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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와 방스3 - 방스에서 버스로 생폴 드 방스에 도착해 샤갈과 모딜리아니를 만나다!
니스 Nice 의 바우반 Vauban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82번 버스를 타고 40분 걸려 에즈 Eze
마을을 구경하고는 112번 버스를 타고 니스로 돌아와 가리발디 광장에 내려 걸어서
니스해변에 도착해 방스 Vence 로 가는 400번 버스 를 놓친지라 대신 94번 버스 를
타니 도중에 생폴 드 방스가 아닌 언덕 위의 도시를 거쳐서 1시간만에 방스에 도착합니다.
걸어서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 10여분만에 로제르 예배당 에 도착하니 이 교회
는 1911년에 "샤갈이 외부 조형작업" 을 하였고 1948년 부터 4년간
화가 마티스 (Henri Matisse) 가 벽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로 내부 조형
작업을 하였다고 하는데...... 교회로 들어가서는 마티스의 그림 들을 구경합니다.
마을로 나와 오후 4시 10분에 니스행 400번 버스 를 타고 10분이 채 안걸려 "생폴드 방스"
에 내리는데..... 여긴 산 정상부 에 자리잡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고풍스러운 마을 입니다.
도시 앞 대로에는 율동적인 여인의 동상 이 눈길을 끄는데 약국을 지나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높은 성벽 이 보이고 광장에는 구슬치기 경기 를 하는 노인들이 보입니다.
뻬떵크 Petanque 라고 불리는 쇠구슬치기 놀이 인데 손에 공을 줍는 기구를 들고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자석 이 붙어 있는지 가져다 대기만해도 쉽게 공을 쥐는 모습을 봅니다.
길 바닥에 도시의 모형이 모자이크된 모습을 지나 육중하게 생긴 성문 을
들어서면 바로 도로가 작은 돌로 포장된 좁고 경사진 골목 이 보입니다.
여기 생폴 드 방스 Saint-Paul-de-Vence 는 산 정상에 자리잡은 돌로 포장된 좁고 경사가
심한 골목길 옆으로 돌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데 성문 옆에 대포 가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니 골목길을 올라가면서 좌우로 늘어선 기념품 숍 들을 구경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 생폴 드 방스 의 거리에 있는 기념품 들은 허접한 그렇고 그런 아무데나
있는 것들이 아니고 하나같이 "공에품으로 에술품" 수준이며 또 거리에는
화랑 들이 셀수도 없이 많은데...... 그 내부에 걸려 있는 그림이며 서있는
조각품들이 저마다 개성이 있고 예술적 수준이 높은 것들이라 감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아니나다를까? 1900년대 초반에 샤갈, 르느와르, 마네,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 에다가
모딜리아니 가 이 마을을 찾아 그림을 그렸으니, 샤갈 은 97세로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데... . "색은 전부다. 색이 옳을때 형식도 옳다. 색은 모든 것이며, 색은
음악과 같은 떨림 이다.모든 것은 떨림이다" 라고 색의 마술사 샤갈 은 말했다던가요?
언덕을 오르면 요새 처럼 솟아 있는 생폴 드 방스는 외관이 성벽 으로 둘러싸여 바깥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주는데, 돌길을 걸어 마을 한 가운데에 교회당이 서있으니
마을 인근에는 예술가들이 숙박료 대신에 그림을 제공하고 묵었다는 호텔 과
식당 이 자리잡았고 돌담으로 단장한 마그 미술관 외에 화랑이 무려 열개 나 있습니다.
샤갈 이 97세로 죽을때 까지 20년간 산책했던 골목길 과 언덕 아래 꼬뜨다쥐르의
아름다운 풍광들은 작품의 소재이자 오랜 반려자였다고 하는데 성벽 안
골목길 은 16세기에 만들어져 중세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니.... 그랑드
거리와 미로같은 샛길들은 70여개에 달하는 갤러리와 아뜰리에 들이 가득합니다.
간판과 문패 하나도 예사로운 것은 없으며 엽서 한 장과 수공예품 들도 기념품 가게에서
흔하게 접하는 것과 분위기가 다르니 골목에 미슐랭 가이드가 추천한 노천 레스토랑
도 들어서 있고, 예술인들이 기거하며 잠과 식사를 해결했던 콜롱브 도르 호텔 도 있습니다.
그랑드 거리에 17세기에 만들어진 분수 는 숨을 고르고 발길을 멈추는 휴식처이자 마을의
이정표 이며 덩굴로 단장된 담장, 문앞에 놓여진 화분, 매혹적인 자갈바닥을 볼수있는데...
마그 미술관 에는 샤갈, 미로, 피카소 등의 작품이 소장돼 있어 야외 숲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샤갈은 니스에 있던 미술관 을 여기 생폴 드 방스로 옮기려고도 했답니다.
니스 시민의 반대가 극심하자 자신이 즐겨찾던 생 끌로드 예배당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노년의 여유 를 즐겼다는데, 마을 한켠 공동묘지 에 잠들어 있으니 내가 샤갈의
그림을 구경하기로는 일본 규슈 오이타현에 있는 온천 휴양지 유후인의 샤갈미술관 이라....
샤갈의 그림 은 꿈과 서커스 가 가장 큰 소재인 듯 싶은데 김춘수
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을 옮겨 봅니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이 시는 80년대 군부독재의 그 암울한 시절에 이국의 어느 마을을 동경 하며....
“이룰 수 없는 꿈”을 “샤갈의 시” 에서 보았다고 느껴진다고 합니다!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은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 에서 태어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황실 미술학교를 다녔으며 이후 이 나라 프랑스에
유학해 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 을 받았으니 20세기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작품 으로 오랜동안 사랑을 받아온 작가라고 하네요!!!
20세기초 유럽 미술계에서는 표현주의, 입체파, 야수파,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사조 들이 정립되는데 그는 야수파의 색채 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다고 하며,
이후 1,922년에는 파리로 돌아와서 프랑스에 귀화하고는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서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 들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샤갈 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원근법 탈피와 화면의 통일성 등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독창적이면서 환상적인 작품 을 창작해 왔다고 하는데
마르크 샤갈은 현대인들의 정서에 꿈과 환상 을 안겨주는 작가로서
삶의 즐거움, 성공그리고 행복한 꿈 을 그려내는 화가로 평가 받게 됐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골목길을 구경하다 문득 D일보 박선희 기자가 “불어로 한국 이야기 쓰는 한국계
佛작가 뒤사팽” 이라는 기사를 쓴 것을 기억해 냅니다. “한국은 내 뿌리이자 낯선
땅속 파고들 것” 프랑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 이 쓴 소설을 읽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다.
국내에서 출간된 데뷔작 ‘속초에서의 겨울’ 은 배경 부터 등장인물 까지 한국적이어서
해외문학이라는 이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불어로 쓴 한국 이야기’ 를 번역판으로
읽는 기묘한 느낌은 정체성 혼란 때문에 창작을 시작했다는 한국계 프랑스 작가의
복잡한 내면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작가와 한국 독자들은 ‘낯선 방식’ 으로 조우 한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 주최한 프랑코포니 축제 참석차 방한한 뒤사팽 씨를 만났다.
데뷔작으로 로베르트 발저상, 프랑스 문필가협회 신인상 등 유럽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에서도 대전, 부산 등에서 독자들과 만나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뒤사팽 씨는 한국 독자들을 만난 것이 매우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한국인 어머니 를
둔 그는 프랑스, 스위스에서 자랐기에 한국어를 조금 알아듣긴 하지만 말하지는 못한다.
당연히 책을 쓸 땐 프랑스어권 독자 들을 먼저 생각했다. 한국어로 번역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그는 “한국문화를 거리감 없이 잘 표현했다 는 평에 기뻤다”
며 “멀리서만 봤던......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 준 책” 이라고 말했다.
“모든 대화를 말하지도 못하는 한국어로 ‘상상’하며 프랑스어로 썼어요. 한국인
임에도 한국어로 말할 수 없는 것 들에 대해 프랑스어로 말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죠. 아마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했다면 쓰지 않았을 것 같아요.”
최근 탈고한 두 번째 작품에서도 그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을 배경으로
한국계 스위스 여성을 다룬 것. 주인공의 조부모는 일본에서 파친코를 경영하는 재일교포다.
8월경 유럽에서 먼저 출간되고 한국어로도 번역될 예정이다. 뒤사팽 씨는 “내
뿌리는 한국에 있지만 여기서 나는 이방인 이고, 내게도 한국은 먼 나라”
라며........ “모든 걸 동원해서 한국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 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선지 그는 열세 살 이후로는 매년 짧게라도 한 해에 한번은 한국에 온다. 올 때
마다 모든 걸 스펀지 처럼 빨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한국은 역동적이다.
언제나 한결 같은 유럽과 달리 변하지 않는 장소를 찾아 보기 어렵다” 며 웃어 보였다.
염상섭 이청준 이승우 편혜영 등 한국 작가들의 프랑스어 번역 책 도 즐겨 읽는다. 특히
염상섭 을 통해 조부모 시대의 한국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특이한 경험
이었다고 했다. 동시대 한국 작가들에 대해서는 “성형수술, 첨단 기술 등
프랑스어권에서는 나올 수 없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글쓰기의 출발은 자신의 정체성 고민 에서 비롯됐지만, 흔들리는 뿌리와 무너지는 경계는
현대사회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뒤사팽 씨는“문화 교류가 늘고 지역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아가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며“글쓰기를 통해
개인적 차원의 고민을 넘어 문화적 복합성에 대한 연구 를 꾸준히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모딜리아니 는 이탈리아 르보르노 태생으로 파리에서 화가 생활을 하던중 소녀
잔을 만나 사랑에 빠진후 1,917년에 이 마을 생폴 드 방스 로 내려와
동거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낳는데.... 아이들을 그리며 인생에서
모처럼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나 결핵 이 도져 치료를 위해 니스 로 이주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잔느가 친정으로 돌아가자 모딜리아니는 외로움에 처가집을
찾아가지만 장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실의에 빠진 화가 는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병마에 쓰러져 죽는데, 잔은 장례식 이틀후 괴로움을
참지못하고 아파트에서 투신 자상 하여 남편의 무덤에 합장 되었던 것이네요!
잔느 는 모딜리아니가 사랑을 고백하자 수줍음 많은 소녀 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으니, 두 사람은 점차 열렬한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나....
그 "사랑이 저주" 였음을 확인했을 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 입니다.
모딜리아니 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한신대 공주형 교수가 동아일보에 쓰는 칼럼 ‘공주형
의 생각하는 미술관’ 에 “세월 속에서 더 또렷해지는 것들”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1920)는 이탈리아 출신 화가였습니다. 20세기 예술의 수도
파리 가난한 예술가의 집합소 몽마르트르 에서 서른여섯 해 짧은 생을 마감했어요.
비운의 화가는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미술 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초상화 가 많았지요.
초상화 인기가 시들해졌습니다. 카메라가 발명 되었거든요. 초상화의 주인공은 힘 있고
부유한 주문자에서 화가 주변 인물로 바뀌었습니다. 모델을 직접 선택하면서 예술적
자유도 커졌어요. 초상화를 제작하고자 활발한 형식 실험도 전개되었지요. 친구와
연인을 신비롭고, 우아하게 표현한 화가의 초상화 는 이런 시대 정황과 무관치 않습니다.
화가의 삶과 예술에 잔 에뷔테른 을 빼놓을수 없으니 예술의 뮤즈이자 생의 반려자 였어요.
단정한 미술가 지망생은 자유로운 화가를 뜨겁게 사랑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중산층
가톨릭 가정에서 마약과 술에 찌든 가난하고 병약한 화가 를 사윗감으로 반길리 없었습니다.
여성 집안의 결혼 반대가 극심 했지요. 두 사람은 혼인 절차 없이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첫 전시가 개최 되며 화가 삶에 전기가
마련되는 듯 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 그림 판로를 개척하려 힘도 썼지요.
그림 속 임신한 아내가 붉은 숄 을 두르고 있군요. 화가는 이 무렵 서서히 지쳐갔지요.
이런 남편과 달리 초상 속 아내는 고요하기만 합니다. 공허한 눈빛 에서
마음의 동요를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곧 들이닥칠 비극적 운명을 예감 할 수 없습니다.
현실의 벽은 높았으니 아내는 아이와 친정으로 향했지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얼마후 였어요. ‘천국에서도 내 모델이 되어 달라.’ 생전 남편의 속삭임에 ‘그럼요’
답했던 아내는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상심한 22세 아내는 5층 아파트에서 투신해
남편 뒤를 따랐지요. 그림속 무기력해 보인 여인이 스스로 삶을 마쳤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도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개입 합니다. 어떤 예술은 시간을
건너 누군가의 마음에 강렬함 을 전합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격정적 사랑과
위대한 예술처럼 세월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것들이 있지요. 어느
한 날.....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밝혔던 간절함의 촛불도 그렇지 않을까요.
드 호리 는 말하기를.....“모딜리아니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남긴 작품이 적습니다,
내가 몇점 보탠다고 "해" 가 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하자... 웰스 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예술" 이라고 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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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無道人之短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라.
無說己之長 나의 장점을 자랑하지 말라.
施人愼勿念 남에게 베푼 것을 기억하지 말라.
受施愼勿忘 남의 베품을 받으면 잊어버리지 말라.
아름다운 날 되시고 幸福한 한해 되세요,
感謝 드립니다.
모딜리아니....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죽은 화가....
피카소를 제외한 화가들은 살아 생전에
그림 값을 제대로 받은 화가가 없네요?
베리굿 입니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별 재미도 없는 글에 과분한......