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의 연구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는 보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이는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니, 주의 깊게 들을 것. 먼저 왼쪽으로 가자. 어깨를 드러낸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그녀는 사포이다. 그녀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아폴론과 뮤즈들이 산의 정상에서 노래를 하며 춤을 추고 있는 예술의 세계로 향하라고 조언한다.
그곳에는 위대한 시인 단테도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암송하며, 또한 춤을 추면서 척박한 삶 속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그곳에는 기분 좋은 광기들이 있어 한동안 사람들은 예술에 미칠 수가 있다.
하지만 산을 오르면 산을 내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잡아 끄는 오른쪽의 늙은 노인은 '현실'을 상징한다. 결국에 우리가 돌아와야 하는 곳은 현실이다. 한없이 예술을 즐기면서 감회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다.
이성이 잡아 끄는 곳. 늙은 노인의 주름진 얼굴만큼이나 우리의 얼굴 역시 그렇게 만드는 힘든 현실. 조그마한 행복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더 힘들어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파르나수스>는 우리에게 삶의 주기를 말해준다..
Pope Julius Ⅱ- Raffaello Sanzio
"회화 예술에서 대가를 이루는 사람은 그가 남긴 작품이 찬탄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화가 자신도 '또 하나의 신神'이라는 평판을 누리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의식에 지대한 자부심을 남긴 <회화론>의 저자 알베르티의 말이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모델을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화가들이 어려워했다. 그러자 "그러면 조각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습니다."라고 충고해주기도 한 그의 말은 라파엘로의 시대에 이르러서 어느덧 고전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라파엘로는 신神이라고 굳이 불리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가였다. 모든 것은 탄탄대로였고, 교황과의 친분마저 좋았기 때문에 평판은 이탈리아 전역과 플랑드르,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까지 퍼졌다.
우리는 앞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임종을 지켜본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가 자신의 퐁텐블로 성城에 라파엘로의 작품도 전시했다는 사실을 알아봤었다. 미술사가들과 미술을 좋아하는 대중들은 굳이 르네상스 3대 거장 사이에 암묵적인 서열을 설정하지만 사실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유희일 뿐이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라파엘로보다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그들의 삶과 작품의 독특함 때문이었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대공의 성모>를 나란히 놓고 보라. 각자 고유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전범이 되어준 작품들이다.
1514년. 바티칸의 스탄차를 리모델링하는 작업 중에 브라만테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0세.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 사업, 그 시작을 맡은 야심찬 노인이었다. 교황도 바뀌어 있었다. 라파엘로를 아꼈지만 미켈란젤로는 유독 변덕스럽게 대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도 브라만테와 같은 일흔 살의 나이로 1513년 선종했었다.
율리우스 2세의 목표는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교황의 권위를 앞세워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를 불렀다. 라파엘로는 그의 선종 1년 전에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를 만들어줬다. 심술이 가득할 것 같은 그의 표정에는 고뇌와 걱정 역시 가득하다.
프랑스, 베네치아, 에스파냐 등의 세력들과 외교 줄다리기를 하며 교황청의 대외적 영향력을 높이고자 그의 말년 10년을 교황으로 지내며 생긴 주름이다. 그는 고독해보인다. 중세시대였다면 저 그림에는 온갖 보석과 금, 은, 그리고 울트라마린이 넘쳐 났을 것이다.
신기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한낱 상인의 아내를 <모나리자>라는 위대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킨 것에 반해 라파엘로는 교황의 모습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의자의 귀퉁이를 꽉 쥐고 있는 왼손에서는 율리우스 2세의 불안증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라파엘로는 평소 율리우스 2세를 그렇게 심중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Pope Leo Ⅹ with Cardinals Giulio de' Medici and Luigi de' Rossi] Raffaello Sanzio
앞서 그는 <대공의 성모>와 <갈라테아의 승리>로 근 19세기까지 이어지는 표현의 전범을 창조했다고 언급했었다. 성모와 요정은 이후에도 거의 인상주의 무렵까지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가 시작된 지점에 라파엘로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영국에서는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극복하고자, 라파엘로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자는 양심적 화가들의 모임이 있었다. 라파엘 전파前派말이다. 살롱展에 출품하여 수상한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인상주의 편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적이 있다.) 라파엘로가 만들어놓은 '이상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라파엘로를 그러한 점에서만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의 일면만 보고 전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생각과도 같다. <율리우스 2세 초상화>와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을 한 번 보라. 저곳에서 이상화된 것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색채의 사용도 무겁고 짙어졌으며, 무엇보다도 "예전의" 라파엘로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이 그를 새로운 작품 세계로 잡아 끌었던 것일까?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를 거의 복사하듯 따라했으며, 모방에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여 독창적인 '라파엘레스크'라는 양식을 창조했다. 초기에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그림을 그릴 줄도 알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관찰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만의 방식을 따른 고집스러운 성격이었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돌 속에서 형상을 찾아 그것을 그대로 표출시킬 줄 아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조각가였다. 라파엘로는 그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체화'시킬 수 있는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방은 창조의 아버지이다. 르누아르, 모네, 그리고 시슬레를 비롯한 아카데미派의 이단아들도 그들의 초기에는 모두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고대의 조각상들을 모방하며 자신만의 스케치 방식을 만들었다.
그들은 관전파(아카데미派)의 지도자격인 앵그르마저 위대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워낙 특이하고 강렬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웬만하면 잘 잊어버리지 않는 마티스도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이거 마티스 맞아?"라는 말을 할 만큼 이전의 작품들을 따라 그렸었다. 이따금 방문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블로그에서 그들의 연대기를 살펴봐도 모방을 통해 조금씩 그들만의 방식이 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화가 라파엘로는 모방과 흡수에 있어서는 거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그는 한 번 보고 익힌 것을 쉽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빠른 드로잉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티칸 스텐차들을 꾸미기 위해 실물 크기의 습작을 그릴 때에도 그것을 보고 있던 라파엘로 공방의 제자들이 탄성을 지를 정도의 속도였다.
그가 <갈라테아의 승리>를 그려주기 위해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에 있을 때에 만난 베네치아派 화가가 한 명 있다.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 : 1485~1547). 그에게 채화법을 익히게 된 라파엘로는 이미 알고 있던 스푸마토 기법과 함께 다양한 채색의 위력까지 갖춘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라파엘로에게 모자란 것은 '경험' 뿐이었을까? 1514년에 <갈라테아의 승리>를 마무리하고 다시 로마에서의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그가 1518년부터 1년간 교황 레오 10세를 위해 그려준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에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깊은 색채, 그리고 현실감이 묻어난다. 그가 우르비노에서 피렌체로 거처를 옮기며 익히게 된 특유의 화풍. 그 변화가 가히 놀랍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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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에는 미켈란젤로를, 초상화에는 델 피옴보. 타인의 작품을 체습한 결과, 그의 화풍은 신기하리만치 다양해졌다. 미술사가들은 라파엘로가 만약 6~70세까지 살았더라면 어떠한 기적을 일궈냈을까 굉장히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요절한 그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La Donna Velata] Raffaello Sanzio
이전부터 쭉 포스트를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혹시 이 그림이 '반 에이크'의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할 것이다. <베일을 쓴 여인>은 1515년 작품이다. 그리고 미술사가들은 이 여인이 아마도 라파엘로의 애인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젊은 여인의 초상화>라는 라파엘로 후기 작품과 똑같은 여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그녀는 <아테네 학당>에 등장했던, 라파엘로와 함께 유일하게 우리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라고 술회된다.
<젊은 여인의 초상화>는 반라의 여인이 전통적인 모양의 두건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녀의 왼팔에는 얇은 완장(밴드)이 하나 채워져 있다. 그곳에 "Rapahel Urbinas"라고 적혀 있다. 이 점에서 그녀가 라파엘로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여기에 기인한 주장이 바로 '애인설'이다. 또한 미술사가들은 그녀가 오른팔로 왼쪽 가슴 밑부분을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 그림이 연인의 포즈를 가장한 하나의 '은폐'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아마도 유방암을 앓고 있었을 것이며, 종양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오른손으로 살짝 가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추측일 뿐이다.
<베일을 쓴 여인>에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도 실제로 <젊은 여인의 초상화>에 나온 여인과 거의 일치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든 도상학적 관점에서 살피는 것 외에 겉으로 드러난 라파엘로의 표현법에 주목하는 것이 이 그림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알베르티의 <회화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색채보다는 형태에 집중했었다. 초기에는 기하학적인 소묘 방식을 체습하기 위해서 여러 도구들을 이용했었다.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원근법 측정 도구를 봐도 그들이 얼마나 거리에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알베르티는 심지어 "소묘만 잘 해도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색채는 중세에나 유행했던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굳이 반짝이는 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금은보화를 사용하지 말고 화가 자신의 테크닉을 이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은 원근법은커녕 색감의 사용에 있어서도 부진했었다.
유화를 들여온 것도 북유럽보다 늦었으며, 풍부한 색감은 오히려 플랑드르 화가들이 훨씬 더 잘 구사했다. 가령, 반 에이크의 그림을 상상해보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에서는 이탈리아의 모든 화가를 통틀어도 감히 비견될 수 없는 경지의 색채 표현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베일을 쓴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라. 베일은 이미 식상해졌다. 그의 스승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결코 표현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유려한 옷감의 표현이 라파엘로의 손에서 탄생했다. 개인적인 추측인데, 이 색채법은 델 피옴보에게 들은 것을 구현한 것일 테다.
베네치아는 로마와 피렌체 못지 않은 동서 무역의 중심지였다. 아니, 무역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그곳에서 활약하던 델 피옴보는 분명 플랑드르의 화풍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도로테아의 초상화>라는 작품에도 라파엘로와 비슷한 구도의 한 여인이 화려한 깃털 옷을 입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자신의 기록에 이렇게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조각에 능통한 것에 비해 회화가 약한 것을 알고 하루는 세바스티아노에게 그림을 그리는 법에 대해서 물어봤다. 둘이 친해진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이미 베네치아에서 뛰어난 화가로 통하던 델 피옴보는 원근법을 능숙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색채에 더욱 관심이 있던 것 같다. 그의 그림에는 피렌체와 로마 화가들보다 더욱 풍부한 색채가 가득하다. 라파엘로는 언뜻 보기에도 델 피옴보보다 유려하며 빛나는 색채를 다룰 줄 알았다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Raffaello Sanzio (and probably with Giulio Romano)
브라만테의 후임으로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작업에도 참여하고, 1515년에는 고대 유물 탐사대의 총감독도 역임했다. 스탄차의 작업도 중요했지만 교황과 그의 측근들에게 초상화도 그려줘야 했다. <갈라테아의 승리>처럼 당대 유력 인사들에게도 프레스코畵나 유화를 그려줘야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공방에서는 5~60명의 도제들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라파엘로의 미완성 작품은 1516년에 추기경 지울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가 의뢰했었다. 훗날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되는 인물이다.
당시에 라파엘로는 더할 나위 없이 바빴었다. 성聖 베드로의 일생을 담은 그림의 스케치가 한창이었고, 스텐차의 작업도 하는 중이었다. 공방의 도제들 역시 각자 맡은 구역에서 로마노, 펜니, 그리고 델 콜레 등의 지시를 받으며 안료를 만들고 바탕을 칠해갔다.
무려 세 개의 궁과 한 개의 별장에서 제의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지울리오는 <나자로를 일으켜 세우다>라는 작품을 라파엘로가 아닌 델 피옴보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리고 델 피옴보는 그 작품으로 로마에서 명성있는 화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보통 큰 그림이 아니다. 높이가 4m에 육박하는 나무판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이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리는 중에 서른 일곱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들은 <그리스도의 변용>을 완성한 사람을 그의 도제이자 동료였던 로마노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구름에 휩싸여 광휘를 내고 있는 예수와 함께 공중에 떠 있는 두 사람은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이다. 예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있다.
상단 부분은 라파엘로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림은 2단 구조를 하고 있다. 밝고 고요하면서도 성스러운 상단과는 다르게 하단은 굉장히 어지럽다. 흡사 카라바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의 그림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단 중앙부에서 한 노인이 소년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다. 진홍색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사람은 예수에게로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렇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봤던 것처럼 지금 소년은 마귀에 들린 상태이다. 화폭의 왼쪽 하단은, 그래서 온통 절망의 일색이다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 Detail - Raffaello Sanzio (and probably with Giulio Romano)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소문을 알아보고 노력해봐도 치료되지 않자, 그들은 타보르(Tabor)산에 있는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치료를 부탁했다. 물론 사도들도 악마가 씌인 소년을 치료하지 못했다. 이를 모습을 바꿔 나타난 예수가 고쳐주었다는 이야기. 이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에 앞서 마니에리스모, 즉 바로크 시기로 이동하는 화풍의 중점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명암 배합이 너무나도 확연하며, 르네상스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의 과도한 움직임도 모두 마니에리스모로 향해 있다. 앞서 살펴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또한 그가 미술사가들로부터 근대 화가로 분류되는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니에리스모의 특징은 굉장한 역동성에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미술보다 정교하면서도 완벽한, 그러면서도 이상화적인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이후의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굉장히 화려하면서도 어지럽고, 또한 초월적인 인간 모습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미술사가들은 마니에리스모에서 모종의 초현실주의를 본다고도 한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변용>에 나온 세속적이면서도 과장된 움직임들을 보라.
[Pantheon, Rome, Raphael's tomb] Photo by Ricardo Andre Frantz
우리에게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가 라파엘로. 르네상스가 일궈낸 모든 역작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한, 그리하여 르네상스 안의 또 다른 신비한 세계를 선사한 젊은 화가. 그는 1520년 4월 6일, 서른 일곱의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대에 활동했던 화가이자 미술사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마르게리타와의 격렬한 정사 후에 지독한 독감에 걸렸지만 이를 의사에게 말하지 않아 잘못된 처방을 받았고, 그것이 결정적인 사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술사가들은 별다른 근거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의 병은 약 15일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는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침착했고, 재산의 일부를 마르게리타의 생활을 위해 남겼다. 또한 다른 유산들은 그와 친분이 깊었던 충복 바비에라에게 주어 생활을 이어가게 하였으며, 공방은 로마노와 펜니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운영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판테온 신전에 묻어달라는 한 장의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교황과 교황청 학자들, 고관 대작들은 물론이고 그와 친분을 가졌던 모든 이들, 특히 화가들이 큰 슬픔에 빠졌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한 젊은이가 맞이하기에는, 아니 그를 아는 이들이 거장을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죽음이었다.
교황의 명령 하에 라파엘로의 장례식은 교황 주관 국장國葬으로 치뤄졌다.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람들은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고인의 죽음을 기리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짧은 인생동안 셀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겨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의심하게 만든 시대의 위인을 떠나 보내는 자리는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베네치아의 학자이자, 시인, 문학비평가, 그리고 추기경이기도 했던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 : 1470~1547)는 라파엘로가 판테온 신전에 묻히자 그의 석관 앞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다.
Ille hic est Raff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출처] : 탕기의 아틀리에 | 탕기
[출처]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세계 Ⅰ-Raffaello Sanzio |작성자 ohyh45
[Pope Leo Ⅹ with Cardinals Giulio de' Medici and Luigi de' Rossi] Raffaello Sanzio
앞서 그는 <대공의 성모>와 <갈라테아의 승리>로 근 19세기까지 이어지는 표현의 전범을 창조했다고 언급했었다. 성모와 요정은 이후에도 거의 인상주의 무렵까지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티프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가 시작된 지점에 라파엘로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영국에서는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극복하고자, 라파엘로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자는 양심적 화가들의 모임이 있었다. 라파엘 전파前派말이다. 살롱展에 출품하여 수상한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인상주의 편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적이 있다.) 라파엘로가 만들어놓은 '이상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라파엘로를 그러한 점에서만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의 일면만 보고 전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생각과도 같다. <율리우스 2세 초상화>와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을 한 번 보라. 저곳에서 이상화된 것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색채의 사용도 무겁고 짙어졌으며, 무엇보다도 "예전의" 라파엘로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이 그를 새로운 작품 세계로 잡아 끌었던 것일까?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를 거의 복사하듯 따라했으며, 모방에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 연구하여 독창적인 '라파엘레스크'라는 양식을 창조했다. 초기에는 그의 스승 페루지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그림을 그릴 줄도 알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관찰을 통해 철저하게 자신만의 방식을 따른 고집스러운 성격이었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돌 속에서 형상을 찾아 그것을 그대로 표출시킬 줄 아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조각가였다. 라파엘로는 그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체화'시킬 수 있는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방은 창조의 아버지이다. 르누아르, 모네, 그리고 시슬레를 비롯한 아카데미派의 이단아들도 그들의 초기에는 모두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고대의 조각상들을 모방하며 자신만의 스케치 방식을 만들었다.
그들은 관전파(아카데미派)의 지도자격인 앵그르마저 위대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워낙 특이하고 강렬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웬만하면 잘 잊어버리지 않는 마티스도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이거 마티스 맞아?"라는 말을 할 만큼 이전의 작품들을 따라 그렸었다. 이따금 방문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블로그에서 그들의 연대기를 살펴봐도 모방을 통해 조금씩 그들만의 방식이 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화가 라파엘로는 모방과 흡수에 있어서는 거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그는 한 번 보고 익힌 것을 쉽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빠른 드로잉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티칸 스텐차들을 꾸미기 위해 실물 크기의 습작을 그릴 때에도 그것을 보고 있던 라파엘로 공방의 제자들이 탄성을 지를 정도의 속도였다.
그가 <갈라테아의 승리>를 그려주기 위해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에 있을 때에 만난 베네치아派 화가가 한 명 있다.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 : 1485~1547). 그에게 채화법을 익히게 된 라파엘로는 이미 알고 있던 스푸마토 기법과 함께 다양한 채색의 위력까지 갖춘 최고의 화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라파엘로에게 모자란 것은 '경험' 뿐이었을까? 1514년에 <갈라테아의 승리>를 마무리하고 다시 로마에서의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그가 1518년부터 1년간 교황 레오 10세를 위해 그려준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에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깊은 색채, 그리고 현실감이 묻어난다. 그가 우르비노에서 피렌체로 거처를 옮기며 익히게 된 특유의 화풍. 그 변화가 가히 놀랍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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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에는 미켈란젤로를, 초상화에는 델 피옴보. 타인의 작품을 체습한 결과, 그의 화풍은 신기하리만치 다양해졌다. 미술사가들은 라파엘로가 만약 6~70세까지 살았더라면 어떠한 기적을 일궈냈을까 굉장히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요절한 그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La Donna Velata] Raffaello Sanzio
이전부터 쭉 포스트를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혹시 이 그림이 '반 에이크'의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할 것이다. <베일을 쓴 여인>은 1515년 작품이다. 그리고 미술사가들은 이 여인이 아마도 라파엘로의 애인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젊은 여인의 초상화>라는 라파엘로 후기 작품과 똑같은 여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그녀는 <아테네 학당>에 등장했던, 라파엘로와 함께 유일하게 우리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라고 술회된다.
<젊은 여인의 초상화>는 반라의 여인이 전통적인 모양의 두건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녀의 왼팔에는 얇은 완장(밴드)이 하나 채워져 있다. 그곳에 "Rapahel Urbinas"라고 적혀 있다. 이 점에서 그녀가 라파엘로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여기에 기인한 주장이 바로 '애인설'이다. 또한 미술사가들은 그녀가 오른팔로 왼쪽 가슴 밑부분을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 그림이 연인의 포즈를 가장한 하나의 '은폐'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아마도 유방암을 앓고 있었을 것이며, 종양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오른손으로 살짝 가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추측일 뿐이다.
<베일을 쓴 여인>에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도 실제로 <젊은 여인의 초상화>에 나온 여인과 거의 일치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든 도상학적 관점에서 살피는 것 외에 겉으로 드러난 라파엘로의 표현법에 주목하는 것이 이 그림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알베르티의 <회화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색채보다는 형태에 집중했었다. 초기에는 기하학적인 소묘 방식을 체습하기 위해서 여러 도구들을 이용했었다.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원근법 측정 도구를 봐도 그들이 얼마나 거리에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알베르티는 심지어 "소묘만 잘 해도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색채는 중세에나 유행했던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굳이 반짝이는 색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금은보화를 사용하지 말고 화가 자신의 테크닉을 이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은 원근법은커녕 색감의 사용에 있어서도 부진했었다.
유화를 들여온 것도 북유럽보다 늦었으며, 풍부한 색감은 오히려 플랑드르 화가들이 훨씬 더 잘 구사했다. 가령, 반 에이크의 그림을 상상해보라.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에서는 이탈리아의 모든 화가를 통틀어도 감히 비견될 수 없는 경지의 색채 표현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라파엘로의 <베일을 쓴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을 보라. 베일은 이미 식상해졌다. 그의 스승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결코 표현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유려한 옷감의 표현이 라파엘로의 손에서 탄생했다. 개인적인 추측인데, 이 색채법은 델 피옴보에게 들은 것을 구현한 것일 테다.
베네치아는 로마와 피렌체 못지 않은 동서 무역의 중심지였다. 아니, 무역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그곳에서 활약하던 델 피옴보는 분명 플랑드르의 화풍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도로테아의 초상화>라는 작품에도 라파엘로와 비슷한 구도의 한 여인이 화려한 깃털 옷을 입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자신의 기록에 이렇게 남겼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조각에 능통한 것에 비해 회화가 약한 것을 알고 하루는 세바스티아노에게 그림을 그리는 법에 대해서 물어봤다. 둘이 친해진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이미 베네치아에서 뛰어난 화가로 통하던 델 피옴보는 원근법을 능숙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색채에 더욱 관심이 있던 것 같다. 그의 그림에는 피렌체와 로마 화가들보다 더욱 풍부한 색채가 가득하다. 라파엘로는 언뜻 보기에도 델 피옴보보다 유려하며 빛나는 색채를 다룰 줄 알았다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Raffaello Sanzio (and probably with Giulio Romano)
브라만테의 후임으로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 작업에도 참여하고, 1515년에는 고대 유물 탐사대의 총감독도 역임했다. 스탄차의 작업도 중요했지만 교황과 그의 측근들에게 초상화도 그려줘야 했다. <갈라테아의 승리>처럼 당대 유력 인사들에게도 프레스코畵나 유화를 그려줘야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공방에서는 5~60명의 도제들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용>이라는 라파엘로의 미완성 작품은 1516년에 추기경 지울리오 데 메디치(Giulio de Medici)가 의뢰했었다. 훗날 교황 클레멘트 7세가 되는 인물이다.
당시에 라파엘로는 더할 나위 없이 바빴었다. 성聖 베드로의 일생을 담은 그림의 스케치가 한창이었고, 스텐차의 작업도 하는 중이었다. 공방의 도제들 역시 각자 맡은 구역에서 로마노, 펜니, 그리고 델 콜레 등의 지시를 받으며 안료를 만들고 바탕을 칠해갔다.
무려 세 개의 궁과 한 개의 별장에서 제의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지울리오는 <나자로를 일으켜 세우다>라는 작품을 라파엘로가 아닌 델 피옴보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리고 델 피옴보는 그 작품으로 로마에서 명성있는 화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보통 큰 그림이 아니다. 높이가 4m에 육박하는 나무판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이 되었다. 이 그림을 그리는 중에 서른 일곱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들은 <그리스도의 변용>을 완성한 사람을 그의 도제이자 동료였던 로마노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구름에 휩싸여 광휘를 내고 있는 예수와 함께 공중에 떠 있는 두 사람은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이다. 예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있다.
상단 부분은 라파엘로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림은 2단 구조를 하고 있다. 밝고 고요하면서도 성스러운 상단과는 다르게 하단은 굉장히 어지럽다. 흡사 카라바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형태의 그림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단 중앙부에서 한 노인이 소년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다. 진홍색 옷을 입고 있는 다른 사람은 예수에게로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렇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봤던 것처럼 지금 소년은 마귀에 들린 상태이다. 화폭의 왼쪽 하단은, 그래서 온통 절망의 일색이다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 Detail - Raffaello Sanzio (and probably with Giulio Romano)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소문을 알아보고 노력해봐도 치료되지 않자, 그들은 타보르(Tabor)산에 있는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치료를 부탁했다. 물론 사도들도 악마가 씌인 소년을 치료하지 못했다. 이를 모습을 바꿔 나타난 예수가 고쳐주었다는 이야기. 이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에 앞서 마니에리스모, 즉 바로크 시기로 이동하는 화풍의 중점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명암 배합이 너무나도 확연하며, 르네상스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의 과도한 움직임도 모두 마니에리스모로 향해 있다. 앞서 살펴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또한 그가 미술사가들로부터 근대 화가로 분류되는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니에리스모의 특징은 굉장한 역동성에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미술보다 정교하면서도 완벽한, 그러면서도 이상화적인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이후의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마니에리스모 양식은 굉장히 화려하면서도 어지럽고, 또한 초월적인 인간 모습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미술사가들은 마니에리스모에서 모종의 초현실주의를 본다고도 한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변용>에 나온 세속적이면서도 과장된 움직임들을 보라.
[Pantheon, Rome, Raphael's tomb] Photo by Ricardo Andre Frantz
우리에게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가 라파엘로. 르네상스가 일궈낸 모든 역작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한, 그리하여 르네상스 안의 또 다른 신비한 세계를 선사한 젊은 화가. 그는 1520년 4월 6일, 서른 일곱의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대에 활동했던 화가이자 미술사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마르게리타와의 격렬한 정사 후에 지독한 독감에 걸렸지만 이를 의사에게 말하지 않아 잘못된 처방을 받았고, 그것이 결정적인 사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술사가들은 별다른 근거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의 병은 약 15일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는 상당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침착했고, 재산의 일부를 마르게리타의 생활을 위해 남겼다. 또한 다른 유산들은 그와 친분이 깊었던 충복 바비에라에게 주어 생활을 이어가게 하였으며, 공방은 로마노와 펜니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운영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판테온 신전에 묻어달라는 한 장의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교황과 교황청 학자들, 고관 대작들은 물론이고 그와 친분을 가졌던 모든 이들, 특히 화가들이 큰 슬픔에 빠졌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한 젊은이가 맞이하기에는, 아니 그를 아는 이들이 거장을 떠나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죽음이었다.
교황의 명령 하에 라파엘로의 장례식은 교황 주관 국장國葬으로 치뤄졌다.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람들은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어 고인의 죽음을 기리자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짧은 인생동안 셀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겨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의심하게 만든 시대의 위인을 떠나 보내는 자리는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베네치아의 학자이자, 시인, 문학비평가, 그리고 추기경이기도 했던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 : 1470~1547)는 라파엘로가 판테온 신전에 묻히자 그의 석관 앞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다.
Ille hic est Raff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출처] : 탕기의 아틀리에 | 탕기
[출처]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세계 Ⅰ-Raffaello Sanzio |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