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서울 漢陽都城: 崇禮門~彰義門
(14-3-1) 서울 漢陽都城: 崇禮門~權慄 都元帥 집터
(01) 서울 漢陽都城터. -大韓∙서울商工會議所앞 崇禮門復舊와 함께 옛 漢陽都城자리에 城郭이 있던 것을 알리기 위해 2008년 8월 상징적으로 道路바닥에 성돌[城石]을 깔아 표시했다.
(02) 서울 漢陽都城 朝鮮 太祖 5년(1396)에 築城된 서울 漢陽都城(史蹟 제10호)의 일부 구간으로 옛城郭의 흔적을 再現시키고 連續性을 유지하기 위해 2005년 10월 復元∙整備했다.
(03) 서울 漢陽都城. 원래의 성돌[城石]과 復元한 성돌(위)
(04) 李忠純 自決터. -中央日報社 앞 李忠純(1877~1907.8.3)은 忠南 洪城출신으로 1902년 육군보병 參尉(현재 少尉에 해당)로 任官되어 侍衛隊(國王 호위부대)에서 복무했으며, 1905년 軍人俱樂部를 조직하고 救國運動을 전개하다 1907년 8월 軍隊解散命令에 不服하고, 漢陽에서 日本軍과 交戰하다 負傷당해 逮捕되기 직전에 自決한 韓末의 義兵이며 殉國志士로, 1977년 建國褒章, 1990년 愛國章이 追敍되었다. (*敍: 펼 서)
(05) 昭義門터. -서울市廳에서 阿峴洞쪽으로 가는 西小門路언덕. 昭義門은 조선시대 四小門의 하나로 ‘西小門’이라도 한다. 太祖 5년(1396) 다른 城門과 함께 건립하면서 ‘昭德門’이라고 했으며, 成宗 3년(1472) 睿宗妃 韓氏의 諡號를 昭德王后라고 하면서 이를 피하려고 [昭義門]이라 했다고도 하고, 英祖 20년(1744) 門樓를 세우면서 [昭義門]으로 고쳤다고 하는 說도 있다. (*睿: 슬기 예 *諡: 호 시) 西小門洞 큰길에 있던 西南間門으로 일반적인 通行路이면서 光熙門과 더불어 屍體를 城밖으로 옮기는 通路구실했으며, 1914년 日帝强占期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都城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한다.
(06) [소덕문 터(昭德門址)] 標石 中央日報社와 大韓通運建物 사이 철탑주차장 앞에 있다. *四小門: 北東의 弘化門 후에 惠化門(속칭 東小門), 南東의 光熙門(속칭 水口門, 屍口門), 南西의 昭德門 後에 昭義門(속칭 西小門), 北西의 彰義門(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며, 世祖 3년(1457) 四小門외에 현재의 奬忠壇고개에 南小門을 개설했다가 睿宗 1년(1469) 撤去했다.
(07) [수렛골] 標識 中區 巡和洞일대의 옛이름으로 前 培材高等學校자리와 梨花女子高等學校敷地의 일부지역으로 車洞이라고도 했는데, 이곳에 숙박시설이 많아 官廳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것 때문에 ‘수렛골’이라고 했다. (*敷: 펼 부) 肅宗妃 仁顯王后 閔氏가 탄생한 곳으로, 1667년 現 中央日報社屋 맞은편 巡和빌딩駐車場터에서 태어나 15세에 王妃로 책봉되었으며, 20세까지 王子를 낳지 못하고 肅宗에게 張禧嬪을 後宮으로 천거했으나 禧嬪의 모함으로 6년동안 安國洞 感古堂에 칩거하다가 35세로 昌慶宮 景春殿에서 昇遐했다. (*遐: 멀 하)
(08) 培材公園. 1984년 培材中∙高校가 江東區 高德洞으로 이전한 뒤 조성되었다. *培材公園에는 培材學堂터와 南宮檍집터 표석이 있다. (*檍: 감탕나무 억) =培材學堂: 1885년 미국 北監理敎 宣敎師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1개월 먼저 와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房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始初로, 高宗이 1886년 [培材學堂]이라 이름 지어 간판을 써 주고, 그 해 10월 學生數는 20명으로 늘었다. 현재 培材學堂 歷史博物館으로 쓰고 있는 培材學堂 東館(서울시기념물 제16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西洋式 學校建物이다 =南宮檍(1863~1939)은 獨立運動家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高宗의 御前通譯, 宮內府 土木局長등을 지내고 1896년 <獨立新聞>에 참여하고, 獨立協會의 首席總務로 활동하다 日本警察에 逮捕∙投獄되었으며 <皇城新聞> 初代社長으로 언론활동에 종사하면서 러시아와 日本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09) 러시아聯盟 大使館 1990년 한∙러修交이후 옛培材高等學校 敷地에 설립된 大使館이다. *貞洞公園에 있는 서울 舊러시아公使館(사적 제253호)은 1896년 2월 高宗이 日本의 武力으로 세운 親日政府를 避해 러시아公使館으로 避身했던 ‘俄館播遷’의 현장이 있으며, 375일이 지나 慶運宮(德壽宮)으로 還宮했다. (*俄: 아까 아 *播: 뿌릴 파 *遷: 옮길 천)
(10) 서울 貞洞敎會 -史蹟 제256호 高宗 光武 2년(1898)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改新敎 敎會建物이며 고딕風의 붉은 벽돌건물로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北美系統의 단순화된 교회건물로,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基壇은 朝鮮時代 木造建築의 솜씨가 배어 있어 주목된다. 교회 앞마당에는 Henry Gerhard Appenzeller의 胸像이 있다. (*胸:가슴 흉) *貞洞敎會(貞洞第一敎會)는 1885년 10월, 미국 北監理敎 宣敎部 牧使 아펜젤러가 貞洞에 마련한 韓屋집에 예배실을 설치하고 監理敎會로서는 처음으로 韓國人을 위한 聖禮式을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女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信者가 예배를 드리고 洗禮를 받았다.
(11) 貞洞劇場 한국최초의 近代式劇場인 圓覺社(현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음.)의 復元理念으로 1995년에 건립한 藝術劇場이다.
(12) 貞洞 梨花女高 돌담
(13) 貞洞梨花女高 심슨紀念館 -登錄文化財 제3호 梨花女子高等學校 캠퍼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 美國人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基金으로 세운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6∙25전쟁때 붕괴되어 1960年代初 복구했으며,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構造의 근대건물로 학교건축의 草創期 西洋建築樣式을 도입했으며, 현재는 梨花博物館이다.
(14) 昌德女子中學校 *창덕여중校庭에는 1896년 프랑시(V. Colinde Plancy)公使가 지은 옛 프랑스公使館터가 있으며, 1910년 庚戌國恥때 領事館으로 格下되며 지금의 프랑스大使館이 있는 西大門區 蛤洞으로 옮겼다. (*恥: 부끄러울 치 *蛤: 조개 합)
(15) [官立法語學校터] 標石 漢城法語學校는 1895년 10월 譯官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官立 프랑스어학교로 1906년 ‘外國語學校令’에 의해 漢城外國語學校에 통합되었다가 1911년 日帝의 ‘朝鮮敎育令’에 의해 廢校되었다.
(16) 中華基督敎 漢城敎會 1912년 美國宣敎師의 夫人 C. S. 데밍(Deming)과 中國에서 온 華僑靑年 처다오신(車道心)이 京城 YMCA에서 中國人을 위한 集會를 열면서 설립되었다.
(17) 敦義門 터 敦義門은 서울 漢陽都城의 西쪽문으로, 통상 ‘西大門’이라고 불렀으며 원래 漢陽都城의 서쪽문은 太祖 5년 社稷壇부근에 세운 西箭門이었으나 世宗 4년에 都城을 고치면서 남쪽으로 옮겨 敦義門을 세웠다. 敦義門은 새로 세운 문이라고 ‘새문’ 또는 ‘新門’이라고도 했으며, 肅宗 37년(1711)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道路擴張工事와 電車路線의 複線化로 인해 强制撤去되었다. (*稷: 피 직)
(18) 서울 京橋莊 -사적 제465호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이었던 白凡 金九가 1945년 中國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暗殺될 때까지 執務室과 宿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938년 金鑛業者 崔昌學이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립한 ‘竹添莊’으로 우리나라 近代建築의 先驅者中의 한 사람인 金世演(1897~ 1975)이 설계한 1930년대 建築術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添: 더할 첨 *驅: 몰 구) 白凡의 居處로 사용되면서 근처의 개울이름을 따 ‘京橋莊’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白凡 死後 崔昌學에게 반환되고, 이후 自由中國大使館 官邸, 國軍醫療陣 駐屯地, 越南大使館 官邸등으로 사용하다가 1968년 高麗病院(現 江北三星病院)이 引受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京橋莊은 雩南 李承晩의 梨花莊,尤史 金奎植의 三淸莊과 함께 大韓民國 政府樹立 이전에 建國活動의 중심을 이룬 三大搖籃이다. (*雩: 기우제 우 *尤: 더욱 우 *搖: 흔들 요 *籃: 대바구니 람)
(19) 氣象廳 松月洞別館과 서울氣象觀測所 -등록문화재 제585호 -鍾路區 松月洞 서울 氣象觀測所는 ‘露場’이라 부르는 雨量計測室과 季節의 변화를 관측하기 위해 심은 단풍나무, 벚나무 등 氣象觀測을 위한 附屬施設도 잘 남아 있다. 京畿道立 京城測雨所 廳舍로 건립된 후 현재까지 氣象觀測用途로 사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氣象觀測歷史를 증명하는 장소로 가치가 있다. *氣象現象 觀測基準: 氣象廳이 발표하는 눈, 積雪, 서리, 얼음등의 기상현상은 각 지역 기상관측소를 기준으로 측정된다. -서울의 첫눈: 松月洞 서울氣象觀測所에서 눈이 肉眼으로 觀測될 때. -서울의 첫 얼음: 서울기상관측소 觀測金屬製容器에 담긴 물이 얼 때. -雪嶽山의 첫 얼음: 大靑峯아래 中靑待避所에서 육안으로 얼음이 관측될 때 -雪嶽山의 단풍시작: 大靑峯頂上에서 20%가량 아래로 단풍이 들었을 때
(20) 復元된 서울 漢陽都城, 仁王山자락
(21) [어니스트 베델 집터]. 月巖公園에 있는 베델이 가족과 함께 살던 집터. *Ernest Thomas Bethell(1872~1909, 韓國이름 裵說): 英國출신으로 1904년 러일戰爭이 일어나자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으로 來韓해, 그해 7월 雩岡 梁起鐸과 함께 <大韓每日申報>를 創刊하고, 이후 乙巳條約의 無效를 주장하는 등 抗日活動을 벌였으며, 1909년 서울에서 病死해 楊花津 外人墓地에 安葬되었다. (*雩: 기우제 우 *鐸: 방울 탁) 韓國의 獨立과 언론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이 인정되어 大韓民國 建國勳章 大統領章이 追敍되었다.
(22) 洪蘭坡의 [고향의 봄]노래碑 -鍾路區 松月洞 月巖近隣公園. 李元壽 作詞, 洪蘭坡 作曲의 <고향의 봄> 이외에도 <봉숭아>노래碑도 있으며, 근처에는 洪蘭坡가 末年을 보낸 집도 있다. (*蘭: 난초 난)
(23) 民家建物에 갇혀 있는 서울 漢陽都城 城壁
(24) 서울 紅把洞 洪蘭坡 家屋 -등록문화재 제90호 1930년대 獨逸 宣敎師가 지은 벽돌造 西洋式建物을 作曲家 洪蘭坡가 引受해 6년간 살던 곳으로 선생의 代表曲들이 작곡된 곳이며, 1930년대 서양식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있다. (*把: 잡을 파) 地上, 地下 各層 121㎡의 건물은 改∙補修工事를 끝내고 2007년 小公演場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5) 權慄 都元帥 집터 *權慄 -中宗 32년(1537) 京畿 江華出生 ~ 宣祖 32년(1599) -本貫; 安東 -字: 彥愼 -號: 晚翠堂 -諡號: 忠莊 (*翠: 푸를 취) 宣祖 15년(1582)에 科擧及第해 禮曹佐郞ㆍ戶曹正郞을 지내고, 宣祖 25년(1592) 壬辰倭亂때 光州牧使로 軍兵을 모집해 防禦使 郭嶸에 예속되었다. 龍仁戰鬪에서 敗해 다시 光州에 가서 1천여명의 軍兵을 모집해 南原戰鬪에서 敵을 大破하고, 羅州牧使가 되어 赴任하며 全羅道巡察使가 되었다. 全州에서 兵士 1만여명을 인솔하고 水原 禿山에 陣을 치고 적의 西進을 막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御劍을 下賜해 軍律을 嚴整하게 했다. 幸州山城에서는 三萬倭軍의 來襲을 무찔러 2만6천여명을 殺傷하는 大捷을 거두었으며, 그 공으로 都元帥가 되었으나 얼마 후 逃亡兵을 直決處分한 죄로 解職되었다. 1596년 忠淸道觀察使에 취임하고, 다시 都元帥가 되어 御馬를 下賜를 받았다. 사후 戰功으로 領議政으로 追贈되고, 宣武功臣 一等에 永嘉府院君으로 追封되고, 忠莊祠에 配享되었다. (*嶸: 가파를 영 *禿: 대머리 독 *捷: 이길 첩 *贈: 줄 증 *嘉: 아름다울 가 *享: 누릴 향)
(26) 權慄 都元帥 집터에 있는 은행나무 -保護樹 서1-10호(1976.6.5) 樹齡 420년, 나무높이 23m, 나무둘레 6.8m
- (3-2) 서울 漢陽都城: 딜쿠샤~平倉洞 너머 보이는 北漢山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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